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모두 나 같은 줄 알았다

 

화면 캡처 2023-08-04 001051.png

출처-영화<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이는 부모의 그늘 밑에서 자란다. 그늘은 아이에게 안락함을 주며, 평생의 든든한 방파제 역할을 한다. 혹은 아이를 붙잡아 두는 족쇄처럼 불편함을 주는 경우도 있다. 조금 더 나은 환경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에, 조금 더 좋은 부모님 아래 태어났더라면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살면서 겪는 뜨거운 햇빛과 모진 풍파를 무난히 막아주는 부모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은 조금 부족한 그늘 아래 적당한 풍파를 겪으며 성장하게 된다.

 

중학생 무렵까지, 나는 우리 부모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집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다른 누군가도 흔하게 겪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다들 비슷하게 살아간다고 여겼다. 발이 아닌 손으로 밥을 먹는 게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부모님의 불화도, 집안 분위기도 다들 이렇게 사나보다 하고 받아들였다.

 

조금씩 나이를 먹고, 친구들 집에 놀러 가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친구들의 부모님이 제공하는 그늘막은 넓고 튼튼했다(물론, 내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친구들이 우리집만 와봐도 분위기를 알았다). 반면 내가 느끼는 부모의 그늘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불안정했다. 처음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었을 때, 내심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금방 그때의 감정을 덮고 잊어버렸다. 다시 말해, 불행과 행복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그저 버티고 살아갔다.

 

특히 내 아버지는 그 점에선 평범(?)하지 않았다. 가장으로서 아내와 자식을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그늘의 범위가 다른 아버지들과 달랐다.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경험이 여럿 있다.

 

시골 똥개의 습격

 

화면 캡처 2023-08-04 005009.png

1993년, 부산 양정동 골목 사진

출처-<KBS>

 

유치원 꼬마 시절, 우리 가족은 부산 양정의 한 단칸방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거의 집에 붙어 있지 않으셨고, 대부분의 시간을 중앙동 술집이나 다방에서 보냈다. 중앙동에 가지 않은 날에는, 사비로 회, 족발, 통닭 등을 구매해 집 앞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술 잔치를 벌였다.

 

즉석에서 모인 파티원들과 밤 늦게까지 술을 진탕 마시고 들어오는 것이 일상 다반사였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자리에 술이 빠져서는 안 됐다. 집에는 닭 다리 한 조각 들고 오지 않았지만, 동네 구멍가게 사장, 지나가던 행인에게는 아끼지 않고 음식을 나눠주었다.

 

주변 상인들은 어머니에게 “그래가 우째 계속 살라꼬?”라고 말하며 동정하는 척했지만, 매상을 올려주는 아버지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진심 어린 충고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돈이 생기면 돈을 다 쓸 때까지 술을 마셨다. 돈이 없는 날이면 어머니에게 가서 돈을 빌려오라고 심술을 부리고 어머니를 두들겨 패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가 늦는 날, 어머니가 직접 아버지를 데리러 가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부인이 남편을 부축해 가는 것은 남자로서 무척이나 모양새 빠지는 일”

 

이라며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를 때렸다. 그날도 밤 열 시가 지났으나 아버지는 돌아올 낌새가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시켜 아버지를 모셔오게 했다.

 

화면 캡처 2023-08-04 010115.png

출처-영화<취권>

 

술에 취해 벌건 눈과 달아오른 얼굴, 어떤 꼬투리를 잡아 폭력을 행사할지 모르는 아버지를 나 또한 데리러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가는 것보다는 내가 가는 것이 결과적으로 낫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차라리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엔, 몸과 마음이 편했다).

 

어두운 골목을 지나 주황색 백열전구가 켜진 구멍가게에 도착했다. 가게 앞 평상에는 아버지와 처음 보는 행인들이 함께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흥을 깨지 않고 아버지 주의를 환기시켜야 했다. 2~3미터앞까지 다가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빠…?”

 

그때였다. 떠돌이 개였는지 아니면 평상에 앉은 행인의 개였는지, 사람들의 안주를 받아먹던 큰 개가 나를 향해 미친 듯이 짖기 시작했다. 내가 만만해 보였는지, 그 개는 겁을 먹고 뒷걸음치는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개는 내 허리 높이까지 오는 똥개였다.

 

“아빠아아악!!”

 

아버지를 연신 부르며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했다. 아버지 눈앞에서 겁에 질린 채 뛰어다녔다. 사납게 짖으며 쫓아오는 개는 유치원생이었던 나에게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눈물이 흘렀다.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동네를 한 바퀴 뺑 돌았다. 그리고 구멍가게로 뛰어 들어가 숨었다.

 

어린아이가 무서워 고함을 치며 혼비백산이 되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어른, 어느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중 아버지란 사람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웃었다. 마치 코미디 프로를 보듯. 땀을 뻘뻘 흘리는 내 모습을 관객처럼 평상에 드러 누워 감상하고 있었다.

 

화면 캡처 2023-08-04 011437.png

그 시골 똥개는 이렇게 보였단 말이다...!!

출처-영화<뉴문>

 

온몸에 열이 올랐다. 수치심과 배신감 같은 감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몸이 떨리고 눈물이 핑 돈다. 구멍가게 사장의 딸이 내 손을 잡아 진정시키려 했다. 아버지는 그 장면도 히히히 웃으며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나는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없이 혼자 온 내게, 어머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니 와 우노, 아버지는?"

 

"흐엉엉! 묻지마."

