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생각한다
단 한 순간도 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생각하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조차 생각이다. 그렇다면 언어를 배우기 전에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생각의 기반에는 느낌이 있다. ‘점심때가 되었나, 배가 고프네.’라는 생각의 기반에는 배고픔이라는 느낌이 있다. ‘추우니까 옷을 더 껴입어야겠다.’라는 생각의 기반에는 추위라는 느낌이 있다. 이런 원초적인 범위를 넘어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자. ‘행복하다는 건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의 기반에 넘쳐흐르는 유쾌하고 편안한 느낌, ‘이런 게 사랑이구나.’라는 생각의 기반에 넘쳐흐르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 이렇게 몇 가지 단어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을 기반으로 생각한다.
생각이란 ‘판단과 행동을 쉽게 하고자 느낌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 및 수정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단순히 번역하는 것을 넘어 ‘수정’ 작업이 들어갔다는 점에서 생각은 느낌을 기반으로 했으면서도 그와 다른 것이 된다. 이 수정 작업 때문에 때로 느끼는 것과는 다르게 생각하기도 한다. 생각이 너무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을 때 많이 일어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때가 그렇다. 느낌은 그 사람을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생각은 ‘너는 그 사람을 사랑하며, 그 사람에게 보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때 너무나 명백한 느낌을 생각으로 번역하지 않는다. 혹은 일부 번역한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잘못된 거야.’라는 생각으로 덮어버린다. 이런 일은 비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스라이팅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내면에서도 생각이 느낌을 다르게 번역하거나 심지어 억압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요즘은 가스라이팅보다
'심리적 지배'로 부를 것을 권장한다
출처-<유튜브 채널 '디글 :Diggle'>
특히 ‘나 자신을 단련시킨다.’ ‘유혹을 이겨내고 열심히 산다.’라고 생각하는 때 그렇다. 느낌은 밖에 나가 햇볕을 쬐라고 말하는데 생각은 ‘일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느낌은 조용히 밤거리를 산책하고 싶다고 하는데 생각은 ‘저녁 운동을 가라’고 말한다. 느낌은 육체적 본능, 욕구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기 때문에 느끼는 대로만 살면 현대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힘들다. 우리의 느낌은 ‘매일 학교에, 회사에 가라.’ ‘아침에 일어나면 샤워를 해라’ 따위의 일들을 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자신의 생산성과 생존을 위해 수시로 느낌을 억압한다. 그 결과 ‘느낌의 억압’은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2. 느낌을 억압하다
느낌을 억압하는 습관은 어렸을 때부터 학습하기 시작한다. ‘건강해지려면 야채를 남기지 말고 먹어라.’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나갔다 들어오면 손부터 씻어라.’ ‘키가 크고 싶으면 흰 우유를 마셔라.’ 우리는 어린 시절 느낌이 거부하는 것들을 먹고, 느낌이 내키지 않은 일을 해야 훌륭한 육체를 지닌다고 배웠다. ‘국그릇은 오른쪽에 놓고 밥그릇은 왼쪽에 놓아라.’ ‘어른에게 인사를 할 때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라.’ 우리는 느낌이 이해하지 못하는 규범을 지켜야 비로소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고 배워왔다. 느낌을 잘 억압할수록 ‘의젓한 아이’ ‘착한 아이’라는 평가를 들으며 자라왔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평가 기준은 바뀌지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한 사람의 생산성은 ‘느낌을 얼마나 잘 억압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몰려오는 잠을 참고 새벽에 일어나 공부나 운동을 하는 사람. 가족과의 시간마저 포기하고 야근하며 일에 몰두하는 사람. 체중을 줄이고자 배고픔을 참고 밥을 거르는 사람. 흔히 ‘성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이런 행동을 잘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머릿속에 이런 관념을 형성한다. ‘느낌은 육체적 본능만을 따르는 원시적인 것, 억압해야 하는 것.’ 그러나 이런 관념은 우리의 성장을 저해하고, 삶을 표면적인 곳에만 머무르게 한다.
느낌이야말로 영혼의 언어다. 느낌이 육체의 욕구와 본능을 대변하는 것은 물질계에서 우리 삶이 육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배고픔을 알리고, 수면 부족을 알리고, 휴식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것. 느낌의 이런 기능이 없다면 육체를 제대로 보존할 수 없다. 물론 잘못된 음식 섭취나 약물 등을 통해 느낌의 신호를 왜곡할 수도 있다. 당분을 습관적으로 과하게 섭취하면 배고프지 않은데 배고프게 느낀다. 어떤 마약은 우리가 자야 하는데 깨어있는 느낌이 들게 하고, 인위적으로 즐겁게 느끼게끔 한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느낌은 육체적 본능과 욕구를 전달함으로써 육체의 생존과 안위를 돕는다.

