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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특히 한창 나이의 청년이 갑작스러운 성공을 손에 쥐면 오히려 그 성공 덕에 잠시 삶의 방향성을 두고 번뇌에 빠지기도 하는 법이지요. 빈 디젤은 1967년생이니 분노의 질주 1편이 개봉한 2001년에는 34살 정도였겠군요. 그는 분노의 질주 1편이 크나큰 성공을 거두자 감독이었던 롭 코헨과 함께 트리플 엑스라는 새로운 프랜차이즈 영화 시리즈를 만들기 위해 자유로운 새처럼 훨훨 날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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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흥미로운 점이 시작됩니다. 분노의 질주는 작품 내 세계관 이상으로 이 영화 시리즈를 둘러싼 배우와 제작사 등등 작품 외적인 요소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시리즈입니다. 오랜 팬들 중엔 이젠 반쯤 포기하고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도 있죠. 동시대 대작 영화 시리즈의 대표주자인 해리포터 시리즈가 작품 외적인 요소로 작품의 스토리가 영향을 받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음을 떠올려 보면, 2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이 시리즈가 얼마나 (좋게 말해) 거친 제작 환경 속을 아직도 부유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을 싫어하는 사람도 물론 많지만, 스트리스 레이스에 목숨을 걸고 인생을 한 번에 쿼터 마일(약 400미터) 씩 사는 레이서들을 그린 영화가 영화 외적으로도 굴곡 많은 히스토리를 가진 건 썩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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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됐든 빈 디젤은 떠났습니다. 분노의 질주는 이대로 1편짜리 영화로 끝나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었지만, 유니버설과 폴 워커는 여기서 나름 21세기 초반 영화사를 바꾼 중요한 결정을 합니다. 폴 워커가 연기하는 브라이언 오코너와 당시 막 배우 커리어를 시작하던 타이리스 깁슨을 더블 주연으로 삼아 브라이언 오코너 중심으로 영화 시리즈를 이어간다는 결정이지요. 분노의 질주 1편을 본 누구라도 ”이걸 빈 디젤 없이 스핀오프도 아니고 정식 시리즈 후속작을 만들겠다니”라고 의문을 품을 만한 일이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제작된 분노의 질주 2편은 거대한 성공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앞으로 시리즈를 이어갈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성공은 거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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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의 배경은 마이애미입니다. 1편의 배경은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리스였고 2편의 배경이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라는 건 영화가 미 대륙 서해안에서 동해안으로 넘어왔다는 이야기죠. 이 과정을 다룬 The Turbo Charged Prelude for 2 Fast 2 Furious라는 6분짜리 단편영화가 DVD에 수록돼 있습니다. 혹시 아직 못 보신 분노의 질주 팬이 계시다면 꼭 한 번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이 시리즈의 원점 거의 대부분이 이 6분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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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없는 6분짜리 영화인 터포 차지드 프리루드 서두에서, 범죄자를 놓아준 브라이언 오코너는 경찰임을 상징하는 배지를 자택 욕실에 걸어두고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그가 마이애미에 도착하기까지, 이 영화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동경하는 자유로운 삶의 편린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돈은 스트리스 레이싱으로 벌고, 우연히 만난 누군가와 짧고 날카로운 로맨스도 생깁니다. 애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 어느 도시에나 비슷한 삶을 사는 친구들이 있기에 운전 실력에 자신만 있다면 빵을 못 살 일은 없고, 거칠게 살지만 승부에는 솔직한 레이서들은 지면 군말 없이 브라이언에게 현금 뭉치를 쥐여줍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허름한 중고차 가게에서 브라이언 오코너는 낡은 닛산 스카이라인 GT-R R34를 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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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이 2편 서두에 타고 등장하는 GT-R을 사는 장면을 보면 동양의 전통적인 고사인 ‘비루먹은 명마’ 플롯을 떠올리게 합니다. 중고차 샵의 젊은 점원은 브라이언에게 멋들어진 이런저런 차들을 권하지만, 브라이언은 구석에 대충 주차된 범퍼도 좀 내려앉은 GT-R 이외엔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그런 브라이언을 젊은 점원은 이해하기 어려워하지만, 중고차 샵 사장님은 그런 점원을 타이릅니다. “넌 저 차로 이 청년이 뭘 할 수 있는지 모른다"라는 식의 제스처인데, 그 뒤 레이싱으로 모은 돈으로 수리와 튜닝을 거듭하면서 실제로 이 GT-R은 2편 초반을 책임지는 브라이언의 애마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브라이언과 GT-R이 마이애미에 도착하면서 2편의 스토리가 시작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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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관통하는 라이벌리는 미국산 머슬카과 일본산 수입 차의 대립입니다. 미국 입장에서 수입 차이기에 임포트라 불리는 일본 차를 대표하는 것이 브라이언 오코너였고 머슬카는 당연히 도미닉 토레도의 영혼의 파트너인데, 둘 중 브라이언만 남은 영향을 받아서인지 2편은 전반적으로 일본산 차량의 활약이 눈에 띕니다. 아예 주인공 둘, 브라이언 오코너와 로먼 피어스의 차량이 미츠비시 랜서 에볼루션과 미츠비시 이클립스 스파이더로 둘 다 미츠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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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먼 피어스를 연기한 타이리스 깁슨은 가수이기도 합니다. 흔히 배우가 가수 겸업하는 수준이 아니라 빌보드 핫 100에서 무려 7위를 기록한 R&B 넘버를 갖고 있는, 상당히 성공한 가수죠.

