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노의 질주가 왜 독특한 영화 시리즈인가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스핀오프인 작품을 정규 시리즈로 분류한다는 거지요. 분노의 질주 시리즈 3편(부제 '도쿄 드리프트')은 세월이 지나 제작된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진짜 스핀오프 격인 ‘홉스 앤 쇼’보다 더 스핀오프답지만, 엄연히 정규 시리즈 넘버링에 들어갑니다.
3편은 평론가와 팬들 사이에서 그리 인기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그러나 팬의 한 사람으로 공언하건대, 극장 개봉 영화라는 기준을 제거하고 DVD나 OTT 서비스로 시리즈를 ‘다시 보는’ 입장에선 충분한 수작입니다. 선입견 없이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재미있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겁니다.
2.
배경은 2000년대 초반의 일본, 그중에서도 도쿄입니다. 물론 할리우드가 생각하는 도쿄의 모습이긴 합니다만, 이 시대 영화치곤 감독, 제작사 그리고 일본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딱 하나, 근본적인 미스매치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군요. 고등학생의 자동차 레이스는 2차대전 이후 전 세계의 부를 흡수한 ‘미국’의 고등학생들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현실의 일본에서 고등학생을 유혹하는 모터 달린 탈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터사이클이죠. 일본 만화가가 그린 <상남 2인조>나 <GTO>에 사륜차가 몇 번 나오는지 떠올려 보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도쿄의 모습
후지사와 토오루의 <상남 2인조> 귀폭 콤비의 모습
3.
영화는 미국 고등학생들의 호방한 카 레이싱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일단 내기 내용도 그렇지만, 레이스 시작을 알리기 위해 조연 한 분이 브래지어를 던지는 연출이 나옵니다. ‘레이싱 걸’이라는 직업으로도 대표됩니다만, 카 레이싱과 여성이란 테마는 무거운 고민거리입니다. 할리우드의 페미니즘 운동 이후 분노의 질주 시리즈도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최근에는 자동차 산업 전반에서 여성 존중 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습니다. 저명한 자동차 칼럼니스트이자 유튜버 Jason Cammisa는 이 문제에 대해 유쾌한 대답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아래 영상에서 성 상품화된 남성이 플래그를 내리는 장면(영상 11:00부터 시작)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4.
이러한 시대의 조류를 앞서 읽어낸 것인지, 도쿄에서 벌어진 첫 번째 레이스에서 레이스 시작을 알린 메인 스타터는 이젠 꽤 유명해진 배우 ‘츠마부키 사토시’입니다. 한국에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주연으로 잘 알려져 있죠.
츠마부키 사토시는 극 중 잘생긴 남자 역을 맡았다
또한 3편에선 개봉 당시 20세였던, 신인 시절의 ‘키타가와 케이코’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려준 돈을 돌려받는 목욕탕 장면에 등장하는 거한은 전 스모 선수 ‘코니시키’입니다.
카메오로 등장한 키타가와 케이코
전직 스모선수 코니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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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을 충분한 수작이라 평하는 이유는, 자동차 마니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생소할 ‘드리프트’라는 개념을 작중에서 잘 설명해 내고, 그러면서 극의 긴장감도 놓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간 여행이나 상대성 이론, 은하계 저편으로의 워프 같은 걸 설명해 내는 영화도 많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엔터테인먼트 영화에서 관객에게 익숙지 않은 개념을 쉽게 설명해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그런 점에 있어서 멋들어지게 그 목표를 달성하고 있죠.
6.
‘드리프트’란 정확하게 무엇이냐, 혹은 ‘파워 슬라이드’와 ‘드리프트’는 무엇이 다르냐에 대한 연구는 그 분야에 해박한 분들께 맡기겠습니다. 영화에서 드리프트는 코너를 돌 때, 차량을 미끄러트린 뒤 이걸 컨트롤하는 기술로 나옵니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지식으로, 이 정도 설명이면 충분합니다. 물론 이걸 대사로 설명하면 영화가 영화답지 않아지죠. 감독은 드리프트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니 갑자기 눈앞에서 두 대의 차량이 옆으로 달리고 있는’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관객들에게 드리프트 개념을 시각적으로 각인하는 데 성공합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주인공 션은 드리프트 현장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7.
서사를 한 줄로 요약하면, “누군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굉장히 이루기 어렵다” 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숀 보즈웰은 광활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V8 엔진을 얹은 차들과 누가 악셀을 강하게 밟나를 겨루고 있었습니다. 여차저차 한 사연으로 그는, 동양의 ‘거대한 실내’ 주차장에서 팔자에 없던 주차장 레이스를 펼치게 됩니다.
직선 구간에서 여유 있는 미소로 상대를 압도하지만, 곧 좁아터진 일본의 주거시설을 상징하는 급커브길이 등장해 그의 앞길을 막습니다. 속도를 유지하고 코너링해야 합니다. 해답은 ‘드리프트’였습니다.
