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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타버스·NFT·챗GPT

 

IT와 경제경영 분야에는 유행이 있다. 한때는 모두가 블록체인 이야기를 하며 관련 도서와 강의가 우후죽순 쏟아졌다가, 또 한때는 모두가 ESG 이야기를 하며 훅 달아올랐다. 불과 얼마 전에는 또 세상 모든 것을 메타버스라는 키워드로 연결하던 적도 있었다. 이게 발전하면 코인 시장에도 '메타버스 코인'이니 'ESG 코인' 따위가 등장해 투자를 빙자한 폰지사기(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이자나 배당금을 지급하는 방식의 다단계 금융사기)가 생겨날 정도로, 어떤 키워드가 인기를 얻으면 여기저기서 해당 키워드를 오남용한다. 특히 그 키워드가 영어로 되어있고, 언뜻 들었을 때 무슨 말인지 잘 알기 힘든 어려운 용어일수록 더하다.

 

'앞으로 이게 세상을 지배할 겁니다. 이걸 모르면 미래에 대비할 수 없어요.' 자기 계발 경제경영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는 각종 명사들과 인플루언서, 전문가들은 어떤 키워드가 떴다 하면 모두가 합세해 '이 키워드가 대세다. 모르면 뒤처진다.' 소리 높여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 얘기만 한다.

 

물론 여기에는 장점도 있다. 일반인에게 다소 어려울 수 있는 트렌드를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도록 설명해 주고, 새로운 지식을 준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장점이다. 하지만 이것을 이용해 사람들의 불안을 조성하고, 공포를 이용해 강의를 팔거나 조회 수를 높이는 행위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2. 챗 GPT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

 

요즘은 어딜 가나 챗 GPT 이야기로 세상이 한바탕 시끄럽다. 챗 GPT는 인공지능이 사용자의 대화를 통해 질문에 답하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이다.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직관적으로 와닿도록 표현하면 한마디로 '네이버 지식인'의 발전된 인공지능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질문하면 사람 대신 인공지능이 즉석에서 답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인에 커플이 기념일에 갈만한 데이트 코스부터 진로 고민, 정신과 상담, 전문 지식까지 온갖 질문과 그 답이 올라오듯, 챗 GPT도 어떤 질문을 하든 인공지능이 즉석에서 자료 조사를 해서 그럴싸한 답변을 준다. 여기에 추가 질문에도 답을 해주고 의문점이 있을 때 지적하면 즉각 그에 대해 수정까지 한다니 앞에 전문가를 앉혀두고 상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질문의 답변이 내 수준에 너무 어렵게 느껴지면 '쉽게 설명해 줘'라는 요청에도 응답한다고 하니, 이 기술이 더 발전하면 자료조사를 위해 도서관을 뒤지거나 전문가를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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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에 공포를 느낀다. 이번 챗 GPT뿐만 아니라,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일에도, 인공지능이 근사하게 섬세한 그림을 그려낸다는 소식에도, 사람들은 민감하게 반응하며 불안을 키운다. '인공지능에 내 밥줄을 빼앗기는 것이 아닌가?'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하게 되면 인간은 필요 없어지는 게 아닌가?' 그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공포다. 인공지능이 내 밥줄을 끊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즉각적으로 내 목숨을 위협하는 공포는 아니다. 하지만 이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이, 더 나아가 인류 전체가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허무 앞에 하얗게 질린다. 

 

혹시 이와 같은 공포를 느껴본 적 있다면, 부디 인공지능의 발전을 공포로 받아들이는 태도 자체를 뒤집어 보았으면 한다. 다소 불편한 말일 수도 있지만, 인공지능의 발전에 공포를 느끼는 것은 '노예의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

 

3. 역사는 반복된다

 

