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주
본 기사를 쓴 국경없는기자회 세가와 마키코 씨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후쿠시마를 방문하는 기자입니다.
그녀가 쓴 대부분의 기사는 이해관계로 인해 일본의 메이저 언론에서 외면당하고 있고 리버럴한 몇몇 언론 및 국외에서만 읽히고 있습니다.
세가와 마키코 씨는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의 취재를 바탕으로 해외 언론 및 프리랜서 언론인의 일본 내 취재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제1 원전 내 잠입 취재를 포함, 수백 번 이상 후쿠시마를 방문한 탓에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
"정보는 도넛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겉면만 보이거나 알려지고, 정보의 핵심인 부분은 쏙 빠져 있습니다. 한가운데는 블랙홀인 셈이죠."
후쿠시마 원폭 피해자인 한 남성의 말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1. 프로파간다의 원칙
2013년 2월, 눈이 조용히 내리던 영하의 날씨 속, [후쿠시마 원전 2주년 특집기사]를 쓰기 위해 후쿠시마 현 고오리야마 시(후쿠시마 원전 사고현장에서 북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한 지역 라디오 방송국을 찾아갔다. 거기서 우연히 후쿠시마 원전사고 피난자였던 한 40대 남성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남성의 아들은 심장에 5밀리미터 정도의 구멍이 몇 개나 뚫린 [체르노빌 하트]를 가진 채 태어났다. 3월 11일 원전 폭발사고 당시 아이는 아직 6-7개월 된 태아였다. 체내피폭을 당한 것이다. 생후 1년 즈음 온몸에 푸른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17년 세가와 마키코 씨가 딴지일보에 기고한
[현장]후쿠시마 제1원전으로부터 70km, 일본 정부에 외면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다(링크)
에서 사진 재인용
원인을 알고싶어도, 저선량 피폭에 따른 장해 데이터는 적었고, 원전사고 관련성도 의학상 인정되지 않았다. 아이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억제하듯, 한마디 한마디 곱씹듯이 아들의 증상을 호소했다. 남자는 그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받아들이고 엄숙한 각오를 마음 속으로 다지고 있었다.
그 남성과 만났던 때와 같은 시기, 일본정부가 주도한 광고 캠페인
"먹으니 안심, 지산지소(地産地消: 지역에서 생산된 농수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한다는 뜻) 후쿠시마산"
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TV광고, 잡지, 전철 내 광고, 전국으로 전개된 후쿠시마산 시식 이벤트 등을 매개로 후쿠시마산 식재료의 안전성 선전이 마치 경주마처럼 전국을 질주하고 있었다. 해안가에선 여지껏 수영금지였던 해안선의 금지가 해제되었고 후쿠시마 원전에서 남쪽 40킬로 권내의 항구에선 어업도 재개된다. 어부들도 다시금 고기잡이에 복귀했다.
후쿠시마 원전 20km 범위 내의 소위 "검은 바다"
2017년 3월 촬영한 것으로
오염된 토양을 채운 검은색 비닐백들이 빽빽하게 쌓여 있다.
후쿠시마 원전 20km 범위 내의 농지 제염 상황.
기본적으로 토지 표면의 흙 수십센치를 일관되게 제거하는 것이 제염의 기본이다.
2021년 2월 촬영 사진.
2021년 우드 쇼크로 버블 경제를 즐기고 있던 후쿠시마산 목재.
이와키시 내 목재 공장에서(원전에서 40km 지점) 촬영했다.
2021년 도쿄 올림픽 시설 건설을 위해 후쿠시마 목재가 사용되었는데 방사능 선량은 측정하지만
식품이나 공간 선량과 달리 "기준값"이 없었다.
원전사고의 위험성을 의심하는 여론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방사능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전국공립 초등, 중학교에서도 쉬는 시간 교내방송을 통해 프로파간다를 계속 내보내고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직전, 후쿠시마현 남소마시에서 시민들에게 배포된
간이 측정기로 농지를 측정해 보았다.
결과는 5.25 마이크로시버트.
평균 정상 값은 0.25 마이크로시버트다.