 

어머니의 물음에, 배를 움켜잡고 웃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표정을 잊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며 더 큰 소리로 울었다. 눈물이 콧물이 되고, 콧물이 침과 섞여 턱 끝에서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고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닦아 주셨다. 얼마 뒤, 귀가한 아버지는 내 추격전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날은 아무런 꼬장 없이 술 냄새를 풍기며 금방 잠들었다.

 

그날 이후, 개만 보면 식은땀이 흘렀다. 찰나의 순간으로 개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 기억과 경험은 내 평생을 압도할 수준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때 난 확신했다. 나의 아버지가 주는 그늘은 그다지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아버지의 조롱 섞인 웃음소리

 

화면 캡처 2023-08-04 011931.png

출처-<링크>

 

다음은 국민학교 6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어릴 때 각인되었던 개에 대한 공포감이 기억에서 조금씩 잊히고 있던 시기였다. 주말 저녁, 아버지는 강변도로를 타고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셨다. 강가에 앉아 저녁노을을 보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따라나섰지만, 아버지가 모는 차에 함께 타는 것은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그래서 난 자전거를 타고 강가로 향했다.

 

주홍색으로 물든 저녁 강가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동생은 강에 돌을 던지며 놀았고, 나와 아버지는 대화 없이 흐르는 강물만 응시하고 있었다. 대화가 없을수록 편안함을 느낀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밖에 나와 바람도 쐬고, 소소한 즐거움이 있는 주말 저녁이 될 것 같아 조금 설레기도 했다.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물들 무렵, 아버지와 동생은 남색 세피아 승용차를 타고 먼저 출발했고, 난 다시 자전거를 몰았다. 차는 20킬로로 서행했고, 난 그 옆을 따라 나란히 이동했다. 어느 순간부터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헉헉대는 거친 숨소리였다.

 

누가 조깅을 하나?

 

아무 생각 없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성체 진돗개 한 마리가 송곳니를 드러낸 채, 침을 흘리며 날 쫓아오고 있었다. 어릴 적 시골 똥개는 요란스럽게 짖으면서 따라왔다면, 이번 진돗개는 조용한 암살자 같았다. 소리소문없이 스으윽 조용히 나를 뒤따랐다.

 

화면 캡처 2023-08-04 012725.png

한 층 업그레이드(?!)된 놈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지릴 뻔했다;;

 

무는 개는 짖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다시 식은땀이 흘렀다.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페달을 빠르게 밟기 시작했다. 멀리서 웃음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으하하하하!!"

 

동생: "하하핫! 행님아 니 뭐하노"

 

뭣 모르는 어린 동생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훗날 동생은 도망가는 형의 모습이 만화 톰과 제리에 나오는 캐릭터 같았다고 했다). 내 어릴 적 트라우마를 만드는 데 한몫했던 아버지는 이번에도 나의 위기를 코미디로 생각하는 듯했다. TV를 볼 때 말고는 절대 들을 수 없는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식은땀을 흘리며 사력을 다해 도망가는데, 그 모습을 보고 웃는 아버지와 동생이 야속했다. 이미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상당히 떨어졌을 때였지만, 이전의 기억까지 되살아나 아버지가 더욱 남처럼 느껴졌다. 평소 친구들과 자전거 경주를 할 때도 이렇게 달린 적이 없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 다다랐을 즈음, 다행히도 나와 진돗개의 거리는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

 

화면 캡처 2023-08-04 013528.png

난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오로지 살기위해 500미터를 미친듯이 뛰었다.

출처-영화<불의 전차>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 뒤를 낄낄대며 따라온 두 부자에게 화를 토해냈다.

 

"도대체 왜! 왜 안 도와주는 건데?!!"

 

경적을 울리는 간단한 방법으로 개를 쫓아낼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땀범벅이 되었고, 화가 나 가슴이 폭발할 것 같은데 천하태평으로 웃는 둘의 모습에 눈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아버지에게 나란 자식은 구경하면 재밌고 웃긴 애완동물 정도의 위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씩씩거리며 소리를 있는 대로 지르던 내게 아버지가 말했다.

 

KakaoTalk_20230804_015018018.png

 

“나는 개가 니 좋아서 쫓아가는 줄 알았지! 크크크.”

 

아버지는 베트남전에서 극도의 긴장감을 가지고 작전을 수행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우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돌아온 참전용사인 것을 감안했을 때, 위험에 대한 인식이 일반인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고 PTSD도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당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상처나 죽음까지도 초연해졌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런 아버지의 상황을 이해하기엔 어렸고, 심적 여유도 없었다.

 

부자간 소통 없는 삶을 살다가, 이번에도 역시 남의 일 보듯 웃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제대로 조롱받는 기분이었다.

 

부모의 그늘 따위 필요 없어

 

나는 대화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 대신 명령과 복종 같은 철저한 상하관계를 지켜야 했으며, 아버지의 조롱 섞인 폭력도 감수해야 했다. 중학생 무렵, 왕따를 당하며 집과 학교, 그 어느 곳에서도 내가 발붙일 곳은 없었다. 다만, 유도관에서 운동을 시작한 뒤, 한 줌의 자신감을 얻어 한동안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 앞에서 뻗댈 수 있었다.

 

이후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부모님'이란 사람의 ‘자애’라는 것을 경험했다. 그 일은 역설적으로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우리 부모님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조금 나이가 드니, 딱히 부모의 그늘 따위 없어도 일단 생존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차갑고 강압적인 그늘은 오히려 나를 불편하고 힘들게 했다.

 

다들 그렇듯, 처음엔 모두가 나처럼 사는 줄 알았다가, 이내 내가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나와 다른 형태의 삶을 살고 있지만,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 

 

1996년 1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밤이었다. 나는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척척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속삭였다.

 

"마. 닥치고 친한 척해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