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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들어 온 건축사의 박힌 돌 빼기

 

건축주 부부가 고른 땅의 위치는 탁월했다. 마을 끝에서 살짝 비껴간 길의 초입에 위치해, 적당히 호젓한 느낌이었다. 땅은 평평하고, 가로세로는 넉넉히 뻗어 있다. 어떤 것을 창조하기에 적절한 너비다. 입구에서 바라본 대지의 모습은 더없이 좋았다.

 

실측을 위해, 부부의 땅을 찾았다. 입구에서부터 저 멀리 무언가 대지 사이로 불쑥 올라온 것이 보였다. 울퉁불퉁하고 부피가 꽤 크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 본다. 10m 정도 진입했을까. 눈앞에 떡 하니 나타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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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시공 전, 대지 한가운데 놓인 돌

 

엄청난 크기의 돌 하나.

 

일반 조경용 바위와는 달랐다. 누가 의도적으로 가져다 놨다고 하기엔 애매하고, 원래부터 있었다고 보기엔 인위적인 위치다. 돌은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곳에 놓여 있었다. 아뿔싸! 문제가 한 단계 복잡해졌다.

 

, 그림을 그린다고 상상해 보자.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건 어렵지 않다. 의뢰인으로부터 주어진 요청 사항만 잘 따르면, 이후엔 창작자가 자유롭게 도화지를 채워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도화지에 이미 누군가의 붓 터치가 남아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미 그려진 그림과 조화를 이루면서, 동시에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걸 옮겨야 하나?”

 

순간, 나태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바위를 제거하고 평평한 대지에 새로 시작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재빨리 건축주가 작성한 소원 노트를 펼쳐 본다. 노트 안에 난관을 헤쳐 나갈 방법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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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주 부부의 소원 노트 일부

 

부부는 반신욕을 좋아한다고 했다. 자연을 보면서 반신욕 할 생각에 설렌다던 의뢰인과의 통화 내용이 떠오른다. 그래서 욕실 콘셉트는 이렇게 결정되었다.

 

“자연을 보면서 즐기는 세미 노천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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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자연이라고 하면, 보통 푸른 숲과 꽃, 온기 있는 동물을 떠올린다. 하지만, 사실 도 자연의 일부다. 생물이 가진 화려한 색감과 온기가 없을 뿐, ‘은 은은하고 고혹적인 분위기를 내는 데에 적합한 재료다. 또한 돌을 뽑거나 재단하는 건, 자연의 본 뜻에도 위배된다. 사람의 힘이 닿는 순간, 그것은 자연이 아닌 게 되어 버리니까.

 

은 대지의 기준점이 되었다.

 

말 그대로, 3차원 설계도에서 x, y, z축이 만나는 꼭짓점 역할을 하게 된 것. 이날부터 집의 모든 배치가 돌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저 돌을 잘 활용하면, 욕조에서 감상할 만한 멋진 조경이 탄생할 거란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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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중심으로 한 배치는, 그야말로 설계의 벤치마크가 되었다

 

소소한 호사가 허락된 공간

 

건축주 부부는 집을 설계할 때부터, 유독 욕실에 애착을 보였다. 그들에게 욕실의 의미는 남달랐다. 의뢰인이 아플 때,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되곤 했다. 따뜻한 물을 받은 욕조에 뉘어, 지친 육체와 마음을 달래는 곳. 부부에게 욕실은 그런 공간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이런 욕실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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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일본의 료칸 같은 세미 노천탕.

 

료칸은 일본 전통 숙박 시설이다. 고급 일식 코스 요리 가이세키가 제공되고,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욕장이 딸린 것이 료칸의 특징이다. 비싼 객실에는, 개별 노천탕도 존재한다. 여행 유튜브를 즐겨 보는 부부는,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다음에 우리도 집을 짓게 되면, 꼭 노천탕을 만들자."

