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현장에서의 논란이 시끌시끌한 요즘, 또 하나의 파문이 기사면을 뜨겁게 달궜다. 교육부 5급 사무관 A씨가 초등학생 자녀의 담임 선생님에게 “왕의 DNA”라는 초유의 드립(!!)을 시전하며 갑질을 한 것이다. 그가 교사에게 보냈다는 글을 한번 보자.
별 희한한 주장들 가운데, “왕의 DNA”라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온다.
이 글의 요지는 이렇다. 제지하지 말아달라, 부탁의 어조를 사용하라, 칭찬과 사과를 자주 해달라, 또래와 갈등이 생겼을 땐 무조건 내 아이 편을 들어주라. 한 마디로,
"우리 애는 특별하니까, 왕자처럼 대우해 주세요."
모든 부모에게 자기 자식은 왕자고 공주다. 그런데 진짜 왕자님처럼 대우한다는 건 뭘까.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제지와 간섭 없이 오냐오냐하는 것이 ‘왕자님 교육법’이었을까? 조선사 전문 필자가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순 없다...!(사실 편집부에서 어서 쓰라고 갈궜다... 시무룩...)
여튼, 적어도 조선에선, “아니올시다”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정말 세자 저하는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알아보자.
태어나자마자 인생은 실전이었던 조선의 세자들
출처-<KBS>
조선 왕세자들의 최종 교육목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었다. 이것에 이르는 구체적인 교육 방법이 ‘성리학 경전 독해를 통한 심성 함양’이었다. 왕은 모든 백성, 모든 신하의 스승이 될 만한 무결점 인간이어야 했으며, 따라서 왕세자를 키워내는 건 국가의 교육 역량을 쏟아붓는 작업이었다.
왕의 자손 또는 왕위를 계승할 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전담 부서가 생긴다. 아이가 3~4살쯤 되어 글을 배울 나이가 되면, 강학청(講學廳)이 설치되어 아이에게 글을 가르친다. 6~7살쯤 한글을 가르치는 요즘과 비교하면 매우 이른 나이에, 그것도 외워야 하는 단어가 수많은 한문을 배우게 된다.
세자가 8살에 가까워 지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인 왕세자 교육이 시작된다. 이때 스승들과 첫 대면을 하는데, 그 장면을 보자.
왕세자가 동쪽 단상에 서자, 세자의 스승들이 서쪽에 마주 섰다. 왕세자가 스승들에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한 후, 스승들이 계단을 오르자, 왕세자가 그 뒤를 따랐다. 스승들이 강당 중앙에 서자, 왕세자가 먼저 머리를 조아리며 두 번 절하였다. 스승들도 두 번 답배를 하고 나갔다.
1625년 5월 5일 - 『소현동궁일기』
왕세자 입학도첩(효명 세자의 성균관 입학례를 그린 도첩)을 보면, 왕세자는 성균관 스승에게 수업을 받을 때, 책상 없이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었다
세자 책봉 후 본격적인 왕세자 교육이 시작되면 먼저 스승이 정해지는데, 대체로 영의정에서부터 종2품까지 최고위 관료들로 구성되었다. “스승을 존경할 수 있어야 세자가 제대로 배울 수 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료였던 스승들은 세자를 존중으로 대했고, 세자는 스승을 예법으로 대했다. 훗날 자기 신하가 될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 그것이 세자의 첫 번째 관문이었다.
이렇게 세자 교육이 시작되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온종일 공부에 매진했다. 세자는 오전·점심·저녁으로 구성된 정규 강의를 받고, 두 번의 보충 학습도 있었다. 더 끔찍한 건, 통합적인 커리큘럼이 없었다. 세자는 반드시 한 책을 완벽히 이해한 후에 다음 책을 배울 수 있었다. 수업 시간 내내 그냥 멍때리다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매점으로 달려가던 우리네 학창 시절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렇다면 진도는 어떻게 테스트할까? 조선시대의 우등생은 ‘이해’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완벽한 암기’까지 동반해야 달성할 수 있었다.
소현 세자의 사례를 보자.
김류 : “지금 저하께서 읽으신 것을 들어보니, 대체로 많이 발전하셨으나 읽는 것이 여전히 미숙한 듯합니다. 강의 시간에 배운 것을 하루에 몇 번씩 복습하십니까?”
소현세자 : “새로 배운 것은 30번, 전에 배운 것은 20번 읽습니다.”
김류 : “민간의 선비들은 하루의 복습 회차가 대체로 70회~100회입니다. 지금 저하께서 복습을 많이 안 하신다는 사실을 들으니, 읽는 것이 미숙한 것이 당연합니다. 지금부터는 꼭 횟수를 정하여 복습하십시오.”
오윤겸 : “제대로 읽지 않으면 글 뜻이 명료하지 않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지금부터는 새로 배우는 것은 60번 읽고, 전에 배운 것은 40번 읽어서 공부의 효과가 날 수 있기를 바라옵니다.”
