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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너는 4.13 총선특집 <저평가 우량주를 찾아서>의 기획 중 하나다.


본지는 이번 기획을 통해 역량이나 활동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저평가 정치인을 집중 조명할 계획이다. 


힘닿는 데까지 열쒸미 발굴할 예정이니,

독자분들주저 없이 추천해 주시라.

 





2월 12일 금요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여의도 모처에서 추혜선 단장을 만났다. 현재 공식직함은 정의당 내에 설치된 언론개혁기획단의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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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제부로 공식 출마선언을 한 상태이다. (출마선언문 링크)


한 번 생각해 보시라. 정치인과 언론의 관계를 말이다.


정치인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언론에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거다. 흔히 “부고 말고는 모든 기사에 이름이 나오는 것을 원한다.” 라는 말로 그 심정이 표현된다. 언론에 노출되면 인지도가 올라간다. 특히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메이저 언론에 이름이 자주 노출되면 전국구급 인지도를 얻게 된다. 중진급 정치인이 되기 위해선 필수적이라는 그 인지도 말이다.


정치인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 역시 언론이다. 언론은 어지간한 지역구 의원의 당락 정도는 맘만 먹으면 결정해 버릴 수 있는 영향력이 있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무슨 의혹 같은 거 하나 키워서 대문짝만하게 보도를 해 버리면 득표율 몇 % 정도는 쉽게 깎아 버릴 수 있다. 특히 접전 중인 지역구에서는 기사 몇 개 가지고 한 정치인의 미래를 암울하게 바꿔 버릴 힘이 있는 것이 메이저 언론이다.


그런데 방송사 노조에서 장기간 활동을 하고, 언론개혁시민연대라는, 언론사 입장에서 보기에는 눈엣가시 같은 활동만 지속하던 한 사람이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그러면서 맡은 최초의 직책이 바로 “언론개혁기획단장”.


이건 초장부터 언론하고 맞짱을 뜨겠다는 얘기가 아니라면 뭐겠는가 말이다. 여태껏 어떤 야당에서도 이런 조직을 만든 역사가 없다.


이제 출마선언을 했으니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가 될 것인데, 그나마 정의당의 빈약한 지지율은 과연 당선가능한 비례대표 순번이 몇번인지도 담보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다. 그러나 대찬 시작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만나보기로 한 거다. 심지어 보도사진 촬영을 해 달라고 부탁하기엔 너무 미안한 사진작가이자 과메기 쇼핑몰 사진으로 유명한 좌린님이 사진까지 찍어주신다길래 더욱 신나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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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 추혜선 단장,  : 물뚝심송 으로 표기한다. )



 : 만나 뵙게 되어 반갑다. 상투적인 호구조사부터 시작하자. 언제 태어나셨는지, 어디서 태어나셨는지, 어린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는지.


추 : 저는 71년 돼지띠.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어요.


 : 완도라니.. 낚시하러 가 본 적이 있다.



원래 완도라면 바다낚시의 메카로 불러도 손색이 없는 넒은 섬이다. 물론 낚시꾼들에게는 추자도나 가거도가 더 선호되긴 하지만, 일단 넒은 섬이니까 말이다. 



 : 우리 아버지께서 낚시배 선장이셨어요. 바닷가에서 태어났고,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께서는 낚시배도 하시고, 김 양식 등의 일을 하셨었죠. 다양한 분들이 낚시하러 오시곤 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 그 분들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은?


 : 마산에 인쇄소, 학생들 졸업앨범을 만들어 주는 회사의 사장님이 해마다 오셨던 것이 기억나요. 아들을 소개해 주셔서 오래도록 펜팔을 했었죠.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서울에 올라와서 만나기도 했어요.


 : 상투적인 호구조사가 급작스럽게 분위기가 바뀐다. 혹시 첫사랑.


 : (웃음) 그런 건 아니고.. 그런 쪽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그냥 편지 교환하고 몇 번 만나본 것뿐이에요. 어느 날 여자친구를 데려와서 소개시켜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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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아.. 이 급작스러운 청춘의 로맨스는 그렇게 끝이 나는 건가.. 어려서 공부는 잘하셨는가?


 : 왕년에 초등학교 때 공부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웃음)


 : 학교는 육지로 진학을 하셨는가?


 : 고1 때까지 완도에서 학교를 다녔고, 고2 때 광주의 삼육고, 삼육재단 소속 학교로 전학을 했어요. 그때부터 개신교를 신앙으로 가지기 시작했지요.


