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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사대부로 임금부터 하급 관료에게까지 학문과 행정, 실력을 골고루 인정받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유희춘(柳希春, 1513~1577). 인종의 스승이었으며, 선조가 왕이 된 후에는 경연장에 빠짐없이 소환되어 ‘왕 직속 1타 강사’로도 이름을 날린 인물입니다. 그는 훗날 여러 서원에 배향될 정도로 조선 사회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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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헴! 내가 바로 유희춘이다~

 

그러나 생전 썼던 일기인 『미암일기(眉巖日記)』를 읽어보면, 그가 대외적으로 받았던 평가와는 다른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남의 녹봉을 가로채고, 국가 재산으로 다른 관료들과 친목을 도모했으며, 돈을 받고 타인의 병역 비리를 도와줍니다. 또 자기 조상 묘를 공사하는데 공적 자원과 군인들을 투입하기도 합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부동산 재테크마저 공적 자원을 투입하여 진행합니다. 이렇게 권력을 이용한 재테크 방식으로, 유희춘은 차곡차곡 재산을 불려 갑니다.  

 

 


 

선물에는 관직을, 거절에는 유배를

 

유희춘의 일기를 보면,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타인과 선물을 주고받는 장면이 그것이죠. 이 장면과 빈번하게 연결되는 장면은 ‘벼슬자리 청탁’과 ‘부역 면제 청탁’ 장면입니다. 물론 유희춘이 청탁이 오는 대로 다 힘을 써줬던 건 아닙니다. 그가 신경 썼던 최우선 순위 후보는 친인척이나, 자신과 경제 공동체로 엮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청탁을 넣은 사람이 관직에 발탁되면, 그는 여과 없이 자신의 속물적 기쁨을 일기에 표출합니다.

 

1574년 2월 21일 ~ 23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엊그제, 김종려가 문안 인사를 왔다. 그가 말했다.

 

“영감님, 제가 듣자 하니, 흥덕현감 이국량이 사람이 용렬하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체직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임 인선을 논의하고 있다는 정보도 들었습니다.”

 

“그러한가? 그러면 내 즉시 이판에게 편지를 넣어 보겠네.”

 

그리고 드디어 오늘 김종려가 차기 흥덕현감으로 낙점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집과 우리 집 모두에게 기쁘기 그지없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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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후! 경사로구나~ 경사야~

 

김종려는 유희춘 집안이 대대로 교류하던 가문의 후손이자, ‘정치인 유희춘 후원회장’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물심양면으로 유희춘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관직에 목이 마른 사람이었습니다. 급한 사람이 우물 판다고 했던가요. 관직과 승진에 목마른 사람일수록, 인사이동에 대한 빠삭한 정보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종려는 어느 날 흥덕현감 후임자를 찾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유희춘에게 이를 알려 관직을 청탁합니다. 2일 후, 김종려가 흥덕현감으로 낙점받자, 유희춘은 “두 집안 모두의 경사”라며 기뻐합니다.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김종려의 부와 권력이 커질수록, 유희춘의 수입 또한 늘어난다는 뜻이었습니다.

 

세자(과거에 인종)와 왕(현재 선조)의 학문적 스승이면서 뭇 선비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은 유희춘의 각종 슈킹과 노골적인 청탁 교류는 이미 놀라운 정도지만, 더 놀라운 게 있습니다. 선물과 편의를 제공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보복도 매우 심했다는 사실입니다.

 

1569년 12월 2일 ~ 6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오늘 드디어 호장(戶長) 송원룡이 곤장을 맞았다. 지난 11월 20일, 그날은 너무나 추워서 송원룡에게 땔감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그는 그저 입을 꾹 닫고 거절할 뿐이었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내 조카 별감(別監, 고을 내 양반의 대표자) 이유수가

 

“어찌 감히 사대부의 부탁을 거스를 수가 있는가! 생각이 있다면 미암 선생님께 면포를 내고 용서를 구하게”

 

라고 하였으나, 송원룡은

 

“제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저는 떳떳합니다. 미암 선생님께서 다른 자의 이야기를 듣고 저를 모함하시는 겁니다.”

 

라면서 뻔뻔하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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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퀴 봐라...

 

나는 그 얘기를 듣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해남현감의 형을 불러 그간의 사정을 전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이야기를 전달받은 해남현감이 송원룡에게 곤장을 90대나 쳤다고 한다. 일 처리가 시원시원하고 정확하니 내 마음이 다 후련하다.