 

의뢰인은 얼마 전, 완치 판정을 받았다. 새집(이하 우주’)의 욕실은 이전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거라고 말했다. 치료가 아닌, 온전히 목욕만을 즐기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무탈한 몸으로, 욕탕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큰 기쁨이 되길 기대했다.

 

세미 노천탕이라는 의뢰인의 구체적인 요청은, 욕실을 설계할 때 중요한 힌트가 됐다. 포인트는, 마치 작은 노천탕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하는 것.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넋 놓고 자연을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 크기는 작고 소박해도, 소소한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했다.

 

목욕하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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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뒤로 보이는 복도를 따라 이동하면, 욕실이 나타난다

 

건축주 부부의 요청과 실측 결과를 바탕으로, 욕실 설계를 시작한다

 

남향으로 공간을 낸다. 욕실에서 돌과 안 정원이 보이도록 창을 낸다. 외부에서 욕실이 보이지 않도록, 가벽을 세워, 시선 처리를 한다.

 

이후, 의뢰인 부부와 여러 차례 피드백을 주고받은 결과. 남쪽과 평행하게 욕실을 내었던 처음 계획과 달리, 새로운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수정안은 이렇다.

 

대지 한가운데 있는 돌을 중심으로, 욕실을 시계방향으로 90도 돌린다. 돌의 너비만큼 복도를 길게 내고, 복도는 떨어진 두 공간을 잇는다. 그 결과 자 모양의 건물이 돌을 감싼다. 복도에서, 그리고 욕실에서도 돌 정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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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맨 오른쪽 위치) 코너 창으로 돌 정원이 보인다

 

이 복도의 이름은 건축주 부부가 직접 지었다.

 

"목욕하러 가는 길"

 

단순하지만, 공간의 기능을 명확히 했다. 마치, 이제 욕실은 목욕을 위한 공간임을 공언하는 것처럼.

 

목욕하러 가는 길을 지나 계단 세 개를 내려가면, “세미 노천탕이 나온다. 이 공간은 크게 세 파트로 구분할 수 있다.

 

1.     건식으로 사용하는 세면대 화장실

 

2.     습식으로 사용하는 좌식 세신 공간

 

3.     몸을 담글 욕조가 있는 욕탕

 

낮은 채도가 주는 편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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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우주"의 습식 욕탕

 

욕실 내부는, 투톤의 무채색 타일로 통일했다. 전체적으로 외부’, ‘동굴같은 느낌을 내기 위해서다. 건식 화장실은 밝은 회색 타일을, 습식 욕탕은 검은색 타일을 사용했다.

 

채도가 낮은 타일을 사용하면, 실내 분위기가 차분해진다는 장점이 있다. 실제로 톤다운 된 색상은, 긴장을 이완하고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어느 것이든 장단점이 있기 마련. 어두운 색도 그 정도가 심하면, 기분을 처지게 하거나 심지어 우울함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코너 창의 역할이다.

 

창은 다양한 역할을 한다. 자연 풍광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밖과의 시선도 연결한다. 욕조에 몸을 담갔을 때도 돌이 보이도록, 눈높이를 맞췄다. 창을 통해 들어온 은은한 자연광이 욕조 위로 떨어진다. 어두운 색의 타일과 창으로 들어오는 빛의 조화는, 답답함보다는 오히려 안락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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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우주"의 건식 화장실

 

작은 공간을 두 가지 색으로 구분하면서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았다타일을 고를 당시실제 동굴처럼 보이는 무늬의 이태리제 타일이 있었다하지만나는 비교적 심플한 무채색 타일을 선택했다야외 자쿠지(거품이 나오는 욕탕)의 분위기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공간의 크기에 어울릴 만한 타일을 찾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타일을 채워야 하는 공간의 크기는 (가로)3,785mmX(세로)1,425mm. “우주의 욕실에는, 600mmX600mm 사이즈의 타일을 사용하기로 했다. 한 시리즈 내에 있는 다른 색상의, 형제 같은 타일을 골랐다. 그리고 바닥과 벽에 타일을 감아올리는 방식을 사용해, 하나의 공간처럼 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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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톤의 타일 메지가 딱 맞아 떨어진다