우리가 ‘느끼는’ 것에 이러한 생리적인 욕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벅차오르는 감동, 눈부신 영감의 순간, 무언가에 강력하게 사로잡히는 감각,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포,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 등,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들도 있다. 또한 ‘감’이라는 말로 표현히는, 미래나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 이런 느낌은 우리가 의식하는 욕구의 범위를 초월한다. 매일 가는 출근길에 어쩐지 느낌이 이상해 다른 길로 갔는데 다리가 무너져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는 이야기. 어떤 사람을 만나고 느낌이 이상해 뒷조사를 해봤더니 사기꾼이었다는 이야기. 이런 기묘한 이야기들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지만 어째서 느낌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영역까지 알려주는지는 쉽사리 알지 못한다.
3. 느낌에 귀기울일 때 들리는 것들
닐 도널드 월쉬의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 인용한 문장이다.
만일 네가 어떤 것을 놓고 무엇이 자신에게 참인지 알고자 한다면, 네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살펴보라. 느낌이란 건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많다.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어려운 경우도 자주 있고, 그러나 네 가장 내밀한 느낌 속에 감춰진 것이야말로 네 가장 고귀한 진실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신은 느낌을 영혼의 언어,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라 이야기한다. 종교의 유무를 차치하고, 맥락은 취할만한다. 느낌이란 단순히 육체적 본능만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영적인 성장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일반적인 사람이 결코 생각해 내지 못한 천재적인 아이디어들도 모두 한순간의 영감, ‘느낌’에서 온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큰 결정을 내리게 되는 계기도 축적된 생각과 계획보다는 한순간의, 온몸을 번개처럼 강타하는 강력한 느낌인 때가 있다. 이렇게 저항할 수 없으며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강력하고 초월적인 느낌을 우리는 ‘계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마치 신적인 도움을 받은 것처럼 위험을 알려주고,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를, 진정한 나 자신을 찾아가게 해주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영혼의 언어’로서의 느낌을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부한 적 없는 외국어를 읽거나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느낌을 억압하는 데 너무 익숙해지면 ‘느낌의 문맹’이 된다.
미래의 위험이나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하는 어떤 암시를 받아도 자연스럽게 억압하고 생각을 통해 만든 ‘계획'대로 행동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일상적 삶과 육체적 본능을 넘어선 초월적인 느낌은 아예 받지 못하게 된다. 느낌의 문맹이 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통제하는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우선 내려놓아야 한다. 창작을 위해 ‘영감’을 받아야만 하는 예술가들의 라이프스타일이 일반인들보다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그들이 ‘느낌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웃고 싶을 때 웃고 먹고 싶을 때 먹는다.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방만한 삶’이지만 이런 삶은 진정 원하는 일에 있어서는 최고의 집중력을 선사하기도 한다. 느낌을 자유롭게 풀어주며 발달시킨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어떤 일에 몰두할 때는 하루고 이틀이고 먹고 자는 것을 잊기도 한다. 쉴 때라도 일상을 옥죄고 있던 억압에서 벗어나 ‘느낀대로' 사는 연습을 해보면 좋다. 단 하루라도, 아니면 반나절이나 몇 시간만이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는 것이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배고플 때 먹고, 산책하고 싶을 때 산책하고 눕고 싶을 때 누워보자. 때로는 이런 단순한 휴식이 깊은 통찰로 안내해 주기도 한다. '느끼는 대로 하면 안 돼'라고 말하는 내면의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야채를 남긴다고, 낮잠을 자지 않는다고 혼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우리가 느낌을 억압하는 이유도 결국 느낌을 충족하고자 함이다. 성취감, 즐거움같이 '기분 좋은 느낌'을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느낌을 억압하는데 너무 익숙해진 사람은 느낌을 억압해 원하는 것을 이루어도 예상했던 것만큼의 만족이나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 술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무리 비싼 와인을 마셔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성장이나 성공을 위해 어느 정도 자기통제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너무 과하면 우리는 어떤 통계도 알려주지 못하는 것을 직관하는 능력, 세상에 없던 발상을 떠올리게 해주는 영감, 자기다움을 발휘하지 못한다. 느낌이라는 영혼의 언어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해야 할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억압의 사슬을 가끔 풀어주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그 언어를 지닌 채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 <신과 나눈 이야기>는 신과 대화했다고 주장(...!?!)하는 닐 도널드 월쉬가 쓴 책으로 2007년, 영화화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연히 "신과 대화했다"는 주장이 허무맹랑하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내용도 상당하기에(...!?)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만, 맥락상 취할 부분이 있기에 인용문을 그대로 싣습니다. 본문에 서술한대로 종교적 관점을 전제로 한 인용이 아님을 밝힙니다.
검색어 제한 안내
입력하신 검색어에 대한 검색결과는 제공하지 않고 있습니다.
딴지 내 게시판은 아래 법령 및 내부 규정에 따라 검색기능을 제한하고 있어 양해 부탁드립니다.
1. 전기통신사업법 제 22조의 5제1항에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삭제, 접속차단 등 유통 방지에 필요한 조치가 취해집니다.
2.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청소년성처벌법 제11조에 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아동·청소년이용 음란물을 제작·배포 소지한 자는 법적인 처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4.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에 따라 청소년 보호 조치를 취합니다.
5. 저작권법 제103조에 따라 권리주장자의 요구가 있을 시 복제·전송의 중단 조치가 취해집니다.
6. 내부 규정에 따라 제한 조치를 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