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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일, 퍼스트 리퍼블릭 은행은 예금보험공사(FDIC)에 의해 JP모건 은행에 강제 매각되었다. 강제 매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거래는 정상적인 인수합병이 아니다. 정상적인 기업 인수합병은 주주들의 의결을 거쳐 이뤄진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이 빚을 갚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기업의 소유권은 채권단으로 넘어간다. 이는 내가 집 담보대출을 갚지 못하면, 은행이 집을 강제로 경매에 넘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기존주식의 가치는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리고, 채권자들은 자산을 청산하여 원금을 회수하고자 한다.

 

은행이 망하면 누가 은행을 관리할까? 앞서 말한 대로 예금보험공사(FDIC)가 은행을 관리한다. 예금보험공사는 망한 은행의 모든 부채를 떠안은(지급보증) 상태에서, 은행이 가진 자산을 매각해 나간다. 은행이 이 지경에 빠졌다는 것은, 은행이 보유한 자산보다 빚이 훨씬 많은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이에 따라 발생하는 손실은 예금보험공사가 떠안게 된다(이 손실금은 평소 예금보험공사가 은행들로부터 거둬들인 기금으로 충당된다). 예금보험공사는 손실을 줄이기 위해, 망한 은행의 자산을 최대한 제값을 받고 판매해야 한다.

 

여기서 ‘가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누가’ 인수해 가느냐 하는 것이다. 예금보험공사가 은행을 강제 매각하는 목적은, 부실 은행을 보다 크고 건실한 은행에게 넘김으로써 연쇄 파산을 막는 데 있다. 인수자가 최소한 망한 은행보다는 더 크고, 재무적으로 탄탄해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 매물로 올라온 퍼스트 리퍼블릭의 자산규모는200조가 넘어간다. 자산규모로 미국 내 14위. 14위나 되는 대형은행이 망했으니, 이를 인수해 갈 수 있는 은행의 수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4개의 인수희망자가 나타났다. 경쟁 끝에 업계 1위인 JP모건이 최종 인수자로 선정되었다. 이는 특정 업종에 편중되었던 다른 은행의 포트폴리오(실리콘 밸리 - IT기업, 시그니쳐 뱅크 – 부동산 임대업)와 달리, 퍼스트 리퍼블릭의 그것은 상당히 깔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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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실리콘 밸리 뱅크와 시그니쳐 뱅크에 이어, 그나마 건실하다고 여겨졌던 퍼스트 리퍼블릭 뱅크까지 강제매각 됨으로써 부실 논란의 휩싸였던 세 은행은 모두 새드엔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번에 파산한 세 은행은,

 

1)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안 알려져 있지만(한국에서는 물론, 미국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태를 통해 이들 은행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을 것이다. 길 가다 쉽게 보이는 그런 은행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알고 보니 졸라 큰 은행이었고(퍼스트 리퍼블릭, 실리콘 밸리 뱅크의 자산은 각각 200조를 넘고 시그니쳐 은행의 자산 또한 100조를 넘어간다. 단순한 지방은행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3) 뭔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갑자기 망해버렸다(서브프라임사태 처럼 뭔가 대규모 파산이 발생한 것도 아닌데).

 

라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 세 가지 공통점 속에, 이번 사태의 진짜 원인이 숨어있다.

 

큰손 장사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은 은행들이, 어떻게 갑자기 수백조에 달하는 자산을 모을 수 있었던 걸까? 은행들이 소수의 큰손들로부터 막대한 예금을 예치해왔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 뱅크의 경우 벤쳐 / IT회사들로부터, 그리고 시그니쳐 뱅크의 경우 뉴욕 일대 부동산 회사들로 부터 각광받았다. 주로 특정 지역(각각 실리콘 밸리 / 맨하탄)에 위치한 법인 고객들을 상대하다 보니, 전국적으로 많은 지점을 운영하거나 일반인들에게 광고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퍼스트 리퍼블릭 은행의 경우, 앞서 언급한 두 은행들보다 훨씬 많은 개인 고객을 상대하던 은행이다. 그러나, 퍼스트 리퍼블릭이 상대해 온 개인 고객들 대부분은 고액 자산가들이었다. 85개밖에 되지 않는 지점이지만, 파크애비뉴, 그린위치, 샌드힐, 팜 비치, 비벌리힐즈같은 대표적인 부자 동네에는 빠지지 않고 지점을 운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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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리퍼블릭 비벌리힐즈 지점