나는 일본 정부가 프로파간다 작전의 기본원칙을 철저히 따랐다고 생각한다. 바로
"질보다 양으로 승부한다"
는 작전이다. "안전하다. 안전하고말고."라고 정해진 대사를 대량으로 흘려보내면 사람들은 어느새 거기에 익숙해진다. 어떤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자연히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어버리게 된다. [원전 안전신화]는 정부의 하청을 받은 덴쓰(일본 최대 광고업체)를 통해 TV, 신문, 주간지, 여성잡지 등 모든 곳에서 선전되었다.
2. 허위사실 유포
후쿠시마현 내에서는 방사능의 위험성이나 후쿠시마산 식재료, 토양, 해수오염 등을 의심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허위사실 유포]로 낙인찍힌다.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쏟아진 다테시에서는 당시 독자적인 자구책으로 제염작업을 추진하는 "제염선진도시"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행정기관이나 관계기업들은 불안에 떨고있는 시민들의 마음에 오로지 안심, 안전만을 심으려는 정책을 펼쳤다. 이른바 "마음 속의 제염 캠페인"이다.
"방사능을 두려워하고, 오염되지 않았나 걱정하는 것은 마음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마음부터 정화하자"
라고 민간업자에게 위탁해 주민들을 설득했다. 불만을 토로하는 한집 한집을 차례차례 뭉개버리는데 막대한 혈세를 쏟아부은 것이다.
원전 작업자 출신 남성 (60대 후반).
후쿠시마 제1현장에서 오염된 차량의 청소를 담당했다.
당시, 오염 수치가 너무 높아 계량기의 바늘이 계속 흔들렸다고 한다.
현재 시력 저하, 당뇨병 등을 앓고 생활 보호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땅에서 살아가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는 사람에겐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을 무시한 채, 정부가 공개한 방사선량 수치를 믿는 것 외엔 살아갈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소수파이긴 하나 아이들의 목숨을 지키자고 자발적으로 생활거점 주위의 방사선량을 측정하고 스스로 오염에 대한 사실을 파헤친 어머니들도 있다. 아이들을 방사선량이 높은 지역에서 피난시키기 위해 오랜 세월 함께한 남편과 이혼하면서까지 후쿠시마 밖으로 아이들을 탈출시킨 싱글마더도 있다. 수년 전 고오리야마시에서 도쿄 인근으로 10세의 발달장애 딸과 함께 탈출한 46세의 여성은 현재 빈곤한 상황이 겹쳐 갑상선 이상 증세에 어지러움, 빈혈 등으로 고통 받고있다.
피폭이 그 원인일 것이다. 폭발사고 당시, 전남편은 그녀가 딸과 함께 후쿠시마를 떠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3. 보도규제
일본의 대형언론매체마저도 후쿠시마의 사실을 전하는 일은 [불가침영역 - 언터처블]이다. 왜? 전력회사가 일본 미디어의 큰손인 스폰서이기도 하고 원자력 산업은 곧 일본의 군사방위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대 미디어기업에 근무하는 정의감 넘치는 특정 기자들 여럿은 해고되거나 보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광고부서로 좌천되는 등의 보복을 받았다.
나 자신도 원전사고 이후, 원전 작업자들에 의해 발생하는 성폭력 피해실태에 관해 현지 취재를 해왔지만 일본의 대형 언론사로부터 기사 게재를 모두 거부당했다. 취재한 내용이 편집부의 판단 단계에서 모조리 버려지는 쓰라린 경험도 몇차례나 맛보았다.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국제 NGO [국경없는 기자회]가 매년 발표하는 보도자유지수에서 일본은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이후 급하락의 길을 걸었다. 2016년에는 72위로까지 추락.
참고로 2010년 일본의 순위는 11위였다. 현재는 G7 주요국 중에서도 최하위. 세계보도자유도 순위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의 순위가 떨어진 이유로는 우선 첫번째로 후쿠시마 제1 원전 사고에 대한 보도문제를 꼽을 수 있다. 원전사고에 연관된 전력회사 및 관련 기업들이 모인 [원자력마을]에 의해 형성된 미디어체제의 폐쇄성 등이 요인으로 지적되었다.
