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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7년, 부처님오신날이다. 올해의 부처님오신날 기사는 뭘 쓸까 한참이나 고민하던 끝에(어쩌다 보니 딴지일보의 불교 전문 기자...?!), 통일에 대해선 1도 관심이 없는 ‘윤석열 강점기’를 맞이하야 북한 불교사에 대해 맛보기로만 디벼보기로 한다. 하루빨리 북한의 소멸해 가는 불교 유산이 회복되는 날이 오기를 발원하며.

 

1942년, 일제가 조사한 북한 지역 사찰의 수는 579개소였다. 자료마다 차이가 크지만, 최소 300개에서 최대 600개소의 사찰이 북한에 있었다. 그중 일부는 폐사되었고 일부는 쇠락했었겠지만, 굵직한 사찰만 하더라도 100개 정도는 있었을 테다. 그리고 지금, 북한 지역에 남아 있는 사찰은 60개 남짓이다. 전국 사찰 수가 약 17,000개소, 그중 전통 사찰은 약 980여 개로 추산되는 남한의 사정과는 천양지차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불교는 한반도 전역에서 약 1,600년 동안 이어져 왔으며, 때론 외부의 강력한 탄압이나 내부의 부패로 위기를 맞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북한 땅에서 불교가 소멸 위기에 놓인 적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은 성철스님을 비롯해,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 전국의 선승(禪僧)이 몰려들었던,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선방이 있던 곳이다.

 

그 많던 스님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해방 공간의 ‘사회주의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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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마하연. ‘해동제일선원’이라 불리던 곳.

만공, 청담, 환경, 성철, 석주 스님 등이 이곳에서 선 수행을 했다.

이 밖에도 수많은 남한의 스님들이 북녘땅에서 수도를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불교는 상당한 격변을 겪었다. 조선 불교 내부의 정체와 일본 불교로부터 받은 충격, 그리고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정치적 환경이 맞물려 개혁과 혁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 복잡한 역사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자. 어쨌든, 그 일련의 흐름 끝에 사회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스님들이 등장했다. 특히, 1930년에 설립된 불교계의 비밀 항일 결사 ‘만당(卍黨)’에는 일본에서 유학한 젊은 스님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1920년대 유학 시절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몸소 겪으며 사회주의, 아나키즘, 공산주의 등의 영향을 짙게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불교와 사회주의라니, 뭔가 찰떡이라는 느낌은 잘 들지 않는다. 도대체 그들은 왜, 사회주의에 경도된 것일까? 그들이 가졌던 생각은 1946년 해방 공간에서 창설된 ‘불교혁신총연맹’의 당면 주장에서 드러난다.

 

불교혁신총연맹의 당면 주장

 

- 교도제(敎徒制)를 실현하여 대중불교를 수립하자

 

- 사찰이 소유한 토지를 모두 개혁하고, 교도는 생업에 근로하자

 

- 일제 잔재인 계급독재를 타파하자

 

- 교도는 모든 기관에 있어서 권리와 의무를 균등히 하자

 

- 친일파와 교단 반역자를 타도하자

 

이 시기, 불교계는 보수와 진보로 극렬히 대립하고 있었다. 이른바 ‘혁신 계열’에서 주장하는 불교 개혁의 주요 논지는 이렇다. ‘절간에는 사유재산이 없어야 한다. 불교계 내부의 친일파를 숙청해야 한다. 모든 승려와 교도는 노동해야 한다. 계급을 타파하고 불교 신자 중심의 불교를 만들자.’ 이것이 그들이 내놓은 ‘사회주의식 불교’의 각론이었다.

 

이 주장들은 다 나름의 타당성이 있었다. 일부 대사찰이 소유한 대토지는 지역 사람들을 대대로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한 문제였으며(「사하촌」이라는 소설에서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잘 드러난다. 지금도 국가를 제외하면 전국의 임야를 가장 많이 소유한 집단이 조계종이다), 친일 불교는 해방 공간에서 불교계 내외부에서 끊임없이 대두되던 주제였다(물론 일본에서 유학한 사회주의 엘리트 스님들 사이에서는 이견이 있던 문제였다).

