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 이야기, 한 줄 요약
1. 황윤석은 머물던 하숙집에서 어떻게든 버티려 했지만, 흉년으로 자금줄이 막힌 집주인이 집을 팔게 되며 다른 하숙집으로 이사 가야만 했다.
2. 황윤석은 항상 돈에 쪼들렸다. 흉년은 물론이고, 풍년 때도 황윤석의 월급으로는 하숙비 등 여러 지출을 하면, 적자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그는 마흔이 넘어서도 부모의 지원을 받았다.
3. 하숙집 생활이 서글픈 황윤석은 자가를 구하려고도 해봤지만, 여러 현실적 사정으로 인해 다시 하숙집 셋방살이를 선택했다. 그 뒤로도 집주인과 갈등으로 인해 이사는 연례행사였다. 이로 인해 황윤석은 새 하숙집을 선택할 때, 집주인의 인품을 1순위로 고려하게 되었다.
4.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 사대부이자 관료인 황윤석에게, 또 하숙집에 머물던 고위 관료에게마저 집주인들은 어떻게 무리수를 두는 데 거리낌이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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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료는 왜 한양을 벗어나서도 집주인에게 쩔쩔맸을까
아무리 하숙집 주인과 세입자의 관계라지만, 신분이 낮았던 집주인이 사대부이자 관료인 황윤석에게 ‘공손하게’ 대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황윤석도 그런 집주인을 두고 볼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출처-<EBS>
그놈의 체면 때문이었습니다.
황윤석은 체면 때문에 치졸하게 복수하는 것을 거두죠. 체면과 공손함, 그것은 양반이 세상을 판단하는 중대한 근거였습니다.
요즘과는 달리,
“비록 내가 월세를 못 내더라도, 상대는 마땅히 나를 공손하게 대해야 하며,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라는 생각이 그들에겐 있었고, 상대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신분이 나보다 낮은 집주인이 비록 나를 불손하게 대했더라도, 나는 사대부이므로 그들에게 똑같이 대할 수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써 상대를 대하는 건 유학자의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렇지만 유학자도 사람이기에 복수의 칼날을 마냥 삼키기만 했던 건 아닙니다.
황윤석은 고심 끝에 ‘이수득(李壽得)’이라는 집주인의 집으로 옮기는데요. 이수득은 처음에는 황윤석을 잘 대해주다가, 또다시 돈 문제로 황윤석에게 얼굴을 붉히곤 했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존버’하던 황윤석에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날이 옵니다. 바로, 전의현감(全義縣監)으로 승진한 겁니다. 이 연재물에서 누차 강조했듯, 지방관 자리는 모든 사대부가 꿈꾸는, 어찌 보면 고관대작보다 더 수요가 높았던 관직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문의 경제적 성장을 위해선 지역의 물자를 모두 책임지는 지방관만 한 자리가 없었으니까요.
드디어... 이 좋같은 한양을 뜨는구나... 흑흑
이렇게 전의현감으로 ‘떡상’한 황윤석은 지긋지긋한 한양살이를 접고 현재의 천안 지방으로 내려갑니다. 관저가 따로 나오니 숙박 문제도 걱정할 것이 전혀 없었죠. 그런데 그에게 10년 전의 집주인 이수득이 찾아옵니다. 이수득은 무엇 때문에 한양에서 천안까지 먼 길을 내려온 걸까요?
1787년 3월 24일 ~ 25일 - 『이재난고(頤齋亂藁)』
어제 이수득(李壽得)이 내가 일하는 전의현의 관청으로 찾아왔다. 그자는 예전에 내가 한양살이할 때 집주인이었는데, 욕심이 하늘을 찌르던 자였다. 그래서 그를 관청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고, 대신 노잣돈만 주라고 전했다.
그런데 어젯밤 아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수득 그자 때문에 화가 나신 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나중에 우리 아들이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갈 때 집주인이 필요해질 것입니다. 접견을 허가하시고 잘 달래서 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내의 말이 맞았다. 그래서 오늘, 이수득을 관청으로 불러들였다.
숨만 쉬어도 적자가 났던 한양살이. 황윤석은 집주인에게 야금야금 빚을 지면서 적자를 메웠습니다. 그런데 황윤석의 현감 부임 소식을 들은 이수득은 드디어 오랜 빚을 받아낼 기회라 여기고 먼 길을 찾아옵니다.
하지만 ‘떡상’한 황윤석은 과거의 치욕을 잊지 않았습니다. 대담하게도 그는 아예 빚을 안 갚을 심보로 이수득을 문전박대하죠. 그런데 아내가 그를 말렸습니다. 나중에 아들이 과거와 관료 생활을 위해 한양살이를 하게 되면, 좋은 관계를 맺은 집주인이 꼭 필요하다는 주장이었죠.
흠... 일리가 아주 있어
그렇습니다. 을에서 갑이 된 줄 알았으나, 한양에 집을 사지 못했던 그는 여전히 을이었습니다. 사실, 황윤석은 이미 목천현감 시절인 1870년에 이수득에게 135냥에 달하는 돈을 만들어 빚을 갚은 적이 있었습니다. 한양의 초가집을 사고도 충분히 남을 돈이었죠. 물론, 이 돈은 수령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만든, 공금과 사금의 경계가 모호한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거금을 받고도 이수득은 어쩐 일인지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뭉그적거립니다. 왜일까요?
1780년 1월 24일 - 『이재난고(頤齋亂藁)』
집주인이 말했다.
“현감 나리. 저는 내일 한양으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그러한가. 몸 조심히 가시게.”
