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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대한민국 3년) 1월1일, 임시정부·시의정원 요인 58명의 신년 축하식 사진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선다. 지난 편(1920년대, 독립운동가들이 '빨갱이'가 된 사연: 영웅들은 어떻게 이념에 가려지게 되었나(링크))서 언급했듯, 당시 중국과 소련은 조선의 독립 투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었다. 초기 임시정부는 소련과 친해지는 것이 살길이라 판단했다. 임시정부는 국익을 고려한,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내린 게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그리고 1920년을 "독립 전쟁 원년"으로 선포한다.

 

열강들에 대한 군사 외교가 중요한 시기였다. 임시정부는 중국 측 반일 인사, 반일 단체와 연합한다. 그들과 한중 공동 전선 형성을 시도한다. 중국 사관학교에 조선 청년들을 입교시키는 방안을 논의한다. 동시에, 조선 독립에 실질적으로 힘을 실어줄 ‘우리 편’을 찾기 시작했다.

 

중국 역시 일본의 대척점에 있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일본에 계속 얻어맞는 상황. 조선의 든든한 편이 되어 주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소련의 도움이 필요했다. 소련은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식민지 독립투사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야말로, 조선 독립의 조력자로 안성맞춤이었다. 

 

결정적으로, 소련과 일본은 적대 관계에 있었다. 소련에서는 볼셰비키의 적군(赤軍)과 나머지 정치 세력이 연합한 백군(白軍)이 내전 중에 있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14개 자본주의 나라는 군대를 만들어 백군을 지원한다. 바로, 이 군대를 ‘간섭군’이라 부른다.

 

일본의 적은, 조선의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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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첫 페이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과 소련(정확하게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는다. 조약의 내용은 이렇다.

 

1. 소비에트 러시아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핀란드, 캅카스, 발트 3국 등 약 7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에 대한 지배를 완전히 포기한다.

 

2.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 제국에 6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금으로 지불한다.

 

3. 소비에트 러시아는 적위군을 해체한다.

 

소련은 위 조약을 맺은 대가로, 1차 세계대전에서 빠지게 된다. 소련이 전쟁에서 빠지자, 협상국(미국, 이탈리아, 일본)들은 조급해진다. 혹여나, 소련이 협상국에 총구를 돌릴까 불안했다.

 

이때 일본이 먼저 칼을 뽑는다. 8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시베리아로 치고 들어간 것. 일본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다시 말해, 공산주의 확산, 즉, 러시아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소련 내전에 '간섭'한다. 그래서 이들을 '간섭군'이라 불렀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사할린, 만주 횡단철도를 거쳐 연해주, 그리고 바이칼호와 이르쿠츠크까지 이른다. 일본군을 주축으로, 다른 협상국도 싸움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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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출생, 알렉산드르 콜차크

 

소련에는 알렉산드르 콜차크라는 인물이 있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엔 흑해 함대 사령관으로, 1918년 11월 시베리아에서 백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영국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은 그를 지지했다. 하지만 영국 총리를 비롯한 미국 윌슨 대통령은 그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콜차크는 백군에 가담한 사회 혁명당 당원, 체코 군단과 갈등이 있었다. 백군의 다른 일파들과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신뢰를 얻지 못하고, 체코 군단에 배신당한다. 체코 군단은 콜차크를 볼셰비키 군대에 넘긴다. 대신, 안전을 보장받았다.

 

콜차크가 무너지면서, 미국을 비롯한 다른 협상국들은 소련에서 병력을 빼기 시작한다. 하지만 일본은 병력을 유지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군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바로,

 

시베리아를 먹는 것.

 

당시, 연해주에는 한인들이 항일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적군에 잠입하기도 했다. 실제로, 백군에 들어가 항일 세력 형성을 시도한다.

 

일본은 그러한 한인 사회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해주에 있는 한인을 학살하고, 한인 사회를 조직적으로 파괴한다. 이제, 임시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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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콜차크의 생애를 다룬 영화 <제독의 연인>의 한 장면

출처 - <제독의 연인>

 

조국 독립을 위한 당연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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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국무총리직을 수행한, 독립운동가 이동휘

 

임시정부는, “적의 적”을 친구로 여겼다. 소련과 접촉해 대(對)일본 공동 전선을 세운다.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자금을 지원받는 걸 목표로 삼았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동휘는 비밀리에 한인 사회당의 한형권을 모스크바로 보낸다. 여운형은 본인이 모스크바에 가겠다고 했지만, 이동휘가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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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김 알렉산드라

 

참고로, 이동휘는 최초의 한인 공산주의자라 불리는 ‘김 알렉산드라’에 이어, 두 번째 공산주의자다. 김 알렉산드라는 제정 러시아 출신의 한국계 소련인이다. 그래서, 이동휘를 오리지널 한인 공산주의자로 본다. 그는 대한제국 시절, 군인이자 기독교 신자였다. 그런데 '혁명'을 알게 된 것이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마자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한국인 최초의 공산주의자, 이동휘. 아시아 최초의 볼셰비키 당인 ‘한인사회당’을 만든다. 이후에는 임시정부로 들어가 활동한다. 의견 충돌로, 임시정부에서 나온 뒤에는 ‘고려공산당’을 창당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자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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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미국에 머물던 안창호 선생의 모습

 

소련과 친교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한 건 이동휘만이 아니었다. 안창호도 소련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소련의 군사적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소련과 친하게 지내야 했다. 