당시 삼육고 재단은 제칠일안식일이라는 개신교 교단이었다고 한다.


 : 지금도 그 신앙이 유지되는가?


 : 네, 편하게 교회를 다니고 있죠. 동네 교회도 나가고.


 : 정치하려면 여러 가지 종교를 다 가지셔야 하는 거 아닌가?


 : (웃음) 교회를 다니긴 하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산사를 좋아하거든요. 가끔 절에 묵언수행을 하러 가기도 하고..


 : 불교신자가 되신 건가?


 : 아니 조용해서 좋아하는 거지, 불교 신자가 된 것은 아니에요.


 : 불교를 철학으로 좋아한다거나..


 : 그런 거죠. 주변에 출가하신 분도 계시고..


 : 어린 시절의 꿈은?


 : 시인이었어요.


 : 문학소녀였단 말인가?


 : 국회의원도 꿈이었어요. 시 쓰는 정치인..


 : 도종환 의원의 이름이 갑자기 떠오른다. 시를 쓰는데 정치도 해보고 싶었다는 건가?


 : 정치는 꼭 해보고 싶었어요. 완도라 하면 전라남도에서 제주도와 제일 가까운 섬이에요. 완도에는 육지와 제주도를 오가는 페리호가 지나가거든요. 아주 큰 배가 제주에서 와서 완도 앞바다를 지나 전라도로 가는데 그 배를 맨날 지켜보면서 자랐어요. 눈만 뜨면 바다가 바로 보이는 집이었고, 그 앞바다로 배가 지나가는 거에요.


완도라는 섬이 사연이 참 많아요. 예전에는 귀양지이기도 했고, 주로 육지에서 실패를 하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죠. 봄이 되면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서 터를 잡곤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면 사상범이었다거나 하는 식이거든요. 경제사범도 오고..


 : 사업하다 망해서 오기도 하고..


 : 그런 식이에요. 그런 사람들과 만나고 살아가면서 시적인 감수성이 풍부하게 자라났고..


 : 잠깐, 스스로를 시적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표현을 하시는 건가? 그건 남들이 해줘야 하는 말이지 본인이 직접 하기에는 좀..


 : (웃음) 그리고 방학 때가 되면 광주 서울로 유학을 간 동네 오빠들이 내려오곤 했지요. 그게 무척 기다려졌어요. 동네 사랑방에 모여 데모하는 얘기도 해 주고.. 광주 항쟁이 있던 때거든요.


 : 어린 소녀가 듣기에는 좀 무서운 얘기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 충격적이었죠. 그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좀 일찍 성장했던 것 같아요. 이게 제 삶을 규정했던 것 같아요. 큰 상처였고, 집단적인 트라우마였죠. 호남이라는 공간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걸 공유하고 있는 거죠.


다른 인터뷰에서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어요. 완도 읍사무소 앞에 교련복 입은 오빠들이 와서, 광주 시민들 다 죽어간다고 도와달라고 외치던 기억이 납니다. 부모님들은 가지 말라고 말리고.. 실제로 흉흉한 소문들도 많았고요.



광주라는 트라우마.. 근대한국의 정치사를 헤치며 들여다볼 때 언제나 만나게 되는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연관이 되어 있고, 수많은 정치적 사건들의 동인이 되어버린 엄청난 사건.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 사건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쯤이나 이 광주라는 아픈 기억이 제대로 소화되고 정리되어 역사로 자리 잡게 될지, 후세의 역사가들에게 맡겨야 하는 것인지, 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흘러가는 와중에 열 살 먹은 소녀의 입장에서 광주를 지켜보고 있는 추혜선 단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학은 어디로 가셨는가?


 : 대학은 가지 않았어요.


 : 인문계 고교를 나오셨을 텐데, 특별한 이유라도?


 : 인문계였고 남녀공학이었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왔어요. 공장에 가고 싶었어요.


 : 돈을 벌러 가신 건가?


 : 그건 아니고요. (웃음)


 : 그럼 노동운동을? 무척 빠르셨다.


 : 사실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니에요. 그때부터 완도 친구들도 공장에 많이 갔었죠. 그리고 사실은 공장에 잠깐 있다가 우연히 기회가 되어서 출판사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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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출판사였는지 궁금하다. 지금도 있는가?


