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음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올바르게 나열한 것은?
나는 역사 과목이 싫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 수업은 견딜만했는데, 역사 시험은 정말 싫었다. 나의 두 아이도 지금 재학 중인 국제학교에서 진행하는 역사 수업을 지독히도 싫어한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다르다. 지금부터 부녀가 역사 수업을 싫어하는 서로 다른 이유를 낳은, 두 종류의 역사 수업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내 기억 속 역사 수업은 오로지 각종 사건의 이름과 수많은 책의 제목, 그리고 지명을 외우는 수업이었다(아래는 문제 예시일 뿐입니다. 풀지 않아도 됩니다).
다음의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올바르게 나열한 것은?
① 갑신정변 ② 갑오개혁 ③ 임오군란 ④ 아관파천
다음의 책들을 시간 순서대로 올바르게 나열한 것은?
① 징비록 ② 성호사설 ③ 자산어보 ④ 격몽요결
다음의 비석들을 시간 순서대로 올바르게 나열한 것은?
① 중원고구려비 ② 광개토대왕비 ③ 진흥왕 순수비 ④ 단양 적성비
아... 가끔 종교 문제도 있었고, 실생활과 관련된 문제도 있긴 했었다.
다음 중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된 순서를 올바르게 나열한 것은?
① 고구려-백제-신라 ② 백제-고구려-신라 ③ 신라-백제-고구려 ④ 백제-신라-고구려
다음 중 우리나라에 전파된 순서를 올바르게 나열한 것은?
① 목화 ② 감자 ③ 고구마 ④ 고추
그러다가 학년말에 도달하면 드디어 학생들을 가장 괴롭히는 난이도 최강의 독립운동사가 기다리고 있다. 이름도 비슷비슷한 각종 단체와 독립운동의 이름과 연도를 외우다 보면 정말 머리가 터질 지경이 된다.
다음 단체들을 설립 순서대로 올바르게 나열한 것은?
① 신간회 ② 신민회 ③ 의열단 ④ 한인애국단
외우고 잊어먹고, 또 외우고 또 잊어먹고.. 아.. 우리 조상님들은 왜 이리도 많은 책을 쓰시고 왜 이렇게 많은 비석을 세우셨단 말인가? 원망스러웠다.
2. "얇고 넓게" vs "좁고 깊게"
처음에는 암기를 싫어하는 나의 피를 물려받아 두 아이가 역사 수업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들의 역사 수업 내용을 자세히 들어보니 내가 배웠던 역사 수업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가 역사 수업을 싫어했던 이유와 아이들이 역사 수업을 싫어하는 이유가 달랐다.
첫째로, '얇고 넓게'와 '좁고 깊게'의 차이가 있다. 우리의 역사교육은 '얇고 넓게' 역사적 사실을 다룬다. 그러고는 열심히 암기한다. 그 덕분에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그곳에서 신석기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사실만은 안다. 역사 수업에 언급하는 수많은 고문서를 단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우리는 '책의 제목'만큼은 완벽하게 외운다.
출처-<경향신문>
그런데 두 아이의 수업을 살펴보니 '좁고 깊게' 배우고 가르치고 있었다. 서로마 제국을 몇 주 동안 공부하더니 갑자기 중세 시대와 동로마 제국으로 넘어가 그 시대를 몇 주 동안 다루고 있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한참 동안 다루는가 싶더니 어느새 근대 역사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제가 되는 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변화상을 매우 깊이 있게 가르쳤다. 한마디로 세계사에서 중요한 '변곡점'만을 골라 그 시대를 통합적으로 배우고 가르쳤다. 나머지 시대들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건너뛰었다.
실례로, 우리가 프랑스에 있을 때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역사 시간에 '로마제국이 어떠한 방식으로 영국을 침략하고 식민지화했는지'를 배우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다. 일단, 초등학교 6학년에게 그렇게까지 심화한 내용을 가르친다는 사실에 놀랐다. 로마 제국이 영국을 침략한 배경, 침략할 때 사용한 군사전략, 도로 등 사회 인프라 건설 목적과 그 양상, 당시의 종교 및 생활상을 매우 통합적으로 가르치는 수업 내용이 기억에 남았다. 한편으로는 '식민지 건설의 역사를 가르치는 숨은 의도는 뭘까?'를 나름 고민해 보기도 했다.
한국의 역사교육은 역사 전체를 빈틈없이 싸맨 얇고 넓은 보자기와 같다면, 서양식 역사교육은 몇몇 부분은 두툼하고 튼실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구멍이 휑하게 뚫린 치즈와 같다고나 할까? 한국인 부모 입장에서 보면 두 아이의 역사 실력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자기들이 배웠거나 관심 있는 시대에 대해서는 몇 마디 할 줄 아는 듯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어느 시대가 어느 시대보다 앞서는지와 같이 '얇고 넓은' 지식은 완전히 꽝이 되어버린 것이다.
