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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칸방 신혼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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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괴정동의 모습 

출처 - <KBS>

 

1970년대 부산 사하구 괴정동.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달동네 어느 한 단칸방에서 우리 부모님의 신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갖춘 것 하나 없는 자그마한 방에는 매일 줄담배를 피우시던 할머니의 담배 연기가 그득했다. 너구리굴 속 대장이었던 할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자주 이런 말을 했고 한다.

 

"아들아, 쟈는 이제 내치라. 아도 못 낳는 년을 뭐 할라고 델꼬 사노?"

 

할머니 앞에서 맞담배를 피우던 아버지는(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서도 방안에서만 담배를 피웠고, 동생이 태어난 뒤에야 마당으로 나가셨다) 허공에 연기를 길게 뿜으며 생각에 잠겼다.

 

"다른 여자라고 뭐 별 볼 일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할머니는 결혼한 지 몇 년이 되어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어머니를 내치자고 했다. 배를 타는 직업 특성상 아버지는 한 번 외국으로 나가면 6개월~1년 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육지를 밟으면 뭐 하나? 집에 오는 날보다 술집이나 다방에 줄곧 붙어있어 어머니 얼굴을 보는 시간이 적었다. 아버지의 생활 방식을 보면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모르는 할머니는 결혼 후 한참 시간이 지나도 손주를 품에 안아보지 못하는 이유를 며느리 탓으로 돌렸다. 며느리가 너무나 못마땅했다. 다만 조금 의외였던 부분은, 할머니가 어머니를 구박할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감쌌다는 점이다. 그것이 사랑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거만함 때문이었는지 어머니를 보호하는 행동의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이후 아버지의 행보를 보면 그의 감정선을 이해하기엔 이랬다저랬다 혼란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내만 문제 있는 기가?

 

한번은 1년 만에 항해를 마치고 집으로 온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미국에서 여자 하나를 만났는데 같이 살자카더라. 태권도장도 채려 준다는데, 아 하나 낳아 오면 니가 함 키워볼래?"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기분 나쁜 물음에 어머니는 대답했다.

 

"아도 낳아주고, 태권도장도 채려준다는데 거서 살지 와 왔노?"

 

이 사건 이후, 아버지의 갈팡질팡한 태도에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어디 어머니 혼자의 문제일까? 아이 하나 낳지 못했다고 여자로서 너무나 치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어머니가 데려온 아이를 키우겠다고 대답하거나 혹은 아이를 낳지 못해 미안하니 나를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생각하고 던진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자, 아버지는 화가 난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차려 놓은 저녁상을 보고도 동네 술쟁이 친구들을 만나러 구멍가게로 향했다.

 

아버지의 떠보는 듯한 행동은 또 한 번 이어졌다. 큰아버지의 둘째 아들을 예쁘게 여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형님 둘째 아들 양자로 데리고 올까?"

 

이번에 어머니는 참지 않았다. 지난번에 겪은 치욕스러움을 되갚기라도 하는 듯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남의 새끼를 왜 내가 키워야 되는데?! 니 혼자서 키아라!!"

 

집 밖으로 나다니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거기다 아이까지 생기지 않는다고 어른들이 압박하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를 원하는데 임신이 되지 않는다면, 내 생각으론 서로를 위해 갈라서는 것이 나을 터인데… 서로 괴로워하며 억지로 붙어 있었던 것은 아마 그 시대의 사회통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가족이 공중분해 되기 직전, 오랜 기다림 끝에 내가 태어났다.

