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의 신문인 상해 일일신문에 천장절 축하식에 참예하는 사람은 점심 도시락과 물통 하나와 일장기 하나를 휴대하라는 포고가 났다. 이 신문을 보고 나는 곧 서문로 왕웅(王雄)을 방문하여 상해 병공창장 송식마에게 교섭하여 일인이 메는 물통과 벤또 그릇에 폭탄 장치를 하여 사흘 안에 보내주기를 부탁케 하였더니 왕웅이 다녀와서 말하기를, 내가 친히 병공창으로 오라고 한다 하므로 가보니 기사 왕백수의 지도 밑에 물통과 벤또 그릇으로 만든 두 가지 폭탄의 성능을 시험하여 보여주었다.”
- 백범일지 中 발췌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虹口) 공원에서 의거를 벌였을 때 사용한 도시락 폭탄과 이봉창 의사가 사쿠라다몬에서 일왕을 노렸을 때 사용했던 폭탄은 왕웅(王雄)이란 인물이 깊이 개입돼 있었다. 김구 선생이 직접 부탁할 정도로 ‘신뢰’할 수 있으며, 위장 폭탄을 만들 수 있는 기술자가 주변에 있을 정도의 ‘실력’도 있으며, 폭탄 성능을 직접 시험할 정도의 ‘열의’까지 있는 인물. 해방되고 나서야 이 인물의 실체가 밝혀진다. 바로 오성장군 김홍일이다.
이 당시 김홍일은 상해 병공창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한인애국단을 운영하고 있었던 김구 선생은 김홍일에게 이봉창 의사가 쓸 폭탄을 부탁하게 된다. 이때도 김홍일이 준비를 했지만, 아쉽게 의거는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진 윤봉길 의사의 의거. 김구 선생의 말을 듣자마자 김홍일 장군은 조카인 영재에게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도시락과 물통을 사 오라고 말한 뒤에 병공창 창장인 송식표(宋式驫) 장군의 허락을 받고 포탄창 주임 왕백수(王伯修)에게 폭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게 있다. 하루하루 운영비와 활동비를 걱정하던 한인애국단이 강력하고 위장 가능한 고성능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자원이 있을 리 없었다. 이건 중국 측의 도움, 그리고 김홍일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김구와 김홍일. 왼쪽은 이봉창의 폭탄을 제작한 중국인 왕바이슈.
가장 완벽한 이력의 군인
“나는 2개 연대에 있는 박격포 16문을 한곳에 모으라고 명령했다. 저녁에 적의 진지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한 우리 보병들이 공격개시선에 도착했다는 신호에 접하자마자 박격포 16문이 일시에 포문을 열고 한 곳에 집중적으로 포격을 퍼부었다. 그러자 산이 완전히 무너지는 듯싶은 요란한 폭음과 함께 적의 가장 주력적인 기관총 진지가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 보병들의 진로가 열렸다. 사기충천한 우리 보병들은 그때 우렁찬 만세소리와 함께 돌격전을 감행하여 기어이 적의 산령(山嶺)을 점거하는 데 성공했다.“
- 김홍일 자서전 “대륙의 분노” 중 발췌
이 회고는 중일 전쟁 당시 중국군이 태아장(兌兒庄)전투에 이어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두 번째 전투. 바로 만가령 전투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내용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김홍일은 외국인으로는 드물게 국민혁명군 소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만가령 전투 상황도.
중앙에 철도가 지나는 지점에 일본 106사단이 중국군 방어선에 포위당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하는 게,
“나는 2개 연대에 있는 박격포 16문을 한곳에 모으라고 명령했다.”
라는 대목이다. 이때 이미 2개 연대를 지휘할 정도의 지위와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의 인생을 글로만 바라보면, “만화책을 찢고 나온 주인공”이다. 1898년생인 김홍일은 1920년 중국 구이저우 성에 있는 구이저우 육군 군관학교에 입학, 소위로 임관한다. 이후 독일로 갈지(군사 유학을 권유받았다) 독립투쟁을 할지 고민하다가 러시아로 건너가 항일무장 투쟁 단체인 대한독립군비단에 투신한다. 이후 대한의용군, 한국의용군 등등을 거쳐서 국민혁명군에 들어가게 된다.