 

이분이 배우로도 가수로도 성공한 다재다능한 엔터테이너인 덕분에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미국판 복면가왕인 마스크드 싱어에서 흑인 목소리의 경연자가 나오면 꽤나 단골로 “타이리스 아닌가”라고 예상하는 패널들이 나옵니다. “흑인 중에 타이리스 말고도 노래할 줄 아는 사람 많다고!”라는 재미있는 댓글이 달리는 원인이 되기도 하죠.

 

 

 

9.

로먼 피어스와 브라이언 오코너가 재회하는 장면은 여러모로 흥미롭습니다. 가석방 중인 로먼 피어스가 생계 수단으로 참가하고 있는, 범퍼카가 아니라 실제 차량으로 자동차 격투를 하는 아메리카다운 경기 장면부터 우선 사람의 혼을 빼놓지요. 절대로 흉내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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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은 당연히도 ‘우선 주먹을 나눈 뒤 화해하는’ 두 남자를 보여줄 순서죠. 이 기사를 읽고 영화를 다시 보실 분들은 이 장면을 부디 잘 봐주시길 바랍니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촬영팀이 이 장면을 만들었으면 우선 카메라 54대를 동원해서 격투 장면을 촬영한 뒤 2분 안에 컷 전환을 231번 해서 아주 아주 멋들어진 격투신을 만들었을 겁니다. 저는 이런 스타일도 물론 좋아합니다.

 

그러나 2003년에 만들어진 분노의 질주 2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예 격투신 초반은 카메라를 와이드 샷으로 고정해 놓고 두 배우가 실제로 격투 기술을 써서 문자 그대로 주먹을 주고받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 뒤 기껏해야 핸드헬드 카메라 두 대 정도로 장면이 전환되는데, 화려한 컷 전환 없이도 지금 이 둘이 어떻게 싸우고 있고 누가 이기고 있는지가 잘 전달됩니다. 심지어 그라운드에서 아래쪽에 깔려 있는 브라이언이 오히려 우세한 상황이란 것도 대사와 카메라 워크로 잘 전달해 주죠. 헐리우드가 격투신을 이렇게 찍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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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리스 깁슨은 이 영화가 성공한 뒤 트렌스포머에도 등장하고 꽤 괜찮은 커리어를 이어갑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분노의 질주 시리즈 중에서도 2편을 특히 좋아하는 저는 이 영화 등장인물들이 이후에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특히 테즈 파커 역을 연기한 크리스토퍼 브라이언 브리지스란 친구는 연기도 재미있게 잘했고 사람도 좋아 보이는데 왜 다른 영화에선 써주지 않을까, 밥은 먹고 다닐까 걱정하곤 했죠. 그러다 어느 날 이분의 근황을 검색해 봤습니다. ‘루다크리스’. 직업이 래퍼, 배우, 사업가, 자선가더군요. 제가 대체 누굴 걱정해 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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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다크리스는 그렇다 쳐도 이 영화의 히로인 에바 멘데스를 헐리우드가 제대로 리스펙트해 주지 않은 것은 제 마음을 늘 아프게 했습니다. 이 시리즈에도 기껏해야 한두 장면 더 나오고 등장도 하지 않고, 다른 영화에서도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 그 뒤 커리어는 문제가 없었을까, 밥은 먹고 다닐까 노심초사하곤 했죠. 그러다 어느 날 이분의 근황을 검색해 봤습니다. 라이언 고슬링과의 사이에 딸이 둘 있고 사업도 하고 계시더군요. 제가 대체 누굴 걱정해 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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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다크리스와 에바 멘데스는 그렇다 쳐도 샤넬의 최연소 뮤즈였던 데본 아오키가 2편 이후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도 등장하지 않고 딱히 영화 쪽 커리어도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이 항상 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혹시 헐리우드가 동양인 여성 아이콘 자리만 하나 내주고 제대로 된 리스펙트를 보여주지 않는 건 아닌가, 밥은 먹고 다닐까 늘 걱정하곤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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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2023년 멧 갈라에 이렇게 등장하셨더군요. 이쯤 되면 제가 저분들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저분들이 저를 좀 더 걱정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분노의 질주 2편 출연진들은 전반적으로 잘들 살고 계시니 혹시 저와 비슷한 걱정을 하시던 분들이 계신다면 안심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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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주조연 배우들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는 역시 차량 그것도 개조 차량일 텐데,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제작하는 제작사 측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재미있는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영화 시리즈가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대성공을 거두기 전에도, 촬영을 위한 차량과 엑스트라를 모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 증언들입니다. 길을 적당히 막아두고 차에 관한 모든 것을 즐기는 청년 세대의 문화는 영화상의 연출이 아니라 실제 미국에서 지금도 이어져오고 있는 문화의 일종이고, 여기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세대를 불문하고 많습니다. 그들에게 “헐리우드에서 영화를 찍는데 네 차 한 번 카메라 앞에 세워 볼래”라는 제안은 벼락같은 축복으로 들렸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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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질주 2편에는 중요한 스트리트 레이스가 두 번 등장합니다. 도입부의 파티형 레이스와 중반부의 각자 자동차를 건 진검승부 레이스죠. 특히 영화 도입부의 레이스 신은 말 그대로 마이애미 지역축제 분위기입니다. 영화 촬영을 위해 개조 차량 매니아들을 모아 놓았으니 당연히 그들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카메라는 돌려줘야 하고, 그래서 영화 본편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후방 트렁크를 개조한 스피커 시스템을 서로 자랑하는 장면이 꽤나 긴 길이로 영화 본편에 들어가 있기까지 합니다. 이 시리즈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이 영화들의 한 요소가 이런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란 걸 잘 알 수 있는 장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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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의 질주 2편은 시나리오 면에서는 1편의 플롯을 조금 틀어둔 정도입니다. 스트리트 레이싱이 주축이지만 기본적으로 잠입수사물이고, 당시 헐리우드의 시나리오 작법에 맞춘 잠입수사물의 기본을 잘 답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시나리오 공부를 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봐 둬도 될 정도입니다.

