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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교사로서, 위엄과 기개가 넘치는 어느 교육부 5급 사무관의 ‘왕의 DNA’ 글을 읽고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하나는 매우 익숙한 일을 볼 때 드는 피로감이고, 다른 하나는 깊은 빡침이었다.

 

국가가 원하는 교육, 교사가 하고자 하는 교육, 학부모가 원하는 교육은 다를 수 있고, 다른 것이 당연함으로 이런 갈등은 필연적이며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건… 끔찍하다. 자기 방식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있으며, 더구나 그 방식이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고, 교육적으로는 철저하게 잘못된 방식이다.

 

물론 왕의 DNA를 가진 5급 교육공무원이 보기에 한낱 7급 공무원인 교사의 말이니 우습게 보이겠지만, 꾸질꾸질한 선비가 올린 상소문을 읽는 마음으로 꼼꼼하게 읽어주시길 간청드리온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왕의 DNA 학부모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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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뻘소리는 하지마, 안돼, 그만!!! 담임에게 뻘소리는 ‘절대’하지 않습니다. 

 

왕의 DNA님의 문자를 받으면 교사들은 저도 모르게 분노가 솟구쳐 오릅니다. 용오름처럼 매우 솟구쳐 오릅니다. 하여 담임에게 뻘소리를 하고 싶은 욕구 및 충동이 일어나는 경우, 관심을 다른 곳으로 재빨리 전환을 시킵니다.(방향전환하는개념) <더 글로리>를 보든가, <미션 임파서블>을 보든가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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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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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싫다는 음식도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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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기거나 딱딱한 음식은 해롭지만, 아이들이 먹기에 지나치게 질기거나 딱딱한 음식은 애초에 급식에 나오지 않습니다. 학교에 영양사 선생님이 왜 계시겠어요?

 

학생 입에 억지로 숟가락 떠미는 선생님은 없습니다. 애석하지만 학생에게 독을 먹이는 선생님도 없습니다. 한 반에 20명이 넘는데 한 수저씩 떠먹이면 점심시간 45분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알아서들 먹어야지요.

 

다만 학교에서는 “골고루 먹어요!”, “꼭꼭 씹어 먹어요!” 같은 기초 생활을 가르칩니다. 그것도 싫으면 기미상궁을 고용하던가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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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사가 철저히 편들어 주는 아이는 또래 집단에서 철저하게 소외됩니다. 그런 걸 원하신다면 흠좀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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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명의 아이들이 똑같은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데, 담임이 한 명만 이런 의자에 앉혔다고 생각해 보세요.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 친구와 같이 지내고 싶을까요?

 

아이들이 일으키는 대부분의 문제는 “잘 몰라서” 벌어집니다. 디아블로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잘못을 저지르는 게 아니고,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잘못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지요…

 

모든 걸 충분히 알고 있어서, 알아서 차츰차츰 행동이 수정되는 아이는 고타마 싯다르타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는데, 그런 아이에게는 공교육이 적절치 않습니다. 고행의 길을 떠나세요. 반야 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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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시, 명령투보다는 권유, 부탁의 어조로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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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DNA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혹시 라이언킹이세요? 암튼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런 게 있다고 치고. 아이에게 왕의 DNA가 있으니, 학부모님께서도 당연히 왕의 DNA가 있으시겠죠? 단호하게 말하면 학부모님 분노만 축적될 것 같으니, 왕자에게 말하듯이 좋게 돌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 전주 이씨 263만 명, 밀양 박씨 316만 명, 경주 김씨 188만 명. 게다가 개성 왕씨, 횡성 고씨, 부여 서씨, 백주 태씨등등.. 쁘라스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의 수많은 왕족들. 따지고 보면 한 반에 왕의 DNA인 아이가 수두룩한데 반장을 줄 수 있겠습니까? 왕자의 난처럼 왕자들이 모여 다이다이를 깔 수도 없는데 말이죠.