남경에 국민정부가 수립된 후, 김홍일은 단위부대 부대장에 임명되었다. 1927년 7월 절강성 수비를 위해서 새로 독립경비연대를 편성했는데, 김홍일이 부연대장 겸 제1대대 대대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김홍일은 부연대장으로 임명된 한 달 뒤 남경을 노리던 손정방 군대를 용담에서 4일 동안 막아내게 되는데, 바로 용담 전투다. 이 공로로 그는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게 된다.
이후, 총사령부 근무를 하게 됐고, 총사령부 기계처 통계과장에 임명된다. 여기서 기계처는 무기와 탄약을 공급, 관리하는 부서다.
이후 2년 5개월간 이어진 북벌전을 마치고, 중국은 국민당 정부의 통치하에 들어간다. 김홍일은 상해 병공창 주임으로 발령받는다. 이것이 윤봉길, 이봉창 의사 의거에 김홍일이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리고, 김홍일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게 되는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김홍일은 그가 발 벗고 사단 창설에 나선 102사단의 참모장이 된다. 이전 참모장이 하필 부상을 당하자 김홍일이 자청한 것이다. 그리고 이 102사단을 이끌고 앞에서 언급한 만가령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이 공로로 그는 소장으로 진급한다. 한국군으로 치면 준장 계급. 1926년 국민당 군에 입대한 그가 12년 만에 별을 단 거다. 엄밀히 말하자면... 12년 만에 진급했다고 보는 게 맞다. 용담 전투 직후 1926년 10월에 소령, 12월에 중령을 달았고, 1927년 3월에 진급한 이후 쭉 대령에 머물러 있다가 1939년 5월 소장으로 승진한다(역시 군인은 전장에서 공을 세워야 한다). 그 직후 제19집단군 참모처장이 된다.
1941년 3월 일본군은 제19집단군을 공격한다. 일본군 제11군을 포함해 제33사단, 제34사단, 제20혼성여단, 여기에 추가로 전차대까지 동원한 대규모 공격이었다. 이때 김홍일은 때마침 병원에 입원중인 19집단군 산하 20군단 19사단장을 대신해 19사단을 지휘하게 된다.
이때 김홍일은 포위 작전을 펼쳐 일본군 34사단 부사단장을 포함 5천여 명의 일본군을 죽이고, 엄청난 숫자의 소총, 야포, 기관총 등을 노획한다. 이게 바로 상고현 전투다.
상고현 전투 상황도. 붉은 선과 화살표가 중국군의 진격로와 방어선이며, 푸른 화살표가 일본군.
이 전투 직후 김홍일은 장개석에게(스케일 봐라) 학생들을 동원하는 계획을 건의한다.
학도병 동원해서 총알받이로 만든다는 무모한 계획이 아니었다. 이 당시 중국군의 평균 수준은... 그냥 ‘농부’였다. 농사짓다가 군대로 끌려온 거다. 이러다 보니 지적 수준이 낮았다. 글자는 고사하고, 시계 보는 법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이들로 구성된 군대로 전투를 수행하는 게 여러모로 어려웠다. 이 당시 국민당은 고등학생, 대학생들은 병역면제를 시켜주고 후방으로 보내 의식주까지 챙겨주고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중국의 미래를 위한 대비.”
라고 할 수 있었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인재를 지키는 모습이니까. 허나, 중국 고위층 인사들 자제들을 전장에 내보내지 않겠다는 꼼수도 섞여 있었다. 김홍일의 생각은 간단했다.
“읽고 쓸 줄 아는 학생들 100만 명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 보다 치밀하고, 계획적인 작전을 구사할 수 있다.”
이 계획은 장개석에게 보고 됐고, 장개석은 이를 허락한다. 문제는 이게 ‘정치’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언제 시행할지 고민을 해 봐야 했다는 거다(학생들이 동원된 건 1945년부터였다). 중요한 건, 이때 김홍일이 장개석의 눈에 들어왔다는 거다.
