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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연재냐구?

 

교과서엔 나오진 않는, 조선시대 직장인들이 쓴 일기를 통해 직장인 개인과 백성들의 삶과 비애를 디벼보는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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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발... 내가 때려치든가 해야지 증말... 흑흑

 

목차 (연재 중 조금씩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1부

 

1. 만년 참봉 금난수의 현기증 나는 관직 생활(링크)

2. ‘영남의 1타 선비’ 김령의 신입사원 분투기(링크)

3. 최전방 GOP 삼수갑산 장교의 삶, 노상추(링크)

4. ‘소확횡’과 재테크를 동시에, 유희춘(링크)

5. 인서울 출근러 황윤석의 셋방살이(링크)

 

2부

 

6. 포로수용소에 던져진 한 군무원, 이민환

7. “범인은 바로 너!” 수사관이자 재판관, 서유구

8. “나 도지삽니다.” 그런데 선정(善政)을 곁들인, 조재호

9. ‘기로소 고인물’ 권상일의 ‘파직은 거들뿐’

 


 

여러분들의 성원 덕분에 <조선 직장인의 삶> 1부 연재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 연재가 일반적이지 않은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차분히 읽어주시고 또 실수를 짚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1부에서는 한 명의 사례로부터 ‘보통의 직장인’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다뤘는데요. 2부에서는 ‘특이 케이스’를 통해 조선의 백성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 시대가 응집된 ‘특이점’에서는 어떠한 보편이 발견될까요?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심하 전투의 포로가 된 군무원, 이민환의 이야기입니다.

 

 

포로수용소에 던져진 군무원, 이민환

 

패권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박 터지는 건 한반도의 지정학적 환경이 낳은 역사적 운명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진짜로 박 터지는 건, 일상에 휩쓸려 사는 보통 사람들이죠. 중국에 한한령이 시행됐을 때, 가장 많은 피를 봤던 건 중국과 알게 모르게 엮어서 살고 있던 수많은 개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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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동아시아에는 새로운 시대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여진족을 통합하고, 1616년 칸을 칭하며 후금의 황제로 등극한 누르하치는 1618년 요동을 기습했습니다. 이에 명나라는 조선을 압박하며 원정군을 요구하죠.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시도하던 광해군은 어떻게든 파병만은 막아보려 했으나, 명나라 황제가 칙서를 통해 “군대를 보내라.”라며 압박의 수위를 높이자 파병이 결정되었죠. 

 

그리하여 1619년 2월, 도원수 강홍립이 이끄는 1만 3,000명의 조선군은 명나라의 재촉과 함께 압록강을 건넙니다. 이 조선군 일행 중에는 사람들이 기피하던 종사관(從事官) 자리를 ‘짬 처리’ 당한 오늘 연재의 주인공 ‘이민환(李民寏, 1573~1649)’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금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습니다. 조선군은 명과 함께 심하(深河) 전투(사르후 전투의 일부)에서 일방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수많은 조선군이 죽었고, 살아남은 조선군은 후금의 포로수용소에 억류당하죠. 이 중엔 이민환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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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 中

 

그는 전쟁 초기에서부터 고국으로 돌아오는 때까지 꾸준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일기를 썼습니다. 이 일기가 『책중일록(柵中日錄)』입니다. 

 

이번 이야기에선 이 『책중일록』을 통해 패권 다툼에 희생당한 수많은 개인의 이야기, 직장생활을 했을 뿐인데 나라를 대표하게 된 이들의 이야기를 살펴볼 것입니다. 

 

 

끌려가는 전쟁, 예견된 패배

 

명나라가 후금을 정벌하겠다고 결정한 당시, 조선 정계의 분위기는 파병지지파가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파병을 주저했던 광해군을 지지하는 쪽은 매우 수가 적었죠. 게다가 명나라는 빨리 파병하라며 지속적으로 엄포를 놓았습니다. 

 

“임진왜란 때 너네 나라 우리가 살려줬는데, 감히 그 은혜를 잊을 수 있느냐!”

 

이러니 광해군으로서는 파병하지 않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파병이 결정된 후에도 명나라는 조선군을 믿지 못하였고, 자신들의 지휘를 받아 움직이게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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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명나라 황제 '만력제'

 

그런데 여전히 광해군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우선, 도원수로 지명된 강홍립은 무관이 아닌, 중국어에 능통한 문관 출신이었는데요. 명군이 조선군을 총알받이로 쓸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총사령관이 중국어에 능통해야만 덜 휘둘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죠. 또한, 광해군은 아예 “명나라 말을 다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법만 고민하라.”라는 지시를 직접 내립니다. 광해군은 ‘이 전쟁, 무조건 진다’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임명된 강홍립은 지휘부를 구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강홍립을 보좌할 군무원인 종사관 임명이 쉽지 않았습니다. 군인이야 명령으로 선발하면 되지만, 문관 보좌관들은 정치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죠. 게다가 파병지지파로 나섰던 문관들조차도 자신이 직접 가는 건 몸을 사리니, 결국 정계의 알력 다툼에 밀려 시골로 낙향해 있던 이민환이 지명됩니다.

