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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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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시스>

 

2020년 7월10일, 대한민국 ‘군인’ 중에서 특별한 인물이 사망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원수(元帥)’ 계급에 추대될 뻔한 인물이자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인물. 바로 백선엽이다.

 

시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백선엽 하면 자동으로 따라붙는 ‘친일반민족행위자’란 꼬리표를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6.25 한국 전쟁으로만 한정한다면, 그는 ‘영웅’으로 불릴만한 공적을 세운 건 사실이다. 물론, 그 공적에 대해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 전쟁 내내 큰 실수 없이 전투를 지휘한 건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일각에서는 다부동 전투에서의 활약이 너무 과장(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8개 사단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는)됐다거나, 평양 입성도 사실상 북한 군 주력이 다 빠진 상황에서 무혈입성한 것뿐이라는 주장도 내놓지만... 팩트는 백선엽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크게 실수하지 않고 병력을 잘 운용했다는 것이다. 그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했다(괜히 군사 영어 학교에 들어간 게 아니다). 결정적으로 미군과의 관계도 좋았다.

 

그의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한 가지 증거물이 있다. 한국 전쟁 당시 북한이 남한에 뿌린 삐라의 내용이다.

 

"8.15전 왜놈의 헌병으로 동포들을 학살하던 백선엽이는 8.15 후 지금은 미국놈의 개가 되여 당신들을 양키놈의 대포밥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백선엽은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다. 군인이 되고 싶었던 그는 1941년,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에 입교해 1942년, 소위로 임관. 1943년, 말 많고 탈 많은 간도특설대로 배치되어 활약(?!)하게 된다.

 

만약 ‘전쟁’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이 이렇게 회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 전쟁, 영웅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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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육군참모총장 재직 당시

 

백선엽(1920년생)은 해방 전 만주군 중위로 지내다가 광복이 되면서 1945년 12월에 월남했다. 군사영어학교를 거친 후 국방경비대에 입대, 1949년 7월에 대령 계급을 달고 육군 제5사단 사단장이 된다. 그리고 전쟁 2개월 전인 1950년 4월, 30살의 젊은 나이에 에 제1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한국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은 백선엽의 인생을 완전 뒤바꿔 놓았다. 다부동 전투, 평양 탈환, 뒤이은 중공군의 공세 저지 등 그는 전쟁 영웅으로서 맹활약한다(그의 전공(戰功)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 그가 전쟁 내내 크게 실수하지 않은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 3년 1개월 동안 그는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부대가 궤멸하거나, 전선에 구멍을 내거나, 크게 패하지 않았다. 이걸 달리 말하면, 백선엽은 믿고 의지할 만한 장군이란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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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과 미군과의 원만한 관계는 한국군에 대한 이미지 향상에 도움이 됐다.

사진은 알레이 버크 제독과 백선엽

 

이렇게 그는 30살에 장군이 됐고, 33살이 되던 해(1952년 7월) 제7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된다. 서른셋의 나이에 육군 참모총장이라니...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이야기다(대한민국 최초의 4성 장군이란 타이틀은 덤이다).

 

전쟁 이후의 모습은 더 극적이다. 한국군 최초의 야전군급 부대인 제1야전군 초대 사령관에 이어, 제10대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합동참모의장까지 굵직굵직한 자리를 모두 거친다. 이 부분에서 인정해야 할 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력’이다.

 

전쟁 직후 한국에서 ‘전쟁영웅’들의 위상은 엄청났다.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안심하라고 말해놓고 도망을 간 상황에서, 전쟁 영웅의 활약상은 대중들에게 더욱 깊게 각인 된 상황. 더구나 그 당시 군대의 장교는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지성과 행동력, 거기에 전쟁 기간 다져진 실전 경험과 명성. 결정적으로 그들 휘하에 있던 ‘군사력’까지 더해지면, 전쟁 영웅은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이들 전쟁영웅을 세심하게 잘 관리했다. 군부 내의 엘리트 세력들을 상호 견제하는 방법으로 쿠데타의 위험을 제거했다. 이때 주목 받았던 것이 백선엽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계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백선엽은 이 평안도계 엘리트들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평안도 출신 장군들의 숫자만 40여 명이나 됐는데, 백선엽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거나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뜬’ 인물이 바로 장도영이다. 훗날 5.16쿠데타 당시 박정희가 바지 사장으로 장도영을 앉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백선엽과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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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백선엽(1군 사령관)이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의 보직 신고를 받고 있다.