 : 지금은 없어졌죠. 사장님이 돌아가셨어요. “자유사상사”라고 하는 출판사였는데, 정말 꿈만 같았죠. 시인이 되고 싶어 하던 소녀가 드디어 출판사에 들어가다니.


편집부의 이름을 딱 걸고 일을 하는데, 세상을 다 얻은 느낌이었어요. 그 출판사의 실체도 모르고. (웃음)


오래된 출판사가 아니고 책 한 권 낸 출판사였는데, 그때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알게 되고, 문학교실도 하고, 당대 유명한 시인들과 교류도 하게 되고, 그때 등단도 하고.. 그때 만나게 된 분 중에 소설가 공선옥 씨도 있어요. 그 땐 이름도 모르고 아람이 엄마라고 했었는데 실천문학에 소설을 발표하셨더군요. 저는 신동아에 시를 실으면서 등단을 했고..



추혜선 단장은 나름대로 등단한 시인이다. 그러나 그가 쓴 시가 어떤 수준인지 평가할 만한 능력은 내게 없기에 굳이 찾아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 그게 신춘문예 비슷한 건가?


 : 신춘문예는 아주 전형적인 등단의 경로고, 문예지 등을 통해 등단하기도 하고, 신동아의 경우도 세 명 정도 선정해서 실어줬던 것 같아요. 기간별로요.


 : 그렇다면, 고등학교 졸업한 다음에 노동운동을 할 생각으로 공장에 갔는데, 바로 또 출판사에 들어가면서 시인으로 활동을 하신 거다. 이거 뭔가 방향이 바뀐 건가?


 : 그때 시를 쓰면서도 노동자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곤 했었어요. 방향이 바뀌었다기보다는 동시에 진행되는 걸로..


그러다가 출판사가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왔는데, 소위 불온서적 관련 사건이었죠. 다른 출판사에서 불온서적 관련 문제가 생겨서 압수수색을 당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짐들을 대신 보관해서 숨겨줬던 거에요. 결국 문 닫고 도망가게 된 거에요.


 : 그러니까 문학도 일종의 저항수단으로 간주하신 건가?


 : 그렇죠. 아주 자연스럽게 그게 서로 이어져 있던 것 같아요. 백기완 선생님이 하시던 노동자 대학 같은 것도 연관이 되고, 좌파 지식인 그룹을 만나게 되고, 노동해방문학이라는 계간지에서 선배들하고 어울리게 되고..


 : 그 시절이 좋으셨는가?


 : 행복했다고 할 수 있죠.



시골에서 갓 상경한 십 대 후반, 이십 대 초반의 청년(원래 청년이라는 단어는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에게 세상은 너무나 넓었을 것이다. 그런 기회를 상경하자마자 가지게 된다는 것은 대단히 운이 좋은 일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인생 망칠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지속적으로 나오겠지만 추혜선 단장의 인생역정에는 뭔가 ‘운 좋음’이 많이 깃들어 있다. 사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운이라고 볼 수도 있다. 



 : 정말 좋으셨나 보다.


 : 민예총 간사 일을 하기도 했어요. 문호근 선생이 기획실장을 하셨었죠.



문호근은 문성근 전 대표의 친형. 2001년 5월 17일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분이다. 서울대 작곡과 출신으로 오페라 기획 등의 문화적인 활동을 많이 하신 분이다. 



 : 민예총 시절 얘기를 좀 해달라.


 : 그때 신경림 선생이 사무총장을 했었고, 민예총 초창기에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이었고, 문호근 선생 같은 분들이 활발하게 활동했었어요. 또 정태춘 씨 전국 공연, 당시에 상업음악을 접고 민중 음악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첫 행보가 전교조와 연결해서 전국 순회공연을 했던 걸로 기억이 나네요.


 : 그런 현장에 함께 했었다니..


 : 물주전자 나르는 영광을 누린 거죠. (웃음)


 : 어찌 보면 행운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 문학을 하면서도 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운동을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니까..


 : 물론 돈은 없고, 시골에서 막 올라온 어린 여자애가 눈만 반짝 반짝 빛나던, 그런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 그런 활동을 지속하면서 뭔가 인생관이나 그런 것에 큰 변화가 온 것인가?


 : 그때 저는 직감을 했었죠. 내 삶이 이 길로 계속 가겠구나, 반골의 삶으로 평생 가겠구나, 또 기회가 주어진다면 뭔가를 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거죠.