나는 2012년 이래 [국경없는 기자회] 일본특파원으로서 이러한 원전 보도를 둘러싼 사실을 국경없는 기자회 본부와 프랑스 언론에 계속 보고해왔다. 일본 보도순위 건 등으로 나는 인터넷 상에서, "비국민", "자이니치 기자", "반일" 과 같은, 의미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악플세례를 받았다. 누가 나의 이름을 집어 인터넷에 퍼트렸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일본 언론에서는 원전에 관한 조사보도를 발표하는 자리가 매우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주로 프랑스와 같은 해외 언론과 협력해 조사보도를 해왔다. 두번째 수소폭발사고가 일어났던 시점, 2011년 3월 15일 밤, 나는 해외언론 신문기자(이스라엘, 캐나다, 영국)들과 함께 후쿠시마에 들어갔다. 수소폭발이 일어났을 때 후쿠시마 현 스카가와시에 있는 스포츠센터 시설 앞 주차장에 있었다. 그날 밤 이후로 지금까지 수백 번도 넘게 후쿠시마를 방문했다. 취재와 시찰을 위해 원전시설 안으로도 4차례 들어갔다.
2016년 당시,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내부.
당시, 나는 신분을 숨기고 통역으로 잠입했다.
후쿠시마는 나에게 있어 그야말로 저널리스트로서 첫발을 내딛은 시작점이기도 하고, 종착점이기도 하다.
현재 2023년 6월,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공포는 일본인들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져 사라졌다.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오염수 방류에 관해서도 일부의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시민들은 전혀 말이 없다. 일부 해외 언론만이 오염수방류 문제에 주목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 보도되지 않은 내용이야말로, 바로 그 도넛의 구멍(블랙홀)인 것이 확실하다.
딴지 미디어를 통해 내가 목격해 온 [도넛의 구멍] 속을 연재해 전해보고자 한다. 최대한 보도의 자유를 보장해주겠다는 말과 함께, 수백 번이나 후쿠시마 현지를 취재해 왔음에도 기사를 낼 수 없는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연재를 제안해 준 김창규 편집장에게 깊은 감사를 보낸다. "우리 독자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이런 취재에 관심이 많다"는 말에 큰 힘을 얻었다.
덧붙여, 내가 원고를 쓸 때 중요시하는 건 COLD FACTS(아무것도 가감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사실에 양념을 얹어 더 흥미롭고 재미있게 기사를 쓸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직접 본 것, 데이터, 숫자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다음부터 주로 이하의 항목들에 대해 자세하게 써내려 가겠다.
COLD FACTS
● 후쿠시마 취재에 몰두하기까지의 에피소드. 기자의 개인적인 추적기록.
● 후쿠시마 보도에 관한 규제, 자기검열
● 오염수방류 문제, 후쿠시마 원전시설의 현실
● 사망한 원전작업자, 야쿠자
● 마을 전체가 원전작업자, 가와우치무라
● 식품검사
● 후쿠시마목재 우드쇼크 버블급등 해외수출
● 그리고 현재
후쿠시마 제1 시설 내 기밀 감시 지구에 통역으로 잠입한 본인(제일 오른쪽).
위험한 일을 좋아하지만 평소에는 밝고 유쾌한 성격입니다.
(계속)
번역 및 자료 정리: 김창규, 현상
JFJN 대표&국경없는기자회 일본 특파원
세가와 마키코
검색어 제한 안내
입력하신 검색어에 대한 검색결과는 제공하지 않고 있습니다.
딴지 내 게시판은 아래 법령 및 내부 규정에 따라 검색기능을 제한하고 있어 양해 부탁드립니다.
1. 전기통신사업법 제 22조의 5제1항에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삭제, 접속차단 등 유통 방지에 필요한 조치가 취해집니다.
2.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청소년성처벌법 제11조에 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아동·청소년이용 음란물을 제작·배포 소지한 자는 법적인 처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4.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에 따라 청소년 보호 조치를 취합니다.
5. 저작권법 제103조에 따라 권리주장자의 요구가 있을 시 복제·전송의 중단 조치가 취해집니다.
6. 내부 규정에 따라 제한 조치를 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