 

건식 화장실과 습식 세신 공간 사이에는 칸막이 벽을 설치했다. 어느 날은, 현장에서 벽을 50mm 옮기는 일도 있었다. 벽을 기점으로, 타일 메지가 딱 맞아떨어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참고로, 건축 현장에서 사용되는 용어 메지는 일본식 표현이다. 우리말로는 줄눈이다. 벽돌을 쌓거나, 타일을 붙일 때, 사이사이에 모르타르(시멘트와 물을 섞은 규토질의 물질. , 타일 등을 결합할 때 사용한다) 따위를 바르거나 채워 넣는 부분을 말한다.

 

메지를 맞추기 위해, 벽을 통째로 옮기다니?!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땐, 하는 게 맞다는 게 나의 신조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우연히 보게 된 타일. 비뚤거나, 무늬가 맞지 않거나, 댕강 잘려 나간 타일을 발견했을 때의 그 심정, 아마 대부분 경험해 봤을 터다. 그때부터, 타일과 나. 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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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앉힐 때부터, 돌과의 눈높이를 고려했다

 

욕조에 몸을 누이면, 시선이 돌을 향한다. 돌 정원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각도를, 수많은 시뮬레이션 끝에 찾을 수 있었다. 이 또한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바닥재가 깔린 집 내부에서 바깥의 돌을 보게 되면, 야외에서 보던 것보다 한참 아래에 위치한다. 보통 돌의 높이가 낮아지지 않도록, ‘성토(흙을 높이 쌓아 올림)’ 방식을 사용한다. 하지만, “우주는 인위적인 시공법을 지양한다. 처음 집을 앉히는 순간부터, 집을 미세하게 틀어 앉혔다. 돌이 틈새로 잘 들어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확인과 조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렇게 돌은 완연한 집의 일부가 되었다.

 

욕실이 완성될 즈음, 건축주 부부는 여기저기 발품 팔기 시작했다. 일본식 욕탕에 들어가는 커튼과 히노끼 의자, 욕실 용품 등을 구해 왔다. 며칠 후, 완성된 욕실은 꽤나 그럴싸한 소품들로 가득했다.

 

작지만, 럭셔리한 세미 노천탕 완성.

 

대지의 남향에 돌 정원이 생겼다. 남향의 온화한 볕과 풍경이 좋다. 특히, 낮 동안 햇볕에 데워진 돌은, 부부의 등 찜질에 요긴하게 쓰인다고 한다.

 

우주가 완공되던 날, 돌 정원으로 향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돌은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본래 자리에 그대로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첫 계획안은 꽤 과감했다. 건축주가 싫다고 했다면, 절대 실현될 수 없는 설계였다. 다행히 나도, 돌도, 운이 좋았다. 건축주의 지지를 받으며, 세상에 하나뿐인 세미 노천탕과 돌 정원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첫 계획안이 나왔을 무렵, 건축주 부부는 돌의 존폐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때마침, "우주"의 돌 정원을 담당할 조경사가 현장 답사를 나왔다. 돌을 본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와! 이런 돌 가져와서 조경하려면, 2천만 원은 더 들었을 거예요."

 

그 순간, 돌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아니처음부터 "우주"와 함께 할 운명이었던 것.

 

부부는 취미가 다양하다. 커피, 와인, 요리, 골프, 요가, 명상, 피아노 등등. 그중 소원 노트에 적힐 만큼, 의뢰인에게 중요도가 높은 취미는 바로, 요가와 명상집안 어딘가 차분하고 고요한 공간을 만들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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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근데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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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부는 무슨 자연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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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보다 요가 하다가 해 뜨면... 눈부시지 않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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