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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연재냐구?  

 

교과서엔 나오진 않는, 조선시대 일기 속에 담긴 출근러들의 삶과 비애를 통해, 그들의 삶도 오늘날의 하루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소개합니다. 호된 신고식을 당하는 신입사원, 왕비에게 탈탈 털리는 미관말직, 할 거 다 해 봐서 파직만 기다리는 만렙 고인물까지. 녹봉에 웃고 출근에 울었던 ‘조선 직딩’들의 숨 가쁜 이야기 속에서 어느덧 여러분의 하루가 떠오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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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연재 중 조금씩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1부

 

1. 만년 참봉 금난수의 현기증 나는 관직 생활(링크)

2. ‘영남의 1타 선비’ 김령의 신입사원 분투기(링크)

3. 최전방 GOP 삼수갑산 장교의 삶, 노상추(링크)

4. ‘소확횡’과 재테크를 동시에, 유희춘

5. 인서울 출근러 황윤석의 셋방살이

 

2부

 

6. 국제외교전의 현장에 던져진 외교관, 황중윤

7. “범인은 바로 너!” 수사관이자 재판관, 서유구

8. “나 도지삽니다.” 그런데 선정(善政)을 곁들인, 조재호

9. ‘기로소 고인물’ 권상일의 ‘파직은 거들뿐’

 

 


 

직장인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던 드라마 <미생>에서 ‘박 과장의 횡령 사건’은 중요하게 다뤄지는 에피소드입니다. 박 과장은 요르단 현지에서 친인척을 이용해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고, 그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자신이 속한 회사의 돈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습니다. 장그래와 영업 3팀은 박 과장의 비리 사실을 드러내면서 일약 영업팀의 에이스로 거듭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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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그래... 띠발!!

 

그런데 영업 3팀 ‘오 과장’은 그런 박 과장의 범죄를 밝히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짓습니다. 한때는 회사의 전설로서,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성과를 이룬 박 과장이 해낸 일에 비해 턱없이 적은 보상으로 ‘현타’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었죠. 오 과장은 그의 퇴장을 지켜보며 말합니다.

 

“보상받는 거라 생각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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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박 과장처럼 능력 하나는 출중했던 한 사대부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유희춘(柳希春, 1513~1577). 젊어서는 슈퍼 루키 관료였고, 만년에는 선조로부터 “내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덕분이었다.”라는 평까지 들었을 정도로 인정받던 관료였습니다. 훗날 여러 서원에 배향될 정도로 많은 선비들에게도 흠모받던 인물이지요. 

 

그런데, 유희춘이 박 과장과 비슷한 점은 능력만이 아니었습니다. 출중한 실력 다른 한 편에 각종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어두운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후 서원에 배향될 정도로 겉으로는 인품 좋고, 학문에 출중하며 정치에 도리를 다하였다 평가되었지만, 다른 한 켠에는 갖은 청탁, 직권남용, 배임, 횡령 등으로 조선 사회를 망가뜨리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나라 살림과 백성들을 이용하여 소확횡과 재테크를 동시에 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본격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그의 일기 속에서 확인해보시죠. 

 

 

20년 ‘존버’ 끝에 다시 받게 된 녹봉

 

유희춘은 호남 정통 사림파의 후손으로 태어난 ‘유학 금수저’입니다. 비록 그의 집안이 당대 명실상부 명문가였다고 할 순 없으나, 조선사의 흐름으로 볼 때 앞으로 명문가가 될만한 포텐셜이 가득 찼던 집안이었죠. 공부도 아주 잘했습니다. 천재라면 으레 따라오는 전설들이 그에게도 어렸을 적부터 붙었습니다. 

 

“어릴 때 동네 친구들이 놀러 다닐 때 혼자 공부만 했다.”

 

“5살 때부터 시를 지을 줄 알았다.”

 

“부모와 스승이 모두 그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등의 이야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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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살던 시기는 16세기로, 사림이 한껏 용트림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정계에는 젊고 똑똑한 관리만 보면 군침 흘리는 세력이 많았죠. 그런 상황이니 ‘천재’ 유희춘은 당연히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26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문과에 급제했고(중종 시기), 30세가 되자 세자(훗날의 인종)의 스승으로 임명됩니다. 세자의 스승은 정치적 부담도 컸지만, 잘만하면 훗날 출세가 보장된 알토란 같은 자리였습니다. 물론, 실력이 없으면 언감생심 꿈에도 못 꾸는 자리였지만요.

