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주
본 기사를 쓴 국경없는기자회 세가와 마키코 씨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후쿠시마를 방문하는 기자입니다.
그녀가 쓴 대부분의 기사는 이해관계로 인해 일본의 메이저 언론에서 외면당하고 있으며 리버럴한 몇몇 언론 및 국외에서만 읽히고 있습니다.
세가와 마키코 씨는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의 취재를 바탕으로 해외 언론 및 프리랜서 언론인의 일본 내 취재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현재, 제1 원전 내 잠입 취재를 포함, 수백 번 이상 후쿠시마를 방문한 탓에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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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데자뷰
미친 사람 취급 받을 각오를 하고 고백할 게 있다.
인생은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합리성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초현실이란 것이 존재한다. 내가 저널리스트와 해외 미디어 코디네이터로서 후쿠시마 피해지역(토호쿠 쓰나미 대지진을 포함한)에 관여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미증유의 대재앙,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가 일어나기 3개월 전부터 나는 똑같은 악몽에 반복적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이후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우리들이 현재 체험하고 있는, 보이는 세상의 이면에는 시차는 다소 차이가 날지라도
“동시진행 중인 평행세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믿고 있을 정도다. 대지진 전 까지만 해도 평행세계라든지 영적인 세계 따윈 믿지 않았지만, 사고이후 피해지역에서 그러한 것들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체험했던 경험이 몇 번이나 있었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 20회 이상이나 같은 악몽을 꾸었다. 막연한 꿈이라고 하기보다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순간이동 한 듯한 느낌이었다. 현실의 3차원 세계 이상으로 리얼리티를 가진 세계에 몰입해 있었다. 냄새, 색깔, 소리 등 감각이 현실보다 훨씬 더 예리했다. 등장하는 건 소나무 수풀이 우거진 무인도 섬들, 그리고 3층짜리 새하얀 대형유람선과 여기저기 물 위에 떠있는 낡은 어선들이었다.
<일본의 전래 동화 중 하나인 우라시마 타로>
100명 이상이 너끈히 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일본의 옛이야기 '우라시마 타로'의 무대가 될 법한 전형적인 일본의 해안가 풍경이었다. 대형유람선이 무인도 사이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20 - 30 미터나 되는 큰 쓰나미가 밀려와 바다 위에 떠있는 모든 배들과 해안가를 따라 줄지어 서있는 어부들의 집을 모두 집어삼켰다. 그리곤 장면이 바뀐다.
나는 어느 한적하고도 오래된 해안가의 작은 마을에 있었다. 붉은 지붕의 목조가옥 1층에서, 분명 젊은 여성의 의식 속에 들어가 오후 15시 30분 즈음 느긋하게 욕조에 몸을 담갔다. 욕조 위에 난 창문을 올려다본 순간, 갑자기 고질라와 같은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와 "죽기" 직전, 가까스로 순간이동해서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이마에 난 땀을 닦을 만큼 공포에 질려 꿈에서 깨어났다. 현실로 돌아온 시간은 늘 새벽 4시경이었다.
마지막으로 꾼 꿈은 원전사고의 예고편 바로 그 자체였다.
2022년, 후쿠시마현에서 열린 유채꽃 행사 모습
출처-<(링크)>
나는 꿈 속에서 새파랗게 아름다운 태평양을 보고 있었다. 태양빛이 해수면에 반사되어 마치 보석이 흩뿌려진 것 같았다. 조용하고 평온한 봄의 일상이다. 해안 가까이 제방에는 노란 유채꽃이 피어 있고 강가의 길에는 벚꽃이 만개해 있다.
꿈 속에선 봄 입학식 시기였지만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너무 조용하다. 돌연 많은 자동차와 버스 그리고 주민들이 유채꽃이 핀 제방 뒤에 있는 중학교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교사 인듯한 사람들에게 체육관으로 이끌려 입고 있던 샤넬 같은 명품 브랜드 옷과 가방을 모두 몰수당했다. 대신에,
"이제부터 이게 당신 옷입니다. 이걸 입으세요."
라며 노란 유채꽃 색의 낡은 트레이닝복을 건네주었다. 보풀투성이 더러운 옷이다.
