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한국전쟁은 소련의 ‘승인’과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적극적인 지원’이란 무기나 장비의 지원을 넘어서 ‘작전단계’에서 깊숙이 개입되었다는 뜻이다. 남침 계획의 핵심은 정확히 한 달 만에 전쟁을 끝내고, 두 달 뒤인 1950년 8월 15일, 광복 5주년을 기념해 서울에서 ‘통일 인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SDFSDF.JPG

1949년 3월5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한을 침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출처-<KBS>

 

왜 하필 한 달이었을까?

 

AFASFS.JPG

1949년,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미군의 모습

출처-<KBS>

 

당시 소련은 미국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다.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극동 방위선(알류산열도-필리핀-일본-오키나와)에서 한국을 제외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미국을 ‘상수’로 여겼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 미국 정부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고, 미국이 돌아오기 전에 한 달 안으로 한국 전쟁을 끝낼 계획이었다.

 

소련 군사 전략가들은 미군의 증원 병력이 한반도에 도착하는 시간을 한 달 반에서 두 달 정도로 판단했다. 전쟁을 한 달 안에 끝내서 그들이 한반도 땅을 밟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또한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해, 남해안의 주요 항구 즉 부산, 여수, 목포를 최대한 빨리 점령해 미군이 들어올 발판을 제거하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았다.

 

남이나 북이나 나라를 만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북한이 전쟁을 미리 준비했다고 하지만 사단 단위 병력을 운용해서 전쟁을 치른 경험자가 얼마나 됐겠나. 결국 북한의 작전 계획도 소련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소련군사고문단에 의해 작성된 남침 선제타격작전 계획.jpg

소련 군사고문단에 의해 작성된 "남침 선제타격 작전" 계획서

 

1950년 4월15일, 스탈린은 2차 대전의 영웅이었던 바실리예프(Vassiljev) 중장을 단장으로 한 20여 명의 대령급 장교를 북한으로 보낸다. 북에 도착한 장교들은 전쟁을 기획하는데, 총 3단계로 이루어진 작전을 내놓는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단계: 38도선을 돌파해 서울지역의 국군 주력을 포위 격멸하고, 전쟁 2일 차에 서울을 점령. 이후 수원-원주-삼척을 연결하는 지역을 5일 만에 점령한다.

 

2단계: 군산-대구-포항을 연결하는 선을 14일 만에 점령한다.

 

3단계: 국군의 잔류 병력을 소탕하면서 남해안으로 진출, 부산-여수-목포를 연결하는 선을 모두 점령한다.  

 

소련은 미국의 참전을 의식해 1달 만에 주요 항구를 모두 틀어막고, 전쟁을 끝내려 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바로, 당시 북한과 소련의 최우선 목표가 ‘서울’이었단 점이다. 북한은 남침에 동원된 전력의 2/3를 서울에 쏟아 부었다. 서울을 지키기 위해 남한이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중 삼중으로 서울을 포위한 뒤 한강 이남의 퇴로까지 모두 차단하면, 한강 이북에 있는 남측 군대를 모조리 잡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전쟁 초반, 북한군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그들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뤄졌다. 6월 28일 새벽, 개전 3일 만에 국군의 서울 방어 최후 보루였던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졌다. 서울이 북한군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울 점령 직후, 38도선을 넘어온 북한군 전력의 2/3가 서울에 집결해 있었다. 우리 군은 이 많은 병력을 막아내야 했다. 

 

국군 한 명이 더더욱 귀한 상황. 그때 그나마 남은 전력마저 말아먹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6월 28일 새벽에 있었던 한강 철교 폭파 사건이다.

 

6DNJF28DLF 새벽2시 한강대교 폭파.JPG

1950년 6월28일, 폭파된 한강 대교의 모습

출처-<KBS>

 

한강 철교 폭파 사건 하루 전날인 6월27일 오후 3시 30분. 한강 다리 3개의 철교에 폭약이 모두 설치되었다. 폭탄 설치를 모두 마친 교량 폭파조는 대기 상태에 있었다. 만약 국군이 기적적으로 북한군을 막아낸다면 다리를 폭파하지 않아도 된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28일 새벽 1시 45분, 채병덕 총장은 북한군 전차가 돈암동에 등장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는 한강교 폭파를 명령했고, 2시 30분부터 차례로 다리를 폭파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시영 부통령이 한강 다리를 넘자마자 폭파되었다(당시 헌병의 통제 하에 있었던 한강 다리는, 피난민들로 가득한 상황이었다). 한강 이북에 있었던 국군 주력 사단들이 모든 장비를 버리고 맨몸으로 나와야 했다. 