1629년 윤4월 2일 - 『소현동궁일기』
소현세자의 동궁일기에는 스승이 왕세자에게 여러 차례 반복 암기 학습을 강조하고 있다
출처-<(링크)>
고전 한문은 토씨 하나에 문장 전체의 뜻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서 토씨까지 제대로 잘 읽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달달 외우다 보면, 자연히 그 뜻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극혐이다. 나는 근 1년간 『맹자집주』를 읽고 있는데, 주석문을 빼고 원문만 읽는데도 한두 페이지 읽는 데 몇 시간이 흐른다. 이렇게 한 번 진도가 나갈 때마다 100번씩 달달 외워야 한다니, “동궁마마 공부할 시간이옵니다.”라는 내시들의 말이 두렵지 않았을까?
이렇게 꼼꼼히 진도를 챙기는 만큼, 당연히 시험도 있었다.
세자시강원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왕세자가 시험을 볼 때 우수·보통·미달의 성적을 매기는 것은 세자께서 비록 어리다 하더라도 신하들로서는 죄송한 일이었으나, 임금님의 명령이 있어 관원이 감히 매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세자께서 학문이 크게 진보하셨으니, 지금부터는 성적을 매기지 않는 게 어떻겠습니까?”
세자가 먼저 답했다. “성적을 매기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이러한 건의를 주상 전하께 드리면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이니, 아뢰지 않는 것이 좋겠다.”
1634년 5월 19일 - 『소현동궁일기』
어린 시절부터 세자는 수없이 많은 성적표를 받아봐야 했다. 소현 세자 역시 수많은 ‘미달’을 받아봤을 터. 어느 정도 학문의 성취를 이룬 성년의 소현 세자였지만, 성적표의 늪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게다가 세자의 시험이란, 단순한 학업 성취 평가가 아니라, 매 순간 “왕의 DNA”를 제대로 보유했는지 꼼꼼히 평가받는 자리였다.
세자 교육을 소홀히 한 스승의 관직을 박탈하는 이방원
출처-<(링크)>
다시 말해, 미래 권력이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숨 막히는 자리였다. 시험을 제대로 못 보면, 세자 대신 세자를 보필하던 내관 등이 처벌받는데, 이는 세자에게 큰 치욕이었다. 이러한 시험을 한 달에 세 번 이상 치러야 한다니, 중간·기말고사 체제에 감사를 표하자.
이렇게 세자는 8살부터 하루 7시간 이상, 그것도 정치권 실세들과 함께하는 교육을 받았으며, 서슬 퍼런 권력의 중심에서 매번 왕이 될 사람인지 평가받아야 했다. 상상만으로도 숨 막히지 않은가? 세자, 누가 시켜줘도 난 안 하고 싶다.
왕 자리 좀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조선이 세자에게 혹독한 교육법을 강요한 건, 왕이라는 자리가 갖는 무게 때문이었다. 구중궁궐에서 벌어진 왕의 사소한 발언, 깊이 없는 결정 하나가 저 먼 지방에서는 무수히 많은 목숨이 사경을 헤매는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지금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대통령의 알콜 냄새 잔뜩 나는 발언 때문에 허둥대는 수많은 행정 현장을.
출처-<MBC>
그런데 안타까운 건, 이렇게 각고의 노력으로 키워낸 ‘세자’가 순탄히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세자로 책봉 받은 왕자는 총 32명이었으나, 그중 12명이 폐위되고 20명만 보위에 등극했다. 이 중에서도 적장자로 태어나 정통 코스를 밟은 왕은 9명(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경종, 현종, 숙종, 헌종, 순종)뿐이었다. 즉,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망한 세자를 제외하면, 이들만이 어린 시절부터 재위에 오를 때까지 정통 세자 코스를 밟았다는 것. 물론 정조처럼 세손 엘리트 코스도 있지만, 아무래도 정통성에서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 험난한 코스를 제대로 밟은 왕은, 왕의 재목을 분명히 보여줬다. 애초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의 피를 봤던 태종은 냉혹한 진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그 어떤 사대부가보다 빡센 왕세자 교육 시스템을 설계했다. 이 빡센 교육 시스템 덕분에 양녕대군이 걸러지고 충녕대군(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여담으로, 세종은 왕세자 교육을 50여 일만 받았다. 하지만 그는 세자가 아니었음에도 어릴 때부터 왕세자 교육에 준하는 교육을 스스로 받아 왔다. 세종 또한 이 시스템을 보완하여, 세종 말년의 업적을 진두지휘한 문종을 키워냈다. 그리고 문종은 다시 적장자인 단종에게 그 시스템을 적용하고 있었다.