학교 밖을 바라보니 현장공사 작업복을 입은 초로의 노인 한 명이 강아지를 깜빡하고 집에 두고 왔다며 울고 있었다. 그 노인과 함께 하얀 트럭을 타고 시속 40킬로미터 정도의 느린 속도로 노인이 살고 있는 해안가에서 수 킬로미터나 떨어진 산간 온천마을로 향했다. 초로의 남성이 조수석에 앉은 나를 향해 몇 번이고 충고를 했다.
"오염되니까 숨을 쉬면 안 돼."
온천마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 소리도 없다. 잠시 후 개 집 앞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울고 있는 시바견이 보였다. 그 개를 트럭에 싣고 학교로 돌아갔다.
그런 꿈이었다. 이 꿈의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의미조차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끝을 모르는 공포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명확해진 날이 찾아왔다.
2011년 3월 11일
2011년 3월 11일 오후 15시, 미증유의 거대 쓰나미와 지진이 동일본을 덮쳤다. 나는 도쿄 아카사카 인근에 있었다. 지면이 가로로 좌우 3미터는 움직였던 듯하다.
길거리를 걷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상이 뒤집어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문득 위를 올려다보니 50층 건물 옥상에 놓인 붉은 크레인이 붕-붕-거리며 급회전을 시작해 지면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2011년, 쓰나미와 지진이 휩쓸고 간 일본 토호쿠 지방의 피해 현장
"꺄악-!"
하고 여성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진피해로 수도권 인프라와 수도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수백만명이 "귀택난민"이 되었다. 나는 2시간 가량 걸어서 도쿄 히가시나카노에 있는 아파트로 겨우 귀가했다. 당시 도쿄음악대학 대학원생이었던 여동생과 신바시에 있는 소니의 자회사에 근무하던 아버지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내 아파트로 피신했다.
거실에서 티비를 켜자 화면 한켠에 쓰나미의 참상이 비춰지고 있었다. 티비에는 쓰나미가 가옥, 병원, 사람들을 차례차례 집어삼키는 모습이 극명하게 중계되고 있었다. 계속 보자니 토할 것만 같아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틀 후 운명을 바꾼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운명을 바꾼 한 통의 전화
승합차를 타고 그대로 토호쿠 피해지역으로 달려갔다. 3월 15일 아침 6시 30분, 악쓰듯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에 눈을 떴다. 거의 첫 울림에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즐거운듯 밝은 목소리였다.
"Hello! Are you Makiko?(여보세요 마키코씨입니까?)"
이스라엘 일간신문사 <Yediot Aharonot>의 중국특파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이름은 보아즈. 도쿄 아카사카에 있는 ANA 인터컨티넨탈 호텔까지 와달라는 요청이었다. 문득 직감이 들었다. 긴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직감.
무엇을 위한 미팅인지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했지만 "무언가가 일어나고있다"는 생각이 들어 만일에 대비해 3일분의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 수건 따위를 가방에 쑤셔 넣으며 아파트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 로비에 도착하자 그곳엔 생글거리는 얼굴을 한 이스라엘인 특파원이 있었다. 허리까지 늘어트린 풍성한 긴머리의 남성이었다. 적당한 키, 적당한 몸매에 근육질인 전형적인 중동계 이스라엘인이었다. 그 외에 영국, 캐나다 기자들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형 승합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인 특파원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거죠?"
"NORTH, 북쪽입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해할 수 없었다. 승합차에 탄 지 2시간, 해외언론 기자집단은 후쿠시마 토호쿠 지진피해지역을 향하고 있다고 판명되었다. 토호쿠 고속도로는 완전히 봉쇄되었기에, 도쿄에서 토호쿠로 이어지는 국도 4호선을 타고 계속 북상하기로 했다. "난 납치된거야!"라고 깨닫기엔 너무 늦었다. 솜씨좋은 코디네이터 통역으로 토호쿠대지진 피해 취재에 연행(?!)된 것이다.
출처-<(링크)>
3월 11일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 여파로 방사능이 주변 100킬로미터 반경에 쏟아져 갑상선 암 예방 차원에서 요오드 액 대신 “이소진(포비돈요오드)”을 마시라는 지시를 받았다. 누가 그런 의학적 조언을 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사이타마 산속 편의점 주차장에서 우리는 구강세척제 <이소진>을 토악질을 해가며 마셨다.
지금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확실히 <이소진>에는 어느 정도 요오드 용액이 들어있다고 나왔다. 조금은 예방이 되었을까…
2011년 3월 15일, 방사능 구름의 움직임
그날 나는 후쿠시마시 주변(고오리야마시)에 있었다. 이소진을 마시고 몇 시간이 지난 후 후쿠시마현에 들어간 순간이었던가, 차 안 라디오 중계에서 속보가 흘러나왔다.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수소폭발이 발생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피난하여 주십시오!"