출처 - AFP

 

법인과 고액 자산가들로부터 막대한 예금을 유치하는 것. 이것이 이들 은행을 단기간에 성장시킨 성공 전략이었다. 미국 연준 자료에 따르면, 2016년 미국인들의 예금 중간값은 3400불이었다. 실리콘 밸리 뱅크의 경우 고객당 평균 예금 금액이 무려 5백 만불에 달했다. 그러니까 실리콘 밸리 뱅크의 고객 한 명의 예금이, 일반 예금 1500개와 맞먹은 셈이다. 이렇게까지 큰 차이가 났던 것은 실리콘 밸리 뱅크의 고객들 대부분 스타트업, 벤쳐회사와 같은 법인 고객들이었기 때문이다.

 

저커버그도 대출박는 은행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이거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큰손들을 모을 수 있었는가?"

 

막대한 예금을 예치해 주는 소수의 큰손은 모든 은행에게 소중한 존재이다. 그 수는 적지만, 이들이 주는 예금은 달달하다. 굳이 따지자면, 건빵(일반고객) 사이에 숨어있는 별사탕(VIP) 같은 존재랄까. 소수의 VIP가 중요하다는 것은 모든 은행이 안다. 그래서 은행들은 예금액을 기준으로 고객의 티어를 나누고, VIP들을 위한 별도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우대 금리를 제공한다던가, 신용카드 포인트를 더 챙겨준다던가 하는식으로.

 

다만, 은행 입장에서는 잠재고객이 큰돈을 가져다줄 큰손일지 아니면 일반 고객인지를 미리 알기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은행들은 일반 고객의 수를 늘릴 수 있는 방식으로 영업을 해왔다. TV에 광고를하 거나, 새 고객을 대상으로 사인업 보너스를 하는 식으로 말이다. 별사탕(VIP)은, 건빵(일반고객)을 많이 상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세 은행은 전혀 다른 접근법을 택했다. 양보다는 질. 아예 별사탕(VIP)의 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은행을 운영한 것이다. 은행이 일반 대중을 상대로 영업하는 것과 VIP 위주로 영업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고객의 대상을 VIP로 한정 지을 경우, 굳이 많은 지점을 운영하거나 큰돈이 드는 TV 광고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렇게 세이브된 비용을, 이들 은행들은 VIP 고객 모집과 관리에 투자했다. 예를 들어, 퍼스트 리퍼블릭 뱅크는 구글과 페이스북 직원들을 대상으로 2천 불의 사인업 보너스를 지급했다. 특히 페이스북 본사에 지점을 열고, CEO인 저커버그의 주택담보대출을 해준 것은 유명한 얘기다(금리는 무려 1.05%).

 

고객 수가 많지 않으면, 고객 한명 한명에게 더 많은 관심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일단 지점에 고객이 방문하면, 갓 구운 고오급 초콜릿 칩 쿠키를 내놓고(이 쿠키가 워낙 존맛탱이라, 인수자인 JP 모건이 레시피를 배워 갔다), 전담 뱅커가 고객의 문제를 발 벗고 해결해 준다. 새집을 장만한 고객에게는 축하 샴페인을 보내주고, 해외여행 중인 고객에게는 급하게 환전할 현금을 부쳐 주는 식이다. 퍼스트 리퍼블릭의 고객관리 서비스는 다른 은행들과 차원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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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리퍼블릭이 고객에게 제공했던 존맛탱 쿠키

출처 - 링크

 

여담이지만, 나는 주택구매자금(백만 불 이상)을 다른 메이저 은행 예금 계좌에 일 년 이상 넣어둔 적이 있었다. 당시 은행 예금 이자는 0.05%로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은행은 내 예금을 재투자해서 약 4%의 수익을 올렸을 테니, 4천 만 원 정도의 수익을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나는 그 은행으로부터 어떠한 개인적인 연락이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지점에 방문해도 남들이랑 똑같이 창구에 줄을 섰고, 주택을 구입할 때도 그다지 좋은 금리를 제시하지 않아 결국 다른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았다. 백만 불이라는 돈은 나 같은 개인에게는 큰돈이지만, 그 은행 에게는 그다지 큰 돈이 아니었기 때문 일 것이다. 하지만, 퍼스트 리퍼블릭 뱅크는 달랐다. 비슷한 예금을 넣어둔 고객에게 퍼스널 뱅커를 배정하고, 고객이 좋아하는 공연 티켓이나 스포츠 경기 관람권을 주기도 했다.

