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스포츠 행사를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식순이 하나 있다. 바로 유명 가수의 국가 제창. NFL 결승전 같은 ‘거대한 행사’일 경우에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출연하고, 미 공군이나 해군의 곡예비행단이 날아오는 정도는 기본이 된다.
2016년 NFL 결승전에서
미국 국가를 부르는 레이디 가가
지금 미국 국가인 The Star-Spangled Banner. 해석하자면, ‘별이 빛나는 깃발’이 된다(한국에서는 ‘성조기여 영원하라’라고 의역해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런지 이해는 안 되지만...).
근데, 이 미국 국가는 1931년 지정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다. 공식 행사에서는 가급적이면 3절까지 부르지 말고, 2절 정도에서 끊는 게 관례가 됐고, 프로 가수들도 음을 맞추지 못해 틀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러 문제 중 특히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게 ‘가사’ 부분이다. 흑인들의 경우, 3절 가사가 껄끄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No refuge could save the hireling and slave
그 어떤 피난처도 그 용병들과 노예들을
From the terror of flight, or the gloom of the grave
도주의 공포와 무덤의 암흑으로부터 구해주지 못했고
3절 가사 중 일부이다. 국가(國歌)에 ‘노예’를 명시한 거다. 그리고 이 가사의 원문이 되는 시 "맥헨리 요새의 방어전(Defence of Fort McHenry)"을 쓴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는 그 스스로가 노예를 소유했고, 노예제 지지자였었다. 또한 흑인들을 ‘열등 민족’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프랜시스 스콧 키
출처-<위키피디아>
이러다 보니 몇몇 흑인 셀럽들을 중심으로, 국가(國歌)를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큰 움직임은 아니었고, 몇몇 소수 셀럽이 들고일어난 정도이긴 하지만). 실제로 몇 번 국가 교체에 대한 여론조사가 있었지만, The Star-Spangled Banner의 인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대신, 논란을 피하기 위해 1, 2절까지만 불러주는 것으로 타협을 보는 게 관례가 됐다.
가사를 고치지 않고 추가만 하는 미국
재밌는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인종 차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은 국가(國歌)도 ‘수정헌법’처럼 새로운 부분을 추가했다. 3절의 노예제 언급을 상쇄하기 위해 5절을 추가한 것이다. 5절은 노예 해방과 남부연합(남북전쟁을 상정해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남북전쟁이 터지자, 올리버 웬델 홈즈가 3절과 배치되는 5절 가사를 붙인 거다.
내용을 보면,
If a foe from within strikes a blow at her glory
내부에서의 적이 그녀의 영광에 타격을 준다면
Down, down, with the traitor that dares to defile
감히 별의 깃발과 그녀의 이야기의 한 장을
The flag of her stars and the page of her story!
더럽히는 반역자들을 타도하라
And the millions unchained who our birthright have gained
그리고 수백만의 생득권을 가진 이들이 해방되었으니
이 가사에 등장하는 ‘내부의 적’, ‘반역자’가 남부의 노예제 지지자들이라는 건 다들 짐작할 거다. 5절 가사의 핵심은 ‘생득권을 가진 이들이 해방되었으니’이다. ‘노예해방’을 의미한다.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가사들이다. 이런 논란 때문에 미국 국가(國歌)는 공식적으로 1절에서 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그 1절도 썩 ‘괜찮은’ 내용은 아니라는 거다.
이때 연주된 것도 1절이다
1절 가사를 잠깐 살펴보자.
O say can you see, by the dawn's early light,
오, 그대는 보이는가, 이 새벽의 여명 속,
What so proudly we hailed at the twilight's last gleaming
황혼의 미광 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환호하며 맞았던
Whose broad stripes and bright stars through the perilous fight
넓은 줄무늬와 빛나는 별들이 이 치열한 전투 가운데
O'er the ramparts we watched were so gallantly streaming?
우리가 보고 있는 성벽 위에서 당당히 나부끼고 있는 것이?
And the rocket's red glare, the bombs bursting in air
로켓의 붉은 섬광과 창공에서 작렬하는 폭탄이
Gave proof through the night that our flag was still there
밤새 우리의 깃발이 그곳을 지켰음을 증명할지니
이 가사에 등장하는 내용을 다 이해하려면, 최소한 3가지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1. 이 가사의 배경이 1812년 미영 전쟁이란 사실
2. 맥헨리 요새 공방전을 목격한 프랜시스 스콧 키가 이 기록을 시로 남겼다는 사실
3. 당시 영국군이 ‘로켓’을 사용했다는 사실
자, 그럼 하나씩 디벼보자.