 

아버지의 실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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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때부터 허약했던 난, 우유도 소화하지 못해 토했다

출처 - <KBS>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약하게 태어났다. 달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2.8kg으로 태어나 인큐베이터 신세를 졌다. 인큐베이터에서 나오고 나서도 우유를 먹지 못하고 끊임없이 토하는 바람에 또 1kg 정도가 줄었다.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않고 목이 쉬어 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밤새 울어 댔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데려간 병원에서는 하루빨리 아기가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겨우 얻은 아이 배를 째고 수술한다고 하니, 어머니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울면서 큰고모에게 전화했다. 보통 시누이 많은 집은 시집가서 고생이라는 말이 있지만. 우리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워낙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닌 탓에 고모들은 어머니에게 “같이 살아주는 것만 해도 고맙다”고 말했다고 한다. 덕분에 객사하지 않고 목숨 부지한다며 연신 고마움을 표하며 어머니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밀양에서 고모들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기가 너무 작고 말라비틀어진 상태인 것에 한 번 놀랐고, 혈관이 얇아 링거 꽂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기에 간호사가 머리에 링거를 꽂았는데 그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고 한다. 이후 수술 면담을 위해 들어간 진찰실에서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병명은 모릅니다. 배를 한 번 열어봐야 안에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고모들은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고모1: "이 손바닥만 한 아 배를 째면 살겠습니까?"

 

고모2: "야 말이 맞심더. 죽어도 집에서 죽는 게 낫지예."

 

경황이 없는 어머니를 데리고, 굵은 링거 바늘을 머리에 꽂은 채 누워 있는 나를 포대에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병명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증상을 앓고 있었고,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한 시절도 아니었으니 작고 약한 아기가 수술대에서 버틸 수 있으리라는 보장을 누구도 할 수 없었다. 괜찮아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당시 어른들은 오히려 그 상태에서 죽을 확률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비장한 각오로 나를 집으로 데려온 것이 맥 빠질 정도로 나의 상태는 호전되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젖을 먹기 시작했는데 토하지 않고 잘 소화했단다. 어머니 추측으로는, 병원에서 우유를 먹이다가 체한 것이 아닌가 했다는데 뭐 여튼. 수술해서 죽었거나, 살았어도 배에 큰 흉터를 지닌 채 살았다면 조금 억울했을 것이다. 고모들 덕분에, 그녀들의 선방으로(?) 흉터 없는 건강한 몸을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어머니는 아버지 없는 집에서 홀로, 여러 차례 식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몇 달 뒤,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요즘 같은 산후조리는 꿈도 꾸지 못하던 시대에 살았던 어머니는, 산후, 제대로 조리하지 못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지도 못해 힘들어하고 있었다. 조금만 몸을 써도 근육통과 피로에 시달렸다. 평생 아버지에게 뭘 사달라고 한 적이 없던 어머니는 이때 처음으로, 아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이야기했다.

 

"통닭이 먹고 싶은데… 한 마리만 사다 주면 안 되겠나?"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늦은 밤, 흥건히 술에 취한 아버지는 손에 검은 봉지 하나를 들고 집에 들어왔다. 봉지를 방바닥에 집어 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애 새끼가 이 생닭보다 작노!!"

 

봉지 속에는 통닭이 아닌 생닭 한 마리가 들어있었다. 갓 태어났을 때는 물론이고, 자라면서도 잔병치레를 많이 하던 나는, 베트남 참전 용사로 친구들 사이에서 영웅 대접을 받던 아버지에게 실패작처럼 보였을 것이다(물론, 친구들이 아버지를 떠받든 건 술을 사주던 당신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먹고 싶었던 건,

 

떡볶이 보니 군침이 싸악-도는.. 80년대 시장에~ 가면!  _ 옛날티브이 고전영상 옛날영상 3-51 screenshot.png

발가벗은 요놈이 아니라

 

떡볶이 보니 군침이 싸악-도는.. 80년대 시장에~ 가면!  _ 옛날티브이 고전영상 옛날영상 3-56 screenshot.png

냄새부터 그윽한 가마솥에 튀긴 노란 통닭이었을 터.

출처 - <MBC>

 

조금 짜치긴하지만, 나도 아버지에 따지고 들어보자면! 내가 실패작(?)으로 태어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지대하다. 후성유전학에서는 부모가 받은 트라우마와 스트레스가 자녀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2세에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 아마, 아버지는 전쟁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고, 어머니는 임신 전후 (아버지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생활비가 부족해 어머니는 물에 밥을 말아 먹으며 대충 끼니만 때워야 했으니… ‘나’라는 결과물은 아버지에게 모든 화살을 돌리기에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폐륜아라고 비난마시라. 이 정도는 괜찮잖아?!)