 

어느 날, 날이 너무 추웠던 유희춘은 아전 송원룡에게 땔감을 요구하지만, 송원룡은 그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왜 거절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이유야 어쨌든 조선 사회에서 사대부의 물품 요구를 아전이 거절한다는 건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여러 양반이 송원룡에게 “유희춘 선생님께 가서 싹싹 빌어라.”라고 권유하지만, 송원룡은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나왔죠.

 

이에 유희춘은 직접 움직여 해남현감 찬스를 씁니다. 당연히 송원룡은 해남현감에게 소환되어 곤장 50대 + 40대를 맞게 되었죠. 곤장 90대라니, 엉덩이가 빨개지는 것을 넘어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큰 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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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악

 

송원룡 입장에선 정말 억울했을 겁니다. 땔감 좀 안 줬다고 곤장 90대를 때리는 건 너무 심한 처사였으니까요. 분했던 송원룡은 또 하나의 사건을 일으킵니다.

 

1570년 6월 1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오늘은 내가 서울로 올라가는 날이며, 고을 사대부들이 마련해준 전별연이 있던 날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있던 곳의 산에서 한 아이의 외침이 들려 왔다.

 

“유희춘과 해남현감은 들어라! 이 천하의 도둑놈들아! 둘이서 붙어서 뇌물을 주고받으니 시원하냐? 특히, 유희춘 너는 들어라! 네가 짓고 있는 그 대단한 집을 언젠가 내가 불 질러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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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외침을 듣는 나는 너무나 창피했다. 이것은 분명 송원룡이 그의 집안일을 하는 아이를 시켜서 벌인 짓이 분명했다. 감히 양반을 능욕하다니, 그 간사하고 교활한 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송원룡이 벌인 복수는 다소 어설펐는데요. 집안일 하는 아이를 시켜서 유희춘과 양반들이 모인 곳을 향해 욕을 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억울했다는 얘기겠죠. 송원룡은 이 일을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다른 아전에게 덮어씌우려고 했지만, 유희춘은 주모자가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송원룡은 해남을 떠나 무안으로 도망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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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춘한테 잡히면 뒤진다~

 

그러나 유희춘의 추적은 집요했습니다. 유희춘은 전라도 일대의 양반 및 지방관에게 송원룡을 잡아다 엄히 벌을 주라고 꼼꼼하게 요구하죠. 결국, 검거된 송원룡은 모진 형을 받고 유배 갈 위기에 놓입니다. 곤장과 유배는 지방관이 백성에게 내릴 수 있는 최대치의 처벌이었으니, 유희춘을 비롯한 당시의 양반 커뮤니티가 이 사건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송원룡의 동생 송원봉이 찾아와 유희춘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1570년 7월 15일 - 『미암일기(眉巖日記)』

 

아침에 송원룡의 동생 송원봉이 찾아와 말했다.

 

“영감님, 저희 형이 지은 죄는 정말로 너무나 큽니다만, 제가 대신 이렇게 용서를 구합니다. 저희 형이 유배만은 면하게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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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요~

 

그놈의 악독한 행위를 도저히 용서할 수는 없지만, 그냥 두는 것도 사대부의 법도가 아닐 터.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놈이 저지른 악독한 행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지만, 만약 그놈이 반성문을 써오면 내가 감사에게 형을 감해달라고 요청해 보겠다.”

 

“알겠습니다. 당장 그리하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유희춘이 송원룡에게 제시한 감형 방안은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글을 가져오라’라는 것이었는데요. 이에 송원룡은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냅니다.

 

“소인이 지은 죄는 죽어도 다 씻지 못하니,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영감님께서 덕을 베푸셔서 목숨만은 살려주시기를 밤낮으로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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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으리~ 제바아아아아알

 

하지만 유희춘은 용서를 베풀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미 전라감사와 송원룡의 처벌 수위에 대해서 계속 상의하고 있었거든요. 심지어 이미 송원룡을 제주도로 유배 보낸다는 세부사항까지 합의한 상태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사건은 별감이 수사하고 수령이 처벌을 내렸다가 나중에 감사가 최종 결정을 내리는 사법 체계가 작동된 사건이지만, 실제로는 그냥 유희춘이 고발도 하고 수사도 하고 판결까지 내린 셈입니다. 자술서는 훗날 송원룡 가문이 딴소리할 때 활용할 법적 근거였을 뿐이고요. 땔감 좀 안 보냈다고 사람 하나를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고 심지어 제주도로 귀양까지 보내는 ‘유희춘 네트워크’의 힘은 이토록 막강했습니다.