 

큰손들의 돈을 모으는 방법

 

과연 과자 쪼가리나 티켓 몇 장 때문에 큰손들이 주거래 은행을 옮길까?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사람들이 무엇을 기준으로 주 거래 은행을 정하는지를 봐야 한다. 고객을 모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높은 예금 이자를 지급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이자를 더 벌기 위해 인터넷 은행(카카오뱅크, 토스 등)이나 저축 은행을 이용한다. 이들 은행은 많은 지점을 운영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 불편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반 시중 은행들보다 높은 금리를 지급해 줄 수 있다.

 

다만, 인터넷 뱅킹과 신용카드 사용이 일반화된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아직도 현금을 쓰거나 개인 체크를 사용하기 때문에 은행 창구를 이용해야 할 일이 상당히 많다. 또한, 땅덩이가 워낙 커서 은행 지점 찾는 것도 일이다. 아직도 반경 몇십 킬로 안에 은행지점이 하나인 동네가 많다. 그래서 이자율만 보고 은행을 고른다는 게 아직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은행 입장에서도, 우대 금리나 사인업 보너스로 모은 고객은 유지가 어렵다. 예금 이자에 민감한 고객들은, 은행의 프로모션이 끝나거나 다른 은행에서 더 높은 이자를 제시하면 바로 계좌를 옮겨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지난 십 년간 기준 금리가 제로였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은행이 예금자들에게 지급해 줄 수 있는 이자는 기준 금리와 비슷하거나 약간 낮은 수준이다. 따라서 기준금리가 제로일 때, 미국 은행들은 예금자들에게 제대로 된 이자를 지급하지 않았다. 그나마 높은 이자를 제시하던 인터넷뱅크의 금리가 1% 수준이었다. 따라서, 가장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은행과 0%대 금리를 제공하는 메이저 은행 간의 예금이자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다. 특히 법인 고객들의 경우, 예금 이자 1% 더 벌겠다고 주거래 은행을 옮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렇게 예금이자가 그다지 변별력을 갖지 않았기에, 이들 은행이 내세웠던 “관계”를 통한 고객 베이스 확장이 먹혔던 것이다. 여기서 관계란, 평소에는 고객의 여유 자금을 맡아두다가, 고객이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동반자적 관계를 말한다.

 

어차피 예금 이자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 나중에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은행과 손을 잡고 싶다.

 

이것이 고객들이 바라는 은행과의 이상적인 관계이다. 실리콘 밸리, 시그니쳐, 퍼스트 리퍼브릭 세 은행은 그 부분을 잘 공략했다. 전담 뱅커를 배치하고, 과자, 샴페인 그리고 경기 티켓을 보내는 것은, 이들 은행들이 고객들에게 그만큼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제스쳐 중 하나일 뿐이었다. 중요한 건, 이들은 고객들이 필요로 하는 맞춤형 대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실리콘 밸리 뱅크는 실리콘 밸리 내에서 위치가 확고했다. 실리콘 밸리 내 고객들로부터 많은 예금을 유치했을 뿐만 아니라, 투자 자금이 필요한 스타트업과 벤쳐 회사들에게 많은 대출을 해주었다. 실리콘 밸리 뱅크는 과거 실적이나 담보물이 부족한 스타트업의 특성을 감안해서, 반복 매출 (Recurring Revenue)을 기준으로 한 맞춤형 대출 상품을 출시했다. 다른 은행에서는 자금을 빌릴 수 없었던 스타트업도 실리콘 밸리 뱅크로부터는 자금을 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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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경험 때문에 나중에 잘되고 나서도 실리콘 밸리 뱅크에 예금을 넣어준 것이다. 실리콘 밸리 뱅크를 이용한다는 것에는, 내가 혜택을 보았고, 지금도 속해 있는 벤처 업계를 돕는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비슷하게 시그니쳐 뱅크의 경우, 부동산 업자들을 상대하는 특성상 상업 부동산 대출 상품에 특화되어 있었고, 퍼스트 리퍼블릭의 경우엔, 고액 자산가들을 위한 다주택 혹은 별장용 담보 대출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만큼 고객의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주었기에, 이들 은행들이 승승장구해왔던 것이다.

