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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연재냐구?  

 

교과서엔 나오진 않는, 조선시대 일기 속에 담긴 출근러들의 삶과 비애를 통해, 그들의 삶도 오늘날의 하루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소개합니다. 호된 신고식을 당하는 신입사원, 왕비에게 탈탈 털리는 미관말직, 할 거 다 해 봐서 파직만 기다리는 만렙 고인물까지. 녹봉에 웃고 출근에 울었던 ‘조선 직딩’들의 숨 가쁜 이야기 속에서 어느덧 여러분의 하루가 떠오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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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땡이 치다 걸렸다... 튀어!!

 

 

목차 (연재 중 조금씩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1부

 

1. 만년 참봉 금난수의 현기증 나는 관직 생활(링크)

2. ‘영남의 1타 선비’ 김령의 신입사원 분투기(링크)

3. 최전방 GOP 삼수갑산 장교의 삶, 노상추(링크)

4. ‘소확횡’과 재테크를 동시에, 유희춘(링크)

5. 인서울 출근러 황윤석의 셋방살이

 

2부

 

6. 국제외교전의 현장에 던져진 외교관, 황중윤

7. “범인은 바로 너!” 수사관이자 재판관, 서유구

8. “나 도지삽니다.” 그런데 선정(善政)을 곁들인, 조재호

9. ‘기로소 고인물’ 권상일의 ‘파직은 거들뿐’

 


 

자기 집 없는 인서울 관료는 고달팠다

 

 

삼백에 삼십으로 신월동에 가보니

동네 옥상으로 온종일 끌려다니네

이것은 연탄창고 아닌가

비행기 바퀴가 잡힐 것만 같아요

 

삼백에 삼십으로 녹번동에 가보니

동네 지하실로 온종일 끌려다니네

이것은 방공호가 아닌가

핵폭탄이 떨어져도 안전할 것 같아요

 

- 김대중 <300/30> -

 

2012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노래 후보에 오르기까지 했던 인디뮤지션 김대중의 <300/30>. 이 노래는 10여 년 전, 88만 원 세대가 느꼈던 ‘한양에서 집 구하는 어려움’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300의 30이 웬 말인가요. 이제는 창문 하나 달렸다 하면, 30짜리 월세를 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죠. 억지로 월세 30짜리 방을 구했다 치더라도 그곳에서의 일상은 말 그대로 ‘방공호와 연탄창고’에서의 안습한 삶일 테죠.

 

조선의 한양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모든 시스템은 단 한 곳, 왕이 있는 한양을 향해 설계되었기 때문에 전국의 모든 인재와 물자는 끊임없이 한양을 향해 모여들었습니다. 때문에 한양에서 집 구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한양에서 집 구하기는 18세기 이후부터 더 힘들어집니다. 상업 도시로서 한양이 더욱 성장하면서 부동산 시장이 장기적인 우상향 곡선을 그렸기 때문이죠. 결국, 누군가에게는 한양에서 방 한 칸을 얻기 위해서 전 재산을 쏟아부어야 할 정도가 됐습니다. 그래도 될까 말까였죠.

 

이런 시대에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라는 선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호남 출신의 박학다문(博學多聞)한 선비.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는 의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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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군에 위치한 이재 ‘황윤석’(1729-1791)의 생가

이재는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출처-<문화재청>

 

그런데 이렇게 박학다식한 선비라 할지라도, 최대의 목표는 결국 좋은 관직을 거쳐서 집안을 일으키는 데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찮았습니다. 

 

영조 시기는 호남·영남 사람들에 대한 정치적 차별이 본격화되고, 한양 사대부 중심으로 정치가 돌아가던 때입니다(이인좌의 난으로 인해 특히, 영남 차별이 심했죠). 이렇다 할 세력이 없던 황윤석은 늘 위기 속에서 관직 생활을 해야 했고, 그런 관직 생활마저도 그의 학문적 명성이 아니었다면 지속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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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만 이렇게 출세하기가 힘든거야... 띠발..

 

그런 황윤석의 관직 생활을 괴롭게 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잘 곳’이었습니다. 한양에 자가주택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가 주택을 소유하지 못했던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한양 집값이 겁나게 높아서 

2. (빽이 없어서) 언제 관직 커리어가 끊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리해서 집을 살 수는 없다는 판단

3. 부동산 관리·감독 때문에

 

여기서 영·정조 시대의 부동산 관리·감독에 대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 권력가들 중엔 백성들의 집을 빼앗거나, 혹은 탈법적인 시도로 집을 확장하는 이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를 여가탈입(閭家奪入)이라고 하는데요. 여가탈입 문제는 영·정조 시대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떠올랐습니다. 

 

때문에 사대부들은 혹시라도 책잡혀 사달이 날까봐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관료가 집을 사지 않고, 대신 셋방을 선택하죠. 하지만 집주인과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 때마다 길바닥에 쫓겨날 위협을 당했는데요. 그 눈물겨운 스토리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769년 3월 12일 - 『이재난고(頤齋亂藁)』

 

집주인이 말했다.

 

“나리께서 주신 월세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식료품비가 더 필요하니, 추가금을 지불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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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더 ‘플러스’ 해달라 이 말입니다.