인간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융성한 문화와 정치를 발전시키고, 자본을 지닌 일부 사람은 삶의 의미와 여유를 동시에 누릴 수 있던 시대를 떠올려 보자. 먼저, 가깝게는 근대 제국주의 유럽. 이때 자본을 가진 유럽의 백인들은 그 어느 시절보다 보람 있고 즐거우며 여유 있는 삶을 살았다. 곳곳에 놓인 철도로 대륙을 여행하고 신기한 물건과 동식물을 구경하고 수집하며, 문학과 미술, 음악 할 것 없이 예술을 발전시켰으며, 과학 등 여러 학문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때 지배층들은 여유롭게 세상을 누리며 여유를 즐기는 동시에 발전을 거듭했다. 발터 벤야민이 제시한, '산책자(flaneur)' 개념만 생각해 봐도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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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는 19세기 프랑스의 부르주아 계급이 여유롭게 파리를 거닐며 군중의 삶을 관찰하는 데서 비롯된 개념이다. 그들은 햇볕 좋은 낮에 좋은 옷을 갖춰 입고 양산을 들고서 거리에 나와 공원이며 도심을 이곳저곳 여유롭게 거닐며 인생을 즐겼다. 그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일상이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 어떤 현상으로까지 정의할 수 있는 정도였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낮에 자유롭게 아름답게 조경된 도시를 거니는 삶. 우르르 몰려가 줄 서서 밥을 먹는 짧은 점심시간 잠깐 말고는 온종일 사무실에 갇혀있는 현대 직장인으로서는 꿈과 같은 삶이다. 이런 삶의 바탕에는 식민지를 대상으로 한 근대 유럽의 '국가적인 노동 및 자원 착취'가 있었다. 유럽인들이 한가롭게 공원을 거닐 때 식민지인은 죽어라 농장에서 일했다. 같은 유럽인이라 해도 가난한 서민은 조그만 아이일 때부터 공장 노동에 동원돼 그야말로 기계처럼 일했다.

 

좀 더 과거로 돌아가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된 아테네의 민주 정치를 떠올려 보자. 자유로운 토론, 충분한 사유, 모두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애쓰는 민주주의가 근대도 르네상스 시대도 아닌 그 옛날 '고대' 아테네에서 처음 꽃 핀 데에도 비슷한 이유가 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생존을 위한 노동의 대부분을 외국인 노예들이 담당했다. 그 덕에 일상이 여유로 가득 차 있었던 아테네 시민들은 정치 참여를 할 만한 시간이 많았고 그 결과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었다. 이때 노동을 담당하던 노예들은 주로 '전쟁'으로 충당되었다. 위의 산업혁명 시기에 전쟁으로 식민지를 정복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약적인 인류의 발전과 삶의 여유가 공존하던 시대는 언제나 약자의 노동착취와 희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런데 인류는 기계가 발전해 단순노동을 대체하는 것도 두려워하고, 인공지능이 발전해 지식과 예술 노동을 대체하는 것도 두려워한다. 서빙 로봇이 나오면 서빙 직원들은 무엇을 먹고사냐고 불안해하고, 그림 그리는 AI가 나오면 그러면 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들은 무엇을 먹고사냐면서 불안해한다. '누군가에게 고용되거나 일을 받아 대가를 지불받는 노동자' 그 단단한 정체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불안을 목도할 때마다 조선 시대 어느 관대한 부잣집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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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관대한 양반이 한평생 일해준 노비에게 동정심을 느껴, 그 노비를 불러다 노비문서를 주면서 말했다. '땅을 조금 내어주고 노비 문서를 불태워 줄 테니, 자유로운 평민으로 살 거라.' 그러자 그 노비는 떨리는 손으로 노비문서를 받아 들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양반은 당연히 노비가 감동에 겨워 우는 줄 알고 괜찮다며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다. 하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노비가 노비문서를 도로 건네더니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주인님,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잘못이 있다면 시정하겠습니다. 이 몸을 죽도록 때리셔도 좋으니 제발 저를 버리지만 말아주세요. 일을 더 열심히 하라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4. 밥벌이는 새로 생긴다

 

다시 인공지능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일론 머스크 같은 이들이 인공지능의 발전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느냐고? 정작 인공지능 개발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이가 바로 일론 머스크다. 안타깝게도 대부분 사람이 갖는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기껏 해봐야 자기 밥그릇에 한정돼 있기 때문에, 위 노비의 두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밥그릇을 빼앗길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새로운 밥그릇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지던 창의적인 예술 영역을 인공지능이 수행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사람들이 '창의적'이라고 여기는 많은 일들도 대가를 받고 행하는 지루한 노동으로 전락한 일이 많다. 미대를 나오거나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 중, 과연 예술혼을 불태우며 온전히 '자기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일례로 디자이너들은 사장이 모니터 뒤에서 '더 크게! 아니 더 작게'를 번복하고 '심플한 동시에 화려할 것'을 요구하면 '차라리 네가 하세요'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고 한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차라리 네가 하세요.'를 현실화할 수 있는 최고의 길이다. 그런 일을 인공지능이 대체해 인간 대신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면, 미래의 예술가들은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예술에 종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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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슬라의  인공지능(AI)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