아주 미세하게 자신이 아주 일찍부터 정치를 하고 싶었다는 뉘앙스의 말을 많이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정치판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그때 이철 의원도 만났습니다. 민예총에 자주 오셨거든요.


 : 이철 전 의원이 민예총과 뭘 같이 하셨던가요?



참여정부 시절 코레일 사장을 역임했던 그 이철 맞다. 



 : 그건 아닌데, 민예총 계시던 분들과 무척 친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자주 놀러 오셨어요. 그렇게 알게 되는 거죠.


 : 아, 그렇게 활동을 하면서 사회적 관계가 점점 더 넓어지는 경험.


 : 그렇죠. 예술계의 대가들을 알게 되고 그 분들을 돕다 보니, 사회적인 네트워크가 확장되는 경험을 한 거죠. 그러면서, 이렇게 일을 계속하다 보면 국회의원도 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든 거에요.


 : 드디어 정계 진출의 야심을..


 : 야심까지는 아니고요. (웃음) 그렇게 계속 활동을 하다가 광주로 다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백기완 선생의 민중당을 돕기 위해..


93년 하반기쯤에는 광주에 내려가서 사무전문직 노동운동 연구회라고 나중에 진보정치추진위원회, 진정추 멤버들, 노회찬 씨 같은 분들이 했던 그런 모임에 함께하기 시작했어요.


 : 그때는 무척 젊었던 시절인 듯.



그 당시 노회찬 전 의원의 이미지를 연상하다가, 문득 지금보다는 머리카락이 좀 더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 그 멤버들하고 활동을 하다가 광주 KBS 노조에 간사로 들어가게 된 거죠. 거기 노조 지부장이 진정추 멤버들하고 친했고,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들어가게 된 거죠. 당시 민주노총에 권영길 위원장이 활동을 하던 시대였어요.


 : 그때, 개인적으로는 20대 초반 아니었나? 굉장히 빠르게 시작하셨다. 정치 엘리트 코스 아닌가?


 : (웃음) 그렇게 까지는 아니고.. 제가 새정연 쪽 나이 많이 드신 보좌관분들하고 얘길 하다가, 어디 출신이냐고 해서 완도라고 했더니, 완도는 DJ의 처가가 있는 곳이거든요. 그 집안 분들하고도 친하고.. 그랬더니 한국 정치의 “성골”이라고.. (웃음)



특히 야권에서, DJ와 어떻게 해서든 연관이 되는 사람들을 성골이라고 부르는 유머가 한참 많이 돌기도 했었다. 그러고 보니 진짜 야권의 성골일 수도 있겠다. 물론 지금은 그게 어떤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특이한 것은, 그런 오래된 야권의 유머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치고는 추혜선 단장의 나이는 꽤 젊다는 점이다. 아주 어려서부터 이 바닥에서 놀던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다가 서울로 다시 올라오신 건가요?


 : 광주에서 결혼까지 했었고요. 5.18 금남로에서 얼마 전에 작고하신 문병란 선생님 주례로 결혼했죠. 민족문학작가회의 하시던..



금남로에서의 결혼이라니, 뭔가 진짜 성골 같은 느낌도 든다. 



 : 결혼 얘기는 자세하게 묻진 않겠다. 그 뒤에 서울로 올라온 계기는 무엇인가?


 : 남편의 직장이 서울에 있었고, 그냥 올라오게 된 것이죠. 그리고 다시 출판사에 들어가서 잠깐 있게 되었고..


 : 사회활동을 잠시 접고 생계를 위해 일을 하신 건가?


 : 그런 면도 있지만 계속 작가분들이나 그쪽 계통 사람들하고의 연계는 놓지 않았죠. KBS 노조 일 하면서도 그랬고.. 출판사도 계간지를 발행하는 곳이기 때문에 언론 쪽 하고 연계가 깊은 면이 있죠.


 : 결혼도 하셨고, 뭔가 삶이 좀 달라지셨을 것 같다.


 : 그 문제.. 그건 여성이 아니면 못 느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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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를 낳고,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급하면 아이를 친정에 맡기기도 하고.. 그렇게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행복하냐, 어떠냐, 하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요. 그냥 끝도 없이 달려왔다는 생각뿐이에요. 계속 한 일주일 푹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그건 사실 지금도 별다를 바 없습니다. 집에 가면 5분도 앉아있기 힘들어요.