 

아버지는 그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이 상황이 못마땅하고 화가 날 뿐이었다. 그때 시작된 아버지의 횡포(?)는 내가 성장하는 내내 이어졌다. 왕따 당하던 중학교 1학년 겨울 어느 날, 반주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나에게 흘리듯 말했다.

 

"니 다음 주부터 유도관 다녀라."

 

아버지 말은 항상 통보였다.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어릴 때는 작아도 그냥저냥 봐줄 수 있었으나, 자라면서 말수가 줄어들고, 예민하게 구는 아들을 지켜본다는 건 아버지에게 큰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를 유도관에 보내 본인처럼 강인한 남자로 키우고 싶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난 아버지와 그 흔한 공놀이 한 번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언가를 직접 가르쳐 주거나 가족과 함께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요즘 결혼한 내 친구들이 육아의 고충을 토로하면서도 동시에 그만큼 육아의 즐거움도 크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 대화를 나눌 때마다 어릴 적 부족했던 아버지와의 시간이 자연스레 떠오르며 씁쓸해진다. 나와 동생은 아버지와의 추억이라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굳히기 하나만 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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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부산 남포동에 위치한 한 오락실의 모습

출처 - <KBS>

 

일방적인 통보로 유도관을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친구를 잃었다는 좌절감에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던 때라, 오히려 다른 곳에 정신을 쏟을 필요가 있던 시기였다. 유도라는 운동은 내게 별 거부감 없이 다가왔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첫날부터 꽤 인상 깊었다. 수련 시간이 되어도 도장에 오지 않는 학생을 두 명의 관원이, 추노꾼이 도망간 노비를 잡듯 오락실에서 포획해 왔다.

 

"이놈의 짜슥이, 어디 시간됐는데도 오락실에 있노?"

 

키가 큰 관장님은 오락실에서 잡아 온 뚱뚱한 관원의 유도복 앞섶을 잡아 십자 조르기 자세를 잡은 뒤 그대로 위로 들어 올렸다. 덩치 큰 친구였지만, 목이 졸린 채로 허공으로 들어 올려져 괴로운 소리를 냈다.

 

"끄이이이….!!"

 

지금은 폭행죄로 뉴스에 나올 수도 있는 현장이지만 90년대 이런 광경은 굉장히 흔했다. 학교에서 뺨을 맞고, 학원에서 엉덩이를 맞고, 빠따로 맞는 생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았다. 그랬던 시절이었기에, 나를 비롯한 도장에 있던 친구들은 응징당하는 친구를 손으로 가리키며 낄낄거리며 웃었다.

 

"여기는 미친 곳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공부한다고 학원에 다니는 것보다 역동적인 무언가를 하고, 날마다 사건사고가 벌어지는 유도관은 신선하고 즐거운 공간이었다. 어린 시절 겪은 경험 중,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상하리만큼 찝찝한 중학교 1학년의 기억이 그나마 유도관에서 얻은 긍정적인 기운으로 상쇄되었다. 이건 뭐랄까… 마치 진흙탕에서 뒹굴고 온몸이 끈적거릴 때, 시원한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첫날의 강렬했던 기억과 그다지 푹신하지도 않은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남녀 구분 없이 대련하고, 회전 낙법을 배우면서 휙휙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유도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자유로운 분위기와 과격한 동작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고 그날부터 유도에 매료되어 몇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유도관에 나갔다. 열심히 나간다고 해서 실력이 느는 것은 아니었다. 적절한 타이밍에 다리를 걸어 엎어 치는 동작은 나에게 쉽지 않았다. 다만 그중 자신 있었던 동작은 굳히기였다.

