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궁지.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했을 당시 고려 궁궐이 있던 곳.
몽골과 화친 후,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과 성곽은 파괴되었다.
이후, 이곳에는 외규장각이 지어져 현재는 외규장각이 있다.

외규장각 건물
출처-<강화군>
연재 목차
1. 이자겸 비긴즈 : 동생이 왕비가 됐는데... 바람을 폈다네?(feat.이자겸) - 링크
2. 훈요십조 코드 : 조선과는 게임의 룰이 다르다 - 링크
3. 고려판 왕좌의 게임 : 고려판 수양대군과 단종이 있었다 - 링크
4. 여진족 맞춤형 특수부대의 탄생과 척준경의 등장 - 링크
5. 피의 연회 : 칼 든 무사 한 명 따위... 가 척준경이라면? - 링크
7. 이자겸이 돌아왔다
8. 이자겸 난의 전말
9. 왕의 반란
10. 묘청의 재림
11. 묘청의 난
<지난 편 역사, 한 줄 요약>
1. 고려는 여진족 촌락을 점령하고, 그곳에 동북 9성을 설치했다.
2. 고려는 동북 9성에 현지 여진족을 수용하는 한편, 남도의 고려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3. 여진족은 동북 9성 지역을 되찾기 위해 반격도 했지만, 결국 고려에 고개를 숙이며 땅을 돌려달라 청했다(북방의 야만족이라고 부르던 이들도 외교란 것을 했다).
4. 고려는 결국 동북 9성을 돌려줬고, 동북 9성을 획득한 전쟁 영웅 윤관은 파직되었다.
5. 시간이 흘러 윤관, 예종이 죽으며 한 시대가 마무리됐다. 그리고 잠시 잊혀졌던 이자겸이 다시 역사에 나타났다.
7. 이자겸이 돌아왔다
이자겸은 자신의 매부이자 고려 12대 왕 순종이 승하하고, 궁노의 아이를 임신한 여동생이 폐비가 되어 사가로 쫓겨난 이후 계속 숨죽이며 살고 있었다.

집에서 주전부리나 먹으며 지내자
숙종 때는 왕권이 강력했기에 기회를 잡지 못했고, 그다음 왕인 예종(재위 1105~1122) 때는 별무반을 통해 여진을 정벌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자신이 조정에 복귀할 틈이 보이지 않았기에 승냥이처럼 바짝 몸을 낮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웅크리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조용히 그리고, 차근차근 다시 정계에 복귀할 준비를 했다. 자신의 둘째 딸을 예종의 왕비로 입궐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 딸이 원자까지 출산했다. 그리고 그 원자는 태자가 되었다. 고려시대 외척의 대명사였던 이자겸은 정계 복귀를 할 때도, 이러한 자신의 외척 신분을 이용했다.
여기서 잠깐 고려시대 외척의 역사를 살펴보면 좋을 듯하다.
고려 왕조는 475년간(918년-1392년) 유지되었는데, 고려 초기 왕실은 족내혼과 근친혼을 통해 자신들의 정통성과 왕권을 강화했다. 왕실이 문벌귀족과 혼인을 맺기 시작한 것은 제8대 현종 때부터이다.

고려 왕조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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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는 음서제도가 있어 5품 이상 관리의 자식들은 이를 통해 개인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대를 이어 이른 나이에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관직에 나가 출세한 관리들의 가문, 즉, 문벌귀족 가문과 왕실이 현종 때부터 혼인을 맺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이용해 문벌귀족들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며 세습해 나갔다. 부와 권력이 소수에 집중되자 고구려의 정신을 잇겠다며 세워진 고려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자겸 또한 이런 음서제도를 통해 관리가 되었고, 나라를 이용해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려 했다.
다시 이자겸의 정계 복귀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숨죽이고 있던 이자겸은 예종의 병세가 깊어질 당시 성공적인 정계 복귀를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왕은 어떠하더냐? 대신 놈들의 동태는 어떻고?”
“폐하의 병세는 날로 위중해지고 있다 하옵니다. 하오나 한안인을 비롯한 폐하의 총애를 받던 자들이 어린 태자마마 대신 폐하의 동생분인 왕보에게 양위를 해야 하지 않겠냐고 간언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이런 간사한 놈들을 봤나! 14살이 뭐가 어리다고! 내 손자가 고려의 왕이 되는 날에는 내가 제일 먼저 그놈들을 처단하리다.”
“나리, 어찌할까요?”
“섣불리 나서지 마라. 나도 은밀히 일을 추진하고 있으니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이자의가 어찌 되었는지 잘 보지 않았느냐. 내 딸은 내 동생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이자겸은 물리적 나이만 먹은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성장해 있었다. 기다릴 땐 기다릴 줄, 과감할 땐 과감할 줄을 알게 된 것이다.
얼마 후, 예종은 승하했다. 그리고 이자겸이 원하는 대로 왕위는 태자에게 물려줬다. 그가 고려 17대 왕 인종이다. 자신의 손자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자, 이자겸은 거침없이 공권력을 사유화하기 시작했다.

