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 이야기, 한 줄 요약
1. 영·정조 시기, 황윤석이라는 호남 출신의 선비가 있었다. 그는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지방 출신인 그가 한양에서 관직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중 대표적인 게 '잘 곳'.
3. 황윤석은 한양에 집을 마련하기 힘들었다. 이유로는 한양 집값이 겁나 높았고, 빽이 없어 언제 잘릴지 모르는 판국에 무리해서 한양에 집을 살 수도 없었고, 당시 정부가 관료들의 부동산을 감독하여 자칫 잘못하면 탈이 날 수도 있었다.
4. 때문에 하숙집에 세를 살아야 했는데, 집주인은 무례했고 걸핏하면 집세를 인상해달라고 했다. 게다가 인상되는 집세에 비해 하숙집 서비스의 질은 낮아졌다.
5. 다른 하숙집들은 더 비싸기에 어떻게든 지금 집에서 버티려 했던 황윤석에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사건이 터진다.
이 집주인 생퀴 좀 봐라...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지난 기사부터 보시길 추천!
지방 출신 관료는 왜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부모 지원을 받았을까
1769년 8월 22일 - 『이재난고(頤齋亂藁)』
집주인 김진태(金震泰)가 말했다.
“올해 흉년이 들어 쌀값이 폭등했습니다. 고작 8되를 사는 데 1냥이나 필요할 정도고, 추수를 해도 풍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죠. 저 또한 생계가 너무나 어려워져서, 집을 팔지 않고선 빚을 갚을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래서 이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옮기려고 하니, 나리께서도 방을 빼셔야 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낭패인가. 객지에서 벼슬살이하면서 가뜩이나 어려운데, 갑자기 집까지 옮겨야 하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저도 힘듭니다...
저한테 투정하지 마세요.
쌀값 폭등으로 인해 자금줄이 막히고, 빚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게 되자 집주인은 집을 팔고자 합니다. 그동안은 비용 증가분을 세입자에게 계속 전가하는 방식으로 때워 왔지만, 이젠 그 방법으로도 한계가 온 것이죠. 황윤석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집주인이 집을 팔겠다는데 그가 어쩔 도리는 없었습니다. 조선도 세입자를 보호하려는 몇 가지 시도가 있긴 했지만, 구체적이거나 실효성이 있던 건 아니었거든요.
그렇다면, 당시 월세는 황윤석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었을까요?
집주인은 ‘쌀 8되가 1냥’이라고 언급합니다. 당시 황윤석의 녹봉은 쌀 13말(1말=10되)과 콩 6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주인 김진태는 황윤석에게, ‘기존 계약인 쌀 12말에 별도로 2냥을 더 얹어달라’라고 요구했었죠. 그렇다면, 한번 계산해보겠습니다.
음...
음... 음... ....
벌써 마이 헤드 빙빙...
이게 어려워? 이게 어려워?
놔 봐, 띠발!
휴... 겨우 끝낸 계산,
황윤석 녹봉(월급) : 쌀 13말(130되) + 콩 6말
집주인이 요구한 월세 : 쌀 12말(120되) + 2냥(=쌀 16되), 즉 쌀 136되
따라서 흉년을 기준으로 보면, 집주인 김진태가 황윤석에 요구한 월세는 이미 녹봉으로 받은 쌀을 모두 소비해도 모자란 비용입니다.
그럼, 흉년이 아니라 상황이 조금 넉넉할 때의 사정은 어땠을까요?
1774년, 황윤석의 일기를 보면, 그는 노비와 함께 지출할 한 달 동안의 생활비를 8냥으로 잡습니다. 주인집이 요구한 월세가 한 달에 3냥이었으니, 여전히 적지 않은 부분을 숙박비로 지불합니다. 경제가 나쁠 때는 물론이고, 괜찮을 때도 하숙집 월세로 나가는 비용이 녹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즉, 엥겔지수가 매우 높은, ‘뜻밖의 욜로(YOLO) 살이’를 한 셈이죠.
하숙비 외에도 그가 써야 하는 돈은 꽤 많았습니다. 관복비, 외식비, 책값, 경조사비, 선물 비용, 노비의 생계비 등 예상치 못한 지출이 꽤 있었죠. 반면, 수입은 쥐꼬리만 한 녹봉에 이따금 선물로 얻는 부수입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녹봉으로 감당할 수 없는, 즉 녹봉을 넘어서는 지출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황윤석은 대체로 집주인에게 자금을 대출받아 처리했죠. 결과적으로 한양 생활은 적자였습니다.