이 대목을 잘 전달하고 싶었다. 뒤에도 한 번 더 나오지만, 추혜선 단장은 여성이다. 여성으로서 이 한국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천형에 다름 아니다. 남자들이 자신의 사회활동에 전념하면서 그 와중에 지치고 힘들다고 탄식하고 절망하는 동안 여성 활동가들은 자신의 활동에 더해 육아와 가사까지 전담하고 살아간다. 남성 활동가들이 정갈한 옷차림으로 무언가를 외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가 아침에 무얼 먹고 나왔는지, 저 사람의 와이셔츠는 과연 누가 저렇게 깨끗하게 세탁해서 다려 줬는지, 그 밑에 깔려 있는 누군가의 고통에 기반한 가사노동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 자녀분들은?


 : 딸 둘이에요.


 : 그렇게 자녀분들이 좀 큰 다음에 다시 사회생활을 하신 것인가? 경제적인 문제도 쉽지 않았을 텐데..


 : 그 과정은 뭐랄까, 제 삶에도 부침이 많아요. 여러가 지 어려움도 많았고,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결혼에 실패하기도 하고.. 이런 문제를 구구절절 다 얘기할 수는 없고 상처의 시기라고 할 수 있겠죠.


계간지 하다가 지역 신문에서도 잠깐 있었고, 다시 서울로 와서 재혼도 하고 아이를 하나 더 낳고 산후 몸조리하고 있던 중에, 최문순 선배에게 연락이 왔어요.


 : 강원도 도지사?


 : 맞아요. 당시에는 언론노조 하실 때였죠. 98년도였나.. SBS에 노조가 생겼는데, 만들자마자 깨졌고, 그걸 다시 재건하겠다고 누가 나섰는데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에요. 그래서 몸조리하던 걸 털고 일어나 달려가게 된 거죠.


 : 최문순 씨하고는 또 어떻게 아는 사이신가?


 : 뭐 언론사 노조 활동하고 그러다 보면 다 알게 되는 거 아닌가요? (웃음) 그 시대에는 뭐, 하아..



시대의 격변기를 한가운데에서 관통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보여줄 수 있는 무게감 있는 한숨. 추혜선 단장의 활동영역이 광범위했음을 입증해 주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당시 사회운동이라는 게 얼마나 한정된 사람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했는지도 보여주는 한숨이기도 하다. 지금이라고 그런 상황은 절대 바뀌지 않았다.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고, 지금도 소수이고, 앞으로도 소수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소수가 이 사회를 그나마 건강하게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 그렇다면 혹시, 최문순 씨가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자 일자리를 소개한 건가, 아니면 활동가가 필요해서 부른 건가?


 : 경제적인 문제는 전혀 관계없고, 진짜로 일할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SBS는 워낙 사측이 노조를 싫어하고 무노조 원칙을 삼성처럼 지키던 곳이에요. 노조 활동이 전무했던 거죠. 방송국 자체도 늦게 생겼고, 다른 방송이나 신문사에서 직원들이 왔을 거 아닙니까? 그 과정에서 노조 관련자들은 모두 걸러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노조 경험이 완전히 없는 거에요.


 : 그렇다면 SBS 노조를 최초로 만든 설립자 그룹에 포함되시는 건가?


 : SBS 직원들은 아직도 제게 자신들이 제 친정식구라고 표현을 해요. 노조 활동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자신들의 일원으로 생각해 주는 거죠. 저는 SBS 직원도 아니었고, 노조가 채용한 사람인데도 말이에요. 그만큼 임직원들과의 스킨쉽이 많았어요. 한 식구로 느껴질 만큼.


 : 활동을 매우 열심히 하시는 스타일인가 보다.


 : 굉장히 열심히 하죠. 조합원들 노조 가입부터 해서, 일상적인 상담까지 도맡아 하고, 모든 걸 다 했죠.


 : 그렇게 일하려면 시간이 정말 많이 소모될 텐데..


 : 그때는 퇴근하면서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찾아와서 재워놓고 다시 나가서 일을 하고 그랬습니다. 꼬박 만 7년이 넘도록 그렇게 일을 했죠. 그리고 그 성과는..


당시에는 조중동S 라는 분류가 있었어요. SBS가 조중동과 함께 엮이던 시절이었죠. 다들 그 S를 조중동에서 떼어내고자 노력을 했어요. 그걸 해낸 거죠.