두번째 폭발이다. 차 안에서 그만 돌아가야 할까, 계속 가야할까에 대한 작은 의견충돌이 있었지만 결국 만장일치로 후쿠시마에 가기로 결정했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20 - 30킬로미터 반경 위험구역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그날 밤, 21시경 원전 폭파지점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후쿠시마현 고오리야마시의 피난소 고오리야마 종합체육관에 도착했다. 피난소로 지정된 장소는 시에서 운영하는 스포츠 시설이었다. 주차장에는 후쿠시마현 나미에마을과 오오쿠마마을의 번호판을 단 차량이 100여 대 가까이 있었다. 나미에마을은 원전 폭심지로부터 10킬로미터, 오오쿠마는 고작 2킬로미터 떨어진 후쿠시마의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단수로 인해 주차장에선 급수차로 주민들과 피난민들에게 물을 배급하고 있었다. 500명 이상이 몰려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배수차를 가진 주민과는 별도로, 20킬로미터 경계구역에서 피난민들이 하나 둘 자가용 차로 도착했다. 거기서 눈에 띈 것이 상반신을 탈의한 남성이었다.
32세인 K 씨는 방사능에 피폭된 것을 알고 소방사로부터 "뜨거운 물로 샤워해 몸을 씻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K 씨가 타고 온 흰 승용차 옆에는 어린아이용 옷 같은 것이 꽉꽉 눌러 담긴 커다란 비닐봉투가 두 개 놓여있었다. 안에 담긴 것은 모두 방사능에 오염된 것이었다. K씨가 말했다.
“방사능에 오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에선 이걸 “가지고 돌아가서 알아서 처분하길 바란다”라는 겁니다. 이딴 걸 차 안에 싣고 돌아가면 가족들이 또다시 방사능에 오염될 수도 있잖아요!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분통을 터트리는 K 씨가 타고 온 차 안에는 K 씨의 아내, 2살배기 딸, 그리고 K 씨 부친의 모습이 보였다. 3명 모두 방사능 물질을 씻어내기 위해 샤워를 해 머리카락이 아직도 젖은 그대로였다.
이러한 방사능 피폭검사는 전원에게 의무로 적용된 것이 아니라 희망자만 받고 있었다. 더욱이 이러한 검사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K 씨도 편의점에서 재회한 지인으로부터 우연히 검사에 대해 듣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방사능에 오염된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생활하고 있으면 당연히 피폭량이 늘어난다.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상태에 있음에도 검사를 받지 않은 주민들도 있다는 것이다. 정말로 희망자만 받아도 되는 것일까?
3월 중순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밤이 되면 뼛속까지 시릴 만큼 추워 난방이 필요한 시기였다. K 씨는 분노와 추위로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피폭검사를 하는 시청 공무원들은 전신을 방호복으로 감싸고 산소마스크까지 방사능보호장비를 완비하고 있었다. 밤이 내린 피난소를 흰 전신 방호복 차림으로 걸어 다니는 공무원들은 우주인처럼 무감정 무표정으로 계측기기를 들고 다니며 피난민들의 신체 오염도를 측정하고 있었다. SF세계와 호러영화를 뒤섞은 것 같은 기묘한 분위기였다.
2017년 세가와 마키코 씨가 딴지일보에 기고한
[현장]후쿠시마 제1원전으로부터 70km, 일본 정부에 외면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다(링크)
에서 사진 재인용
2011년 3월 15일 이 날, 나도 피폭 당했다. 풍향 탓에 수소폭발 후 방사능 구름이 마침 후쿠시마현 한가운데인 스카가와, 고오리야마, 후쿠시마시 상공으로 흘러왔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전 동료였던 TBS디렉터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폭발직후 TBS도 50명의 기자를 도쿄본사에서 현장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난 후, 그 50명 중 현장에서 취재하던 10명 정도의 기자들은 갑상선 암 등의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
나는 직접 그들의 병상태에 대해 사실확인을 하지 않은 관계로 딱 잘라 말할 순 없다. 하지만 후쿠시마 취재 후에 림프종 암이나 교원병(피부, 힘줄, 관절, 혈관 등 결합조직에 팽화나 괴사 등 변화가 발견되는 모든 질환을 총칭), 갑상선 암 등 중병을 앓게 된 지인 여러 명을 알고 있다. 원전 작업자로 일하며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에 거주하던 야쿠자 출신의 기독교 교인 3명은 2020년까지 암으로 모두 세상을 떠났다.
