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김홍일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아직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했던 일이 ‘동포’를 구하는 일이었다. 일본 패망 직후 큰 문제 중 하나가 만주국에 있는 조선인들이었다.
영화<마지막 황제>에도 잘 나와 있지만, 만주국은 일본이 만든 괴뢰국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은 이 만주국을 ‘개발’해야 했다. 그래서 일본 본토와 식민지 조선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만주국에 정착시킨다. 이때 일본인들은 아주 '고전적인' 수법을 써먹었는데, 바로,
"나눠서 통치한다(Divide and Rule)"는 것.
만주국 황제로 다시 즉위하는 푸이(극 중 황제 역). 사실상 만주국의 실권은 일본이 장악해, 푸이에게 부여된 황제 칭호는 허울 뿐이었다.
출처-영화<마지막황제>
디바이드 앤 룰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상당한 ‘대우’를 해줬다. 일본이 봤을 땐, 조선이 중국보다 나으며, '중국 놈들'은 조선인들보다 아래에 있다고 우위관계를 만들어 냈다. 중국인과 조선인들 사이에 갈등과 긴장 관계를 조성해, 보다 손쉽게 만주국을 통치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문제는 일본이 패망한 뒤 시작되었다.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중국인들의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나치 부역자를 색출하듯 단칼에 잘라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당시 중화민국의 속사정은 그러지 못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는 잘 지내고 있었으며, 임정이 독립하면 이후에도 그들과 척지고 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정부의 판단과 대중의 생각은 달랐다. 조선인들은 무조건 일본 부역자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이 모여 폭력 사태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과 작전 토의 중인 김홍일 소장
출처-<링크>
조선인들은 스스로 자경단을 만들어 대응했다. 하지만 역시나 숫자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사태를 관리해야 할 소련 점령군은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고, 결국 승전국으로 만주국에 입성한 중화민국 정부가 나선다. 이때 중화민국 내에서 이런 일을 가장 잘 처리할 인물이 바로 김홍일 장군이었다. 그는 중화민국 장군이면서, 조선인이었다. 조선인들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에 매진했다.
프로잡(Pro-job)이 판치는 시대
당시 미군은 김홍일 장군을 공산주의자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귀국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나라를 세우고, 창군 작업에 들어가야 했던 당시 최고의 인재는 김홍일 장군이었지만, 그는 1948년 8월 28일이 되어서야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해 12월에는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임관된다.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최초의 장군 임관자였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초대 육군 총참모장으로 내정되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이응준 대좌가 초대 육군 총참모장이 되었다고 한다.
1941년 일본군 육군 대좌로 승진한 이응준. 그는 광복 전까지,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군이 되어 전쟁터로 나가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 안치되어 있다.
출처-<오마이뉴스>
해방 직후 민중들이 가장 적대시했던 이들은 일제 앞잡이, 그중 친일 경찰들이었다. 문제는 해방 직후 잠잠했던 이들이,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그리고 뒤 이은 이승만 정권에서 그대로 유임되거나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을 제정하고 국회에 반민특위가 들어서도, 친일파와 친일 경찰의 척결은 거의 불가능했다. 심지어 반민특위의 실질적인 ‘물리력’이었던 특별경찰대, 이른바 ‘특경대’가 친일 경찰 세력에 의해 해체되었던 것도 이 당시였다.
민중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먼저 대구(대구가 보수의 텃밭이 된 건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좌우합작위원회 대표인 김규식(金奎植)은 민심을 가라앉히려면 친일 경찰을 처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당시 미군정청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이 유명한 말을 남긴다.
"일제시대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친일한 프로-잡(pro-job)은 처벌하기 곤란하다. 다만 그것 이상의 진짜 친일을 한 프로-잽(pro-Japanese)이 문제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국가 ‘시스템’을 돌려야 하는 입장에서는 경험자가 필요했다. 특히나 제삼자라 할 수 있는 미국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조선인을 뽑아서 새로 가르치고 써먹을 시간이 없었다. 한국 ‘군대’를 만들어야 하는 미군에게 가장 적합한 인재들은, ‘일본군’ 출신들이었다. 그중 이응준은 조선인 출신 일본군들 중 최선임이었고, 최연장자였다. “일본군 출신의 대표”였던 이응준을, 미군은 안고 가야 했다. 그래야 일본군 출신을 수월하게 데려갈 수 있으니 말이다.