처음에 SBS에 가니까, “우리”라는 표현을 써요. 영화 “내부자들”에 나오는 것 같은 의미의 우리. 대구경북, 보수, 이런 의미의 “우리”.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뭘 한다. 이런 표현들. 정치부장, 간부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얘길 하면서 그런 소릴 한다는 거죠.


SBS에 당시 진짜 호남 출신의 직원이 없었어요. DJ 정권이 출범하면서 호남 출신을 보도본부장에 앉히려고 하는데, 사람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쟈니윤 쇼를 만들던 예능 출신, 호남 출신을 보도본부장으로 차출을 했을 정도에요. (웃음)


 : 하아.. 참 우리나라, 대단하다.


 : 제가 원래 방송계 뒷 얘기 정말 많이 압니다.


 : 그 얘기는 나중에 언제 따로 한 번 자리를 만들어서 듣기로 하자. 그런데 그렇게 갓난아기를 키우면서 일을 하는데, 도대체 왜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신 건가? 그게 본성인가?


 : (한숨) 대한민국에서 고졸 여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특히 제도 언론이고, 대한민국 1%의 최고 학력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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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양형자 씨 기자회견에서 “나처럼 노력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는 부분에서 정말 감동했어요. 사실 저는 소수 기득권자들에게 선택받은 경우에요. 저는 일부러 양형자 씨의 기자회견을 애써 거리를 두고 지켜봤거든요. 그런데 바로 그 부분에서는 정말로 뭉클하더라구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하기사 양형자 씨는 그래도 삼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있었고, 유리천정을 보고 절망했겠지만, 우리같이 바닥을 구르는 여성들은 그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상처받고 고통받는 거에요.



이 부분은 학벌 문제에 좀 더 비중이 가 있는 이야기. 방송사만큼이나 거의 대부분의 직원들이 엘리트급 학력을 가진 집단도 없다. 기자가 그렇고, 앵커들도 그러하고, 심지어 엔지니어들도 해당 분야의 전문가급이 진출하여 모여있는 집단이다. 그만큼 엘리트 의식도 강하고, 학벌 문제의 폐해가 깊게 배여 있는 집단도 드물 것이다. 

그 집단에 뛰어든 섬마을 출신의 고졸 여성. 정규직원도 아니고 노조가 채용한 간사. 이런 신분의 사람이 그 집단 내에서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이 가지는 이 사회에 대한 인식은 어떤 것일지 궁금해진다. 



 : 보통은 그런 자리에 가지도 못한다는 얘기..


 : 저는 정말로 운이 좋았던 거죠. 선택을 받았고..


 : 운이 좋게 그런 자리에 갔고,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한 거다..


 : 저희 엄마가 저를 보고 항상 그러세요. 사주를 봤는데 정말 운이 좋다고. 그렇게 운 좋게 자리에 가서, 나름대로 자격지심과 싸워야 하고, 자기 검열을 해야 하고, 편견과 싸워야 하고..


저는 사실 노조 간사 활동하면서 정말 바닥일부터 했어요. 현장이라는 데가 원래 그렇거든요.


여성의 문제를 운동권에서 왜곡될 걱정 없이 편하게 꺼내게 된 것 자체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에요. 오히려 성폭력이나 그런 문제들이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진영논리에 밀려 오히려 은폐되고 그랬잖아요.


그렇게 드러내놓고 노골적인 문제들은 별로 없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과 발을 맞추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엄청나게 했어야 되는 거죠.



앞부분이 학벌의 문제에 가깝다면 이 부분은 성차별에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는 그나마 내놓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지만 정말 8~90년대의 진보 운동권 바닥은 이 부분에서만큼은 진짜 할 말이 없어야 한다. 

고졸, 여성, 이 두 단어에 함축되어 있는 차별과 배제의 두께는 결코 얇지 않다. 그리고 이 두 단어를 동시에 한 몸에 붙이고 활동해온 추혜선 단장의 입장은 정말로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뭐라고 말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바닥에서 그 두 단어를 등에 지고 살아남았고, 성과를 올렸다. 



 : 공부도 열심히 하셨겠다.


 : 글 쓰고 그러는 것은 좀 타고나서.. 성명서 쓰고 그러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잘하기도 했고..



알게 모르게 자랑질을 하는 경향이 있다. 시적 감수성에, 타고난 글쓰기 재주라니... 



무엇보다도 SBS가 나름대로 조직에 건강함이 있었어요.


