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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 이분들에게 걸려 보았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가다가 맞닥뜨리는 이분들의 기습적 출몰.

 

“도를 아십니까?”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처음 가보는 지역에서 부지런히 목적지를 찾고 있었다. 또다시 누군가가 나에게 도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네에! 자알~ 압니다.”

 

상대방이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이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시작하는 그.

 

“그러니까아~"

 

부드러운 거절로 쉽게 떨어지지 않을 상대였다. 한껏 데시벨을 높여 응수한다.

 

"개~수작 떨지 말어!”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괴성을 지르고 나서야 그가 물러섰다. 너무 큰 무안을 준 것 같아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사람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부득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강증산"께 쬐금 죄송스럽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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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jtbc(링크)

 

강증산이 전봉준과 달랐던 것

 

예수보다는 몇 년 더 살기는 했지만 38년이란 못지 않게 짧은 인생(1871-1909)을 살고 간 증산 강일순은 전봉준(1855-1895)과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다. 증산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 남의 집 머슴살이도 했고, 나무꾼 노릇도 했으며 독학 끝에 처가에서 서당 훈장 노릇을 하다가, 24살 때 동학혁명을 맞았다.

 

증산은 ‘하느님’으로서 하늘에 있다가(...), 마테오 리치를 통해 동서양을 교통케 하려 했으나 통역을 못 구했는지 실패하고 금산사 미륵불상에 내려와 30년을 보내고, 최수운을 선택하여 사명을 맡겼으나 ‘유교의 테를 벗어난 진법’을 드러내지 못하였기에 강일순이라는 인간으로 직접 하강하였다고 한다. 물론 황당한 주장이지만 예수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증산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아리까리한 것은 그의 생애 한 복판에 일어났던 동학혁명에 관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그는 동학군이 실패할 것을 예언하고 동학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며 말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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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몽 전봉준과 증산 강일순

 

전봉준과 강증산, 두 사람은 똑같이 민족이 겪는 고통을 안고 씨름했으나 해결하는 방법은 완전히 달랐다. 전봉준은 도탄에 빠진 민중의 힘을 모아 물리적 후천 개벽에 힘을 다하다가 죽임을 당했지만, 증산은 동학혁명을 올바른 것이라고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 군데서 동학군이 민간에 입힌 폐해에 대하여 한탄했다. 

 

강증산은 일생 동안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사적인 것이었다. 이 점은 예수의 기적과 대비되는 점이다. 예수의 기적은 어느 쪽에 유익이 되면 다른 한 편에 손해가 되는 그런 기적이 없는 데 비해 강증산의 기적은 주변 사람 중심적인 것이 많았다.

 

예수의 언행이 상당히 체제 부정적이었다면 강증산은 다분히 체제 긍정적이었다. 예수는 세속적인 권력과 종교의 권력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지만 증산은 일본의 역할을 인정하고 오히려 호의적으로 봤다. 증산은 심지어 일본 사람들이 조선에 와서 일만 하고 품삯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처지가 될 것이니 말이라도 후하게 대접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 성서에 나오는 로마인은 다 나쁘지 않은 사람(심지어는 군인인 백부장까지)으로 나오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로마 지배하에 사는 백성들이 별수 있었겠나?

 

친일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증산의 태도는 정치적 이유가 아닌 ‘원한을 사지 않는다’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교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구약성서의 예레미아도 바벨론에 대하여 무모한 반란을 일으키지 말고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라고 권면했었다.

 

증산은 현실 세계에서의 물리적인 어떤 역할도 부정하고 오직 신명계의 변화를 통해서 현실의 변화만을 추구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런 까닭에 의병의 봉기조차도 그 폐해를 지적했던 것이다.

 

증산은 인간의 문제를 사회구조적 모순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신명계 내 신들의 역학관계라는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이해했다. 인류가 수천, 수만 년을 살아오는 동안 맺힌 한과 원이 우주에 그득 차 있기 때문에 이미 죽은 이들의 원한을 어떻게 하든 풀어 주어야 새 세상을 펼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므로 사회개조가 아닌 신명계의 개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이룩된 세상이 후천 개벽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을 해원상생이라고 했다. 그러나 증산에 의하면 신들 사이의 원한을 푸는 것도 결국은 이 땅의 인간들이 담당하는 것이다.

 

예수적 망상

 

해원상생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간단히 말해서 인간관계의 원한을 푸는 것이 해원인 것이다.

 

해원상생은 물론 각자가 마음으로 실천할 수 있는 도이기는 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듯이 해원상생 할 수 있는 것을 증산상제의 은사라고 보고, 해원상생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 즉 ‘상대를 신명과 같이 대함’은 상극(相極)의 선천시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자연적 능력이 아니라, 후천 개벽에 동참한 신인간의 능력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증산의 하강은 새 시대의 시작이며 증산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의 근원’과 접하게 해준다고 믿는다. 결국 해원상생은 ‘자력과 타력을 합쳐서 성취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원한을 맺지 않고 푼다’는 ‘해원’이라는 논리가 약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고통스러운 현실 변화의 기회를 더 멀리 밀어 버릴 근거도 될 수도 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처럼, 원한을 끊임없이 만들어 가는 기존의 체제를 개혁하지 못하고 지속하는 이데올로기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는 방법으로 십자가를 졌지만, 증산은 굿을 했다. 이게 무슨 개소리냐 싶겠지만 증산이 살던 그 시대는 굿이 가장 민중적인 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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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순 유골 영대 이장식

 

증산이 천지도수를 뜯어고치기 위해서 은밀하게 공사(굿)를 행했다는데 이것은 좋게 보면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하는 놀이와 같은 것이요, 나쁘게 보면 종교적 정신질환적인 망상에 불과하다. 돼지고기 몇 점과 술과 떡을 단지에 넣어 땅에 파묻는 굿을 벌여 미래에 있을 대전쟁을 예방한다는 식이니 말이다.