그는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부모님의 지원을 받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여러 상인에게 돌아가며 계속 대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운다고 하지만, 그의 좌절감은 나날이 커져만 갔을 겁니다. 하지만 ‘고관대작’이 되면, 이 모든 투자 비용을 회수할 수 있었으니, 눈물을 머금고 존버하는 길밖에 없었죠. (어떤 방식으로 회수하는지 궁금하다면 지난 기사 ‘유희춘 편’ 클릭)
하루 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생긴 황윤석은 새로운 거처를 다시 알아보는데요. 이번엔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지긋지긋한 세입자 신세를 벗어나, 비록 자그마할지라도 한양 안에 ‘내 집’을 얻고자 한 겁니다.
1769년 8월 23일 - 『이재난고(頤齋亂藁)』
이날 밤, 고민에 휩싸이다가 부하직원(서리)인 이성춘(李成春)을 불러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 오도 가도 못할 상황이네. 집주인이 나보고 그토록 나가달라고 하는 상황이니 당장이라도 고향에 내려가고 싶지만, 나의 관직 생활을 응원하시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성춘이 답했다.
“보통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한양에서 2~30냥을 주고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하여 숙식을 해결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집을 사서 나가는 방법입니다. 우리 부처 근처의 집값은 번화가의 집값에 비할 정도는 아니니, 초가집 한 채를 사서 나가는 건 어떨까요? 의향이 있으시면, 저희가 한번 추진해 보겠습니다.”
황윤석의 고민을 들은 이성춘은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온 관료들이 주거난을 해소해 왔던 방법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하나는 결혼으로 집을 얻는 방법입니다. 2~30냥의 비용을 상대 집안에 지불해서 두 번째 부인(첩)을 맞이하고, 그 부인 집에 들어가 사는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비용이 부담됐을 뿐 아니라 황윤석의 부인이 반대했기 때문에 택할 수 없었죠.
첩이요?
서방님 뜻이 그러시다면 들이시지요...
왜 활...?
안 들이면 될 거 아니오~~!!
두 번째 방법은 비록 초가집이라도 구매하는 방안이었습니다. 황윤석은 집을 구매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부동산 정보를 폭넓게 파악합니다. 당시 그가 모은 1769년 한양의 부동산 시세가 전해지고 있는데요. 한 번 보시죠.
1769년 황윤석이 수집한 주택 가격
<클릭하면 확대>
당시 한양의 평균 집값은 초가집은 한 칸당 10냥, 기와집은 한 칸당 20냥이었다고 합니다. 황윤석은 자신이 근무하는 종부시(宗簿寺, 왕실 보훈 부서)에서 가까운 집들을 주로 찾아보았는데요. 출근 시간이 5분에서 10분 사이라니,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도 경기도에서 출퇴근하는 사람과 한양에서 출퇴근하는 사람의 하루는 몇 시간이나 차이가 나잖아요. 조선시대 관료의 출근이란, 당사자부터 노비까지 집안 전체가 긴장해야 하는 하나의 사태였으니, 황윤석이 이런 집들에 군침을 흘린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직세권’ 집들은 황윤석에게 너무 비쌌습니다. 아주 번화가인 곳들보다는 저렴했지만, 그렇다고 황윤석에게 괜찮은 집값은 아니었습니다. 그 집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이 있었기 떄문인데요. 우선 몇몇 관청들과 가깝다는 지리적인 장점이 있었고, 관청이 가까운 만큼 그 동네 집 대부분이 관료에게 알맞은 스타일로 리모델링 되어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관료에게 알맞은 리모델링이라... 예를 하나 들어보죠. 당시 관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중 하나는 ‘말’이었습니다. 때문에 말을 매어둘 수 있는 헛간의 유무에 따라 집값이 크게 차이 났습니다. 그래서 관청 인근 주택들은 헛간을 비롯, 관료들에게 최적화된 옵션들을 넣어둬서 비싼 집값과 월세를 자랑했습니다.
황윤석이 조사한 집값에는 다른 재밌는 정보도 있습니다. 그가 조사했던 110냥짜리 초가집의 1년 전셋값은 60냥으로, 집값 대비 전셋값이 약 54%의 비율이었습니다. 2022년 6월 기준 한국의 매매가격 대비 전셋값 비율은 63.8%입니다.