 

보스 악역인 카터 베론이 브라이언 로먼 콤비와 남자 경호원 없이 독대하는 장면에서 로먼은 카터 베론의 약을 살살 올려 심중을 떠 봅니다. 먹을 걸 좀 달라, 보수를 올려라 너 돈 많잖냐, 심지어 사소한 기호품인 시거 커터를 훔치기까지 하죠. 여기서 카터 베론이 경호원을 불러 로먼을 두드려 눕히면 2류 악역이 됩니다. 그는 시종 여유를 잃지 않고 그럼 오늘 밤 클럽에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둘을 초청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클럽에서 자신의 원래 목적도 달성하고 브라이언과 로먼에게 지금 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해 주는 과격한 행동을 보여주죠. 몇 시간 전까지 카터 베론을 슬슬 약 올리던 로먼의 표정 변화가 압권인 이 장면만으로도 시나리오가 충분히 다듬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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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복선 하나, 로먼 피어스는 작중 항상 뭔가를 열심히 먹습니다. 그렇게 먹고 그 복근 어떻게 유지하는지 신기할 정도로 먹어대는데, 처음에는 그저 코믹 요소인가 싶지만 이것도 작품 후반부에 회수되는 복선입니다. 이런 사소한 배려들이 영화의 퀄리티를 높여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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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질주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노스(NOS)의 폭발력은 2편에서도 당연히 활용됩니다만, 이번엔 차를 더 빨리 달리게 하는 것 이외의 용도에도 사용됩니다. 버튼 하나로 이런 조작이 가능한 장치를 후다닥 만들어 낸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지만, 이것이 가능하단 걸 관객이 믿게 해야 하기 때문에, 작중 ‘테즈의 정비소에선 못 하는 게 없다’는 빌드업을 꾸준히 해 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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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정비소. 이 단어에 이렇게나 많은 감수성을 넣을 수 있는 영화 시리즈도 드물 겁니다. 한 번에 400미터씩 살아가는 이 청년들도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청춘은 영원하지 않고, 이들이 운 좋게 길에서 죽지 않고 노후를 맞이한다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내일 없이 살지는 못할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마음의 고향이 하나 있다면 결국 ‘언젠가 목 좋은 곳에 정비소나 하나 차려서 먹고살까’일 겁니다. 영화의 마무리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한번 잘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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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질주 2편을 통해 분노의 질주는 단편으로 끝나지 않고 시리즈물로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편의 흥미로운 점 하나는, 시리즈의 중요한 기반 하나를 도미닉 토레도 없이 만들어 냈다는 겁니다. 그건 바로 ‘사해는 모두 형제’라고 요약할 수 있는 ‘차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는 친구’라는 시리즈의 관통하는 연출입니다. 영화 클라이맥스에서 브라이언과 로먼을 구해주기 위해 마이애미의 모든 카 매니아들이 총출동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에서 영화 도입부의 레이싱에서 서로 목숨을 걸고 경쟁한 드라이버들이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미소를 띄고 경찰의 눈을 돌려주는 작전에 참여합니다. 이렇게 한때 대립했던 사이라도 영화 마지막에는 모두 친구가 된다는 요소가, 도미닉 토레도가 카메오로도 출연하지 않는 유일한 작품인 2편부터 싹트기 시작했다는 건 여러모로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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