 

이른 나이부터 출세가도를 달리던 유희춘에게도 잿빛이 가득한 변화가 찾아옵니다. 왕위에 등극한 인종이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승하해버린 것이죠. 곧이어 어린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됐으며, 윤원형이 권신으로 등장합니다. 좀 오래된 드라마지만 SBS에서 방영했던 ‘여인천하’의 배경인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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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여인천하’ 中 문정왕후와 윤원형

 

혼란기는 꼭 누군가의 피를 마시며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문정왕후를 정점으로 구축된 권력 구조와 사림은 양립할 수 없는 존재였고, 사림은 여러 차례의 사화를 거치며 문자 그대로 갈려 나갑니다. 전 임금의 스승이었던 유희춘도 곱게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고, 그 유배는 20년이나 이어집니다. 이 20년의 세월 동안, 그는 ‘성리학 폐관수련’에 돌입하며 성리학을 깊숙이 연구합니다. 그렇게 다져진 그의 성리학 이론과 연구가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며, 그는 전국구로 학문적 명성을 쌓게 됩니다.

 

그리고 20년 후, 드디어 그는 존버에 승리합니다. 유배가 끝난 것이죠. 선조가 즉위하자마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요직을 두루 꿰찼습니다. 게다가 과거에는 세자를 가르쳤다면, 이제는 선조와의 경연장에 빠짐없이 소환되며 ‘왕 직속 1타 강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훗날의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성실하고 청빈하였다.”

 

“공직자나 학자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모범적인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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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범적인 인간의 일기를 보면, 후대에 알려진 평가와는 다른 모습이 아주 많습니다. 우선, 그는 사실 월급명세서 숫자에 누구보다 예민한 사람이었죠. 

 

그 내용은, 그가 직접 쓴 『미암일기(眉巖日記)』에 나옵니다.

 

 

녹봉에 예민했던 왕의 1타 강사

 

1573년 1월 8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노비 옥석이가 나의 녹봉을 받아왔다. 쌀 12석, 콩 8석, 옷감 5필 등인데, 이번에도 나라 살림이 어렵다는 이유로 녹봉이 깎였다. 노비가 받아온 녹봉을 보자, 집안 식구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2품으로 승진한 후에도 여전히 3품의 녹봉을 받는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내가 경연관으로서 임금님을 가까이 모시는데, 영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성적인 재정적자로 인해 공직자의 고통 분담을 일상적으로 요구했던 나라, 조선에서 녹봉 깎임은 그리 놀랍지도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사기업이라면 때려치우고 말겠지만, 조선의 사대부가 공무원을 때려치우면 어딜 가겠습니까.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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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무리 마음을 다스려도, 섭섭한 감정을 감추기는 힘들었습니다. 만약 유희춘이 정말로 ‘경연관으로서의 영광’만으로도 만족했다면, 넉넉한 녹봉을 받았을 때의 기쁨도 다스릴 수 있었을 겁니다. 현실은, 당연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처럼요.

 

1576년 7월 23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노비 몽근이와 천리가 여름 분량과 가을 분량의 녹봉을 받아왔다. 여름과 가을 분량의 녹봉을 한꺼번에 받으니, 모두 쌀 28석과 보리 8석, 그리고 옷감 8필이었다. 녹봉이 제대로, 그것도 넉넉하게 나왔다니 이게 무슨 횡재인가. 지난밤 꾼 꿈에, 길을 가다가 들판의 벼가 아주 노랗게 익은 것을 보았었는데, 오늘을 가리키는 징조였을까. 가난한 아이가 갑자기 떼부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직장인에게 연봉과 승진을 빼면 뭐가 남겠습니까. 세자의 스승이고 왕의 경연관이라도, 월급봉투의 얇고 두꺼움에 섭섭함과 감사함을 오가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제대로 녹봉이 들어오면, 성과급을 받아서 새 플스를 지르는 회사원처럼 그의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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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난다! 신나. 헤헤

 

그렇다면, 그의 녹봉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선조 즉위년에 그가 받은 가을 및 겨울 녹봉은 쌀 51석 정도였고, 선조 6년에는 쌀 81석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걸로는 그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며 살림을 꾸려나가기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선조 즉위년에 지인과 친척에게 뿌린 선물 규모만 해도 쌀 200석을 거뜬히 넘었거든요. 공직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녹봉은 조금씩 오르는 반면, 선물할 사람들은 스피디하게 많아지니, 가계경제 생활은 ‘지속 가능한 마이너스 삶’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나라로부터 받는 것이 딱 이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보수도 있었습니다. 근데 급여 내용이 조금 독특했습니다.

 

1569년 6월 15일, 1570년 7월 11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당상관(정3품 이상의 고위직)만이 받을 수 있는 얼음 배급표를 이용해 서빙고에서 얼음 한 덩이를 받아왔다. 20년 동안 유배를 갔던 사람이 다시 얼음을 받을 수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임금님의 은혜에 정말 감사할 뿐이다.