“예. 그런데 저... 그동안 빚을 많이 갚으셨지만, 여전히 저는 손해가 큽니다.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조금 곤란합니다. 아무래도 더 갚아주셔야 제가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이대로는 못 갑니다요!
그의 말이 황당하기 그지없다. 지난 겨울에 갚은 빚까지 합해 그에게 갚은 빚이 무려 135냥이었다. 원래 원금이었던 87냥에 비하면 그 이익이 원금의 반을 넘을진대,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소리를 듣고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어 식량, 말먹이, 노잣돈, 꿀, 기름 등을 선물로 주었다.
황윤석이 한양살이를 하면서 이수득에게 빌렸던 돈은 총 85냥이었는데요. 이 빚이 10년 동안 눈덩이처럼 불어나 135냥을 훨씬 뛰어넘어 버렸습니다(한양의 초가집집 한채 빚이 집 두 채 빚으로 점프!). 조선시대 사채의 무서움이 여실히 드러나죠? 좋지 않은 기억때문에 황윤석은 속으로 이수득에게 ‘쌍욕’을 퍼부었지만, 아내의 말을 떠올리면서 화를 꾹꾹 누릅니다. 대신 여러 선물을 주면서 이수득을 달랬죠.
이처럼 황윤석의 한양살이는 툭하면 올라가는 월세금,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함, 갑자기 식사의 질이 떨어지는 치사한 압박, 그리고 가랑비에 옷 젖듯 쌓여가는 부채라는 악재 속에서 ‘존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황윤석은 그나마 사정이 정말 좋은 편에 속한 편이었습니다.
황윤석의 부친은 호남의 ‘천석꾼’ 대지주였습니다. 덕분에 황윤석은 ‘호남의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릴 수 있을 만큼 공부할 수 있었고, 과거를 볼 수 있었으며, 힘들어도 ‘한양에서 살 수는’ 있었습니다. 한양살이를 꿈조차 꾸지 못했던, 지방의 수많은 선비에게는 부러운 삶이었죠.
이렇게 ‘존버’하는 이유는 결국, ‘존버’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한양살이를 해야만 관직 생활이 가능하고, 한양살이를 버텨내야만 나중에 지방관이 됩니다. 지방관이 된 후엔,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해 부를 이뤄서 부동산에 투자하죠. 그렇게 일정한 규모를 갖춘 지주 계급이 되면, 그 수익을 교육에 투자합니다. 이것이 조선 사람들이 꿈꿨던 ‘세세손손 영원할 가문의 번영’이었습니다. 어떠세요. 지금의 한국과 다르지 않지요?
그래서 고향의 차이는 곧 출발선의 차이였습니다. 황윤석 집안이 만약 호남이 아니라 한양에 기반을 갖춘 집안이었다면, 더욱 효과적이고 안정적인 투자로 대단한 번영을 이뤘을 것입니다. 단적으로, 황윤석이 한양에 살면서 지출했던 수많은 비용은 한양에 집 한 채만 있었다면 쓰지 않아도 될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비용과 쌓였던 빚은 지방관이 된 뒤, 지방의 백성들에게 돌아갈 돈을 ‘유용’하여 메꾸죠.
한양, 특권, 부동산.
이 세 가지가 결합된 기득권이 나라의 공정성과 평등함을 얼마나 심하게 해쳤는지, 황윤석의 사례는 절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황윤석도 레이스의 주자였습니다. 만일 그가 성공했다면 그 역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불평등의 과실을 먹으며 가문을 번영시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출신의 한계를 넘지 못한 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그의 낙오에 주목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더 긁어모을 수 있었는데... 아쉽구나
사람들은 사회 시스템적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시스템 속에서 개인의 성공만을 위해 어떻게든 내달렸습니다. 레이스에 더 뛰어들었고,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도 레이스에서 이기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성공한다면 곧 ‘능력’으로 포장되었죠. 그러나 당장 이익의 숫자로 치환되는 부동산 레이스의 끝에는 소수만이 누리는 영광과 다수가 아우성치는 연옥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집 없는 서러움’이 공동의 문제인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왜 나라에서 집을 지어주냐”
“왜 나라에서 집을 임대 해주냐, 나도 해줘라.”
이런 이야기들이 있지요. 능력에 따른 보상만이 공정함의 기준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압니다. 집을 구매할 수 있는 ‘구매력’의 차이는 어쩌면 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요. 그러므로 수많은 개인의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하는 건 공동체의 평등함을 나타내는 척도이면서, 동시에 내 삶과 미래 세대에 더 편안한 삶을 보장해 주는 길일 것입니다.
뱀발.
독자 여러분 덕에 놀랍게도(?) 저의 연재물이 계속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부동산에 관련한 해당 연재물도 곧 『조선부동산실록』(출판사: 들녘)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조선부동산실록』에는 ‘부동산 왕국’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알 수 있는 시시콜콜한 조선의 부동산사(史)가 담겨 있습니다. 출간되면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참고문헌
(1) 『이재난고』 (장서각기록유산DB)
(2) 강신항 외 7인, 『이재난고로 보는 조선 지식인의 생활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07.
(3) 정수환, 「18세기 황윤석의 매매정보 수집과 소유권으로서의 매매명문 활용」, 『민족문화논총』 0.52, 2012, 540-577.
(4) 정수환, 「18세기 이재 황윤석의 화폐경제생활 - 『이재난고』 1769년 일기를 중심으로 -」, 『古文書硏究』 20, 2002, 147-182.
(5) 정수환, 「노상추(1746~1829)의 토지 매매정보 수집과 매매활동 : 居間과 居間人 그리고 土地買賣明文」, 『민족문화논총』 73, 2019, 155-191.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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