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 이야기, 한 줄 요약
1. 명과 후금이 대립할 당시, 광해군이 왕으로 있던 조선에선 명나라를 위해 파병을 보내자는 쪽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2. 명나라도 지속적으로 파병을 재촉했다.
3. 광해군은 결국 총사령관 강홍립에게 “명나라 말을 다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법만 고민하라.”라는 지시를 몰래 내리며, 파병을 결정했다.
4. 그러나 막상 파병이 다가오자, 파병지지파 문관들은 몸을 사렸다.
5. 이런 상황에서 시골로 낙향해 있던 이민환(『책중일록』을 쓴 주인공)이 짬을 맞으며 강홍립을 보좌할 군무원 신분인 종사관으로 파병을 가게 되었다.
6. 조선 조정은 군량 보급을 제대로 안 해줬다. 명나라는 조선군을 계속 재촉했다. 조선군은 어쩔 수 없이 군량이 떨어진 채로 요동에 들어섰고, 명군과 함께 후금 본대와 마주했다.
출처-영화<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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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 군대와 만나다
1619년 3월 4일 - 『책중일록(柵中日錄)』
갑자기 돌풍이 불고 연기와 먼지가 하늘을 뒤덮었다. 강홍립은 급하게 진을 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중영(中營)과 우영(右營)은 언덕에서 진을 치고 있었고, 좌영(左營)은 평지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였다. 적의 기병이 벌써 좌영으로 들이닥쳤다.
잠시 뒤, 유정 제독의 지휘관들이 말을 타고 도착해 말했다.
“도원수, 명나라 병사들이 후금 기병의 급습을 받아 모두 전사했습니다. 유정 제독 또한 전사하셨습니다.”
이윽고 적의 엄청난 기병이 포위망을 갖추어 우리 군을 포위해 오다가, 일제히 돌격했다. 그 기세가 마치 폭풍우 같아, 우리 포수들이 총포를 한 차례 발사한 후 장전하기도 전에 우리 진영을 모조리 격파했다. 그렇게 좌영과 우영이 순식간에 전복되어, 지휘관들이 모두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 석양 아래 비처럼 쏘아진 화살들과 적의 철기군이 어지러이 뒤섞였다.
당대 최강의 기병,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 아이신기오로 다이샨이 이끄는 후금의 철기군은 명나라 군대는 물론, 조선군 또한 압살합니다. 후금군은 명나라가 군대를 쪼개어 압박해 오는 것을 파악하고, 각 방면엔 소수의 병사만 배치한 후, 본대를 움직여 한 쪽씩 각개격파 합니다. 명나라군 전원이 모여서 후금군과 한판을 벌여도 이길까 말까인데, 최강의 기동성과 전투력을 가진 후금군을 따로따로 상대하니 이길 확률이 거의 없었죠. 조명연합군이 속한 동로군 또한 이미 다른 명나라 군대를 박살 내고 온 후금군에 의해 각개격파 당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그동안 조선이 재정을 쏟아부으며 애지중지 키웠던 포수들이 단 한 번의 사격 이후 그대로 ‘순삭’당합니다. 이때 조선군은 각각 좌중우영(營)에 약 3,500명씩 배치했는데요. 순식간에 좌영과 우영이 격파되어 6,000명의 군인이 살해당합니다.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었습니다. 강홍립과 이민환이 있던 중영은 이 광경을 지켜보고 그대로 충격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1619년 3월 4일 - 『책중일록(柵中日錄)』
중영에서 두 영까지의 거리는 불과 1,000걸음이었으나, 두 영이 유린되는 모습을 보고 모두 충격에 빠졌다. 심지어 무기를 버리고 앉아서 미동조차 없는 자도 있었다. 게다가 며칠이나 굶어서 병사들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는데, 도망가려 해도 퇴로가 끊겼고 싸우려 해도 사기가 무너져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나 또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순시하면서 사기를 북돋웠으나, 호응하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이때 조선군이 잃은 것은 단순히 수천 명의 목숨만이 아니었습니다. 광해군과 파병 반대파가 파병을 염려했던 까닭은, 조선과 명이 이 전쟁에서 패할 경우 그다음은 조선 차례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참전 경험이 있는 포수들과 여진족 상대 경험이 있는 전방의 군사들이 사라지면, 이어질 후금과의 전쟁에서 싸울 사람이 없어집니다. 그 소중한 전략 자원이 순식간에 증발했으니,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이렇게 전투가 마무리되자, 중영의 앞은 적의 대군이 가로막고, 뒤는 끊긴 상황입니다. 군량도 사기도 없이 목숨만 부지한 조선군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유일한 살길은 항복뿐이었죠.