 

그렇다면 당시 국군 수뇌부들은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었을까?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탄생

 

DEDGDF.JPG

신성모 국방부 장관. 이승만 계열 우익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의 초대 단장을 지낸 인물로,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채병덕과 함께 국회에 출석해 "3~5일이면 평양을 접수할 수 있다"는 거짓 보고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월 26일 오전 10시,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 김정렬 공군총장, 김영철 해군총장 대리(손원일은 이 당시 군함 구입 건으로 미국에 있었다), 김홍일 소장, 송호성 준장, 전 통위부장 유동렬과 이범석 前 총리, 前 광복군사령관 지청천, 前 1사단장 김석원 예비역 준장까지, 원로급 군 경력자들이 국방부에 모인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현 상황을 확인하고, 이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하기 위해서.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은, 

 

“현재 군은 의정부에서 북괴군을 반격하고 있으며, 전황은 유리하게 진전되고 있다.”

 

라고 전황을 설명했다. 이때 김홍일 장군이 말한다. 

 

“작전지도 방침을 확립하는 게 급선무다. 결전을 준비하느냐 아니면 어느 선에서 어느 병력을 집중하느냐, 지연작전을 취한다면 어디까지 철수하느냐를 빨리 결정해야 한다.”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그야말로 명확한 사태 인식이었다. 동시에 정론이었다. 김홍일 장군은 말을 이었다.

 

“의정부 정면에서의 공세는 위험하니, 한강 이남에서 결전을 준비해야 한다. 후방에서 투입되는 병력으로 한강 남쪽에 진지를 급편하고, 전선의 병력을 축차적으로 수용해서 한강 남안에 결전 방어 태세를 갖춰야 한다!”

 

당시 전투 경험이 많았던 김홍일, 이범석, 지청천 등은 무조건 한강선 결전을 주장했다. 회의에 나왔던 인물들은 저마다 결전과 지연전을 놓고 팽팽하게 의견을 대립했다. 문제는 채병덕 총참모장과 신성모 국방장관이었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결정을 미뤘다. 정확히 말하면, 채병덕은 수도사수를 고집했다. 그 결과, 한강 다리가 무너지고 나서 한강 이북의 부대는 장비를 다 버리고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그때 김홍일은 1사단 작전을 맡고 있었으나 그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작전 지도였으며, 1사단의 실질적 병력 지휘자는 백선엽이었다).

 

JGFHJGH.JPG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 1950년 6월26일, 국회에 출석한 그는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했다"는 거짓 보고를 한다.

 

6월 28일 12시가 되어서야 채병덕은 한강 방어를 결심한다.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이범석 국무총리까지 나서 한강 방어를 주장했고, 결정적으로 서울이 함락되자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북한군과의 결전을 포기하고 진작 ‘한강 방어’를 선택했다면, 한강 이북에 버리고 온 장비를 모두 수습할 수 있었다. 병력도 건제를 갖춘 상태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좋은 시간을 날려버렸다).

 

그가 김홍일 장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시흥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철수 병력으로 혼성부대를 편성해서... 한강 방어선을 지켜 주십시오.”

 

대한민국을 구원한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WVxH0tSnccdzuhanm4Vv74rWuKiWJppahBCVWIiKc5s22pdKlWqctvEjmWMDmCB2bnKsBpCj6Ru-IjCZNxyGqNSL-ymU4XxzRaJpsG7z6O1c-2slomXT-8EhpBJNeYBrOfx35Tq50VoQ33EScA7gpw.webp

6월28일, 한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급편된 혼성공병대대의 모습. 나뭇대를 걸치고 노량진 정면을 지키고 있다.

 

미군에 대한 희망

 

유엔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한국전쟁 참전 결정.JPG

유엔 깃발을 흔드는 미군의 모습. 유엔이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국은 한국 전쟁 참전을 결정한다.

출처-<KBS>

 

한강을 넘어온 부대들을 재편성해 당장 방어선을 꾸려야 했다. 상황은 급박하고 절망적이었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국군 제6사단, 8사단을 제외한 모든 국군 병력을 지휘 통제한 것으로 나온다. 당시 서류상으로는 연대라고 하지만, 실제 병력은 대대 규모였으며 그들이 보유한 장비 또한 최악이었다.

 

맨몸으로 한강을 넘어온 국군은 거의 모든 중장비를 버렸기 때문에, 연대별로 중화기라 분류할 수 있는 것들은 박격포 2~3문에 기관총 5~6정에 불과했다. 지금으로 치면 1개 중대 병력의 화력에도 못 미치는 전력이다. 통신망조차 연결되지 않았는데(무전기조차 버리고 온 경우가 많아서), 각 지휘관끼리 전령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병사들은 지난 사흘간의 전투와 한강 철수로 피로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이 최악의 상황에서 한 자락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미군’이라는 희망이었다.

 

Walker_Church_Collins.jpg

맥아더는 처치(가죽 재킷을 입은 인물)를 한국으로 보내 무초 대사와 한국군 군사고문단과 협력하여 남한에 어떤 지원을 할 수 있는지 평가하도록 했다.