 

뒤이어 한반도의 통일 정부 및 단독정부 수립과 관련하여 뜨거운 논의가 있었다. 1948년, 북한에서 ‘전조선 제정당 대표자 연석회의’가 개최되고, 우리가 잘 알듯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수많은 남한 인사가 방북했다. 여기에 불교계 인사들도 있었다. 그 후 홍명희나 백남운이 북한에 그대로 남았듯, 방북한 스님 중 일부가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한국전쟁 시기에도 많은 남측 스님들이 북한으로 넘어갔다. 전쟁이 끝나고, 남과 북은 그대로 단절되어 버린다.

 

대숙청의 시대, 북한 불교계의 암흑기

 

자유의지로서 북한으로 떠났던 사람들. 그들에게는 여전히 ‘사회주의 지상락원의 건설’이라는 꿈이 있었다. 불교계 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부패해 버린 불교계의 현실에 좌절한 후, 민중에게 진정한 빛이 되는 불교를 꿈꾸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북한을 선택할 만한 이유도 있었다. 이른바 ‘혁신계’라 분류되던 스님들이 오랫동안 주장했던 건 ‘절간에 사유재산은 하나도 없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토지는 오랫동안 사찰 경제의 근간이었다. 토지 해체를 부르짖는 그들의 이상과는 달리 각 사찰의 주지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던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그런데 그 ‘허무맹랑한 소리’를 북한에서 현실로 이뤄낸다. 1946년 전후에 실시된 토지개혁이 그것이다. 북한은 대부분의 토지를 국유화하는데, 이때 교회나 사찰이 소유한 토지는 빠르게 몰수되었다. 그 결과 북한의 기독교계는 대규모로 남하하였고, 승려들은 산발적이지만 꾸준히 남하했다. 남한을 선택한 북한 출신 옛 스님들이 남쪽으로 내려온 시기도 대부분 이때였다. 하지만 반대로 북한의 토지개혁 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스스로 입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은 원칙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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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의 꿈은, 모든 사회주의자가 품었던 것처럼, 물거품이 되었다.

 

김일성은 50년대 가혹한 숙청을 반복하면서 독재 권력을 구축해 냈고, 60년대부터는 ‘주체사상’ 원툴로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이른바, ‘북한식 문화혁명’이었다. 해방 이후 종교에 관한 김일성의 발언 내용은, 이렇다.

 

“종교는 일종의 미신입니다. 예수를 믿든지 불교를 믿든지 그것은 다 본질상 미신을 믿는 것입니다. 종교는 역사적으로 지배계급의 수중에 장악되어 인민들을 기만하고 착취하고 압박하는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또 근대에 들어와서는 제국주의자들이 후진 국가 인민들을 침략하는 도구로 이용되었습니다.” - 김일성 『김일성 저작선집 1』

 

이런 반응이 이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대로 절에 남아 있는 스님들이 있었다. 세상이 어찌 변하든 관계없이, 오직 수행과 ‘스님 생활’에만 관심이 있던 ‘진짜 스님들’ 말이다. 하지만 탄압은 줄기차게, 그리고 정교하게 시행됐다. 1958년, 냉전을 맞이한 북한은 ‘중앙당 집중 지도 사업’으로 전 국민의 성분을 조사한다. 이때, 많은 종교인이 ‘적대 계층’으로 분류되었다. 이어 1966년, ‘주민 재등록 사업’을 시행하는데, 이때 ‘미신 숭배자, 천도교, 기독교, 불교, 천주교, 유교’는 하위 계층으로 정해져 감시와 불이익의 대상이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하위 혹은 적대 계층’을 ‘사회주의 인민’으로 통합시키는 사업이 시행된다. ‘교양 개조 사업’이다. 김일성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은 누구나 다 낡은 사상의 잔재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과오를 범할 수 있습니다. 우리 당은 낡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꾸준히 교양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하는 방침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 회고록 1』

 

그리하여 60년대, 북한 불교는 아주 빠르게 소멸했다. 토지가 몰수되었을 뿐 아니라, 불공을 드리고 시주하는 행위 자체가 금지되면서 사찰의 경제 체제가 붕괴되었다. 종교인들은 ‘특수 지역’에 집단 거주하게 하였고, 집단농장과 집단노동체제가 시행되면서 그들은 노동자가 되었다. 많은 스님이 환속할 수밖에 없었다.