1945년 12월에 개교한 군사영어학교의 모습. 미군정이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등에서 장교 생활을 경험한 한국인 군경력자를 대상으로 영어를 교육했다. 현 육군 사관학교의 전신.
당시 미군은 사관학교의 전신이자, 한국군 창군 과정의 시작점이라 할 수는 군사영어학교( Military Language School)를 설립하게 된다. 군사영어학교는 겉으로 보면 통역관을 양성하는 것 같아 보지만, 이들을 중심으로 국방경비대(경찰 예비대 성격이지만, 이들이 국군의 전신이 된다)가 꾸려지게 된다.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군사영어학교 구성원 비율을 어떻게 할 것 인지였다. 미군은, 일본군 출신 1/3, 광복군 출신 1/3, 만주군 출신 1/3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때 광복군 출신들이 이 정책을 거부한다. 일본군에 입대해 자신들에게 총구를 들이밀었던 이들과 함께 군대를 만들라는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군의 제안을 단체로 거부했던 광복군 출신들은 이후에 다시 들어가긴 했지만, 이미 군사영어학교는 일본군 출신이나 만주군 출신으로 꽉 들어차 있는 상태였다. 이때 1기생의 일본군 선발을 담당했던 이가 바로 이응준이었다. 군사영어학교는 일본군 출신들이 꽉 휘어잡게 되었다. 일본군 출신이 만주군 출신을 넘어설 정도였다.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창설 당시 경비대 육군 사령관은 원용덕(만주군 중령), 이응준(일본육사)이 맡게 된다. 물론, 광복군 출신도 사령관 자리에 오르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투입되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이런 과정이 쌓이고 쌓인 결과, “조선인 출신 일본군 최선임”인 이응준이 대한민국 육군 초대 참모총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김홍일 장군의 후학 양성
1948년 귀국과 함께 준장이 되었던 김홍일은 ‘후학 양성’이라는 명분으로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된다. 이때가 1949년, 한국 전쟁 발발 1년 전이었다. 김홍일 장군의 학식과 경험이 후배들에게 전해진다는 것도 의미가 크지만, 창군 과정에서 중심을 잡고, 대한민국 군대의 정통성을 세우는 데 역할을 했으면 어땠을까… 약간의 아쉬움이 남지만, 어쨌든 김홍일 장군은 맡은 바 책임을 다했다.
김홍일 장군의 <국방개론>
후학을 양성하면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쌓은 지식을 나눴다. 육사 교장 시절에는 <국방 개론>이라는 저서를 냈다. 한국군의 상비군 숫자를 계산했을 뿐만 아니라, 사단의 편제(1개 사단이 1만 2천 명 수준의 전차, 모터사이클, 야포, 기관총 등의 장비가 필요함을 설명)와 상비사단의 숫자까지 제시했다. 공군이 필요한 이유를 전략적으로 설명하고 동시에 “폭격기”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독일군의 전격전과 2차 대전 당시 폭격기를 통한 공중 폭격의 효용성을 확인하고, 이를 후학들에게 전달하려 했다.
실제로 그는 중국에 머물 때 육군 대학에서 위 내용을 학습했고, 2차 대전에 참전한 영국군과 소련군의 생생한 체험담을 들을 기회가 있었던 그가, 중일 전쟁에서 직접 체득한 내용일 것이다.
1949년 12월 27일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작성한 <1949년 말 종합 정보 보고>를 보면, 이때 대한민국 육군은 북한군의 침공을 예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한미군이 철수한 뒤 이미 북한군의 남침 계획을 알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국군방어계획>이다. 이 계획의 시안은 1950년 1월 말에 나왔으며, 육군 본부와 육군 참모학교에서 해당 방어계획을 작성한다.