크하하핫~!
그 첫 번째 계획은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십 대의 어린 왕과 자신의 다른 딸을 혼인으로 묶는 것이었다. 그렇게 인종은 이모와 결혼하게 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폐하! 태조대왕께서 이 나라를 어찌 세운 줄 아시지요? 지방 호족들과 혼인을 통해 통일의 초석을 다지셨습니다. 또한 건국 초기에 근친혼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여 오늘의 고려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번 혼례도 폐하와 우리 고려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허…. 허나…. 이….…. 이모를 왕비로 맞…. 맞아 들이는 것은 아… 아… 무래도….”
“폐하! 태자 시절에는 말을 전혀 더듬지 않으셨는데 어찌 그러십니까?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세요. 제가 있잖습니까! 이제 내일이면 폐하의 외조부이자 장인이 될, 저 이자겸입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하시되, 제 말은 거역하지 마세요. 방금 들은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참! 혹시 잊으셨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누구 덕에 왕이 되셨는지 잊으시면 곤란합니다.”
이자겸은 자신의 둘째 딸을 예종의 왕비로 맺게 한 것도 모자라,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인종과 자신의 셋째 딸을 혼인시키며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이제 다음 순서는 정적 제거였다. 첫 번째 대상은 인종의 즉위를 방해했던 ‘한안인’이었다.
“역모란 것이 말이다. 참으로 무서운데 애매한 것이다. 물증만 있다면 삼족을 멸할 수 있는 무서운 것이지만, 심증만 가지고도 죄를 물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데 애매하다고 그냥 두면 내가 먼저 죽는 것 또한 역모이다. 참으로 재미있지 않으냐? 내가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인데 무엇이 두렵겠느냐? 한안인과 그 일당을 당장 잡아드려라.”
한안인은 예종의 동생 왕보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즉시 압송되었다. 한안인은 귀양지로 끌려가며 저항했으나, 권력은 이미 이자겸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누구 하나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네! 이놈들!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냐! 내가 역모를 꾸몄다면 물증을 가지고 오너라! 세상에 이런 법도는 없다.”
한안인뿐 아니라 그의 측근들도 즉시 압송되었다. 그들은 왕명도 없이 이자겸의 명령만으로 귀양지에서 처형되었다.

“폐하! 폐하께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시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역모의 무리들이 발호하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신이 잘 처리하고 있사오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다만 그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왕명 없이 처형되는 자들이 있사오니 그 점만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래… 도… 짐…. 이… 왕... 아닙니다. 경이 알…. 알아서 잘….”
“네이~ 신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다음 수순으로 이자겸은 여진족 정벌에 공을 세운 대신들을 제거하며 선대왕의 흔적을 지웠다. 그 후 빈자리에는 자신의 측근들로 채워나갔다.
양절익명공신 중서령 영문하상서도성사 판이병부 서경유수사…… 이는 이자겸이 스스로 또는 인종에게 강요하여 하사 받은 관직이다. 고려는 조선보다 분업화가 덜 되어 겸직을 하는 경우가 잦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는 명백히 도를 넘는 만행이었다. 이자겸은 멈추지 않고 달리는 야욕의 적토마였고, 외교 문제에까지 자신의 이권을 1순위로 결정했다.
인종 즉위 초반 고려는 외교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된다. 13년 전만 해도 고려에 머리를 조아리며 동북 9성을 다시 돌려달라고 했던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약해진 요나라(거란 제국)을 점령하고 금나라를 세운 데다가 고려에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1125년에는 ‘형제관계’ 요구에서 ‘군신관계’로 요구조건이 더욱 강하게 바뀌었다).
1140년경 고려와 금나라 지도
많은 신하는 어쩔 수 없이 나중에 조공하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지금은 당당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자겸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순순히 금나라에 조공하자고 주장했다.
외부의 적에게 맞서는 과정에서 고려의 충신 세력이 뭉쳐 고려 내 권력 구도의 변화가 생기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이자겸에게 국가의 존망은 애초에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나라의 국익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부귀영화와 집착에 가까운 권력욕이었다. 이자겸이 반대하니 다른 대신들은 강경론을 계속 주장할 수 없었다. 이자겸의 말이 곧 왕명이었다.
이자겸이 중요한 외교 문제까지 자신의 의지로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여진 정벌의 영웅 척준경을 자신의 여포로 두었기 때문이다. 척준경은 자신의 딸을 이자겸 가문으로 시집보내며 전쟁영웅에서 정치인으로 탈바꿈했다. 당시 이자겸의 횡포를 기록한 고려사 기록을 살펴보자.
「자기 족속을 요직에 포열하고 관직을 팔았으며, 당인을 많이 심어 스스로 국공이 되고 예우를 왕태자와 같게 하며, 그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부르고 내외가 하례하는 글도 전(箋)이라 칭하게 하였다. 여러 아들이 다투어 제택(第宅)을 지어 가로에 잇닿았고, 권세가 더욱 성하게 됨에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하여져 사방에서 선물이 모여들어 썩어가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나 되었다. 남의 전토를 강탈하고, 그 종들을 내놓아 차마(車馬)를 노략하여 자기의 물건을 수송하니 주민들이 모두 수레를 부수고 소, 말을 팔아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자겸의 횡포는 갈수록 심해졌고, 고려 천지에 이자겸을 대적할 자는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변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계속>
<오늘의 역사, 한 줄 요약>
1. 이자겸의 외손자가 고려 17대 왕(인종)이 되며, 이자겸은 고려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2. 이자겸은 곧 자신의 셋째 딸(인종 어머니의 친동생)을 인종과 혼인시킨다. 즉, 인종은 자신의 이모와 혼인했다.
3. 그 후, 이자겸은 차례로 정적을 제거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4. 여진족이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금나라를 세우며 고려에 조공을 요구했다.
5. 이자겸은 고려 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순순히 조공하기로 했다.
6. 이자겸의 권력은 계속 커지고, 횡포는 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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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팩토리공장장이 이제와서(?!?!) 유튜브를 시작한다.
기나긴 역사 중 흥미로운 주제를 집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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