오랑캐의 포로가 되다
1619년 3월 4일 - 『책중일록(柵中日錄)』
오랑캐가 우리 진 앞으로 와서 물었다.
“우리와 명나라는 원한이 있기 때문에 전쟁을 한다. 너희 나라와는 원한이 없는데, 어째서 우리를 공격하는가?”
통역관이 답했다.
“양국은 이전부터 원한이 없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너희 나라가 어찌 그것을 모르는가!”
오랑캐 장수가 다시 사람을 보내, “너희 나라의 사정은 우리도 알고 있다.”라며 화해하자는 내용을 주고받았다. 강홍립을 비롯한 지휘부는 목숨이 아깝지는 않으나, 항복하면 3~4천 명의 병사를 살릴 수 있고, 훗날 변방의 방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기에 강화에 응했다.
한때 강홍립과 조선군의 투항은 ‘광해군의 밀지 때문이다.’라는 설이 있었습니다.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광해군이 중립외교 노선을 이어가기 위해, 강홍립에게 몰래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설이었죠. 그런데 여러 사료가 발굴되면서 이 설은 폐기 되었습니다. 밀지를 받았음에도 이렇게나 많은 전사자를 남길 수가 없다는 이유였죠.
만약 강홍립이 밀지를 정말로 받았다면, 명나라군이 대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즉시 무장을 해제했을 겁니다. 다만, 원정에 소극적이었던 광해군의 태도 덕분에 강홍립은 대패한 후에 간신히 항복을 생각할 수 있었겠죠. 광해군 또한 여러 채널을 통해 ‘우리가 명에 파병을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후금에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포로가 된 조선군은 그대로 무장을 해제당한 채, 누르하치가 있는 곳으로 소환됩니다. 병사들은 해체되어 후금 측 민가에서 지내게 되었고, 지휘관들은 한데 모아서 감금당했죠. 누르하치는 곧바로 광해군에게 국서를 보내, “당신이 하는 걸 봐서 이들을 풀어주겠다.”라는 협박과도 같은 국서를 보내죠. 즉, 명나라를 빨리 손절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전력차를 확인했음에도, 조선 양반들에게 후금은 여전히 ‘오랑캐’였습니다. 곧 비록 몸은 항복했으나 마음은 절개를 굳히지 않겠다는 것이었죠. 이 외에는 별다르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습니다.
이런 마음가짐 때문이었을까요? 이 상황에서, 정신 못 차리고 미친 짓을 한 양반들이 있었습니다.
1619년 3월 23일 - 『책중일록(柵中日錄)』
성 밖에서 머무르던 양반 무리가 밤을 틈타 집주인 여자를 죽이고 도망친 일이 있었다. 또한, 오랑캐 여인을 강간하고 현장에서 발각된 자도 있었다. 이에 분노한 누르하치는 포로가 된 조선군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다행히 다이샨이 애써서 말린 덕분에 성 밖의 양반 무리만 살해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 수만 해도 4~500명이 되었다.
포로로 잡힌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양반 무리는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지휘관급에서도 그런 일을 벌였죠. 적국에 포로로 잡힌 군인이 적국의 민간인을 상대로 범죄를 일으킨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이것은 오랑캐에게 총 한 번 제대로 못 쓰고 사로잡힌 양반들이,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추잡한 자위행위에 가까웠죠. 그 결과, 아무 죄 없던 양반들까지도 처형되었을 뿐 아니라 후금군 내부에서도 조선 포로에 대한 반감이 자라게 됐습니다. 이 문제는 심지어 양국의 외교 관계에도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포로로 잡힌 조선군 중 제대로 된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책임 있는 조선 지휘관들은 후금의 군사력을 눈으로 확인한 후, 후금이 조선을 침공하면 엄청난 피해가 있을 것을 예견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들의 강경론을 누그러뜨리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때그때의 임기응변이 최선이었습니다.
저희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또 한 번의 사건이 터집니다. 조선이 후금에 보낸 답서 내용이 누르하치를 화나게 한 것입니다. 이에 조선의 지휘관들은 최대한 후금측에 유리한 해석을 내놓으며 누르하치의 분노를 달래고자 했습니다.
성공했을까요?
다음 편에서 한 번 보시죠.
<계속>
사르후 전투 관련 영상 추천
국립진주박물관 유튜브 채널에 고증이 잘 된 사르후 전투에 관한 영상들이 있는데, 관심 있는 분들은 시청해보면 좋을 듯하다. 영상 제작은 '우라웍스'에서 했다.
(1) [화력조선 시네마] 단편영화 '사르후', 1619, The Battle of Sarhū - 링크
(2) [화력조선 시네마] 단편영화 '사르후' , 코멘터리 - 역사적 배경과 제작 뒷 이야기 - 링크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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