3. "아빠. 역사는 그냥 제2의 영어야. 계속 읽고 에세이 써야 해."
둘째로, 배우고 가르치는 방식이 아주 다르다. 다른 과목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의 역사교육은 초중고 과정 모두 선생님들이 쭈욱 판서하고 아이들은 받아 적는 일방적 지식 전달의 방식으로 이뤄진다. 아이들이 초·중학교 과정을 다닌 프랑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은 주로 지식을 전달하고 아이들은 그것을 배우는 모양새는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 인도에 있는 미국계 고등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역사 수업 대부분이 특정 주제에 대한 자율적인 조사와 에세이 작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 첫째 아이는 역사 수업 시간에 다른 사람이 쓴 문헌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읽고 또 인용하는지 그 방법론을 몇 주 동안 배우기도 했다. 나는 그런 수업을 대학교 학부 때에도 받아본 적이 없다(...)
즉 초·중학교 과정에서는 아이들이 역사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지식을 집중적으로 전달한 후(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중세 시대 기사들의 삶이나 제1차 대전 전쟁사는 역사 시간에 꼭 가르친다), 고등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에게는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도시화의 과정' 또는 '동서양의 여러 제국(empire)을 성립하게 만든 조건들'과 같이 제법 수준 있는 내용을 토론하고 에세이를 쓰게 하는 모양새다. 오죽하면 둘째는 엄청난 자료조사와 에세이 작성에 질려서
"역사는 그냥 제2의 '영어'야. 엄청나게 읽고 조사하고 에세이 쓰는 거야."
라고 정의를 내릴까.
두 번째 차이점과 밀접하게 연결된 세 번째 차이점은 바로 역사 교육의 목적이었다. 우리나라 역사교육은 역사적 지식을 많이 전달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많은 수의 사람·책·비석·각종 제도의 이름과 연도를 외우게 하는 것···. 책 내용은 몰라도 책 제목은 꼭 알아야 하는 게 한국의 역사 수업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냉소적인 진단일까?
미국 화가 존 트럼블(John Trumbull)이 그린 독립 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 미의회 건물에 전시되어 있다. 미합중국의 건국을 전후로 한 역사는 미국학교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토픽이다.
반면, 국제학교의 역사교육, 특히 고등학교 이상에서의 역사교육은 학생들이 스스로 역사 인식을 정립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많은 미국 학생들이 시험 보는 'AP US History' 과목에서도 사지선다형과 단답형 문제는 출제된다(AP는 'Advanced Placement'의 약자로 미국의 대학 입시에 필요한 시험들을 실시하는 칼리지 보드에서 주관하는 대학 과정 인증 시험 및 고급 교과 과정이다).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시점인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서 문제가 출제되니 출제 범위도 제법 넓다. 하지만 배점의 약 40%는 역사적 문서를 읽고 이를 기반으로 에세이를 쓰거나 아니면 아예 긴 에세이를 쓰는 문제로 구성되어 있다. 학생들의 역사 지식이 아닌 역사 인식을 묻는 것이다.
4. '과거를 묻지 않는' 역사 시험
프랑스 대입(바칼로레아) 역사 시험은 미국 역사 시험과는 또 다르다. 일단, 프랑스 역사 시험의 불문율은 19세기 이전 사건은 출제 범위에 아예 들어가지도 않는다는 거다. 역사 시험인데 불과 몇십 년 전 사건만을 묻고 답한다. '과거를 묻지 않는' 역사 시험인 것이다. 그러니 프랑스 학생들은 그 길고 어려운 프랑스 왕 이름 하나도 외울 필요도 없다. 책 이름, 비석 이름도 당연히 외울 필요가 없다. 대신 2개의 긴 에세이 문제 중 하나를 선택해 답한다. 그 주제가 한국의 역사 선생님들이 들으면 눈이 동그래질 만한 주제들이다.
실제로, 2018년 프랑스 대입(바칼로레아) 역사 시험은 '역사 연구의 발전과 프랑스 사회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문제를 출제하였다. 2차 대전 중에 발생한 유대인 학살과 1960년대에 프랑스의 잔인한 탄압에도 끝내 성공한 알제리의 독립전쟁과 관련된 문서들을 각각 제시한 후 '역사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유대인 학살 또는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설명하라'는 문제였다. 참고로 이렇게 과거의 잘못을 성찰하는 문제는 프랑스 바칼로레아에 단골 문제다. 예를 들어, '2차 대전 이후 중동이 왜 화약고가 되었는지 설명하라'라는 문제도 출제된 바 있다. 지금의 중동이 왜 지금의 중동이 되었는가? 영국, 프랑스와 같은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 후유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961년 10월 17일 알제리의 독립을 요구하며 평화시위를 벌이던 파리 거주 알제리인들이 폭력적 방법으로 진압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십명이 사망했다(출처-<Algerie Press Service>).