 

박정희 이야기가 나왔으니, 백선엽과 박정희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백선엽이 없었다면, 박정희는 장군이 될 수 없었다. 아니, 군대에 몸을 담을 수 있게 해준 게 백선엽이었다. 사실, 둘은 친척지간이다. 박정희의 모친인 백남의는 수원 백씨인데, 백선엽이 수원 백씨이다. 박정희가 백선엽보다 3살 많지만, 항렬로 따지면 백선엽이 박정희의 외할아버지뻘이 되기에 박정희는 백선엽을 형이라 불렀다.

 

하긴, 형이라 부를 만했다. 박정희는 남로당 경력이 빌미가 돼 숙군 과정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구형받았는데, 백선엽이 적극적으로 도와줘 형 집행 정지 처분을 받게 해 준다. 이후 박정희를 정보국 문관으로 일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그의 군 경력을 계속 이어 나가게 해 줬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박정희는 포병 소령으로 복직하게 된다.

 

백선엽의 배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 전쟁이 끝난 1953년 11월, 백선엽은 박정희를 장군으로 진급시킨다. 이 당시 경무대에서는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문제 삼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로당 경력이 있는 사람을 장군으로 진급시키는 건...”

 

“내가 책임진다니까! 걔 괜찮은 놈이야!”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이 강력히 밀어붙인 결과 박정희는 장군이 될 수 있었다. 자,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백선엽을 알면 5.16쿠데타의 실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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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장도영, 박정희

 

한국에 있었던 두 번의 쿠데타는 툭 까놓고 말해서 ‘대령 계급의 불만’에서 시작됐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한국에서 쿠데타를 없애려면, ‘대령(colonel)’이라는 계급을 없애면 된다.”

 

는 미국 국무부 관리의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5.16쿠데타는 육사 5기생들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육사 8기생'들 작품이라 말할 수 있고, 12.12 쿠데타는 '육사 17기생'들이 육사 11기생을 등에 업고 주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때 당시 육사 8기와 17기의 계급이 중령~대령 사이였다.

 

그렇다면, 육사 8기생들은 왜 쿠데타를 생각했던 걸까? 백선엽이 그 대답이다.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전쟁영웅이 배출되었고, 이들이 군대 상층부를 꽉 틀어쥔 상황. 30대 장군이 수두룩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육사 8기 입장에선 그들과 나이 차도 크게 나지 않는데, 기껏해야 저희는 중령에 머물러 있는데, 언제 장군직을 달게 될지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저 인간들이 저러고 있으니, 우리는 언제 별 한번 달아보나?”

 

백선엽만 하더라도 33살에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앉았고, 언제 자리에서 떠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8기생들은 본인들보다 불과 4개월 먼저 입대한 육사 7기생 중에서 소장 진급자가 나왔는데, 자신은 중령 계급에 멈춰 있다는 것에 격분하게 된다. 더구나 당시 육사 8기생들은 1~7기생들에 비해 긴, 6개월의 교육 기간을 거치면서 나름 끈끈한 유대감이 있었고, 전쟁 기간 내내 야전에서 소대장, 중대장 등으로 복무하며 실전경험이 풍부했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인재들이란 프라이드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급은 정체됐고, 정부에서는 군대 규모를 축소한다는 말이 나오니 살아날(?!)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참고로, 1957년 당시 한국군 규모는 70만 명 수준이었는데, 민주당 장면 총리는 장기적으로 한국군 규모를 40만 명 수준으로 감축하겠다는 발언을 한다. 뒤에 50만 명 수준으로 후퇴했지만, 어쨌든 감축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군대 규모가 줄어들면 진급은... 더 어렵게 되고, 육사 8기생으로서는 도망갈 구석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5.16쿠데타는 성공했고 그날 이후, 백선엽은 대만을 비롯해 유럽, 아프리카 대사를 하면서 계속 해외를 떠돌게 된다(5.16쿠데타 발생 전, 그는 예편해서 대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로서도 백선엽이라는 이름값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결국 백선엽은 196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국내로 돌아와, 교통부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그의 긴 외유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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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 19대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되는 백선엽

 

군에 남은 백선엽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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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합뉴스>

 

2009년,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가 내놓은 보고서에서 백선엽은

 

친일 반민족행위자

 

로 분류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1942년 만주군 소위로 임관, 1943년 간도특설대 장교로 만주 지역 항일무장 독립 세력을 탄압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런 친일 행적이 공식적으로 나왔음에도 그가 대한민국 군대에 남긴 흔적은 길고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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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국방부는 한미동맹 탄생 60주년을 맞아 10대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백선엽 한미동맹상을 제정했다.