 

저항하는 자들은 수용소로 끌려갔다. 중앙당 집중 지도 사업에서 적대 계층으로 구분되어 숙청 대상이 된 사람 중 종교인, 지주, 기업가, 상인이 약 10만 명이었다. 이들 모두가 숙청된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반동’의 기미만 보이면 바로 수용소행이었다. 자료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해방 공간에서 스스로 북한으로 입국한 많은 스님이 이때 많이 환속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300에서 600개에 이르던 북한 지역의 사찰들이 대거 소멸한 것 또한 이 시기이다. 한 증언을 들어보자.

 

“한 번은 절의 일부를 노동자 휴게소로 쓰도록 내놓으라고 해서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데 어떻게 절을 침해할 수 있느냐’고 하니까 반동이라 하더군요” - 고태우, 『북한의 종교정책』 (민족문화사, 1988)

 

참 재밌는 일이다. 1600년을 이어온 불교였다. 조선시대 때도 대규모 절의 통폐합과 승려의 강제 환속이 있었으나, 이렇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그런데 약 20년 만에, 불교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쇠퇴했다. 토지개혁을 통해 국가의 생산수단을 모두 점거하자, 세상에 어떤 변화와 위기가 있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종교마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북한 불교, 생존을 택하다

 

혹독한 시기가 지나가고, 북한 불교는 새로운 시기를 맞았다. 탄압과 청소가 다 끝났다고 판단한 김일성이 아주 제한되는 수준에서 종교를 인정하는 신종교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계열은 여전히 탄압받았으나, 불교는 상황이 조금 나았다. 불교가 보유한 건축 유적이 ‘주체사상의 선전물’로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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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김일성이 안변 석왕사를 방문하여 ‘이 절간을 가지고 우리는 불교를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의 슬기롭고 정교한 건축술의 전통’을 교육시킬 것을 지시했다.” - 고태우, 『북한의 종교정책』 (민족문화사, 1988)

 

그 덕분에 조선불교도연맹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승려 교육과 양성을 위한 기관인 ’불교학원’을 설립할 수 있었다. 사찰과 불교 문화재를 관리하고, 주체사상에 입각한 팔만대장경 번역을 위해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오랜 탄압 속에서도 간신히 ‘존버’하던 스님들은 적극적으로 주체사상에 협력하면서 생존의 길을 모색했다. 불교 사상이 주체사상과 다르지 않다고 역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냐고? 이런 식으로 말이다.

 

“석가세존의 위업을 이어 조선 불자들이 해야 할 과제는 세존이 깨달은 도리인 연기와 사성제를 등불로 삼아 이 나라 이 땅의 중생이 겪고 있는 고통과 그 원인을 없애기 위해 통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 1991년 북한 대성산 광법사에서의 ‘석탄절 기념법회’

 

주체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우리식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의 목적인 ‘우리식 사회주의를 통한 조국 통일’. 북한의 불교는 그것을 해탈의 방법으로 여긴다. 즉, 조국이 분단되어 주체사상으로 똘똘 뭉치지 못한 것이 고통의 원인이요, 주체사상을 통한 통일이 고통의 해소라고 보는 것이다. 이 기묘한 논리를 도출시키기 위해 그들이 해야 했을 타협과 절망이 얼마나 많을까. 그들이 겪어야 했던 암울한 시기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감히 짐작만 할 따름이다.

 

지금 300여 명으로 추산되는 북한의 스님 중 다수는 진정한 의미에서 스님이라 보기 어렵다. 수행이라기보단, 그냥 월급쟁이 직장인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찰을 관리하고, 시주가 들어오면 아주 약식으로 염불을 해주며, 외국에서 관광객이나 외빈이 오면 접대를 맡는 역할에 종사하고 있다. 일부는 보위부 요원이 ‘스님 코스프레’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불교는 완전히 사라진 걸까.