다음날 아침, 후쿠시마 시내로 들어갔다. JR후쿠시마역 서쪽 출구에 있는 버스정류장엔 대형버스 3대가 정차 중이었다. 수백명의 중국인 유학생, 중국인 노동자들이 중국어를 떠들어대며 서로 앞다투어 상대를 밀어젖히듯 기세 좋게 버스에 올라탔다. 원전사고로부터 피난 가는 것이었다. 중국대사관의 현명한 조치라 생각했다. 후쿠시마시에 남겨진 주민들은 중국인들의 탈출극을 시종일관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일본인만 남겨졌다."
라고, 몹시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센다이 공항 활주로가 쓰나미로 뒤덮히는 모습
출처-<(링크)>
후쿠시마 취재는 이틀만에 끝내고 잽싸게 철수했다. 그리고 3월 17일 이후엔 미야기현과 이와테현 연안선을 따라 대형 쓰나미 피해지역을 해외언론과 함께 취재했다. 잔해더미가 산처럼 늘어선 재해지역. 센다이공항에는 반으로 조각나버린 비행기도 몇 대나 있었다. 안에는 시체가 몇 구나 무참히 방치되어 있었다.
"분쟁지역에 온 것 같다. 아니, 그 이상으로 참혹하다."
영국인 기자가 중얼거렸다. 전쟁전문기자가 뱉은 말은 진실감이 있어 더욱 무거웠다.
2011년 3월14일, 한순간에 궤멸된 이와테현 마을의 모습
미야기현 히가시마츠시마시에 들어선 순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3개월 전부터 꿈에서 보았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츠시마(松島)라는 이름 그대로, 소나무(松)가 심어진 섬들(島), 그리고 흰 유람선이 뒤집혀있는게 아닌가.
히가시마츠시마시에서 차로 약 1시간을 달려 쓰나미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리쿠젠다카다에 도착했다. 거기서도 역시나 꿈에서 본 것과 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쇠퇴한 어촌, 그리고 민박집. 무너진 민박집에서 지역 소방관들이 스키웨어를 입은 채로 사망한 20대 전반의 여대생 시체를 옮기고 있었다.
나는 그 여성의 얼굴을 보았다. 마치 잠든 것만 같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내가 꿈에서 보았던 등장인물은 바로 이 여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영적인 체험 따윈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허나 이제 나는 존재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피폭된 후의 영향이나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시체를 목격한 후, 내가 센다이시 외곽의 비지니스호텔(토요코INN)에서 잠이 들자 쓰나미로 급사한 수백명의 사람들 이 벽을 통과해 호텔 안을 떠돌고 있는 꿈을 꾸었다. 소리도 지르고 있었다. 그들의 발은 지면에 붙어있지 않고 떠다니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제 어디로 가는지, 크고도 새된 목소리를 내며 찾아 헤매고 있었다.
"도대체 우리들은 어떻게 된 건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출구는 어디인가?"
꿈 속에서 본 수백명의 유령들은 초등학생부터 젊은 여성, 노인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쓰나미로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탓에 자신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후쿠시마 원전 근처의 해안가에서도 유령을 목격했다고 하는 등 이런 류의 영적인 이야깃거리는 끊이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사십구재”라고 해서, 사망한 날로부터 49일간 사망한 자의 영혼이 이승을 떠돈다고 한다. 불교의 가르침이다. 영적인 체험이나 유령을 믿지 않았던 나는 사고 이후, 어쩌면 이게 사실이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탐사 취재를 전문으로 하는 기자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의 취재에 신뢰도를 떨어트릴 수도 있겠으나 본 그대로, 느낀 그대로 솔직하게 적고 싶은 게 지금의 마음이다. 이것이 피폭 후유증이라고 해도 말이다)
미야기현 나토리시 비교 위성 사진(왼쪽 2010년, 오른쪽 2011년)
출처-<BBC>
동일본 대지진 피해 연안지역을 2011년 3월 15일에서 3월 24일까지 해외언론과 함께 취재한 후, 한가지 중대한 점을 깨달았다. 바로 해외언론과 일본 국내언론 간의 보도자유도 격차에 대해서다.