 

잃을 수 없는 게임

 

2020년 1분기부터 2022년 1분기까지, 실리콘 밸리 뱅크의 예금은 두 배 이상(220%) 증가했다. 특정 은행의 예금이 이 정도 규모로 갑자기 늘어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100조 정도 굴리던 실리콘 밸리 뱅크는 갑자기 200조짜리 은행이 되었다. 실리콘 밸리 뱅크의 주 고객들인 스타트업, IT기업들이 테크붐을 타고 막대한 자금을 투자받았는데, 그 자금의 상당 부분을 주 거래 은행인 실리콘 밸리 뱅크에 예치시켰기 때문이다. 덕분에 실리콘 밸리 은행은 주가가 지난 몇 년 사이 8배 이상 오를 정도로 주목받는 기업이 되었다. 안정적인 은행주라기보다는 빠르게 성장하는 IT회사다운 주가 차트였다. 이 시기, 시그내쳐 뱅크 그리고 퍼스트 리퍼블릭의 예금과 주가 또한 가파르게 상승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이 세 은행은 가장 성공적인 금융 기업이었다.

 

이들 은행이 이렇게 잘나갈 수 있었던 것은, 말 그대로 돈 복사를 했기 때문이다. 은행은 예금이자와 대출이자의 차이, 즉 '예대마진'으로 먹고산다. 예금 금리가 여전히 제로에 가까운 상태에서, 미국 은행들은 대출과 투자를 통해 4% 가까운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 차액은 고스란히 은행의 이익이었다. 이 구조에서는 예금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예대마진을 통해 많은 이익이 발생한다. 자산이 백조일때는 4조의 이자소득이 발생하고, 200조가 되면 8조의 이자소득이 발생한다.

 

다만, 갑자기 예금이 늘어난 실리콘 밸리 은행 같은 경우에는 문제가 조금 복잡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많은 예금이 밀려들었던 상황이라, 이 돈을 다시 대출해 주거나 투자처를 찾기까지 시일이 소모된다. 이에 실리콘 밸리 뱅크는 별 고민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자금을 미국 국채나 미국 정부가 보증하는 모기지 관련 상품에 투자했다. 이러한 국채 관련 상품은 수익률은 다소 떨어지지만, 원금 손실 위험이 없다. 무엇보다도, 공급 / 거래가 활발하기 때문에 원하는 금액만큼 포지션을 빠르게 늘릴 수 있었다. 수익률이 다소 떨어진다는 것은 실리콘 밸리 뱅크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예금자들로부터 공짜에 가까운 예금 이자를 지불하고 돈을 빌리고 있었으니까. 낮은 이자라도 안정적으로 벌 수 있으면, 그 돈이 고스란히 실리콘 밸리의 이익이 된다.

 

무엇이 실리콘 밸리 뱅크를 죽였는가 : 이자율 리스크

 

모든 금융사고는 이처럼 망할 수가 없을 것 같은 완벽한 계획에서 발생한다. 리스크가 없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눈에 드러나는 곳에 한정된 이야기다. 생각지도 못 한 곳에서 리스크가 갑자기 튀어나왔을 때, 완벽했던 계획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 내린다. 실리콘 밸리 뱅크의 경우가 딱 그랬다. 미국 연준이 스탠스를 바꾸어 갑자기 기준 금리를 대폭 인상하자, 안전빵으로 여겨졌던 미국 국채 포트폴리오에서 대규모 평가 손실이 발생한 것이다.