우리 같은 외국인들은 잘 모르지만, 2차 대전 때 프랑스 거주 유대인들을 색출하고 학살하는데 프랑스인들은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자유·평등·박애를 떠들어대는 프랑스가 불과 육십 년 전에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얼마나 잔인하게 유혈 진압했는지는 글로 옮기기 고통스러울 정도이다. 그들은 이러한 부끄러운 역사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미국 역사 시험은 객관식 문항에서 역사 지식을 묻는 문제가 일부라도 있었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런 것조차 없다. 그냥 대놓고 역사 인식만 묻는다.
우리로 치자면, '일제강점기 친일파가 어떻게 일본 제국주의에 협조하였는지를 서술하고 본인의 의견을 쓰시오',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나라 군인들이 어떻게 베트남 시민들을 학살했는지를 서술하고 본인의 의견을 쓰시오' 정도의 문제라고나 할까. 아직도 사회 곳곳에 힘깨나 쓰시는 친일파 후손들이나 베트남 참전전우회 회원들에게 엄청난 항의를 받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출제할 수 없는 문제들일 터이다.
5. 우리는 학생들이 무엇을 얻기를 원하나?
우리 가족이 공통으로 싫어하는 역사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글이 길어졌다. 이제 결론을 내리자면 국제학교의 역사 수업은 가르치는 수준이 좁고 깊다. 더불어 역사 수업을 다 듣고 졸업장을 받고 학교 문을 나서는 학생들이 단순히 역사 지식뿐만 아니라 역사 인식을 갖추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과거의 사건을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의 정치, 경제 상황을 '삐딱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수업이다.
자국민이 저질렀던 나치 독일에 대한 부역과 아프리카 식민지에서의 폭정, 그리고 KKK와 같이 어두운 현대역사를 자세하고 꼼꼼하게 가르치는 프랑스와 미국의 역사교육. 그와는 반대로 독립운동 역사는 열심히 가르치지만, 친일파들이 어떻게 일제에 부역했는지는 껄끄러워서 가르치지 않는 우리나라의 교육. 이중에서 어떤 교육이 과거의 실수를 미래에 반복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될까? 과연 우리 사회는 역사 수업을 통해서 학생들이 무엇을 얻길 원하는 걸까? 다시 한번 궁금해진다.
추신
저와 제 자녀들이 경험한 프랑스 학교와 미국 학교의 교육방식, 교육 철학, 그리고 그 안에서 허둥지둥 똥볼을 차며 고생했던 토종 한국 학부모의 생생한 고생담과 실수담이 궁금하시다면 아래의 책을 추천해 드립니다. 2014년부터 3년 동안은 테러 사건이 빈번하게 터지던 프랑스 파리에서, 2020년부터 지금까지 코로나로 수십만 명이 확진되던 인도에서 주재원 생활을 하고 있는... 문자 그대로 타이밍 하나는 완벽하게 '꽝'인 해외주재원의 진솔한 삶이 궁금하신 분들께도 권합니다.
[나라를 옮겨다니며 일합니다]
되돌아보니 직장 생활 20여 년 동안 각종 위기 상황의 한복판을 귀신같이 찾아가는 '신박한' 능력을 발휘해 왔는데, 이번에도 영락없이 그 능력이 발휘된 듯합니다. 한국에서는 IMF 사태(1998년)와 리먼 브러더스 사태(2008년)의 칼끝을 간신히 피하고, 2014년부터 3년 동안은 무려 3번의 끔찍한 테러 사태가 연달아 벌어진 프랑스 파리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했는데... 그런데 인도는 정말 차원이 다른 것 같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시작된 코로나 사태 때문입니다.
이 책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꿀 빠는' 해외주재원 생활을 했던 제가 다른 나라도 아닌 인도에 아내와 사춘기 두 딸과 함께 부임하며 겪은 일을 담았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시작된 무시무시한 코로나 사태...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 가족들 건강도 많이 걱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걱정만 하면서 세월을 보내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에서 생활하며 겪은 경험과 인도에서의 경험을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비교해 가면서 차분하게 글을 적어 나갔습니다. 그러고는 제 자신에게 묻고 대답했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가족이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잘 몰랐던 우리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은 한 달짜리 인도 배낭여행만 하고 나서도 이 세상 모든 철학을 깨우친 듯한 명문장을 휘리릭 써내시던데... 회사에 들어가 20년 넘게 워드보다 엑셀을 더 많이 들여다본 저에게는 그런 글솜씨는 없습니다. 하지만, '글쟁이' 아빠가 아닌 '생활인' 아빠의 입장에서 '여행지로서의 인도'가 아닌 '생활의 터전으로서의 인도'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담백하게 기록했습니다.
어디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저희 가족이 프랑스로 떠나기 전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요? 첫 페이지를 한번 넘겨보세요. 3개의 나라를 넘나드는 저희 가족의 생생한 고생담을 들여다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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