일본의 대형 언론사에선
"세계각국으로부터 구조물자와 식량이 속속 도착하고있다."
같은 정부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보도하고 있는데, 실제현장은 전혀 달랐다. 내가 3월 18일에 갔던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중심부(주로 경찰서 주변)에서는 먹을 게 없어 잔해더미 사이에서 냉동식품을 찾아 쓰레기를 뒤지는 주민들이 많이 있었다. 주인이 없어진 피해지역의 슈퍼마켓, 편의점, ATM에서는 피해지역주민들에 의한 강탈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부의 식량지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피난소에서도 1일 1식이었고 그나마도 소금 주먹밥 1개가 전부였다.그것 만으론 공복을 채울 수 없어 사람들은 쓰나미로 창문이 다 깨지고 주인이 없는 잔해 투성이인 슈퍼마켓으로 억지로 들어가 만두와 같은 냉동식품을 챙겼다. 연료가 되는 가솔린도 거의 없어 피해지역에서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었다. 쓰나미로 밀려온 자동차에서 가솔린을 뽑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라고 이런 짓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일본 언론은 “세계각국에서 지원물자가 도착했다”라고 하고 있지만 보도내용과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언론인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먹을 게 없어. 우선 식량을 달라!”고요."
폐차에서 기름을 뽑아내며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벗어나겠다고 발버둥치던 한 남성이 내게 던진 이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남성이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숄더백 안에는 녹아버린 냉동 새우만두와 약간의 어패류가 든 진공 포장 팩이 들어있었다.
일본 거대언론이 전하는
'피난처에서도 서로 양보하는 정신'
이나
'피난처에서 출산한 이야기’
같은 아름다운 현실도 실제로 있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다.
이와테현의 한 피난소에선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젖소에게서 갓 짜낸 생우유를 끓여 아이들에게 점심밥 대신 주고 있었다(위 사진이다). 나중에 방사능 구름의 움직임을 확인해보니 100킬로미터 떨어진 이와테현도 방사능 영향권 안에 있었다. 심지어 가장 방사능을 섭취하기 쉬운 우유를 아이들에게 주고 있다니.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쿄로 돌아온 후에도 한참동안 나는 계속 도호쿠 피해지역만을 생각했다.
후쿠시마 원전 20 - 30킬로미터 반경내 주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원전사고 직후 반경 20 - 30킬로미터 내 지역을 취재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후쿠시마 피난권고지역에 남겨진 사람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어볼 수 없었다. 일본의 거대언론은 주민들을 내버려두고 즉시 철수했다. 반면 여러 해외언론 기자들은 계속해서 야금야금 경계구역까지 취재를 하러 들어갔다.
나도 가야만 하는게 아닐까?
공포감과 싸우면서도 한편으로 늘 고민했다. 그런데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2011년 4월 11일, 미국인 저널리스트를 데리고 사고 당시,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시의 시장이었던 사쿠라이 카츠노부 시장을 인터뷰하게 되었다.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나고, 우리는 "후쿠시마현 20 - 30킬로미터 이내로는 접근하지 않기"라는 조건 하나를 내걸었었다. 하지만 해당 지역 내의 소식은 완전히 차단되었고, 일본 국내 언론의 보도 내용만을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들어가 봤다. 그 안에선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일본 정부에서 입단속 하는 내용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다음부터는 이하 내용을 자세히 써 내려갈 예정이다.
●유령마을이 된 후쿠시마현 20-30킬로미터 반경내 지역으로.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세계100인 중 1명으로 꼽힌 미나미소마시 시장 사쿠라이 카츠노부 씨의 속마음
●사쿠라이 시장이 남몰래 홀로 골머리를 앓던 산업폐기물 재판문제. 원전피난민들에게 수억엔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야쿠자와 행정부.
●방사능오염? 흰 반점이 있는 소. 소고기 시장이 폭락할 위험이 있으니 일본에선 보도금지? 그렇다면 한국과 싱가폴에서 한다!
●<국경없는 기자단>편집부와 후쿠시마에서 운명적인 만남
후쿠시마 제1 시설 내 기밀 감시 지구에 통역으로 잠입한 본인입니다(제일 오른쪽).
위험한 일을 좋아하지만 평소에는 밝고 유쾌한 성격입니다.
(계속)
번역 및 자료 정리: 김창규, 현상
JFJN 대표&국경없는기자회 일본 특파원
세가와 마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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