사진은 제1회 수상자인 윌튼 워커 전 미군 대장의 손자와 김관진 국방부 장관

출처 - <연합뉴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백선엽은 대한민국 군대에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제1사단에는 백선엽의 동상이 있고, 그의 이름을 딴 ‘백선엽 한미 동맹상’이라는 상도 있다(한미 동맹 60주년을 기념해서 2013년에 제정됐다). 계룡대 육군본부에는 ‘백선엽 장군실’이 있다. 한때 문화재청이 백선엽이 한국전쟁 당시 입었던 군복들을 ‘대한민국 근현대사 문화재’로 지정하려고 시도했던 적도 있다.

 

다 떠나서 국방부는 예비역 장군이었던 백선엽을 위해 근 10년 가까이 에쿠스 차량과 운전병, 4급 상당의 개인 보좌관을 지원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 시절, 그를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 원수'로 추대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무산됐다. 당시 국방부는 작정하고 백선엽을 원수로 밀어붙일 계획을 짜놓고 있었다. 이미 언론을 통해 <백선엽 장군 명예 원수 추진계획>이라는 문건까지 돌았다.

 

명예 원수 추진이 한참 논의 되던 당시 나의 감정은 이랬다.

 

“개인 백선엽이 아닌 보수 진영 아이콘으로서 영웅 백선엽의 서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백선엽 개인의 공과를 논하기 이전에 뭔가 일사불란하게 백선엽의 영웅 서사를 만들어 가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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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방TV>

 

국방부 내에서 그에 대한 존중과 예우를 말하는 건 논란의 여지가 있더라도 어느 정도 감안할 부분이 있다. 한국 전쟁의 영웅이자, 육군참모총장에 합참의장을 지낸 원로이니 말이다.

 

그의 원수 추대와 국방부의 과잉 의전(예비역 장성인데 차량과 비서관을 지원)은 도를 넘어섰다고 보지만, 보수 진영의 관점에서 봤을 때 백선엽은 모든 걸 가진 영웅이기에 수긍이 되는 부분도 있긴 했다.

 

1. 친일을 했던 전력이 있지만,

 

2. 해방 직후의 혼란기를 틈타 군대에 자리를 잡았고,

 

3. 이 와중에 미국과의 원활한 소통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졌으며,

 

4. 이를 기반으로 '공산주의와 맞서 싸워' 영웅이 됐다.

 

해방 직후 백선엽은 당시 엘리트들의 평균적인 모습이었다(소설<꺼삐딴 리>의 이인국 박사의 행적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친일했던 이들에게 있어서 그는,

 

공이 과를 씻어낸 대표적인 인물

 

로 내놓을 수 있는 영웅이었다. 그렇기에 백선엽에 대해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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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장군 대전 현충원 안장 현장

출처 - <SBS>

 

명예 원수 추진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새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그의 죽음은 현충원 묘지 안장이라는 새로운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국립묘지에 안장해도 되는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현충원 안장을 금지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를 서울 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보수진영 측에서 나올 정도로 백선엽은 특별한 존재였지만, 이미 서울 현충원 장군 묘역은 꽉 들어찬 상태라(20세기에 이미 꽉 차 버렸다) 여의찮은 부분이 있었다. 물론, 작정하면 못 할 건 없지만 그러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해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를 한국전쟁의 영웅이자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으로 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항일 무장 독립 세력을 때려잡던 만주국 중위로 기억될 수 있다. 안타깝지만, 이 두 개의 모습 모두 백선엽의 얼굴이다. 혹자는 물을 수 있겠다. 그럼 6.25 당시, 그렇게 대단한 장군이 백선엽 뿐이었냐고. 

 

... 

 

물론, 아니다. 당연히 국가를 위해 본인의 목숨을 던졌던 수많은 영웅이 존재한다. 

 

특히 백선엽과 같은 시기,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완벽한 이력을 가진 군인이 등장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