 : 건강함이라는 것은? 엘리트 의식 같은 것이 좀 적었다는 의미인가?


 : 개방성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다른 메이저 방송사들 같은 경우는 아주 좋은 언론인, 신화적인 인물들이 많았지만, 선민의식 같은 게 좀 강한 경향이 있었어요. 대신 SBS는 그런 게 좀 적었어요.


처음에 원래 비정규직, 계약직들은 노조에 포함이 안 되는 거였는데, 제가 과감하게 비정규직도 노조에 포함시키기로 했고, 그게 SBS에 받아들여질 정도였죠. 그 덕분에 상당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턱 같은 게 없었겠습니까?


 : 정말 고생 많으셨겠다.


 : 거기서 신장이 망가졌죠.



급성 신부전 판정까지 받았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한다.

삶을 지나치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 특징이 일찍부터 몸이 망가진다는 점이다.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서울 출신의 고학력 인텔리 사회 운동가 남성들조차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매진하다 보면 몸이 망가지는 경우가 흔하디 흔한 판에서, 만 7년 동안이나 SBS 같은 거대 방송사 조직내에서, 그것도 “노조”라는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집단의 간사 역할을 수행해 놓고 몸이 안 망가졌다면 그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과연 그런 치열함이 “행복”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뜬금없이 독자 여러분들께 이 말을 하고 싶어졌다. 건강하시라. 건강이 최고다. 



 : 그 시절을 생각하면 회한이 좀 있으시겠다.


 : 아니 뭐 그런 건 없고, 지금도 정말로 편하게 생각합니다. 자주 찾아가고, 누구든지 만날 수 있고, 또 그 쪽에서도 반갑게 친절하게 잘 대해줘요.


시민단체 활동하면서는 정말로 편하게 자주 갔었는데, 얼마 전에도 찾아가서 보도본부장님하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다른 선배, 데스크들이 지나가다가 제 뒤통수를 보고 들어와서는, “아니, 정당인이 보도본부장실에 함부로 들어오고 말야! 이래도 되나?” 이러기도 했죠.


 : 그게 반갑다는 의미의 농담이겠지만 실제로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 당연히 안되죠. 정치인이 언론사를 그렇게 함부로 드나들면 안 되는 거에요. 저도 그 순간에 아 이제는 이러면 안 되는 거구나, 이 사람들이 “내외”하는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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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전에 심 대표(심상정)와 함께 언론사 순방을 했거든요. 대표를 수행해서 여기저기 언론사를 찾아다니는데, SBS를 간 거죠. 모든 언론사는 정치인들의 갑이에요. 그런데 SBS는 무척 잘 대해 주더라구요. 친정식구니까.. (웃음)


심 대표님도 현장 출신이신데 저한테 “도대체 얼마나 지독하게 잘 했으면 사람들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오냐?”고 그 말씀을 하시더군요.


 : 그게 뭐 거창한 일은 아니지만, 상당히 큰 성과를 올리신 것 같다.


 : 잔잔한 성과들이 누적되어 있다는 거겠죠. 저는 그런 걸 내세우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제가 힘들 때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하나의 동력이 되긴 해요.



SBS는 스스로 추혜선 단장을 친정식구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추혜선 단장이 의석을 갖게 되고, 그가 평소에 생각하는 대로의 방송사 관련 법안을 제출했을 때에도 SBS가 “추 의원”을 지지할까? 과연 언론과 각을 세우는 정치인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또다시 떠올랐다. 



 : SBS 이후에는 무슨 일을 하셨는가?


 : 일단 건강에 이상이 와서, 병원에 입원을 하고 퇴원하면서 정리를 했죠. SBS 쪽에서 감사패를 만들어 주더군요. 아마 노조 간사가 전 조합원들의 마음을 담은 감사패를 받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을 거에요.


그리고 나서 언론개혁 시민연대에 가게 된 거죠. 거기 1기들의 시대는 가고, 활동가 한 명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중이에요.


 : 1기라면 어떤 시대를 의미하는가?


 : DJ 정부 시절에 신문개혁, 조중동 개혁에 관해 주로 일하던 분들이죠. 신문법, 지분 축소 문제, 이런 부분을 관철시키기 위해, 조중동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던 그런 시대였죠. 당시에는 조선일보에 세무조사까지 들어가고 했었죠.