 

그리고 너무 오래전에 학교를 졸업해 모르셨겠지만, 민주화 이후에 학교, 특히 초등학교에서는 왕의 DNA가 있냐 없냐를 따지지 않고 모든 학생에게 지시, 명령보다 권유, 부탁, 설득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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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80%는 버리고 20% 정도로 해석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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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SNL>

 

몰랐는데, 저한테도 왕의 DNA가 흐르는지, 제가 표현이 강하고 과장된 편입니다. 제가 하는 “학부모님, 좀 진상 같으세요.”라는 말은 학교에서 일하기 힘들고 무섭다는 표현입니다. 20% 정도로 해석해 주세요.

 

근데 막상 학부모님께서 그런 말을 들으면 20%로 해석이 잘 안될 거에요. 쉽지 않은 일이죠.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의 의도만큼 듣는 사람이 어떻게 듣는지도 중요하다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인데, 그걸 못하게 하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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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교사는 칭찬과 사과에 너무 메말라 있습니다.

 

행정은 공기라고 하지요. 있을 땐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다가 없어지면 그제야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고 합니다. 학교나 교사 역시 마찬가지죠. 잘하고 있을 때는 누구도 보지 않다가  잘못이 생기면 그게 들불처럼 금방 번져 나갑니다.

 

열심히 하는 건 ‘당연한 것'이고, 작은 잘못만 저질러도 대역죄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항상 칭찬과 사과에 메말라 있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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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왕의 DNA님 같은 연락을 받으면 뇌 손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뇌세포가 막 자살하고 죽습니다. 그러니 칭찬과 사과의 중요성을 잘 아시는 왕의 DNA 학부모님께서는 교사들에게 칭찬은 과장해서, 사과는 자주 진지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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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색칠 공부를 잘하고 덧셈뺄셈을 못 한다는 말씀이시죠?

 

안타깝게도 뇌세포는 태아 때부터 꾸준히 발달하고, 언제나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학부모님께서 말씀하신 ‘뇌세포가 활성화될 때'가 대체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국가 수준 교육과정에서 초등학교 1학년 때는 1부터 9까지 숫자 세기를 시작으로 6학년 때까지 산수를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교실에서는 학습을 강요하지 않고 촉진할 뿐이지만, 그마저도 부당하다고 생각되시면 중전마마와 무릎을 맞대고 홈스쿨링을 진지하게 논의 하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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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학부모가 원하는 방식으로 인사를 강요하지 않도록 합니다.

 

인사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멋있게 손을 흔들 수도 있고, 악수할 수도 있고, 고개 숙여 할 수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앞구르기도 인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이든 반가움을 전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고, 때와 장소에 맞는 방법으로 하면 됩니다. 그런 걸 배우기 위해 우리는 세금을 모아 학교라는 걸 지었습니다.

 

그리고 ‘극우뇌'라는 것이 극우 뇌인지, 극 우뇌인지 극무뇌인지 알 수 없지만 혹시 말하고 싶은 게 극 우뇌라면, 그런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 아이는 덧셈뺄셈은 못 하고 색칠 공부는 잘하니까 극우뇌라고!!”라고 주장하며 자존감을 지키고 싶으시다면 신경정신과 전문의 박한선 교수가 쓴 이 기사를 3번 필사하고 5번 독경하고 오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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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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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이가 등교를 거부하는 것은 학부모님 너 때문입니다.

 

1번부터 8번까지 착실하게 읽으며 여기까지 왔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아이가 교실에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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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왕의 DNA를 가진 학부모 너님의 잘못입니다.

 

아이가 소통을 불편해하는 것은 아이가 또래와 소통할 기회를 얻지 못했고, 그 능력을 키울 기회를 왕의 DNA가 모두 박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공포감을 느끼고 학교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아뢰옵기 황송하게도 왕의 DNA를 지닌 아버님께서 직위해제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교육철학이 본인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인지, 어떤 끔찍한 사교육 업체의 컨설팅을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해보세요. 절대 혼자서 하지 말고, 되도록 많은 사람, 특히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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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신념대로 사는 건 문제가 없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학부모님이 삼시세끼 고사리만 먹든 불닭볶음면만 먹든 상관없고 본인이 책임질 일인데, 아이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학부모님이 아플 때, 약을 먹지 않고 신념에 따라 쑥을 쪄먹어도 괜찮지만, 아이한테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아이는 온전히 교육받고 건강하게 성장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외우세요. 아이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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