 

채권투자에는 크게 두 가지 리스크가 존재한다. 하나는 크레딧 리스크(신용위험), 다른 하나는 이자율 리스크. 크레딧 리스크는, 돈을 빌려 간 주체가 약속한 날짜에 이자나 원금을 제때 갚지 못하는 리스크다. 돈 빌려 간 집 주인들이 대거 원금을 갚지 못해 드러누워 버렸던,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가 대표적인 크레딧 리스크다. 그동안 발생했던 대부분의 금융 위기들은 이 크레딧 리스크가 만든 것이다. 이자나 원금의 지급을 미국 정부가 보증하는 국채 투자에는 신용 리스크가 거의 없다. 하지만, 이자율 리스크가 남는다. 바로 이것이 실리콘 밸리 뱅크를 죽였다.

 

금융적으로 이자율 리스크를 설명하자면, 내가 투자한 채권의 금리가 약정된 이자율보다 올라가는 것에 대한 위험성이다.

 

새로 발행된 이자율 3%짜리 10년 만기 채권에 투자를 했다고 가정해 보자.

 

구입 당시, 채권이 지급하는 이자율 (3%) = 채권구입당시의 금리(3%)는 같기 때문에 이 채권의 가격은 100이다.

 

그런데, 1년 뒤에 금리가 4%로 오르면 어떻게 될까?

 

새로 발행되는 채권들은 모두 4%의 이자율을 지급한다. 그런데 내가 예전에 구입했던 채권은 여전히 3%의 이자율을 지급한다. 한번 구입한 채권의 이자율은 만기일까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1%의 손실을 보게 된다(금리 4% - 내 채권의 이자율 1%). 그것도 해마다 1%씩 손실을 본다. 만기일까지는 아직 9년이나 남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는 9%의 손실을 (1% * 9년)을 입는다. 이처럼, 금리가 상승하여 내가 구입한 채권의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 이자율 리스크이다.

 

다 때려치우고, 좀 더 피부에 와닿게 이자율 리스크를 설명해 보겠다.

 

내가 이번에 큰맘 먹고 풀 할부 땡겨서 새로 나온 갤럭시 핸드폰을 구입했다. 그런데 쉬벌, 새 핸드폰을 산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삼성전자가 갑자기 내가 샀던 기종의 기계값을 내렸다. 며칠만 기다렸으면 같은 폰을 더 싸게 구입할 수 있었는데, 잠깐의 차이로 그만큼 손해를 봤다.

 

채권도 마찬가지다. 내가 채권을 구입했을 때 통용되던 가격(금리)은 이자율 3%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의 통용되는 가격이 4%로 올라버리면? 씌벌. 요즘 나오는 다른 채권들은 죄다 4%씩 이자율을 준다는데, 내가 구입한 채권만 이자율은 3%랜다. 결국 나만 호구가 된 셈이다. 내가 채권을 구입할 때보다 금리가 올라, 결과적으로 내가 손실을 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자율 리스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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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밸리 뱅크는 이 이자율 리스크에 빠져 많은 평가 손실을 봤다. 다만 미국 정부가 돈을 못 갚겠다고 드러누운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만기일까지 존버를 하면 원금 회수는 가능한 상태였다. 문제는, 실리콘 밸리 뱅크가 고객들의 예금을 가지고 국채 투자를 했다는 것이다. 예금은 고객들이 인출을 원하면 언제든지 지급해 줘야 하는 돈이다. 원래 은행이란, 만기일이 없는 예금을 가지고 만기일이 긴 국채나 대출을 해 줌으로써 예대마진을 먹는다. 갑자기 대규모 예금이 인출되는 일은 어지간해선 없기 때문에 예대마진으로 영업이 가능하지만, 이처럼 대량 인출이 발생하면 큰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다.

