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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재밌는 거 없나 국회 회관을 어슬렁거리다가, 안면 있는 보좌관과 마주쳤다.

 

"뭔 일 있어요? 오늘 유독 바빠 보이시네요"

 

"아 우리 의원실에서 주최하는 행사가 있는데, 초빙자 발언 순서 조율하느라 정신이 없네요."

 

"오... 순서. 그런 게 의원실 간에는 꽤나 중요한 문제인가 보죠?"

 

"그렇죠. 누구를 누구보다 뒤 순서에 놓으려면 (당)선수랄지 당내 직급이랄지 하다못해 나이랄지 그쪽 의원실에서 납득할 수 있는 명분 같은 게 필요한데, 항상 무 자르듯 선명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니까. 우리 의원실에서도 행사 성격에 맞는 순서가 또 따로 있기도 하고."

 

그렇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실제 행사에서 발언 순서에 어떤 의미가 부여되었건 말건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보여질 수 있는 가능성'이 중요한 거다. 행사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소개된 의원이 그보다 뒤에 소개된 의원보다 현재 더 비중 있는 정치인이라고 느낄 여지가 1이라도 있다면, 각각의 의원실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 움직인다. 그게 의원실의 실력이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정치인의 이미지다.

 

기사 한 줄로 남는 작은 포럼에서조차 이런 보이지 않는 각축전이 벌어질 진데, 더 큰 정치 무대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국가와 국가 간의 정치, 블록버스터 무대인 외교전에서의 수 싸움은 그 차원을 달리한다.

 

외교는 상징을 놓고 싸우는 전쟁이다. 겉으론 점잖은 사람들이 우아하게 담소를 나누다가 맛있는 거 나눠 먹고 우정을 다지고 헤어지는 것 같지만, 수면 아래엔 수많은 실무자와 관계자들이 뭐라도 하나 더 챙기기 위해, 어떻게든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오리발을 내 젖는다.

 

이 싸움에선 정당성을 인정받는 쪽이 유리하다. 누가 더 정당하냐를 겨루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누가 더 정당해 보이느냐다. 국가를 대표해 만나는 사람들은 각자의 국민에게, 이 무대를 지켜보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어떠한 이슈에 대한 주장이 '정당해 보이기 위해' 경제 문화 역사 음식 등 온갖 상징 자본을 끌어모아 투쟁을 벌인다.

 

우아한 전쟁

 

2016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일명 '사드' 배치 문제를 두고 한국과 중국 사이에 긴장이 흐르고 있던 때였다. 때마침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서 박근혜와 시진핑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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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은 모두 발언에서 역사 한 토막을 꺼냈다.

 

"여기 항저우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3년 정도 활동했다. 한국의 유명한 지도자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장군이 1996년 항저우 인근 저장성 하이옌을 방문했을 때 이런 글자를 남겼다. 음수사원 한중우의."

 

음수사원(飮水思源). 물을 마실 때 그 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한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시인 유신(庾信)이 패망한 조국 양(梁) 나라를 그리워하며 쓴 '징조곡(徵調曲)'의 한 구절을 언급한 건 시진핑이 중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박함을 과시하기 위한 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근원을 생각하고 그에 감사하라.'라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도운 우리 중국에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전문용어로 돌려 까기. 한마디로 전 세계가 지켜보는 데에서 '꼽'을 준 거다.

 

시진핑의 '음수사원'에는 몇 가지 코드가 더 있다. 박근혜는 정상회담 3주 전, 광복절 경축식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임시정부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발언. 당시 박근혜의 '건국절' 역사 인식 논란은 국내에서도 뜨거운 이슈였다. 일타 쌍피. 시진핑의 음수사원 카드는 상대국 국민들에게도 정당성을 확보하는 '꼽'이었던 거다.

 

또 하나. '음수사원'은 쿠데타군이 부일장학회를 강탈하여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정수장학회의 신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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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정수장학회 장학금 수혜자 모임 '청오회'

 

당신의 아버지는 이토록 은혜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자식 된 자로서 어찌 입은 은혜를 가볍게 생각하는가?

 

일타 삼피.

 

2016년 정상회담을 준비하던 중국 외교당국 실무진에 대단한 실력자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외교 실무자에게 어느 기자가,

 

"시진핑 주석이 모두 발언에서 언급한 사자성어는, 박근혜 대통령의 외교정책, 역사 인식, 쿠데타 장군의 딸이라는 가족 배경까지 풀 패키지로 한국을 압박하는 의도가 담겨있던 것인가?"

 

라는 질문한다면,

 

"양국의 우호적 관계 지속과 발전적 미래를 논하는 자리에서, 과한 해석과 억측은 삼가주길 바란다."

 

라고, 우아하고 기품있게 잡아뗐을 것이다.

 

정말 그랬을 수도 있다. 저 모든 것들이 과한 해석이고 너무 나간 추측일 수 있다. 문제는 공식 회담장에서 저 단어가 나간 순간 그건 이미 1도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음수사원'의 의미심장에 관하여 해석과 추측들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 도달하게 된 것만으로도 중국은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회담장을 떠난 거니까.

