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15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식 현장
출처 - <링크>
국방부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결정으로 대한민국이 시끌시끌하다. 문제가 된 것은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입당 이력. 다시 이념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념 논쟁의 끝은 언제나 하나로 귀결된다.
“빨갱이인가, 아닌가.”
아무리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빨갱이면 독립운동가로 대우해 줄 수 없다는 논리가 등장한다.
때는 2005년. 권위주의 정권이 지나고, 노무현 정권이 들어섰을 당시였다.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수면 아래 깊숙이 가라앉아 빛을 보지 못했던 역사가 하나둘 세상에 공개된다. 상당수 독립운동가의 공이 ‘이념’에 가려 있었다.
몽양 여운형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3.1절을 기념해, 여운형을 포함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 유공자 54명이 추서되었다. 당시 국가유공자 공적 심사 위원장이었던 신용하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 있었지만, 그동안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에게만 포상이 이뤄져 왔다.”
그리고 앞으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게도 포상이 이뤄져야 함을 언급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무기명 투표를 통해 추서자를 선정하던 시기였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게 포상할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 이건 좋은 변화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이것.
독립운동가 중에는 왜 사회주의 계열이 많았는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수가 적은 것처럼 포장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수는 꽤 많다. 이들 중에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북한 건국 과정까지 활동한 이들이 있고, 6.25 한국 전쟁 당시에 남쪽으로 치고 내려온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건, 1940년대 이야기다.
툭 까놓고 말해보자.
사실, 1920년대 독립운동가 중 상당수는 사회주의 계열이라 할 수 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당시 사회주의 계열을 제외하고 독립운동사를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만큼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쯤에서 의문이 든다.
그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왜 하필 사회주의를 쫓았던 걸까?
1920년대(추정), 상해 교민단장으로 활동하던 여운형 선생
출처 -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1920년대, 사회주의의 의미
조선 독립을 꿈꾸고 무장투쟁을 했던 이들에게, ‘사회주의’는 친숙한 사상이었다. 국내에 남아 일제와 싸우기엔 힘에 부쳤던 시기.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그곳에 활동 근거지를 둔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상해에 터를 잡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중국과 소련에 머물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과 소련은 독립운동 조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심지어 독립군과 손을 잡고,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기도 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된다. 나라 잃은 조선 청년 중, ‘조국 독립’에 뜻 있던 이들은 해외로 나간다. 그곳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한 방법을 찾으려 한다.
이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곳이, 지금의 동북 3성 지역이다.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깝고, 여차하면 조선으로 치고 들어갔다, 빠지기도 좋았다. 또한 많은 이들이 ‘생계’를 이유로 만주로 넘어왔을 시기. 이들 속에 숨어들 수도, 이들을 배경으로 힘을 키울 수도 있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의 우드로 윌슨(맨 오른쪽)
한반도를 떠난 이들은, ‘우리 편’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국제 사회에서 조선을 도와줄 세력 말이다. 그 첫 번째 대안이 바로, ‘미국’이었다. 조선인들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이런 평가가 많았다.
“미국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는 다르게,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하지 않았어.”
“고종황제 시절, 미국은 중재자 역할을 했지.”
“조선에서 선교 활동하고, 병원 짓고, 좋은 일만 하더라.”
물론, 미국을 대안으로 고르는 데에, 결정타가 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그의 말에 온 세상이 들썩인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며 3.1 독립 만세운동을 벌였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말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사실, 연합국과 싸웠던 독일, 오스트리아, 튀르키예에 한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제국주의의 압제에 시달리던 수많은 국가가 저마다의 사정에 맞춰 해석했다. 그리고 활용하기 시작한다.
재미 한인 사회에서는 파리 강화회의에 보낼 한인 대표를 뽑는다. 대표로 선출된 인물은 이승만과 정한경. 이들은 미국에 파리로 가기 위해 필요한 여권 발급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한다. 이 분위기에서 이어져 나온 것이 1919년 2월8일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2.8 독립 선언이다.
