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부활절 방학의 악몽

 

0_JS295511607.jpg

출처 - <PA wire>

 

"17시간이나 기다렸어! 제길!!"

 

지난 부활절 방학은 우리나라로 치면 추석과 같은 연휴였다. 간만에 찾아온 2주간의 방학. 영국의 각 학교는 프랑스로, 이탈리아로 수학여행을 계획했다. 하지만 연휴 첫날은 말 그대로 카오스였다. 

 

장장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차들은 한자리에 멈춰 섰다. 한두 시간은 그럴 수 있다지만 화장실도 없고 음식점도 없는 도로 위에서 그 오랜 시간을 버티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결국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무려 절반에 가까운 학교가 취소 결정을 했다고 하니… 암튼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겐 고문이 따로 없었을 연휴가 되었다. 여기서 놀라운 건, 세계 5대 경제 대국 영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것도 21세기에! 
 
어떻게 영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범인은 브렉시트(Brexit)

 

추ㅠㅊ.JPG

출처 - <CNBC>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한 뒤, 국경에서는 별도로 출입국 관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물자가 오가는 길엔 세금 문제가 발생하고, 사람이 왕래할 땐 비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여권 한 번 쓰윽 훑어보고 배에 타던 과거와 달리, 일일이 여권을 검사하고 비자를 확인한다. 가방을 검사하고 트렁크엔 뭐가 들었는지, 혹시 불법적인 게 들어있진 않은지, 세금을 부과해야 하는 물품은 없는지 차량 곳곳을 살핀다.
 
브렉시트 이후 업무 양은 급격히 늘었는데, 그에 따른 증원이 없었다. 브렉시트 이후, 코로나 이후,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보리스, 리즈 트러스 총리 교체 등) 들이 지난 뒤 첫 번째 휴가였고, 행정 서류 절차도 아직 익숙지 않은 상태에서 결국! 제대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 모두 차에서 내려 일일이 여권 검사와 수화물 검사를 받아야 했다. 보통 관광버스에 40여 석이 있으니, 학생들이 하차한 후 수많은 짐을 하나하나 검색하다 보면 출입국 관리 직원은 물론, 뒤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한 대 두 대 밀리기 시작하다 도버(Dover)로 가는 고속도로는 10km 이상 줄이 늘어선 주차장이 되어 버렸다. 모처럼 찾아온 부활절 연휴는 그렇게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노조 파업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사람이 몰려서 그렇다", "인원 확보를 하지 못한 탓이다". 정부 여당은 갖가지 핑계를 늘어놓았다. 시민들이 겪는 불편에 대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려 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범인은 바로,
 
"브렉시트"
 
출입국, 수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던 이전과 달리 국경선이 생겨났다. 그만큼 국경을 넘나드는 일이 복잡해졌으니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정부는 끝까지 브렉시트가 원인이 아니라고 발뺌했지만, 이 모든 게 브렉시트 때문이라는 건 에비로드를 지나던 개도 아는 사실이다. 한때 독자적인 행보를 통해 제2의 대영제국을 꿈꿨던 이들도 브렉시트로 인한 후퇴를 체감하고 있다고 한다(인간은 도로에서 18시간 가까이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보수당의 몰락과 노동당의 승리
 
지난 5월 4일(대관식 이틀 전), 영국에서는 구청장, 시의원, 시장을 뽑는 지방선거가 있었다. 의회민주주의답게 영국 국민들의 분노는 투표를 통해 드러났다. 결과는
 
보수당 폭망, 자민당 선전, 노동당 승리
 
 

2.png

출처 - <BBC>

 

2010년 보수당과 손을 잡은 이후 쭉 나락의 길을 걷던 자유민주당(자민당)이 선전했고, 시의원의 경우, 노동당이 과반을 차지하며 승리를 누렸다. 시의원 선거 결과 보수당은 1063석을 잃었고, 그중 537석은 노동당에게, 407석은 자민당에게 돌아갔다. 카운슬(Councils, 우리에겐 구청, 혹은 도청)에서 48석이 빠진 보수당의 자리를 노동당과 자민당이 각 22, 12석씩 나눠가졌다.
 