영화는 도쿄에서의 첫 번째 레이스 장면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 드리프트가 필요한지, 그 스킬을 연마하면 어떤 성과를 얻고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지 침착하게 보여줍니다. 이후의 서사는 매우 순탄해집니다. “주인공이 드리프트를 배워서 더 큰 레이스에 참가하겠구나”하고 누구나 추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설득력 있게 묘사한 것 만으로도 이 영화는 칭찬받을 만합니다.
8.
도쿄를 무대로 한 것으로 미뤄 알 수 있듯,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일본 차(미국 입장에서의 수입차)의 기세가 아직 왕성했습니다. 게다가 드리프트라는 기술을 널리 알린 일본인 츠치야 케이이치 씨가 세계적으로 명망이 있는 드라이버였던 만큼, 자동차와 레이싱에 대한 일본의 자부심이 남달랐던 시기이기도 했죠. 츠치야 케이이치 씨는 3편 제작에 도움을 주고, 낚시하는 남자 1로 카메오 출연까지 했다. 탑기어 코리아에 등장했던 그의 드라이빙 실력을 한번 감상해 보시죠. 참고로 ‘드리프트 킹’은 실존 인물인 츠치야 케이이치 씨의 실제 별명입니다.
9.
세월이 흘러 자동차 엔진과 타이어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드리프트를 더 이상 ‘필요 없는 기술’로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차량이 트랙을 뱅글뱅글 도는 레이싱 자체가 ‘꼭 필요해서’ 하는 일이 아닌 만큼, 이 드리프트라는 멋들어진 기술에 열광하는 팬은 전 세계적으로 넘쳐납니다. 혹시 이 영화로 드리프트에 입문하셨다면 만화<이니셜 D>도 추천합니다.
만화 <이니셜D>의 한 장면. 두부공장 아들 탁미는 구형 모델로 멋진 드리프트를 선보인다.
10.
영화 초반, 탁 트인 미국 대륙에서의 레이싱 장면이 이 영화에 끼치는 영향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물론 과장이 섞이긴 했습니다만, 감독은 첫 레이싱 장면에서 미국의 광활한 공간감을 강조합니다.
카메라가 도쿄로 옮겨지고 나서는 모든 것이 좁고, 복잡하고, 평지에 뭘 세워서 해결될 일이 없어 보이니 모든 것이 고층으로 쌓여 올라갑니다. 도쿄의 상징인 수도 고속도로도 영화에 자주 나오고, 심지어 고속도로도 2층 3층으로 겹겹이 쌓여 있죠.
영화 속 고층 건물이 가득한 도쿄의 모습
주차장 따위 넓은 공간이 있을 리 없으니, 일본 특유의 기계화 문명으로 무장한 ‘주차건물’이란 걸 세워 차량을 세로로 쌓아 두고, 그 차를 빼낼 공간이 없으니 디스크 테이블처럼 바닥이 돌아가는 장치를 써서 차량 방향까지 바로잡아 줍니다. 대도시권 생활상이 도쿄와 비슷한 한국 입장에선 그러려니 할 수 있는 묘사지만, 주요 타깃이었던 미국 관객들에겐 충분히 이국적으로 보였겠죠. 주요 레이싱 장소가 주차장이고, 골 지점은 커브 길을 다 올라온 건물 옥상입니다.
11.
건물 옥상에서 펼쳐지는 풋살 장면이 화룡점정입니다. 3편의 배경은 도쿄 중에서도 시부야인데, 2000년대 이후에 나온 할리우드 영화에서 도쿄를 묘사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면 이 풋살 코트도 틀림없이 한 번은 보셨을 겁니다. 할리우드에서 도쿄를 비출 땐 우선 도쿄 타워, 그다음 시부야의 스크램블 교차로, 그 뒤 고층 건물 옥상에서 풋살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이 공식이었던 시절도 있었죠. 공간을 극도로 활용해야 하는 비좁은 도쿄를 상징하는 장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야경 사이의 녹색 잔디가 인상적이라는 이유도 있겠죠.
안타깝게도 이 ‘아디다스 풋살 파크 시부야’는 2018년에 영업을 종료했습니다. 이젠 추억의 장소가 되고 말았죠.
영화에 등장한 풋살 파크 시부야의 모습
영업 종료로 더 이상 위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출처-<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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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스크램블 교차로 드리프트 신’은, 사실 이 장면 만으로도 영화사에 남을 만한 명장면입니다. 많을 때는 한 번에 3천 명이 동시에 길을 건너는 이곳에서 스포츠카로 드리프트를 한다는 할리우드 스케일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일본에서 가끔 회자되곤 합니다.