1절 가사의 배경, 미영전쟁
우선 이 노랫말의 배경이 되는 ‘1812년 전쟁(미영전쟁이라고도 한다)’을 알아야 하는데, 발단은 나폴레옹 전쟁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내리고, 영국과 프랑스가 한바탕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 상황에서 영국은 프랑스와 교역하는 상선에 높은 세금을 때리고, 무차별적으로 해군 징집을 감행하게 된다.
1811년 당시 대륙봉쇄령에 참여한 유럽 국가들
진한 푸른색: 프랑스 제1제국
옅은 푸른색: 프랑스의 위성국 및 점령지
희미한 푸른색:프랑스에 의해 대륙봉쇄령에 강제 참여한 국가들
출처-<위키피디아>
(당시 영국 해군은 닥치는 대로 징집하는 걸로 유명했다. 말이 좋아 징집이지 사실상 강제 연행, 납치 감금 수준이었다. 영화 ‘마스터 앤드 커맨더’의 원작 소설인 오브리-머투린 시리즈를 보면, 술집을 털어 징집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도 잘 표현돼 있지만, 영국 해군 전함은 ‘나무감옥’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식수 대신 맥주와 럼주를 마시고, 타격무기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딱딱한 쉽 비스킷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이런 함상 근무는 선원들에게 지옥 그 자체였다)
이런 무차별 징집에 미국인들이 걸려든 거다. 처음엔 탈영한 영국 해군을 잡는 형태였는데, 크고 아름다운 ‘미국인’(영어도 쓸 수 있는!)을 버릴 수가 없었기에 이들도 납치해서 같이 끌고 가 선원으로 활용했다. 이러니 당연히 미국과 영국 사이의 감정의 골이 패일 수밖에.
미국 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
출처-<위키피디아>
결국, 미국 4대 대통령이 된 제임스 메디슨이 이런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당시 제임스 메디슨은 미국 선박을 나포하고, 선원들을 강제로 징집한 것에 분노해서 법안까지 내놓고 영국과 프랑스의 전향적인 자세를 요구했다. 프랑스는 순순히 미국 의견에 따랐지만, 영국은 무시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미국의 여론이 들끓었고 제임스 메디슨은 결국 전쟁을 선포하게 된 거다.
(덤으로 이야기하자면, 당시 캐나다는 영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즉, 영국령 북아메리카였다. 이 땅은 전략적으로 미국을 내려다보고 있는 위치였다. 이런 캐나다에 미국 오피니언 리더들은 일종의 두려움이 있었다. 언제든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영국은 인디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미국을 공격하게 했다. 이런 영국에 미국은 두려움과 불만이 한창 증가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전쟁을 선포한 이유에는, 실은 미국도 캐나다 땅이 탐났던 면이 있었다. 이참에 캐나다까지 먹고 싶어 했던 미국의 야망이랄까?)
1850년까지 미국의 영토 팽창을 나타낸 지도
미영전쟁이 일어났을 당시는
제일 오른쪽 검정색 부분과
그 옆 루이지애나 부분만 미국 영토였다.
출처-<월터 라페버>
야심 차게 전쟁을 선포했지만, 이게 좀 미적지근했다. 애당초 미국은 전쟁을 할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육군 병력 7천 명에 군함 14척이 당시 미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었다. 물론, 준비가 안 된 건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대륙에서의 전쟁(나폴레옹 전쟁)에 집중하고 있던 상황에서 캐나다 쪽으로 돌릴 병력이 없었다. 그래서 초반엔 미국이 캐나다 쪽으로 진격해 들어갔고, 영국은 이를 방어하는 형태로 막아서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유럽 쪽 상황이 호전되면서(나폴레옹이 박살 나고), 영국이 병력을 돌리게 되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외국 군대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치고 들어갔다. 이 때문에 백악관과 미국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주요 관청이 불탔고, 메디슨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와 기밀 서류 몇 개를 들고 황급히 백악관을 도망쳐야 했다.
미영전쟁 당시 불타는 백악관 그림
독립전쟁 이후로 다시 한번 미국과 영국의 진검승부가 벌어질 거 같았지만, 전쟁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둘 다 전쟁을 계속할 여력도 없었고, 할 이유도 없었다. 영국은 오랜 전쟁에 지쳤고, 미국도 영국을 쓰러뜨릴 힘이 없었다(지금의 미국을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시 미국은 독립한지 얼마 안 된 그저 그런 국가였다).
결국, 3년 가까이 싸우다가 서로 평화 조약을 맺고 전쟁을 수습했다.
피로스의 승리(패배나 다름없는 승리)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미국이 하나 건진 게 있다면, 바로 오늘날까지 부르게 된 미국 국가(國歌)가 이때 만들어졌다는 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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