출처-<위키피디아>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27일, 처치 준장(John H. Church)이 이끄는 미 극동군 사령부의 ‘전방지휘소(ADCOM)'이 수원 농업실험장에 설치된다(몇 시간 뒤 이곳에 한국 육군의 육군본부도 개설된다). 김홍일 장군이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직후였다. 이때 미군은 김홍일에게 이런 지침을 전한다.  

 

“미군의 참전 가능성에 대비하여 시흥-수원 이남선에서 병력을 수습하고 한강선에 투입하여 한강선을 고수해야 한다.”

 

작전 지침의 배경에는 당시 육군참모학교 고문관이었던 해즐렛(Robert T. Hazlett) 중령이 있었다. 그는 김홍일 장군이 시흥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되자 

 

“미 지상군의 참전은 기대 이상으로 확실시된다. 그러나 미군이 이 땅에 상륙하여 전투 전개를 갖출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시간은 향후 3일간으로 본다. 따라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3일 동안, 이 한강선을 고수하여 적을 저지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한마디로, 

 

“너희가 3일만 버텨주라.”

 

라는 뜻이었다. 김홍일은 이 3일에 희망을 걸고, 자신이 평생을 갈고 닦은 군사 지식과 경험을 모두 쏟아낸다. 김홍일이 이후에 보여준 방어전은 ‘마술’과 같았다. 그는 우선 병사들의 사기 진작에 나선다. 며칠 간의 사투로 지쳐있는 병사들을 위해 그는 민간인들을 동원, 시흥과 안양 일대에 대형 취사장을 만들어 식사를 추진했다.

 

김홍일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헌병들을 모두 불러내 시흥 부근 도로변의 문짝을 뜯어냈다. 거기에다 ‘미군 참전’이라고 크게 쓴 간판 수십 개를 제작해 낙오병이 철수하는 길목마다 세우게 했다.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한강 방어 전투 내내 방어진지를 돌아다니며, 이 전투의 의미와 앞으로의 전황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역설하며 병사들에게 사명감을 심어 주었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패배 의식과 두려움에 침식되어 있던 국군들이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김홍일 장군의 "한강선 방어"

 

ㅣㅏㅚㅏㅘㅣ.JPG

북한군 노획장비를 시찰하는 이선근 대령(왼쪽)과 김홍일 소장(오른쪽). 한국 전쟁 발발 후, 이선근 대령은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훈감에 보임되었으며, 현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른 인물이다.

출처-<링크>

 

사령관으로서 김홍일의 진짜 면모는 “한강 방어” 전략에서 드러났다. 먼저 한강을 넘어온 병사들을 급히 재편성해 ‘혼성 수도사단’, ‘혼성 7사단’, ’혼성 2사단‘을 편성했다. 이 병력으로 24킬로미터의 전선을 방어해야 했다. 그 앞에는 북한군 4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홍일 장군의 계획은 간단했다.

 

도하지점을 틀어막고, 버틴다.

 

한강 철교가 눈에 들어왔다. 덜 파괴된 경부선과 경인선 상행선이 문제였다. 철교를 파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박격포와 장갑차를 배치했다. 공병대대를 투입해서 경부선 철교의 교각 일부를 파괴했다. 미군에게 지원을 요청해 B-26 폭격기로 경인선 상행선 철교의 경간을 박살 냈다. 

 

다리를 파괴한 후에는 장갑차와 박격포로 북한군의 철교 복구 작업을 방해했다. 노량진 일대에는 중화기를 집중 배치해 북한군의 진출을 막고 교량 보수 작업을 지체시켰다. 김홍일 장군은 부족한 병력을 적재적소에 투입했을 뿐만 아니라 그 운영에서도 ‘숙장(宿將)’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다리를 틀어막은 다음엔 ‘나루터’로 향했다. 지금처럼 한강에 다리가 많지 않던 시절에는 나루터가 꽤 많았다. 김홍일 장군 눈에 들어온 서강 나루터(서강-여의도), 마포 나루터(마포-여의도), 서빙고 나루터(서빙고-잠실), 한남동 나루터(한남동-신사동), 뚝섬 나루터(뚝섬-압구정동), 광나루(광장동-천호동). 위 나루터를 중심으로 방어 작전 계획을 세웠다. 

 

2016062800058_0.jpg

영등포 일대에서 정찰 중인 국군 장병의 모습

출처-<국방홍보원>

 

중화기를 한강 이북에 놓고 왔기 때문에, 북한군 포병 화력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병력을 총동원해 방어진지 구축에 모든 걸 걸었다(맥아더가 진지에 있던 병사에게 “언제까지 그 호 속에 있을 것이냐?”라고 묻자, “상사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려지든가, 제가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지키겠다.”라고 말해 맥아더가 감동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나온 곳이 바로 여기다).