도쿄 드리프트에서 명장면으로 꼽히는 스크램블 교차로 드리프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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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인 악역인 D.K.가 도쿄에서의 첫 레이스에서 탑승하는 차량은 닛산 페어 레이디 Z입니다. 2023년 현재도 수동 변속을 선택할 수 있는 역사와 전통의 스포츠카입니다. 영화 내에서도 수동 변속과 핸드 브레이크가 여러 장면에서 멋들어지게 연출됩니다.
D.K.가 탑승한 모델, 닛산 페어 레이디 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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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3편의 진짜 주인공이라 해도 무방한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배우 성강이 연기한 ‘한’입니다. 그는영화 상영 당시까지 세계적인 명성을 얻진 못했던 현대차를 가볍게 디스하고, 마쓰다 RX-7을 탑니다. 참고로 영화에 등장하는 풀 바디 킷은 튜닝샵 VeliSide가 여전히 판매 중인 실존 모델입니다.
Veliside에서 판매 중인 마쓰다 RX-7 홍보 사진
출처-<링크>
영화 속 마쓰다 RX-7의 모습
15.
한의 RX-7은 아예 넘버 플레이트에 VeilSide라는 로고가 들어간 장면도 있을 만큼 영화에서 적극적으로 튜닝 가게를 홍보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분노의 질주 시리즈와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인 유서 깊은 튜닝 가게로, 3편뿐만 아니라 분노의 질주 다른 시리즈에서도 해당 튜닝 가게 로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이 몰던 RX-7 상단에 Veilside 마크가 보인다
위 장면에서도 눈에 띄는 Veilside 마크. 의도적으로 노출했음을 알 수 있다.
16.
저스틴 린 감독에게 어느 정도 복안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3편의 한의 설정과 연기는 이후 스토리를 다 알게 된 뒤 다시 봐도 준수합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뤄 봤고, 그것을 허무하게 잃어도 본 사람이, 세상과 자신을 자조하면서도 눈앞의 작은 희망을 놓지 못하는 모습으로 잘 묘사되고 있죠. 이후 시리즈에서 한이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고, 결국 정규 시리즈의 스토리가 조금 어색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도 어떻게 보면 이해가 될 정도입니다.
배우 성강의 최근 모습
출처-<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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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린 감독이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분노의 질주 시리즈인 3편은, 절박하면서도 흥미로운 시도였을 겁니다. 당시 무명이었기 때문에 촬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평단의 평가도 흥행 성적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후 시리즈에서 연타석 홈런을 날리며 “영화 시리즈에서 후속작을 더 잘 만든 감독”이라는 아주 보기 드문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릅니다. 무엇보다 이 감독이 한을 연기한 배우 성강을 아껴서 자주 등용해 주는 것에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저스틴 린 감독
18.
일본 교통경찰이 과속 차량 단속에 거의 손을 놓은 듯한 묘사가 나옵니다. 이는 영화적 연출이고 과장입니다. 일본은 치안이 어느정도 보장된 나라이고, 그 말은 강력한 경찰력을 보유했다는 뜻과 같습니다. 혹시라도 일본 여행 중에 이상한 생각은 떠올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영화 엔딩 크레딧에도 관련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션과 한은 도쿄 시내를 시속 197km로 달리는데
일본 경찰은 이를 확인하고도 과속 차량을 추격하지 않는다.
의아해하는 션에게 한이 하는 말
"일본 경찰차는 공장 출고 사양으로 락이 걸려있어. 시속 180km 가 넘으면 쫓아오지 않아."
19.
영화 후반에 거물 야쿠자가 인용하는 시는 영어 속담 “For want of a nail, the shoe was lost..."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못이 없어 말굽에 편자를 달지 못했고, 편자가 없어 말이 달릴 수 없었고, 말이 없어 전령이 소식을 전하지 못했고, 그래서 결국 전쟁에 져서 모든 것을 잃는다는 스토리입니다. 야쿠자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내용 자체는 교훈적이고 이런 이야기가 늘 그렇듯 언어마다, 지역마다 디테일이 다른 여러 버전이 전해 내려옵니다.
D.K.의 야쿠자 삼촌이 인용한 속담
“For want of a nail, the shoe was lost. For want of a shoe, the horse was lost. For want of a horse, the rider was lost. For want of a rider, the battle was lost."
출처-<링크>
20.
한국 관객 입장에선 가까운 이웃 나라로, 주요 타깃이었던 미국 관객 입장에선 머나먼 동양의 나라로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 마지막엔 재미있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카메오라 하기엔 너무 중요한 인물이, 지금까지 사용되었던 "할리우드가 생각하는 도쿄" 느낌의 음악과는 전혀 다른 음악을 BGM으로 등장하죠. 그렇게 이야기는 이어지게 됩니다.
사진 이후의 상황은 엄청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도쿄 드리프트의 마지막 장면을 보시고 싶은 분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출처-<링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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