그런 개혁의 열기를 등에 업고, 40여 개 언론운동 단체들이 힘을 합쳐서 언론개혁시민연대를 만든 거죠. 그러던 시대가 끝나고, 다 정리하고 줄이고, 프레스 센터 언론노조 옆에 작은 사무실에 대표 한 분과 활동가 한 명 수준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도 안 나지만, 한때 우리 사회는 이랬었다. 건강한 언론, 제대로 된 신문을 갖기 위해 시민사회의 동력이 결집되고, 정부가 함께 나서고 했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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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에 나름대로 많은 활동이 있었지만 성과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 물론 많은 법안이 제안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지만, 절반의 성과라고 할까, 상당 부분 관철이 되지 못했던 점은 있죠.


 : 실제로 그런 법안들이 모두 어디에서 나온 건가?


 : 실제로 법안이 통과가 되면 의원의 이름이 붙어서 통과되죠. 의원 개개인들은 하나하나가 입법기관이잖아요. 그렇게 의원들의 손을 거쳐야 실질적인 법안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법안의 내용은 시민사회단체에서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아요.


언론개혁시민연대에서도 신문위원회가 있었고 방송위원회가 따로 있었죠. 조중동은 신문사업자의 지배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고, 신문위원회에서 일단 사주의 지분축소에 관해, 법정 상한선을 두고 싶었던 거에요. 법안도 제출하고 했지만 결국 무력화된 거죠.


 : 조중동이 사력을 다해서 저항했을 거 아닌가?


 : 그거야 당연한 얘기고, 야당의원들조차 그들의 로비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거에요. 결국 선을 넘지 못한 거에요. 결국 그들의 논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문도 산업인데 왜 지분을 제한하는가, 이건 과도하다 하는 논리가 퍼지면서 물타기가 된 거에요.


 : 그런 걸 보면 시민사회단체가 조중동에게 패한 것 같다.


 : 그렇게 보이죠. 그게 바로 언론의 영향력이라는 거겠죠. 이걸 넘어서려면 시민사회의 동력이 그만큼 커야 한다는 거에요. 그러나 그렇지 못했죠.


역사적으로 봐도 언론의 영향력이 지배적 권력을 담지 못하던 시절은 거의 전쟁과 혁명 때밖에 없어요. 그런 언론의 전횡을 막아내야 하는 비평과 저항 세력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최악을 막는 것 정도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어요.



꿈은 크고 이상은 높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거기에 한참 못 미친다. 

사력을 다해 언론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언론 자체의 힘은 언제나 그들보다 더 강력했고 개혁에 저항한다. 정권까지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을 정도. 이걸 현장에서 함께 싸우면서 지켜본 사람의 입장에서, 언론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지나치게 큰 꿈이고, 결국 최악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는 이야기. 

한편으로는 매우 서글픈 이야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추 단장의 실리적인 현실주의자적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 심오한 얘기이다. 언론개혁시민연대에 처음 들어가신 과정은?


 : 사무차장.


 : 처음부터 굉장히 높은 자리로 가셨다.


 : (웃음) 아니 그 동안 해온 일이 있고, 경력이 있는데..


 : 가서는 뭘 하셨는가?


 : 날마다 성명서 썼죠. (웃음) 들어갔을 시점이 2005년. 참여정부 때부터였어요. 아마 제 동영상을 검색해 보시면 “기자실 폐쇄”건 관련해서 인터뷰도 많이 하고 그랬던 게 나올 거에요. 참여정부 시절, 언론개혁 시민연대에 사무차장으로 들어갔다가, 사무처장을 하게 됩니다.


 : 차장보다 처장이 높은 건가?


 :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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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서 드디어 참여정부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다. 본인의 표현에 따르자면, 시적인 감수성을 지녔던 문학소녀이자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던 섬마을 소녀가 서울로 상경하여 이 사회를 바꿔 보자는 진보적 사회운동 판에 뛰어든 이야기.


그 소녀는 어느새 자라서 청년이 되었다가 시인으로 등단도 하더니, 사회 활동가가 되고, 메이저 방송사의 노조 간사가 되더니, 언론개혁시민연대라는 시민사회단체의 사무처장이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신장이 망가진다.


이제는 더 이상 물주전자 나르는 아이가 아닌, 본격적인 시민사회 언론개혁 운동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그런 핵심적 활동가는 참여정부라는 일찍이 없었던 특이한 정권을 맞상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2부에 계속.





물뚝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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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