 

겁도 없이 ‘고발사주’까지 해가며 민주주의를 망가뜨린 데다가 관련자 중 아직까지도 처벌받은 이가 없는 ‘검사&검사 출신’들의 빠워와 겨루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흥미로운 상상이 듭니다.

 

 

유희춘의 ‘소확횡’을 더욱 엄중하게 봐야 하는 이유

 

유희춘이 이런 부패 정치인이 된 첫 출발은 국가의 ‘적은 보상’에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일면 사실이거든요. 녹봉 자체도 양반의 생계 수준에 못 미치는데, 심지어 그 녹봉도 매번 깎여서 나오니, 공직자도 사람인데 가족을 부양하고 가문을 세울 방도를 찾는 것을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즉, 관료들의 처우에 허점이 많은 조선 사회에서, 관료들은 스스로 부족한 처우를 보충하기 위해 ‘보상받는 것’이라고 자기 체면을 하며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리는 ‘소확횡’에서 시작해 나중엔 국가 권력을 더욱 사적인 영역에까지 노골적으로 쓰는 것으로 발전해간 것이죠. 

 

하지만 사대부들이 불만을 갖고 있던 관료 처우 시스템은 사대부 본인들이 자초한 면이 있습니다. 적은 세금과 관원의 봉사 의무를 강조했던 건 다름 아닌 사대부들 자신이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시 조선이 갖췄던 재정구조로썬 국가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 빵꾸를 개인의 도덕성에만 맡겨 놓고, 경제적 불균형과 부패 방지를 위한 근본적인 체제 정비에는 소홀했습니다. 누구보다 부동산의 독점을 원했던 사람들은 바로 사대부 집단들이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겉으로는 온갖 도덕을 부르짖지만, 실상 속으로는 누구보다 부패한 이중성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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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한국의 현실, 즉 부동산 가격은 (최근 떨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천정부지로 높고, 급여는 물가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하며, 생활 수준은 점점 높아지는 현실이 우려스럽습니다. 전 국민이 부의 레이스에 뛰어들고, 그 과정에서 어떤 짓을 해도 ‘국가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내가 해내는 것이다.’라는 말로 정당화하는 흐름이 손에 잡힙니다. 그것은 정당하지 못한 부에 적절한 책임을 묻는 데 소홀했고, 나아가 노동이 존중받는 경제구조를 점차 포기해왔던 현대사적 흐름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특정 네트워크가 국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정부를, 근래에 벌써 세 번이나 겪고 있습니다. 마침내 경제적 네트워크가 사법 네트워크를 장악한 이 역사에 적절한 책임을 묻지 못하면, 과거 군부독재 시대에 이런 행위가 ‘국룰’처럼 여겨졌던 흐름이 반복될 것이 우려됩니다. 나아가 반드시 해소해야 할 경제적 불균형마저도 정당화되어, 더는 손을 댈 수 없는 지경까지 흐르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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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기준 변호사 수임료 (단위: 원)

자료 : 한국형사정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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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신 아들 ‘정윤성’이 민사고 재학 당시

친구들에게 자주 했던 발언

 

그래서 우리는 유희춘의 ‘소확횡’을 더욱 엄중히 바라봐야 합니다. 조선사를 가로로 넓게 폈을 때, 유희춘의 시대는 조선 후기를 휘감던 부패의 사슬이 조금씩 그 마수를 뻗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훗날의 역사가는 우리가 살던 시대를 어떻게 기록할까요? 월급봉투가 당당하던 시대로의 회귀는 이제 어려울 수 있지만,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자산을 채우지 못하면 도태되는, 마침내 ‘소확횡’이 특정 집단의 ‘국룰’로 자리 잡는 시대로의 진보는 아무리 생각해도 반갑지 않습니다.

 

 

 

참고문헌

 

(1)정창권,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사계절, 2003

(2)장서각 데이터베이스, 『미암일기』 (https://jsg.aks.ac.kr/)

(3)李成妊, 「16세기 朝鮮 兩班官僚의 仕宦과 그에 따른 收入」, 『역사학보』 145, 1995, 91-146.

(4)김건태, 「16세기 양반지주층의 경제활동」, 『역사와 현실』 16, 1995, 133-154.

(5)최주희, 「16세기 양반관료의 선물관행과 경제적 성격」, 『역사와 현실』 71, 2009, 245-289.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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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