 

나는 그를 타이르며 말했다.

 

“그동안 잘 지내왔지 않은가. 이제 와 아무 곳에서나 묵을 수는 없는 일이네. 다시 잘 생각해 보게.”

 

하지만 사실 이렇게 지내는 것도 불편하고, 게다가 집주인도 자꾸 선을 넘는다. 그냥 오 선전관이 묵고 있는 곳으로 옮기고 싶지만, 거기서도 편히 지낼 수 있는지 깊이 고려해 보려 한다. 비용이야 더 비싸겠으나, 집주인과 잘 지낼 수 있다면 마음은 훨씬 편할 것이다.

 

1769년 즈음의 황윤석은 종부시(宗簿寺, 왕실 보훈 부서) 등으로 출퇴근하고 있었는데요. 이때 그가 택한 숙소는 지금의 성균관 주변 반촌으로 그의 직장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주인이 물가 상승으로 인한 월세 인상을 요구합니다. 황윤석은 갑작스러운 주인의 통보에 점잖게 대응해 보지만, 내심 불편해진 심기를 일기에 적고 있죠.

 

도보 31분 거리.PNG

출발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종부시가 있던 곳)

도착지: 성균관

도보로 약 31분 거리다.

 

‘주인집’, 그곳은 관료들을 위한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주인집은 숙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관료(투숙객)들이 의뢰하는 물건의 구매·수리·세탁, 연락 대행, 자금의 대차 등 한양살이에 필요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그 덕분에 투숙하는 관료들은 많은 노비와 대리인을 거느린 한양의 대감댁을 ‘흉내’낼 수 있었고, 관료 커뮤니티에서 필요한 다양한 의례와 제반 비용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굳이 많은 돈을 들여서 한양에 집을 사는 리스크를 짊어지지 않아도 되었죠.

 

하지만 집주인의 월세 인상 요구는 황윤석에게 고민거리를 선사합니다.

 

1769년 3월 29일 - 『이재난고(頤齋亂藁)』

 

요즘 집 문제로 너무나 혼란스러워 더욱 신중히 결정해야겠다. 지난번, 지금 집주인이 하숙비로 한 달에 2냥을 달라고 했다. 비용이 너무 비싸 옮기고자 했는데, 상황이 녹록지 않다. 듣자 하니, 반촌(泮村) 이외의 집주인들은 한 달에 3, 4냥 이상 받는 게 관행이라고 한다. 내 경제 사정을 생각하면 지금 셋방에서 살아야 하지만, 다른 곳으로 옮기면 직장을 더욱 편하게 다닐 수 있다. 으아, 당최 결정할 수가 없다.

 

황윤석은 집주인을 달래기 위해 받은 녹봉을 탈탈 털어 전부 집주인에게 줍니다. 하지만 집주인은 끊임없이 황윤석을 압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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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거주지를 옮겨 새로운 셋방에 들 생각을 하는데요. 문제는 반촌의 월세가 가장 저렴한 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반촌에는 성균관이 있었는데, 성균관에 다니는 유생이나 한양에 머무는 가난한 관원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시세보다 낮은 숙박료가 책정되었거든요. 과거의 신림동이나 노량진, 혹은 낙성대입구역 근처 같은 곳이라 할 수 있을라나요?

 

황윤석은 한동안 두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에 시달립니다.

 

1. 지금 셋방에서 산다. 직장과 거리가 좀 있다. 집주인의 월세 인상 요구로 인해 약간의 월세를 올려준다.

2. 아예 목돈을 써서 직장과 가까운 다른 셋방으로 들어간다. 

 

사실, 이게 다 얇은 유리 지갑 때문입니다. 벌이가 넉넉하면 이런 고민을 왜 하겠습니까. 시원하게 질러 버렸겠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집주인의 압박을 불편하게 견디고 있던 황윤석에게 한 가지 희소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6월에 있던 승진이었습니다. 승진으로 인한 녹봉 상승 덕분에 황윤석은 집주인의 월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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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흑흑..

 

집주인의 요구를 들어주었음에도, 집주인의 태도는 더 악화했습니다.

 

1769년 8월 2일 - 『이재난고(頤齋亂藁)』

 

집주인이 갈수록 무례해지고 있다. 식비가 부족하다면서 2전을 받아 간 지가 3일도 되지 않았는데 또 추가 식비를 요구한다. 지난 10일 동안 계속 이런 식이다. 급한 대로 돈을 보내주긴 해야 하는데, 이 인간이 이제는 식사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다. 집주인이 제공한 식사에서 고기는 냄새가 심했고, 살점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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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퀴 좀 봐라...

 

황윤석이 월세를 올려주었음에도, 집주인의 식비 요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엄살이 아니라 진짜로 물가 상승 압박이 심각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이 먹을 것 가지고 장난을 치면 안 되는데요. 집주인은 ‘냄새가 심하고 살점도 없는 고기’를 관료들에게 제공하기에 이릅니다. 마치 “이래도 안 나가? ㄹㅇㅋㅋ”라는 느낌이랄까요.

 

그럼에도 다른 곳보다 싼 셋방이라, 황윤석은 수모를 참아가며 어떻게든 버티려 했지만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계속>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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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