1919년, 2.8 독립 선언의 주역들
우리는 2.8 독립 선언을, “3.1 독립 만세운동 전에 있었던 독립운동” 정도로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2.8 독립 선언은 상당히 큰 사건이었다. 당시, 조선 청년 독립단은 자신들이 작성한 독립 선언서를 각국 대사, 공사, 일본 정부 요인, 귀족원과 중의원의 의원들, 조선 총독, 신문사, 잡지사 그리고 당시 방귀깨나 뀌던 학자들에게 보낸다. 조선과 일본이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찻잔 속의 태풍과 같았다. 미국은 움직이지 않았다. 민족자결주의는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에만 적용되는 ‘민족자결’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조선을 포함, 그 어떤 아시아 식민지와 아프리카 식민지도 독립을 이룰 순 없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붙었고, 그 결과 승전국의 지위를 얻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독립을 꿈꾸기에 너무 미약했다.
이때 독립을 꿈꾸는 이들에게 ‘복음’이 들린다.
바로 “공산주의”였다.
빨갱이 역사 만들기
소련 최초의 국가 원수, 블라미디르 레닌
러시아는 1917년,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다. 반자본주의면서, 반제국주의였던 당시의 “공산주의” 국가는,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는 동지와 같았다.
레닌의 저서, <제국주의론(帝國主義論)>에는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라고 설파한다(실제로, <제국주의론>의 원제는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다). 레닌의 주장은 이랬다.
“독점 자본주의가 확립되면, 경쟁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독점 기업은 시장과 자원을 놓고 세계 시장으로 나가 싸우게 된다. 독점 기업 간의 경쟁은 국익을 건 국가 간의 싸움으로 발전한다. 그 결과,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세계를 나눠 먹는다.”
기존 강대국들이, 자신들끼리 먹잇감을 나눌 때는 괜찮다. 다만,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신흥 강대국이 힘을 키워, 기존 강대국에 자신의 몫을 요구할 때 문제가 생긴다. 이걸,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고 한다.
레닌은, 자본주의 체제에 ‘영구적인 평화’는 없다고 결론 내린다. 즉, 자본주의 체제 유지는, 전쟁과 전쟁 사이에 짧은 휴전을 반복하는 것. <제국주의론>만 봐도, 사회주의는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에게 ‘빛’이었다.
다른 열강들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가지려고 다투는 와중에, 소련은 반제국주의 투쟁을 외쳤다. 미국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과 달리 소련은 식민지국의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돕는다. 여기서 “실질적으로” 도왔다는 게 중요하다.
2.8 독립 선언에 이어, 3.1 독립만세운동을 겪은 조선. 겉으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강압적인 통치에서 조금 부드럽게 바뀌었다는 정도였다. 물론, 그 안에서 큰 변화는 있었다. 당장 국외로 빠져나가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임시정부는, 미리 와있던 간도의 무장 독립 단체들과 손을 잡는다. 당시 임시 정부는 독립 투쟁을 위한 10만 명의 병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병력을 7개 군단 규모로 편성하려 했다. 간도 일대의 조선인을 모병해, 훈련할 계획도 세운다. 이런 무장 투쟁에 대한 고민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로 이어졌다.
요점은, 임시정부 내에서 ‘소련’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는 것. 이와 같은 말이 국내외적으로 계속 퍼져 나갔다.
출처 - <연합뉴스>
여기서부터 한 가지 염두에 둬야 할 것이 있다.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의 시선으로 1920년대 역사를 보지 말아야 한다. 1919년 3.1 독립운동, 임시정부 수립, 임정 초기의 외교정책, 뒤이은 1920, 1930년대 독립운동가의 활약상까지… '지금'의 관점으로(윤석열식 관점이라고 하자), 잔인하게 표현하면
“빨갱이들이 설친 역사”
정도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사회주의 계열”로 활동한 것이 당시엔, “민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 뒷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하나씩 풀어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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