1946년, 한교사무처장 부임 이후 시찰 나온 장개석과 찍은 사진.
1942년 1월 김홍일은 육군대학에 들어간다. 이곳에서 김홍일은 전술과 전략, 육해공군의 연합작전 및 야전군급 부대의 대부대 운영 전술, 참모 업무에 대한 교육을 2년간 받는다. 당시 최신 트렌드라 할 수 있었던 독일군의 총력전 관련 이론까지 들었다. 이때 김홍일은 영국군 몽고메리 원수 휘하의 사단장, 스탈린그라드 방어 작전에 참가한 소련군 사단장 등등 대학에 초빙된 각국의 지휘관들에게 전투 경험과 작전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
여기까지만 봐도 만화를 찢고 나온 사람인데, 이후는 그야말로 SF라고 말해도 믿지 못할 수준이다.
민족을 위해
중일전쟁에 다시 뛰어든 김홍일은 1944년 1월, 일본의 <1호 작전> 즉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 ‘대륙타통작전’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 당시 일본은 패전이 가시화되면서 제해권을 서서히 상실해 갔다. 전쟁 자체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이때 일본 군부는 중국 대륙을 관통해 중국과 동남아를 육로로 연결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게 된다. 이렇게 되면, 중국 전선을 정리할 수 있는 동시에 ‘귀축영미’를 협상 테이블로 끌고 와 강화협상을 할 수 있을 거란 판단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은 50만 대군과 15,000대의 차량, 6,000문의 야포와 800대의 전차 등등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전력을 긁어모아 한타 싸움을 벌이게 된다. 이게 대튝타통작전이다. 장개석조차 위기의식을 느낄 정도였으니 당시 상황은 알만 했을 거다.
대륙타통작전 당시 형세.
붉은 부분이 일본군 점령지, 붉은 선은 일본군의 진격로,
검은 선은 철도, 별은 중미연합공군 기지.
이 당시 김홍일은 제19집단군 소속이었다. 19집단군이 맡은 전구가 9전구였다. 김홍일은 이곳에서 백만 단위의 병력들이 집결해 싸우는 걸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이때 국민당 9전구 사령장관이 바로 설악(薛岳) 이었다.
설악은 대만에서 전설의 ‘전쟁영웅’이었다. 중국 공산당을 공격했던 초공작전, 국공내전, 중일전쟁 등에서 활약한,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 이 사람은 나중에 국공내전에 패해 장개석이 대만으로 도망칠 때 같이 대만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 설악이 일본군을 상대로 지연작전을 펼치는 걸 직접 목격하게 된다. 설악은 병력과 물자를 최대한 보존하면서 축자적으로 후퇴했다. 시간을 끌며 일본군을 지치게 만든 것이다. 이 경험은 훗날 김홍일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여기까지는 대충 중국에서의 큰 사건들 위주로만 말했는데, 이제까지 중국 군복을 입었던 김홍일에게 뜻하지 않은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다.
한국광복군이 만들어지자, 김구 선생이 한국광복군 사령부 한인 참모장을 부탁한 거다. 김홍일은 참장의 계급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때 한국광복군은 한국 진공작전(기사링크)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이때까지의 김홍일의 인생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을 둘러싼 근현대사의 총합편이었다. 그것도 ‘좋은 쪽’으로 말이다.
그는 평생을 바쳐 항일을 했고, 반공을 했다. 그것도 말로 한 게 아니라 직접 총과 칼을 쥐고 싸웠다. 같은 나이 비슷한 이들이 일본군에 투신했던 이들이 넘쳐났음에도 김홍일은 꿋꿋이 중국군으로, 독립군으로 민족을 위해 싸웠다. 능력도 인정받았으며, 당시로서는 얻기 힘든 기회를 얻어(몽고메리 원수 휘하의 사단장에게 강의를 듣다니)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았으며, 자신이 얻은 힘을 민족을 위해 사용했다. 그가 없었다면,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민족 최대의 비극 앞에서 김홍일은 다시 한번 자신이 이름을 떨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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