전세제도를 유지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과 볼리비아 등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중 가장 발달한 곳이 한국이죠. 황윤석이 수집한 정보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전세라는 개념이 얼마나 오래됐고, 또 집값 대비 전셋값을 결정하는 사회적 통념 또한 얼마나 오랜 시도 끝에 정착되었는지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집을 찾아보던 황윤석은 결국 ‘한양에서의 내 집 마련’을 포기합니다. 그가 ‘영끌’로 모을 수 있는 예산은 30~50냥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인에게 주택 구매 자금을 통째로 대출받기도 했습니다만, 그날그날의 가계부를 적는 황윤석이 선택할 만한 수단은 아니었죠.
황윤석은 집 구매를 단념하고 다시 셋방살이를 선택합니다. 이전보다 월세는 더 비싸졌지만, 계산기를 두드려 본 끝에 나온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하지만 그때마다 집주인과의 갈등과 뒤따르는 이사는 황윤석을 힘들게 했던 연례행사였습니다.
띠발! 세상 살기 졸라 힘드네... 흑흑
1770년 6월 22일 - 『이재난고(頤齋亂藁)』
종묘 인근의 김선달 집에서 월세를 살기 위해 알아보았다. 집주인인 김선달의 성격도 둥글둥글하고 집도 새로 지은 것이라 맘에 든다. 하지만 이미 방이 많이 나가, 내가 지내게 될 방은 대문과 너무 가까웠다. 게다가 비용도 이것저것 포함하여 6.5냥이나 더 내야 하니, 조금 더 고민해 봐야겠다.
1770년 7월 28일 - 『이재난고(頤齋亂藁)』
집주인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 나는 이사 갈 것이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데 떠나게 되어 아쉽네, 빌린 돈 4냥은 곧 갚을 것이니 받으러 오게나.”
사실 저 인간들은 예의도 없고 정도 없는 인간들인 데다가 나도 돈이 없으나, 모름지기 사대부가 아랫사람들에게 각박하게 굴 수 없어 예의 있게 말했다.
저녁에 이수득의 집으로 이사했다. 예전 집과 그리 멀지 않아 금방 옮길 수 있었다. 그의 성격은 온후해 보이니, 전 주인과 지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1770년, 또다시 집주인과의 갈등으로 이사하게 된 황윤석은 새로운 셋방을 구할 때 최우선 고려 사항으로 ‘집주인의 성격’을 꼽습니다. 황윤석의 일기만 보면, 집주인들이 황윤석에게 젠틀하게 대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집주인들은 엄연히 계약이 있음에도 물가 상승분을 끊임없이 세입자에게 전가하고, 자신의 건물을 매매할 때는 세입자와 한 마디 상의 없이도 없이 결정했습니다. 전세 사기도 존재했었죠. 전세 사기는 지난 편(링크)에 다뤘었던 노상추의 일기에서도 종종 등장한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집주인이라고 다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요동치는 한양의 물가와 부동산 시장은 기본적으로 자연재해와 국가 경제와 같은 큰 요인들이 있었으나, 상인과 코어 권력이 결탁한 커뮤니티의 영향력도 간과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조선의 경제는 그 상인 집단과 권력이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맥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던, 변두리 집주인들은 자신 또한 ‘영끌’해서 사업체 하나 차린 건데, 까다로운 요구만 많고 돈은 안 되는 관료 양반들을 세입자로 받다가 파산하기도 했죠.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들지 않나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아무리 세입자라 하더라도 대부분이 관료였고, 심지어 그중 고위 관료가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집주인은 무리수를 두는 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황윤석의 일기에서 드러납니다.
<계속>
출처
-1769년 황윤석이 수집한 주택 가격 : 정수환, 「18세기 이재 황윤석의 화폐경제생활 - 『이재난고』 1769년 일기를 중심으로 -」, 2002, p. 17의 <표 4>를 수정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검색어 제한 안내
입력하신 검색어에 대한 검색결과는 제공하지 않고 있습니다.
딴지 내 게시판은 아래 법령 및 내부 규정에 따라 검색기능을 제한하고 있어 양해 부탁드립니다.
1. 전기통신사업법 제 22조의 5제1항에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삭제, 접속차단 등 유통 방지에 필요한 조치가 취해집니다.
2.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청소년성처벌법 제11조에 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아동·청소년이용 음란물을 제작·배포 소지한 자는 법적인 처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4.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에 따라 청소년 보호 조치를 취합니다.
5. 저작권법 제103조에 따라 권리주장자의 요구가 있을 시 복제·전송의 중단 조치가 취해집니다.
6. 내부 규정에 따라 제한 조치를 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