 

상대 선수 공격에 본능적으로 반사신경 발동한 강호동 (소름주의)│KBS 151201 방송 4-55 screenshot.png

출처 - <KBS>

 

유일하게 내가 잘할 수 있는 동작. 굳히기에 집착했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몸싸움은 도장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띤다. 그냥 마구잡이, 엉거주춤 싸움이다. 그럴 때 근거리에서 손만 내밀면 나의 작은 힘으로도 큰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동작이 굳히기라고 판단했고, 한 동작 수련에만 집중한 것이다(나도 나름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나보다 두 살 많은 동네 형에게 부탁해 굳히기 동작을 연습했다. 처음 몇 달은 체격 차이가 나고 보다 오랜 기간 유도를 배운 형이었기 때문에, 나의 포박은 쉽게 풀어졌다. 하지만 이내 나도 근력이 붙기 시작했다. 연습 도중 형이 나에게 소리친 날이었다.

 

"야 새꺄 죽겠드아…! 빨리 풀어라!!"

 

드디어 굳히기에 성공한 것이다. 기쁨도 잠시 동네 형의 패배 선언 이후, 유도에 대한 흥미가 점차 사라졌다. 이상하리만큼 빠르게, 며칠 만에 유도를 그만두게 될 만큼 재미가 없어졌다. 내게 필요한 동작을 터득했고, 그것 외엔 내가 잘할 자신이 없었던 것일까? 혹은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겠다 싶었는지? 한 놈 정도 거품 물게 할 자신이 생겼다. 

 

딱 이 정도면 되었다.

 

더 이상 유도관에 다닐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실제로 훗날 고등학교에서 장난 걸던 일진 한 명 입에서 침이 흐를 때까지 조르기를 한 적이 있으니, 얼추 유도관에 다닌 보람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버지 '덕분'이라는 생소한 경험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부모님을 보면서 깨달은 것들이다. 

 

조금이라도 무의미하면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습관. 

 

성인이 될 때까지 수십 년간 "부모님의 다툼"이라는 무의미한 시간을 지켜보았다. 그런 시간 낭비에 대한 염증이 생겼다. 까다롭게 시간의 ‘가치’를 따졌다(흔히 요즘의 가성비, 시성비 같은 느낌일까나). 그렇다고 가치 있는 것만 하겠다는 건가? 그건 아니었다. 내가 판단하기에 투자할 가치가 없겠다, 저렇게 시간을 보내기는 싫다 하는 것들은 빨리 포기해 버렸다. 모두 주관적인 선택이었다. 어떻게 보면 도피성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러한 경향성은 나이가 들어서도 쓸데없는 기 싸움이나 다툼, 분쟁을 피하는 생활 방식으로 이어졌다. 

 

두 살 많은 동네 형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그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내 이제 유도관 그만 다닐랍니다."

 

주말 연속극 <목욕탕집 남자들>을 보던 아버지는 뒤에 서 있던 나를 보기 위해 TV에서 눈을 돌렸다. 취기가 오른 아버지 얼굴은 마치 홍시 같았다. 의외로 상황은 싱겁게 종료되었다. 고함을 칠 줄 알았던 아버지는 웬일로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라."

 

그만두는 이유를 물어보지 않은 건 놀랍지 않았다. 그다지 나의 선택에 큰 관심이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 선택에 태클을 걸지 않았음에 놀랄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쿨함. 적응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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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즐겨 보던 주말 연속극 <목욕탕집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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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쌍문동 목욕탕을 운영하는 노부부와 그의 대가족 이야기를 다뤘다.

 

방에 들어와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뭐지. 왜 순순히 그만두라고 하시지?"

 

아마, 아버지가 보기에 내가 조금이나마 변한 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나의 추측이었다. 겉모습이 크게 변하진 않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내 몸에는 잔근육이 조금 붙었으며 무엇보다 눈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아니면 유도를 시켜도 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만… 아버지의 의도였든 아니든, 나는 유도관을 다니기 전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조금 성장해 있었다.

 

왕따 당하고 "어떡하지? 이제 어떻게 살지?" 하고 발을 동동 구르던 불안한 나는 없었다. 건드리면 무조건 한 놈은 조진다는 생각으로, 어떻게 보면 공격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름의 생존 방식을 찾은 것이다. 주변 환경이 변해도 크게 쫄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유도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것만 봐도 그러하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아버지의 아들 개조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시킨 것 중, 처음으로 내가 만족했고 아버지 "덕분에"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