 

머나먼 북방에서, 싸웠다 하면 연전연승의 후금을 상대로 한 전쟁. 아무리 용기 있는 사람이라도 나서기 쉽지 않겠죠. 이민환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종사관 복명서가 떨어지자, 

 

“평안함과 위험함, 그리고 생사를 가리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직분이다.”

 

라며 급히 짐을 꾸려 나섰습니다.

 

그러나 1만 3천 명이라는, 전국의 포수를 ‘영끌’해서 만든 조선의 대군은 시작부터 난관을 맞이합니다. 보급이 형편없던 겁니다. 이민환은 바로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닙니다.

 

1619년 1월 9일- 『책중일록(柵中日錄)』

 

누르하치의 명 침략으로 급히 군대가 만들어진 이때, 도원수 강홍립은 원래 다른 사람을 종사관으로 삼았으나 왕의 재가를 받지 못하고, 출발 직전 나 같이 시골의 힘 없는 사람으로 자리를 채웠다. 

 

우리 군은 1618년 8월 한양을 출발하여, 10월 압록강에 도착해 명나라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정은 평안감사 박엽과 분호조참판(임시 호조참판) 윤수겸에게 군량 보급을 지시하였는데, 군량이 거의 보급되지 않았다. 1월부터는 각종 군량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말 먹이도 떨어지고, 군사들 식량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된 보급이 없고, 군량도 바닥이 나자, 나는 원수의 명령으로 인근 고을들을 돌며 군량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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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후금)의 창업 군주 '누르하치'

 

1619년 2월 18일 - 『책중일록(柵中日錄)』

 

군량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의 감독관들은 계속해서 진군을 재촉했다. 어쩔 수 없이 내일 강을 건너기로 하였다. 분호조참판 윤수겸은 마중을 나왔으나, 순찰사 박엽은 여러 번 군량을 재촉했음에도 끝내 오지 않았다. 우리는 보급을 받지 못한 채 강을 건너야만 했다.

 

보급의 중요성이야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그런데 보급 담당을 맡은 박엽과 윤수겸은 훗날 인조반정 후 각기 다른 이유로 처형된 사람들입니다. 특히, 박엽은 광해군의 최측근이었으며, 중국어를 잘해 광해군 개인의 외교채널로도 맹활약했죠. 조정에서 이 둘에게 보급 책임을 맡겼다는 건, 군대의 보급에 나름대로 큰 신경을 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왜 보급에 실패했을까요?

 

우선, 예산의 절대적 부족 때문입니다. 궁궐 신축에 미친 듯이 집착했던 광해군의 광기는 국고를 연이어 바닥나게 만들었습니다. 군대 보급은 둘째치고, 관료들 월급도 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증언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런 광해군에 궁궐 신추겡 가장 협조적인 사람이 박엽이었습니다. 그는 평안도의 재물이 바닥날 정도로 끌어다 궁궐 신축에 투입하기도 했죠. 

 

또한, 파병에 소극적이었던 광해군의 태도도 이하의 관료들에게 잘못된 사인으로 비쳤을 겁니다. 누구나 보급이 중요한 건 알지만, 왕의 미온적 태도가 ‘보급이 최우선 업무는 아니다’라는 오판을 낳게 한 거죠.

 

이민환이 종사관으로 참전했던 이 사르후 전투(명과 후금이 요동에서 벌인 일련의 전투를 총칭)에서 명나라는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까지 군을 나누어 다섯 방향으로 압박해 들어가는 작전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작전 중 일부인 조선군이 군량 문제로 진군을 늦추니, 명나라는 살벌하게 압박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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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서해문집>

 

1619년 2월 27일 - 『책중일록(柵中日錄)』

 

우리 군이 가져왔던 군량이 모두 떨어졌는데, 후속 군량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보병들이 행군하면서 정강이가 부르트고 피가 흘러나와 명나라 군대와 함께 진을 치지 못하니, 명나라 감독관 우승은이 강홍립에게 쫓아와 칼을 빼 들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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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KBS1>

 

“유정 제독께서 조선 군대가 뒤떨어져 있는 책임을 나에게 물어, 내 목을 치려고 한다! 조선군에 군량이 없지 않은데, 뒤에서 관망하고 두려워만 하는가!”

 

당시 명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은 양호였고, 조선군이 속한 동로군의 지휘관은 유정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현역 지휘관이었죠. 그런데 유정은 양호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서, 사실상 총알받이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유정이 이끌던 군대는 명나라의 장기인 화포도 없었고, 군사들의 질도 안 좋았죠. 유정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어서 강홍립에게 “나는 조선군만 믿소”라는, 황당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맞닥뜨린 조선군은 ‘조땠다’ 싶었을 겁니다. 광해군 또한 “명나라 지고 조선군도 지면 피 보는 건 조선인데, 어떡하면 좋냐...”라고 탄식하죠.

 

명나라의 압박에 무기와 군량도 제대로 없는 채로 한 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내딛던 조선군은 유정의 명 군대와 함께, 부차 벌판에서 후금의 본대와 드디어 마주합니다.

 

<계속>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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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