 

홍문관(弘文館, 유학 연구기관)에서 관직자를 위해 지급하는 반찬거리를 보내왔다. 건조한 노루고기, 꿩고기, 대구, 대하와 젓갈이었다. 가지고 온 사람을 위해 수고비를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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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있는 빙고인 석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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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빙고 내부

 

얼음이 귀했던 조선에서 빙패(氷牌), 즉 ‘빙고 이용권’은 당상관 이상의 고위 공직자에게만 지급된 특혜였는데요. 『미암일기』에서는 6월 중 한 차례 정도만 얼음을 받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얼음의 최우선 용도는 여름에 치르는 제사의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는 데 있었는데요. 20년 동안 얼음을 받지 못하다가, 드디어 다시 얼음을 받은 그날은 유희춘에게 권토중래의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한편 비정기적이긴 하지만, 관청에서 관원을 위해 반찬거리를 보내줬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유희춘은 한 해에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반찬을 받았는데요. 그래 봐야 고기 몇 덩이나 생선 몇 마리 정도였으니, 그냥 나라에서 ‘체면치레’ 정도 한 셈이죠.

 

그렇다면 이상합니다. 어차피 체면치레 정도밖에 안 되는데, 나라에서 굳이 이런 물품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니, 애초에 왜 체면치레를 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조선의 경제구조와 관련 있습니다. 

 

깊이 들어가면 복잡한 내용이라 저의 시선을 곁들여 간략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관료가 녹봉으로 급료를 받는 시스템은 1556년에 성립이 됩니다. 그전에는 어떻게 했냐. 조선이 건국되며 고려의 권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조선에 귀속되었고, 조선 조정에서 관료에게 일부 땅을 임대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직접 농사를 짓든지 소작을 줘서 생계를 유지하게 했죠. 이때, 임대를 해주는 관료의 대상이 시기별로 나뉩니다.

 

세조 전까지는 현직은 물론, 전직 관료까지 대상인 ‘과전법’을 시행했고, 세조 때부터는 현직 관료만 대상인 ‘직전법’이 시행됐습니다. 그래서 세조 전까진 전직 관료까지 포함이기에 관료 혹은 관료였던 사람이 죽으면 땅을 반납해야 했고, 세조 때부터는 관료가 죽거나 퇴임하면 땅을 반납해야 했습니다. 이런 제도는 ‘사유 재산의 철폐’라는 목표를 담고 있었습니다. 토지를 비롯한 부의 독점이 고려를 얼마나 망쳤는지 조선의 건국자들은 익히 보았기 때문이죠.  

 

농업 시대에서 사유 재산 중 가장 중요한 ‘땅’을 규제하니 대신, 조선 조정은 전국 각지에서 중앙으로 올라오는 모든 물자 중 남는 잉여물을 관료들에게 나눠주어 생계를 도우려고 했습니다. 

 

국가가 너의 생계를 책임지겠다. 대신 너는 국가에 사심 없이 헌신하고 봉사해라.

 

이런 의미였죠. 그런데 이런 조선의 시스템은 급속도로 무너집니다. 나라에서 나눠준 땅은 원래 ‘상속 불가’지만, 몇몇 예외조항이 있었습니다. 공신은 예외, 생계를 이뤄나갈 만한 가족 구성원 없을 때도 예외, 그 외에도 예외조항들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관료들은 이런 예외조항 등을 이용하여, 편법으로 땅을 상속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원래 나라 것이었던 땅들은 급속도로 관료 가문의 땅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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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자들이 그토록 경계했던 ‘땅 투기와 독점’은 다시금 잡초처럼 살아나 조선 관료 사회를 집어삼킨 것이죠. 그러다 보니 과전법, 직전법 같은 제도는 무색해졌고, 나라에서 줄 땅도 없어지며 관료의 봉급 체계를 ‘녹봉’만으로 일원화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남은 잉여물을 관료에게 반찬이나 옷감 등으로 나눠주던 옛 시스템만이 유명무실하게 남아 체면치레 정도만 하게 되었던 것이죠.      

 

다시 유희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당시 나라로부터 받았던 관료의 공식적인 급여는 유희춘의 일기에 언급된, 딱 그 정도였습니다. 유희춘의 생계 수준에는 턱없이 부족했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어떤 생각 하나가 스멀스멀 올라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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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 보상이 필요해!"

 

 

첫 번째 소확횡, 남의 녹봉에 손을 대다

 

우리는 언제나 인정 욕구와 투쟁하며 살아갑니다. 인정 욕구를 채우는 방법은 갖가지입니다. 상사의 칭찬, 동료들의 리스펙, 업계의 샤라웃, 그리고 페이까지. 자존심 강한 천재들이 잔뜩 모여 있던 조정의 고위 공직자들에게 인정 욕구의 충족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죠.

 

그런데 그보다 강한 욕구까지 끼어듭니다. 

 

생존을 위한 욕구

 

아시다시피 조선은 궁궐에서부터 여염집까지 물자가 그리 풍부했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즉, 고관대작일지라도 여차하면 식량난에 허덕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니,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를 위한 정치철학을 고안했던 사대부들 역시도 욕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겁니다. 적은 페이와 생계에 대한 불안, 그 두 가지의 불만족은 ‘소확횡’으로 이어집니다. 남의 녹봉에 손을 대는 것이 첫 번째 스텝이었습니다.

 

<계속>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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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