 

이내 북한군의 ‘초반 러시’ 운도 바닥이 났다. 북한군이나 국군이나 군대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수준이 둘 다 고만고만했다. 북한군의 전쟁 초반 기세를 보면 군사력이 대단한 것 같지만, 처음 얼마 간은 장비빨과 기습에 의한 승수효과, 소련군이 짜준 작전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북한군은 당장 도하작전(적의 통제 하에 있는 강이나 큰 내를 건너 공격하는 작전)을 해야 하는데, 장비가 부족했고 장비를 운용할 능력은 더더욱 부족했다(북한군의 도하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는 건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인 라주바예가 쓴 ‘라주바예프 보고서’에 잘 드러나 있다). 그들의 운도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홍일 장군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7월 3일, 결국 북한군 전차가 한강을 도하하면서 공식적으로 한강 방어선이 뚫리지만, 김홍일 장군은 최초 3일만 버텨 달라는 미군의 부탁보다 3일 더, 총 6일을 버텨낸다. 이 6일간의 방어 전투는 한국에게 기사회생의 시간이 되어주었다. 

 

과연 6일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꾼 6일

 

19507월1일 일본규슈에 있던 미군스미스부대의 한반도 상륙.JPG

1950년 7월1일, 일본 규슈에 있던 미군 스미스 부대가 한반도에 상륙한다.

출처-<KBS>

 

6월 28일, 미 합참(JCS)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넘겨받은 맥아더는 바로 한강 방어선을 방문한다. 그리고 그날 워싱턴으로 지상군 파견에 대한 의견을 긴급 타전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요청을 승낙한다. 

 

7월 1일, 부산 수영 비행장에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가 공수됐다. 뒤이어 일본 규슈에 있던 미 제24사단이 한국 전선으로 넘어올 준비를 한다.

 

7월 2일, 미 극동군사령부 전방지휘소장으로 와있던 처치 준장과 정일권 장군(당시 육해공 총사령관)은 한미 양군의 작전구역과 세부 사항을 정리했다. 이건 상당히 중요한 신호다. 조금 전까지 나라가 망할 줄 알았는데, 위기를 벗어난 상황에서 한국군과 미군이 어디를 담당할지 영역 분배의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이때 경부가도를 중심으로 서부축선은 미군, 중동부와 동부는 한국군이 맡기로 했다. 

 

결정적으로 그 시간 동안 국군이 재편성되었다. 한강 방어선에서 물러난 국군은 기존의 8개 사단 체제를 5개 사단으로 축소하고,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모체로 한 1군단을 창설하게 된다. 이때가 1950년 7월 5일이었다.

 

장개석_이승만_1953.png

(왼쪽부터)한국을 방문한 장개석과 그를 맞이하는 김홍일과 이승만

출처-<위키백과>

 

김홍일 장군의 수십 년 군 경력은 이 6일을 위해 존재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 전쟁 초반에 김홍일 장군이 벌어준 6일은 한국 전쟁의 방향 자체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오죽하면, 이승만 대통령마저 낙동강 방어전 당시 1군단 사령부를 방문해서,

 

“김홍일 장군이 한강을 잘 막아 주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기사회생해서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야. 그때 만약 한강을 그만큼 막지 못했다면 괴뢰군은 그대로 부산까지 밀려왔을 것이고, 그랬으면 우리도 지금쯤은 자유중국처럼 제주도에 건너가 있게 됐을지도 모르지. 우리나라에 김 장군 같은 훌륭한 군인이 있다는 건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에요.”

 

라고 말했을까? 이 당시 김홍일 장군을 좋아하든 말든, 그 출신이 일본군이든, 광복군이든, 미군이든 간에 김홍일 장군의 한강 방어 작전에 대해서는 칭찬 일색이었다. 한국전쟁의 결정적 순간이 인천상륙작전이라 말하지만, 그걸 가능케 한 것 또한 한강 방어 전투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있어선 한국전쟁의 영웅이라 칭송(!?)받던 백선엽 장군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군 고급 지휘관으로 대부대 실전경험이 누구보다 많았고, 건군 후 참모학교 교장을 역임한 김 장군은 지연전의 의미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고등군사 전술을 터득한 김 장군이 한강 방어선을 지휘하게 된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한강 방어선을 지탱함으로써 국군과 미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어주었다. 한강 방어선이 조기에 무너졌다면 미국은 지상군과 전투 장비를 투입할 시기를 놓쳐 전세를 만회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3년 1개월간 끌고 갈 수 있었던 건, 김홍일 장군이 막아낸 6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란 걸 많은 이들이 기억했으면 한다. 만약 육군에서 ‘원수’ 계급장을 추서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김홍일 장군을 꼽을 것이다. 이보다 더 완벽한 이력을 갖춘 군인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