정당 지지율로만 본다면 44%인 노동당이 압승을 거둬야 하겠지만, 의외로 10%대 지지율의 자민당이 약진한 것을 보면 이 또한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보수당은 못 뽑겠고, 그렇다고 노동당을 찍기도 싫은 중도층의 몰표라는 뇌피셜 분석도 있지만, 어쨌든 분명한 건,  보수당 지지율은 날이 갈수록 하락세를 보이고 이를 반등할 만한 어떠한 조짐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
 

3.jpg

지역 별 정당 지지도 

출처 - <폴리티코 유럽>

 

게다가 리버풀, 맨체스터, 버임험 등 영국 내 굵직한 대도시들을 대부분 노동당이 차지했다. 소도시 중 인구가 많은 플리머스, 엑시터, 케임브리지, 코벤트리 등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말 의미가 있는 건, 지금까지 보수당이 선점했던 지역, 그래서 노동당이 자리 잡기 매우 어려웠던 지역을 노동당이 가져갔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요크(York)와 켄터베리(Canterbury). 참고로 켄터베리는 부활절 휴가 때 아주 큰 이슈를 만들어 낸 도버(Dover)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요크라는 지역은 과거 백 년 전쟁의 주인공인 요크가의 후손들이 자리 잡은 오랜 정통 보수 지역이다. 그런데 이곳이 노동당 우세지가 되어버렸다. (참고로 미국의 뉴욕 -New York- 은 영국의 도시 요크의 명칭을 따 ‘새로운 요크’라는 뜻으로 뉴욕이 되었다. 처음에는 ‘뉴암스테르담’이 될 뻔했는데…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한 유럽인(네덜란드, 아일랜드, 게르만, 잉글랜드) 중 영국인이 세력을  잡게 되면서 뉴욕이 되었다고 한다)
 

4.png

출처 - <폴리티코 유럽>

 

켄터베리와 요크는 성공회를 대표하는 대성당을 보유한 도시다. 성공회의 대주교는 켄터베리에 있고, 서열 2위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그리고 3번째가 요크 민스터 주교다(서열 4위는 더람(Durham) 대성당 주교). 런던이야 워낙 국제적인 도시이고, 외국인 수가 많다 보니 노동자 계층이 두터워 노동당 강세 지역이긴 하나, 켄터베리와 요크는 영국 전통을 수 놓은 도시이자, 오랜 시간 귀족, 성공회의 역사로 가득 채워진 보수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지역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데, 이 두 곳이 모두 노동당으로 넘어갔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켄터베리는 이번 부활절 휴가 동안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이번 선거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물론 아직은 직접적인 이유 하나만 뽑을 수는 없다. 다만, 이 결과가 분명한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강력한 근거는, 총리에 대한 신임도, 정당 지지율 모두 보수당이 노동당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5.png

출처 - <폴리티코 유럽>
 
데이비드 카메론이 불을 지핀 "브렉시트"라는 화살은 결국 테레사 메이와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를 관통해 리시 수낙으로 끝을 보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난무한다. 솔직히 오래 참아왔다고 말한다. 10여 년간, 4명의 총리가 교체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영국 국민들은 그들(보수당)이 끝까지 책임을 지도록 지지를 표했다. 하지만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는 법. 십 년을 허비한 이들에게 베풀 더 이상의 자비는 없었다. 
 
투표로 드러난 민심

 

000_APP2003032250185x.jpg

2003년, 토니블레어 정부의 이라트 파병 결정 반대 집회

출처 - <AFP>

 

토니 블레어가 주장한 "계급이 뚜렷한 사회에 모두가 중산층이 되어야 한다"는 개혁안과 "제3의 길"이라는 방향성은 대중들이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한 요소였다. 외부적으로는 아일랜드와 화합을 이루고, 내부적으로는 최저임금제와 차별금지법 제정 등을 통해 인종차별을 비롯한 각종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 결과 견고한 지지층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이라크 참전 결정 후, 그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18세기부터 시작된 식민주의, 그 끝에서 만난 두 번의 세계대전 경험이 있었기에, 영국인들은 전쟁으로 무고한 시민이 희생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당시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블레어 정부를 규탄했다.
 
블레어 정부의 이라크 파병 동의 여파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에 대한 여론은 여전히 좋지 않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동당 집권 당시 보수당이 잘해서 정권 교체를 이뤄낸 것이 아니라 블레어의 전쟁 동의 때문에, 노동당이 신뢰를 저버렸기 때문에 보수당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영국 시민들은 '불가침'의 영역을 건드린 토니 블레어 정부에 대해, 이번엔 '브렉시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지 못한 보수당에 회초리를 들었다. 보수당이 말하는 "브렉시트를 통한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기엔 이미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게 영국 국민들의 입장이다.
 
영국인들은 자국의 '가치'를 건드리면 더 이상의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투표를 통해 보였다. 영국과 한국 모두에 곧 다가올 내년 총선. 과연 시민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