 

증산의 이러한 기묘한 행각은, 시대 변화의 추이와 진전에 대해서는 천재적으로 예민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무기력하여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인간의 소아병적인 보상 행위와 과대망상증으로 볼 수 있다. 증산은 아이들의 병정놀이처럼, 골목대장이 조무래기들에게 종이로 만든 가짜 계급장을 달아 주듯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천상의 직책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80년 전에 이 땅에 존재했던 토종, 신토불이 예수였던 증산의 모습에서, '하느님'이란 힘 없는 나라 그늘진 곳에서 태어나 삶이 주는 온갖 어려움을 손수 당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직이나 구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란 것이다. 자본주의가 추악한 것이기는 하나 이걸 고쳐 보겠다고 마르크스가 들고 일어나서 애매한 목숨 수천만 명만 희생되고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증산이 예수라는 말이 아니라 증산의 방법론이 예수적이었다는 말이다. 전태일이 예수적이었던 것 같이.

 

판타지가 혁명을 만났을 때

 

전봉준은 물리적으로 후천 개벽을 하려고 했지만 증산은 종교적 측면에서 후천개벽을 하려고 했다. 보수적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의 관점을 ‘철저히 개인의 문제’로 국한한 것에 비해서, 증산은 세계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선천(先天)이 기존 체제라면 후천(後天)은 새로운 사회를 의미하며 개벽(開闢)은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말한다. 최제우는 정신과 물질 현상이 근본적으로 혁신되어 새 세상이 된다는 뜻으로 '개벽운수(開闢運數)'를 제시하였다. 또한 천도교에서는 기미년 3ㆍ1혁명 후 『개벽』이란 제호의 종합지를 창간하여 72호까지 내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된 바 있다.

 

동학사상을 비롯한 각종 민족종교에는 '후천개벽'이 큰 자리를 차지했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정역」의 창시자 일부 김환, 「증산교」의 창시자 증산 강일순,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 등 신흥 민족종교의 공통적인 키워드는 우연인지 섭리인지 공교롭게도 후천개벽사상이었다. 

 

후천은 선천(先天)의 대칭 개념으로 풀이되었다. 인지가 열리지 못하고 모순과 불합리와 상극이 지배하던 어두운 시대와 세상이 선천이라면, 인지가 열리고 통일과 합리와 상생이 지배하는 밝고 새로운 시대와 세상이 후천이다. 민족종교에서는 선천과 후천의 교역(交易)에 따라 선천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후천의 신천지가 열리는 것을 후천개벽이라 한다. 과천에 있는 신천지 말고...

 

판타지는 비현실적이라는 측면에서 자기만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로는 당사자의 삶을 이끌어가는 강한 힘이 되기도 한다. 자기만의 판타지를 갖는 것은 남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도 자기 삶에는 중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삶의 큰 동력이 되기도 한다.

 

판타지는 놀라운 힘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 최대의 항쟁이었던 동학농민혁명 때 우금치에서 동학군은 기관총 앞에서 주문을 외우면 총알도 피해 간다는 믿음을 가지고 전진했다. 비록 망상에 가까운 믿음이었지만 자기들이 일으킨 거사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했던 것이다.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

 

뜻을 풀어 보자면

 

“하늘의 지극한 기운이 내게 이르렀으니, 하늘님을 모신 나는 스스로 조화를 정하여 평생 잊지 아니하고 하늘의 도에 맞도록 행하겠습니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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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투

출처 - 한국문화재재단

 

새로운 종교가 등장하는 이유

 

80년대 젊은이들이 돌과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섰던 것은 세상을 바꾸어 보자는 열정 때문이었다. 정반대로 전혀 다른 형태로 이상한 신흥종교에 빠지는 것도 세상이 뒤집어질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종교적 판타지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재미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재미의 반대는 지루함일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때로 재미를 찾아서 목숨까지 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은 ‘역적모의’이다. 세상을 뒤집어엎는 일! 이보다 흥미 있고 스릴이 넘치는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고등 종교는 모두 세상을 뒤집어엎으려는 것이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고 부처가 ‘서방정토’를 이야기한 것들이 모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뒤엎으려는 판타지! 혹은 목표, 아주 작게 표현해서 소망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것을 가진 사람은 삶을 긴장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종말을 강조하거나 자기들만 선착순 구원의 특혜를 받는다고 믿는 신흥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빠져나오기 어려운 이유이다. 기성종교는 그런 짜릿함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신흥종교의 침입에 번번이 구멍이 뚫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