출처-<테슬라 유튜브>

 

게다가 인공지능은 오히려 인간의 예술을 발전시킬 것이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예술이 얼마나 풍성해질지 설레지 않는가? 예컨대 미술이라면, 인공지능은 미적 감각이 있는 인간이 자신의 감각을 이용해 기술이 다소 부족해도 근사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최고의 도구가 될 것이다. 요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손 그림이 아닌 아이패드로 일러스트 작업을 하는 것처럼 인공지능은 훌륭한 도구일 뿐이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미술이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손에 동물의 피를 묻혀 벽에 그린 벽화만이 인간의 미술이고, 아이패드로 그려낸 그림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언제까지 아이들을 석상 앞에 모아놓고 손 아프게 스케치를 시키며 아이들을 원근법을 구사하는 기계로 만드는 미술만이 미술일 수 있겠는가? 그런 시대는 이미 끝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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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형 로봇과 키스하는 일론 머스크 사진. AI가 만들었다

출처-<미국의 한 건설회사 CEO 대니얼 마빈 트위터>

 

물론 인공지능이 인간의 미적 감각까지 뛰어넘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미적 감각을 발휘해 그려낸 그림을 '아름답다'고 인식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인식의 주체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아름다움을 인공지능에 빼앗길 수 없다. 우리가 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고흐의 작품을 볼 때 그의 삶을 떠올리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는 아름다움을 인식할 때 눈에 보이는 선과 색만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그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이런저런 배경(context)을 함께 인식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어떤 소설가는 소설 한 편을 쓰기 위해 소설 속 가상의 지역의 지도까지 그린다고 한다. 소설뿐 아니라 인문 교양서, 자기 계발 책의 저자들도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짧게는 며칠 밤, 길게는 수년을 글쓰기 그 자체가 아닌 자료 조사하는데 할애한다. 드라마는 또 어떤가? 대부분의 드라마는 작가 혼자 쓰는 게 아니라, 수많은 새끼 작가가 붙어 자료조사를 하고 메인 작가와 함께 써내는 합작품이다. 인공지능이 덜어주는 부분은 바로 지루한 자료조사와 새끼 작가들의 밤샘 노동이 될 것이다. 또한 인공지능은 어떤 작가의 저작물이 '표절'이 되지 않도록 기존 작가와 지나치게 유사한 문장을 걸러내 준다든가 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 좋은 콘텐츠를 가졌지만 글쓰기 실력이 부족해 대필 작가를 구해야 하는 경우에도, 인공지능 글쓰기는 좋은 대안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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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글쓰기는 대략적인 아이디어를 입력한 뒤, 인공지능이 써낸 초고를 다듬기만 하는 식으로 변할 수도 있겠다. 게다가 문체도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필자도 주제와 구상만 입력하고 인공지능이 쓴 글을 다듬는 게 더 편할 듯하다. 그렇게 된다면 하루에도 수십 편의 '좋은' 글을 써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직접 글쓰기 인공지능을 써보니 아직 실제로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형편없어 손수 쓸 뿐이다.

 

5. 주인을 맡자

 

인공지능이 여러 방면에서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은 공포가 아닌 축복이다. 당장 대한민국만 놓고 생각해 보자. 젊은 세대가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언론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당장 나라가 망할 것처럼 공포심을 조성한다. 젊은 인구의 감소가 문제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노동력 문제 때문이다. 만약 인공지능이 젊은 세대의 지식 노동, 창의성까지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다면 인구가 줄어드는 게 왜 문제가 되겠는가? 아이를 낳고 안 낳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어떻게 생각하면 인구수를 정부 차원에서 줄이거나 늘리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인간을 가축 취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과거 정부는 임신할 수 있는 나이대의 여성이 어느 지역이 얼마나 살고 있는지 표시한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들어, 국민이 가축이냐는 빈축을 사기도 했었다.

 

인공지능이 노동과 생산을 도맡는다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가축화시켜야만 했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터이다. 인공지능 때문에 불안하다면, 자신의 가치를 조금 더 높게 설정하길 바란다. 우리는 하루 종일 일해야 겨우 배를 채우는 노예가 아닌, 한적하게 대낮의 도시를 산책하며 사유하는 지배자가 될 수 있다. 그때가 되어서야 인류는 비로소 '생존을 위한 생산'이 아닌 '가치 있는 삶'을 진정으로 향유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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