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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매국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던 역사에 대한 분노와 답답함이 요즘같이 강하게 느껴지는 날도 드물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여론의 거센 뭇매에도 불구하고, 홍범도 장군 흉상을 기어이 철거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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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분노가 일어나는 지점은 이런 윤석열 정부의 기조에 호응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리해 봤다. 그런 자들과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쟁에서 말로 디지게 팰 수 있는 매뉴얼을.

 

자, 그럼 시작하자.  

 

1. 홍범도 장군은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기 때문에 육사에서 모시는 것은 부적절하다.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지 않은가.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지 공산주의가 아니다. 우리 헌법에서도 공산주의를 주적으로 규정한 대목은 없다.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입당이 문제 될 정도라면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 베트남과는 왜 교류하고 물건 파는가? 

 

2. 아무리 그래도 공산당원이었던 사람을 육사에 모시는 건 적절하지 않다.

 

박정희는 남로당 핵심 간부였고 사형판결까지 받았는데, 그의 흔적은 왜 지워지면 안 되는가.

 

3. 박정희는 전향을 하신 분이고, 이후에 20여 년간 산업화에 기여한 공로가 크기 때문에 홍범도 장군과는 경우가 다르다.

 

박정희는 체포된 후 사형을 피하기 위해 전향했다. 그런 논리를 세워 전향을 만능키로 삼으려면 먼저 심각한 반국가 행위를 저지르고 체포되는 게 재평가의 필수적 요건이라는 뜻이 된다. 또 한 사람의 업적에 대한 평가를 전향 전과 전향 후로 나누는 것은 누구의 기준이며, 그 기준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걸 왜 당신이 임의로 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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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 누님에게 가려진 이름은 '김종필'이다.

 

4. 이분의 공로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공과를 잘 판단해서 보다 적절한 방법으로 모시자는 뜻이다.

 

과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공과가 있다는 표현을 쓰려면 그분의 과오를 정확히 말해주기 바란다. 역사적으로 확인된 홍 장군의 공은 많은 반면, 확인된 과는 전혀 없다.  

 

5. 어쨌거나 자유시 참변에 가해자 측으로 가담했다는 의혹이 있는 건 사실 아닌가.

 

그런 의혹 없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의혹이다. 알려진 바로는 극우 유튜버의 영상물이 출처라고 하는데, 내가 확인해 보니 홍범도가 자유시참변의 가해자라는 주장은 '펜앤드마이크'의 기사가 유튜버보다 먼저인 것 같다. 물론 역사적 근거나 학계의 동의는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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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KBS>

 

의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혹이 있는 척을 하는 것이다. 이 사안은 논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누군가가 아무 증거도 없는 주장을 했다고 의혹이 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내가 '광개토대왕은 사실 백인이었다는 의혹이 있다'고 말하면 '광개토대왕 백인설'이 정말로 논란이 되는가? 그런 거 없다. 

 

6. 자유시 참변에 재판관으로 '참여'한 건 사실이란 말이다.

 

사건 차제에 참여하는 일과 사건의 처리 및 수습에 참여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 그 논리대로라면 살인사건은 법정에서 완전히 종결되므로, 판사가 살인사건에 가담한 공범이라는 뜻이 된다. 

 

7.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빨치산은 Partisan을 말하는 것이며 비정규 저항군이라는 뜻이다. 나라 잃은 독립군 세력은 우리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빨치산이다. 우리 역사가 인정할 빨치산이 있고 부정할 빨치산이 있는 것이지, 빨치산이라는 말 자체는 무장세력의 의미가 아닌 형태를 가리킬 뿐이다. 

 

8. 북한은 소련의 사주를 받아 6.25 전쟁을 일으켰다.

 

항일무장투쟁은 넓은 범주에서 2차 세계대전의 일부다. 추축국 세력에 맞서 소련과 미국은 동맹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적성불온국가란 말인가. 미국은 랜드리스를 통해 소련에 엄청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레닌은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고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을 사주했다. 육사는 어째서 레닌에게 현금과 군복, 권총 정도의 선물을 받은 홍범도조차 문제 삼으면서 스탈린과 손을 잡은 미국과의 동맹을 기념하는 공원을 조성한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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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소련 서기장 스탈린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냉전기와 냉전 이전의 선택은 다르게 평가받아야 하며, 지금은 냉전기도 끝난 지 오래다. 심지어 박정희는 냉전시기에도 홍 장군에게 훈장을 추서했다. 노태우 정권에서는 유해 봉환을 시도했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잠수함을 홍범도함으로 명명했다. 육사는 박정희의 행위가 사관생도의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는 것인가?  

 

9. 사실 봉오동전투나 청산리대첩의 전과는 너무 과장되어 있다. 사소한 승리이거나 기껏해야 무승부 같은데...

 

식민지 시절을 겪고 독립한 국가의 민간에서 독립군의 전과를 과장해 소비하는 것은 문화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하등 이상할 게 없는 현상이다. 깐깐하게 따져서 정확한 숫자를 찾아가는 것은 학계의 일이다. 

 

두 전투의 일본군 피해가 별 볼 일 없는 수준이라는 출처의 근본을 따져 들어가면 한 일본인 학자의 논문 두 편이 진원지인데, 논문의 근거는 매우 부실하다. 오히려 한국 측 주장의 신빙성이 더 높다. 애초에 일제의 전장 보고는 거짓말로 악명이 높다. 패배한 전투가 승리로 둔갑해 공식적으로 발표되거나 은폐된 경우들이 패전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무더기로 밝혀졌다. 

 

당시 독립군의 미비한 행정력과 일제 군부의 관습으로 인해 어차피 전과를 정확히 계측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두 전투의 의의에 있는 것인데, 어째서 한 일본인 학자의 논문에 근거해 우리나라 영웅의 업적을 폄하하는가. 

 

10. 절대 폄하가 아니다. 진심으로 장군님을 인정하고 존경하는데 단지 육사라는 장소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왜 그분의 흉상이 육사에 있는 게 적절하지 않느냐고 따져 묻고 있는 것인데, 제대로 된 설명을 전혀 듣지 못하고 있다.

 

11. 아무래도 홍 장군이 우리 국군의 창군과 육사 창설에 관련이 없지 않은가. 정확한 역사적 의미를 따져봐야 한다.

 

그렇게 따지면 해국사관학교 이순신 동상은? 조선은 북한과 같은 왕조 국가로,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체제와 동떨어져 있다. 강력한 근왕주의자였던 충무공의 동상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할 장교를 양성하는 학교에 서 있는 건 홍범도 장군 흉상보다 더 불온하다. 

 

12. 그건 해사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나는 모른다. 육사엔 육사만의 판단이 있는 거 아닌가.

 

대한민국은 이승만과 미국이 만든 거라고 말하고 싶은가. 그게 아니라면 독립군 세력이 어떻게 창군과 관련 없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초대 국방부 장관 이범석은 한국광복군 참모장이었으며 홍범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다. 그를 국방부 장관과 국무총리에 임명한 사람은 보수와 뉴라이트가 그토록 흠모하는 이승만 대통령이다. 그러므로 홍범도를 포함한 독립운동 세력이 정녕 창군의 주체라고 하기 어렵다면, 최소 직계 선배이며 계보가 이어진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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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

출처-<국가보훈부>

 

만약 초대 육군사관학교장인 이형근이 일본 육사 출신이라 홍범도 장군과는 어울리지 않는 거라면 이승만을 포함해 모든 독립운동가는 '육사와 적절치 않은 관계'가 된다. 동시에 육사는 국방부와는 사상이 다른 독립적인 조직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정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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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