 

양날의 검

 

실리콘 밸리 뱅크가 채권으로 대규모 손실을 봤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고객들은 앞다투어 예금 인출을 요구했다. 실리콘 밸리는 늘어난 예금 인출을 감당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손실 상태인 채권 포트폴리오를 손절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더욱더 큰 규모의 평가 손실이 났다. 이는 다시 더 많은 예금 인출을 불러일으키는 뱅크런으로 이어졌다. 사실 작년에 미국 연준이 그렇게까지 금리를 가파르게 올릴 거라고 예상한 전문가는 없었다. 거의 모든 은행들이 이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봤다. 다만 실리콘 밸리 뱅크는 갑자기 늘어난 예금으로 인해 국채에 거의 몰빵을 해 둔 상태여서 그 손실 규모가 더욱 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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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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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는데, 바로 초과 예금의 문제다. 미국의 경우 미국 예금보험공사가 최대 25만 불까지는 지급 보증을 해준다. 즉 은행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은행에 몇천 불쯤 넣어둔 나 같은 일반인들은 예금을 떼어먹을 위험이 거의 없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실리콘 밸리 뱅크의 고객당 예금은 무려 5백 만 달러였다. 즉 실리콘 밸리가 예치하고 있는 예금 대부분은 25만 불을 초과하는 초과 예금이었다. 실리콘 밸리 뱅크의 고객들 대부분은 은행이 망하면 원금 손실을 볼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은행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가 나오자마자,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실리콘 밸리 뱅크가 추구했던,

 

“법인 고객들로부터 많은 예금을 뽑아내는”

 

전략은, 호황기에 은행을 빠르게 성장시키는 데 큰 도움이되었지만 은행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갑작스런 뱅크런의 원인이 되었다. 실리콘 밸리가 무너지자, 비슷한 전략을 추구했던 시그니쳐 뱅크와 퍼스트 리퍼블릭 뱅크 또한 유탄을 맞았고, 침몰했다. 그에 비해, 다른 시중 은행들이 일반인들로부터 조금씩 예치한 쌈짓돈은 이러한 금융위기에도 변동이 거의 없었다. 소액 예금주들은 잃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이미 결과가 나온 실리콘 밸리 뱅크 사태를 가지고, 이들 은행의 탐욕을 탓하기는 쉽다. 소수의 큰손으로부터 많은 예금을 쉽고 빠르게 예치하려는 날먹전략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도 있고, 금리 인상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탓 할 수 도 있다. 훨씬 어려운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익 추구과 과도했고 이를 앞으로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실리콘 밸리 뱅크가 지나친 탐욕을 부렸다고 단정 짓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많다. 지나치게 방만한 대출을 해줘서 신용 손실을 본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 뱅크는 안전빵인줄 알고 투자했던 국채 포트폴리오에서 대규모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손실을 입게된 원인은, 니들 좃되봐라하고 금리를 마구 올린 연준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다. 연준이 제로금리에서 금리 인상으로, 갑작스럽게 스탠스를 바꾼 시점에서, 누군가는 엄청난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실리콘 밸리 뱅크가 이자율 리스크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이자율 리스크를 관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금융상품의 수익률이란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다. 신용 리스크도 제거하고 이자율 리스크까지 완전히 제거하고 나면, 수익률은 아예 제로가 된다. 따라서, 건강한 금융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리스크를 제거할 것인지를 생각할 게 아니라,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게 만들까를 고민해야 한다. 지난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 이후 도입된 방대한 규제는 대부분 신용 리스크를 관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실리콘 밸리 사태 이후로는, 이자율 리스크까지 고려해서 은행이 어떻게 균형 있는 리스크를 취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딱 봐도 졸라 어려운 문제다. 관리해야 할 게 두 배로 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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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태를 개별은행들의 방만한 경영 탓으로만 돌려서 안 되는 이유는, 앞으로 다가올 더 큰 문제에 대한 본질을 흐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큰 문제란 신용 리스크다. 은행들이 이자율 리스크로 입는 손실은 보통 투자금의 10% 내외이다. 실리콘 밸리, 시그니쳐 뱅크, 그리고 퍼스트 리퍼블릭 뱅크 모두 이자율 리스크에 의한 문제였기 때문에 연준이 등판하고 나서 어느 정도 수습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돈 빌려 간 채무자가 돈을 갚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투자 손실은 30%~50% 를 상회한다. 저금리 시대 때 연준이 공급한 막대한 유동성은 이미 경제 전반으로 풀려나가 아직도 회수가 안 되는 상황이다. 이 상태에서 대규모 신용 손실이 발생한다? 은행 몇 개가 망한 이번 사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헬게이트가 열릴 것이다. 아직 본게임은 시작도 안 했다. 갈 길, 참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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