폐위된 양녕대군이 눈물을 흘리지도, 비탄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는 신하의 말에 태종은 이렇게 말한다. "그와 같기 때문에 그와 같이 되었다. 어찌 허물을 뉘우치겠는가?"(태종실록 태종 18년 6월)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혹독한 왕세자 교육을 받아 개인의 자질에는 큰 결격 사유가 없었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난다. 왜일까? 수양대군이 이 시스템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그는 적장자이자 ‘원손→세손→세자→왕’이라는 정통성 끝판왕 테크를 탔던 단종을 밀어내고 왕이 되었으며, 이로써 왕을 정하는 데 사대부들의 의견이 깊이 개입하게 되는 선례를 만든다. 즉, 중종반정·인조반정·철종 등극 등 “왕의 DNA”와는 관계없는 “어른의 사정”이 왕을 결정짓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힘들게 교육받고도 끝내 ‘수기치인’의 목표에 다다르지 못한 왕들도 있었다. 연산군은 세자 시절 우등생은 아니었으나, 비록 시간이 좀 걸려도 어떻게든 최소한의 목표는 달성하는 ‘모범생 연기’를 잘했다. 적장자이면서 세자 교육 코스도 그럭저럭 밟는 연산군에 대해 아무도 태클을 걸 수 없었고, 끝내 재위에 오른다. 그러나 그가 폭주하게 된 원인은 어머니인 폐비 윤 씨 사건 때문이었으니, 세자 교육보다 더 중요한 게 가정의 화합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왕세자 교육 코스는 이따금 실패 사례를 발생시켰고, 심지어 많은 자가 코스를 밟지 않고서도 왕이 됨으로써 그 존재 이유를 위협받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양녕대군을 걸러냈던 것처럼, 자질이 부족한 세자들을 잘 걸러냈기 때문이다. 성질이 포악해서 애초에 세자 자리에도 가지 못했던 임해군, 여러 가지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며 뒤주에 갇혀 죽었던 사도세자의 케이스가 있다. 물론 사도세자는 영조가 기존 시스템보다 더 강도 높은 교육을 하다가 발생한 사고(?)였으나,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조는 정조에게 적합한 세자 교육을 진행했다.
"왕의 DNA"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조는 사도세자보다 한 살 늦은 나이, 네 살이 되어서 글 공부를 시작했다
조선의 왕세자 교육 시스템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지나치게 혹독한 면이 있다. 효명세자나 헌종처럼, 왕세자 코스를 제대로 밟아 왕의 자질을 충분히 갖춘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타났지만, 불행히도 많은 ‘훌륭한 세자’들이 요절했다. 이들이 왕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의 왕세자 교육 시스템의 의미는 더욱 퇴색된다.
하지만 비록 왕이라도, 또한 훗날 왕위를 이을 왕세자라 하더라도, 교육을 시스템에 맡긴 것은 의미가 있다.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였음에도, 때때로 그들에게 특별 대우가 있을지라도, ‘교육’ 자체의 의미를 훼손하는 특별 대우는 요구되지 않았다. 시스템에 개입해서 ‘남다른 조치’를 취할수록, 모든 사람에게 내재 되었다고 믿었던 ‘착한 본성의 발현’이 더욱 방해받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의 DNA를 충분히 갖춘 적장자를 더 강하게 밀어붙이곤 했다. “동궁마마, 공부하러 가실 시간이옵니다.”가 아이를 귀하게 키우는 방법이 아니라, 아이를 강하게 키우는 방법이 되던 시대가 조선이었다.
재밌게도, 자신의 정통성이 미비한 왕일수록 세자 교육에 유난을 떨곤 했다. 그리고 대부분 시행착오를 겪었다.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태종은 처음으로 교육 시스템을 설계했으나, 양녕대군을 탈락시켰고, 조선 최초의 서출 방계 임금이었던 선조는 연일 광해군을 시험하고 영창대군을 뽐뿌질하면서 훗날의 비극을 심어놓았다.
정조의 세손 시절, 영조는 구체적인 교육 방법과 진도를 직접 결정하고 학업을 평가하는 휘강도 직접 했다
출처-<KBS>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소현 세자의 교육을 위해 당대 최고의 석학들을 초빙했으나, 그 역시 자신의 미비한 정통성 콤플렉스가 발현되면서 소현 세자를 궁지로 몰아갔다. ‘무수리 출신’ 영조는 사도세자의 교육에 지나친 관심을 보였고, 직접 교재를 만드는 등 교육 시스템에 깊이 개입했으나, 그의 손으로 사도세자를 죽였다. 우리가 요즘 뉴스에서 보는, 자신의 욕망을 아이에게 투영하는 ‘극성 학부모’가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성공적으로 세자를 키워낸 왕들은 조금 더 시스템에 의지했다. 만약 교육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면, 교육 당사자들을 초청하여 토론하면서 더 나은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선생님에게는 충분한 권위를 보장하고, 자녀에게는 균형감 있는 사랑을 표현했다. 시스템은 잘 작동하기도 하고, 때로는 실패했다.
그러나 조선은 왕의 DNA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시스템을 통해 길러내는 것임을 알았고, 그때 조선의 시도는 충분히 가치 있었다.
[참고문헌]
김남기, 「동궁일기를 통해 본 17세기 세자의 교육 -『소현동궁일기』부터 『숙종춘방일기』까지를 중심으로」, 『漢字漢文敎育』 22, 2009, 309-337.
김은정, 「17·18세기 왕세자(王世子) 교육과정(敎育課程) 연구」, 『漢文古典硏究』 33.1, 2016, 517-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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