 

오므라이스를 좋아해서

 

이번 일본과의 정상회담은 여러모로 이례적이었다. 실무 회담이라는 방문의 낮은 격을 일본이 앞서 강조했던 거나, 정작 그 실무 회담이라는 게 공식 선언문 하나 남기지 못한 실무 없는 실무 회담이었다는 거나,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장기에 목례를 한 거나, 수행 장관들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애국가가 연주된 거 같은 이야기들은 집어치우자. 공개 석상에서 다른 나라 국회에 대고 이새끼 저새끼한 것도 딱 잡아떼는 마당에, 저 정도 지적을 두고 문제의식을 느끼거나 부끄러워할 리가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상 간의 회담 같은 큰 행사는 즉흥적으로 치러지지 않는다. 대통령이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내릴 때까지 모든 것이 실무자들의 합의와 조율에 의해 촘촘하게 사전 세팅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렌가테이'라는 식당이 만찬 장소로 선정된 이유가,

 

'한국 대통령이 오므라이스를 좋아해서'

 

라는 건 당황스러울 정도로 설득력이 없다. 오바마가 하노이에서 쌀국수를 먹으며 베트남 국민들에게 친밀감을 과시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면, 오바마가 방문한 식당처럼 미국인들을 자극할 수 있는 상징이 전혀 없는 곳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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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윤 대통령이 기어이 밥을 먹고 나온 식당 렌가테이의 영업개시 연도는 1895년이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해다. 렌가테이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 일어난 곳 근처인 긴자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긴자(銀座)라는 지명은 에도시대 은화를 주조하던 곳이라는 데서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사도 광산에 강제 징용되어 파낸 그 은으로, 주화를 만들던 장소다.

 

'오므라이스 만찬'이 누구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사전 실무 협의 때 테이블에 올랐고 공식 일정으로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저 상징들을 대한민국의 외교당국과 대통령이 받아들인 거다.

 

자연인 윤석열이 오므라이스의 심각한 매니아여서 '4대째 대를 이어 온 오므라이스와 돈까스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긴자거리를 방문하는 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는 한반도의 역사를 계승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며, 그가 방문한 곳과 그가 먹는 식사는 강력한 상징을 갖는다.

 

인터넷에 잠깐만 검색해도 줄줄 쏟아지는 저 상징들을, 전문가인 외교 실무자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몰랐다면 그건 더 심각한 문제다.

 

압도적 굴욕

 

대한민국 대통령실과 외교당국이, 이 정도로 모든 요구를 다 받아줄 우호적인(?) 관계였다면 일본 입장에서는 착한 한국 대통령을 놓고 연출하고 싶은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 행복한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돈까스 오므라이스 가게였다. 그들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고른 상징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합리적은 해석은 돈까스와 오므라이스로 대표되는 '경양식'이라는 단어에 담겨있는 상징이다. 가벼운 서양요리라는 뜻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정착한 서양식 식문화인 '화양식'이 일제강점기 한반도로 들어오면서부터 쓰이고 있는 말이다. 한국의 발전은 일본이 만들어준 근대화의 초석 위에서 시작되었다는 식민지 사관이 오므라이스 접시 안에 담겨 있는 거다.

 

'오므라이스를 좋아하는 한국 대통령이 오므라이스의 발상지에서 오므라이스를 맛있게 먹고 왔다.'

 

일본 외교 실무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누군지 몰라도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그의 커리어하이 일 것이다.

 

더 나아가 보자. 일본인들은 시험을 볼 때나 중요한 시합이 있을 때 돈까스를 먹는 문화가 있다. 돈카츠(豚カツ)의 가츠는 이긴다는 뜻의 勝つ와 글자는 다르지만 음이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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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렌가테이 인스타그램

 

보안 문제가 취약한 외부 식당을 '굳이' 만찬 장소로 골라 '굳이' 언론에 미리 공개했고, 이미 다른 곳에서 식사한 후에 '굳이' 오므라이스 집으로 자리를 옮겨 2차 만찬을 가졌다. 무언가를 ‘굳이’ 할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굳이’ 돈카츠가 처음 만들어진 식당에서 ‘굳이’ 2차 식사를 하는 이유는 한국과의 외교전에서 일본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음을 선언한 것과 다름없다.

 

오므라이스 한 접시 값

 

일본이 이토록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 건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 외교부는 지난 6일 대법원의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강제징용 피해자 15명(원고 기준 14명)의 판결금 및 지연이자를, 일제강제동원피해자재단이 대신 지급하는 방안(3자 변제안)을 피해자들에게 해법으로 제시했다.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 지배, 전범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청구권을 함부로 손을 대고 있는 거다. 다름 아닌 지금 대한민국 정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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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의 역사 전쟁에서 최전선에 서 있어야 할 자들이, 일본의 무참한 역사 왜곡과 무뢰한 태도를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고 있는 거다. 대한민국 정부와 대통령이라는 커다란 상징으로.

 

박근혜가 2016년 중국에서 한 방 먹고 온 '음수사원'은 '부끄러움은 우리 몫'으로 돌리면 그만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잡숫고 온 오므라이스 한 접시 값은 부끄러움을 넘어선다. 역사 문제를 두고 벌이는 일본과의 싸움에서 오래도록 회복되기 힘든 치명타가 될 것이다. 임기 4년 남은 대통령이 역사를 어질러 놓았다. 대책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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