이 시안은 1950년 3월 25일 <육군본부 작전명령 38호>로 확정된 뒤, 사단별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5월 초, 사단 작전계획이 수립된다. 이 계획의 핵심은 북한군의 주공이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으로 오리라 판단하고, 의정부 지구에서 방어지대를 형성, 38도선을 지키는 걸 1차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만약 이 38도선이 뚫린다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플랜 B다. 국군은 ‘지연전’을 준비했다.
1944년, 대륙타통작전이 벌어질 당시의 형세. 김홍일이 있던 국민혁명군 9전구는 붉게 튀어나온 영역의 바로 남쪽인 장시성 지역에 위치했다. 1940년경 교착된 이래로 대륙타통작전이 벌어지는 1944년까지 위 형세는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지연전 경험은, 한국전쟁 당시 김홍일이 성공적인 지연작전을 펼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최초 한강 이남으로의 전략적 철수를 진행하면서, 한강선, 대전선, 낙동강 선에서 축자적인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시간을 벌 계획이었다(6.25 전쟁의 주요 국면을 생각해 보면 놀랍도록 유사하다!).
김홍일 장군은 고위급 장교들과 이에 대해 토의했다. 실제로 그가 육군 참모학교 교장일 당시, 한강을 자연장애물로 이용할 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교육했다고 한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깨닫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적어도, 군인에 한해서는, 프로-잽(pro-Japanese)이 프로-잡(pro-job)이 될 수는 없었다.
유일한 전투보직 출신, 김홍일
육군총참모장 정일권 소장과 전선 시찰 중인 김홍일 소장
출처-<링크>
전쟁 발발 직후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계급이었던 소장 계급에는 4명의 장군이 있었다. 육군 총참모장인 채병덕 장군, 제5사단장 이응준 장군, 전 육군 총참모장 신태영 장군, 그리고 김홍일 장군이다.
김홍일 장군을 제외한 3명은 모두 일본 육사 출신들이었는데, 그 보직은 채병덕이 병기 장교(소좌 출신으로 오사카 육군조병창을 거쳐 부평의 육군조병창에 근무했다. 창군 초기 자주국방을 위해서 ‘무기’가 필요했던 이승만은 무기 전문가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출신이었다. 이응준은 수송 병과였고, 신태영은 행정이었다. 김홍일 장군을 제외하면 사단 단위 이상의 대규모 부대를 운영하거나 전투를 벌인 ‘야전형 군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 고위급 장교 출신 대부분은 ‘비전투 보직’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 일본군도 식민지 출신 조선인에게 ‘전투 보직’을 맡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예과생도 시절의 유재흥(맨 왼쪽).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그는,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안치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원균’이라 할 수 있는 유재흥 중장도 이때 사단장, 군단장 자리에 올랐는데, 그는 일본군 대위 출신이었다. 유재흥 중장은 가는 부대 모두를 해체하거나 박살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담당한 전선은 다 뚫리거나, 부대가 궤멸하곤 했다. 한국군 사상 최악의 패배, 현리 전투의 주인공이라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한국군에서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이응준 덕분이었다.
일본 육군 대좌 출신의 유승렬(유재흥의 아버지)이 이응준과 동기동창이다. 즉, 이응준은 유재흥의 학교 선배이자, 아빠 친구였다. 한국군 내 일본군 군 맥의 대부인 이응준의 도움으로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고, 이후 승진 코스를 쭉 밟을 수 있었다.
유재흥이 김홍일 장군을 평가하기도 했는데,
"김홍일 장군은 대부대를 지휘하는 능력과 경험이 크게 돋보였고, 시종 침착한 가운데 사단 전투지경선을 분명하게 할당하는가 하면, 후방에서 증원되는 병력을 묶어 예상되는 적의 주공 방향에 집중 투입하는 모습을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정말로 느끼는 바가 많았어야 할 텐데;;)암튼, 김홍일 장군에 대해서 의외로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 한강 방어전을 짧게 요약하고 끝내려는 걸 창군 초기의 상황과 일본군 군 맥의 문제점도 같이 언급하기로 기사 방향을 틀었다. 다음 회에는 김홍일 장군의 한강 방어선 전투를 제대로 파 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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