 

그렇지는 않다. 그 엄혹한 시대를 견뎌낸 사람들이, 아주 소수로 존재했던 것 같다. 1982년~1983년 사이 10여 차례 북한을 방문했던 독일의 소설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 1911~2002)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맞은 그 승려는 깊은 산중에는 아직도 수도승들이 있다고 말했다.” - 루이제 린저·한민 역, 『또 하나의 조국 – 루이제 린저의 북한방문기』 (공동체, 1988)

 

특히, 금강산이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된 후, 묘향산 일대에서는 선풍이 미약하게나마 전수되어 온 것 같다. 예컨대, 조불련 활동을 주도한 박태화 스님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묘향산 보현사에서 수행한 스님이다. 즉, 북한 불교가 아직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고, 보현사의 선방이 제대로 돌아가던 때에 스님 생활을 하시던 분이다. 그런 분이 70년대부터 조불련 활동을 주도했으며, 주체사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삭발 또한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멸해 가는 불교를 다시금 제도권 내로 안착시켰으며, 남한 불교와의 교류 협력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박태화 스님이 있었기에 조불련이 있었고, 조불련이 있었기에 북한의 사찰이 그나마 남아 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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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의 스님들

 

또한, 묘향산의 사찰에는 지금도 삭발하고 선 수행을 하는 스님들이 소수로나마 남아 있다. 예컨대 ‘북한 불교의 살아있는 부처’라 불리던 청운 스님이 60년 동안 절을 지키면서 제자들을 길러냈고, 이 제자들은 삭발하고 홍가사를 두른 채 수행하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 이 모든 스님의 수는 10명 안쪽이다. 한때 100여 명의 학승이 모여들던 보현사였으나, 이제는 10명도 채 안 되는 수만 남아 있게 된 셈이다.

 

북한 불교의 멸절,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승풍을 간직하고 있던 1세대 스님들이 모두 입적하고, 그들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2세대 스님들도 떠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금강산 사찰에서 출가하고 그곳에서 수도하던 남한의 스님들은 이제 다 떠났다. 남과 북의 불교는 점점 더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북한 스님들이 겪어야 했던, 반세기 동안의 잔혹한 운명을 상상하기 어렵다. 세상의 변화와 무관하게 보현사에서 화두를 들고 참구하던 스님들, 혹은 유점사의 장엄한 법당 내에서 염불 삼매에 들던 스님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는 환속했고, 일부만 남아 혹독한 계절을 견뎠다. 그 끝에, 그들은 일종의 암묵적 합의를 했을 것이다.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다. 살아남아야 법을 전수할 수 있다.’

 

그래서 주체사상을 비롯한 북한의 정치체제를 선전하는 도구로서 스스로 몸을 던지게 된 것이 아닐까. 아직까지는 어떠한 증언도 자료도 없는 추측의 영역일 뿐이지만, 언젠가는 그 감춰진 진실의 어두운 역사를 발굴하게 될 날을 꿈꾸고 있다.

 

지금도 북녘땅의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이름 모를 스님들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는 부처님오신날이다. 간신히 가까워졌던 그들과의 거리가, 무지한 정치가로 인해 한참이나 벌어지게 된 오늘. ‘생성된 모든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이지만’, 범부인 나로선 그들의 소멸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머지않은 가까운 미래에, 그들이 살아내었던 반세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세히 적어 후세에 전하게 되기를 발원하며, 부처님오신날을 보낸다.

 

[참고문헌]

 

중화 법타, 『북한불교 백서』, 조계종출판사, 2020.

김상영, 「일제시대 북한지역의 불교실태」, 『僧伽』 13, 1996, 116-126.

류승무, 「북한의 사회주의 사회 건설 과정과 북한 지역 불교의 변화」, 『僧伽』 13, 1996, 127-140.

조성렬, 「북한불교의 특징과 성격」, 『북한학연구』 6.2, 2010, 27-81.

불교닷컴, [이지범의 북녘 땅과 스님들] <묘향산의 붉은승려, 서산의 후예들>, 2017.06.21(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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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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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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