 

안창호의 준비론인, “전쟁 준비론”에서 소련은 빠질 수 없는 상수였다.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흥사단과 독립신문 등에 사회주의 선전을 시작한다. 1920년대, 소련은 식민지 지식인에게 ‘희망’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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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박은식

 

일제 강점기 시절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은식. 그는 자신이 쓴 항일 투쟁 기술서 <혈사>에서, 한중 연대를 강조했다.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러시아도 들어간다. 즉, 한중러 3국 연대론을 펼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민족의 충성과 강건한 힘을 감탄하여 도의상 원조를 줄 것은 필연”

 

중국과 소련은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한다. 그래서 소련과 중국이 조선과는 순치 관계임을 역설했다. 이후에, 박은식은 한중러 그리고 인도까지 포함해 ‘4국 연대론’으로 확장하기도 한다. 1925년 10월, 그는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사임하면서 <독립운동의 대방침을 덧붙여 논함>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반드시 중국의 4억 인민, 러시아의 1억 5천만 인민, 인도의 3억 인민과 연합적 행동이라야 성공을 이룩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당시의 소련, 중국, 인도, 조선은 함께 적을 물리쳐야 하는 ‘동지’였단 걸.

 

한국과 중국의 연대는, 당대 지식인들에게 독립을 위한 기본값이었다. 여기에 소련이 포함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일본과의 충돌, 그리고 코민테른을 통해 소련이 피압박민족에게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한중 연대에서 소련과의 연대도 당연한 것이 되었다. 

 

여기서 중국이 불을 댕긴다. 1923년~1924년, 쑨원은 소련과 연대 정책을 추진한다. 그 결과, 1차 국공합작이 이뤄진다. 중국마저 소련과 손을 잡게 된 것.

 

인도가 더해진 건,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운동 때문이었다. 박은식은 피압제 민족끼리 연대해 제국주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박은식은 4국 연대라는 마지막 “전략”을 말하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조국 독립 후 ‘광복사’를 기술하는 것이었다. 

 

민족 교육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던 박은식. 그에게 1920년대 소련은 조선과 함께 가야 할 동지이며, 조선 독립을 위한 가장 중요한 외교적 파트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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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레닌이 참석한 코민테른 2차 대회의 대표단의 모습

 

앞서 언급한 코민테른도 짚고 넘어가자. 코민테른. 영어로, Communist International. 직역하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지도자 스탈린을 선두로 하는 코민테른의 목표는 이것이다. 

 

"무장 군대를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으로, 완전한 국가 소멸이라는 과도적 단계로 이행함으로써, 전 세계 자산계급의 전복 및 세계적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립"

 

각국 공산당 사이의 연계를 강화한다. 공산당 간의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함으로써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무너뜨린다. 1970~80년대에 코민테른이란 말을 함부로 했다간 어딘가로 끌려가 ‘코렁탕’을 먹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 코민테른은 피압제 민족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은 존재였다. 

 

Image 1 The main building of KUTV at today's Pushkin Square (to the left), late 1920s. Photo by I. Panov.jpg

소련 모스크바에 설치되었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왼쪽 하단)'

출처 - (링크)

 

실제로, 조선의 젊은이들은 코민테른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는다. 1925년, 조선 공산당이 설립되던 해. 조선의 청년들은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921년 4월에 설립된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공산주의 운동가 교육 기관으로, ‘국제 레닌 학교’와 비슷한 기능을 했다.

 

국제 레닌 학교가 주로 유럽, 아메리카 대륙 학생을 대상으로 했다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아시아계 학생을 많이 받았다. 아시아 식민지 피지배국의 똑똑한 젊은 혁명가를 데려와 교육했다. 공산주의 이론을 기본으로, 당 조직 건설, 선전, 노조 건설 등 ‘실용적인’ 교육을 진행했다.

 

1920년대 볼셰비키 정부는, 모스크바에 공산 대학, 서방 소수민족 대학, 모스크바 중산대학 등을 설립한다. 이러한 교육기관을 통해 혁명 전파에 애를 썼다. 볼셰비키 정부의 목적이 어떻든 간에, 식민지 지배에 허덕이던 젊은이들에게, 소련과 공산주의는 ‘희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일본 편이었던 시기였다. 피지배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젊은이들을 교육하겠다고 나선 국가는, 소련이 유일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소련의 조력을 마다할 수 있었을까.

 

베트남 독립운동의 아버지 호찌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 류사오치(마오쩌둥과 함께 중국 혁명에 나선 인물이다), 개혁 개방을 시도했던 덩샤오핑 등 쟁쟁한 이들이 모두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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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세여자>의 주인공(왼쪽부터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출처 - <한겨레출판>

 

한국인 졸업자 명단도 만만치 않다. 대통령 후보로 유명한 조봉암 선생(진보당 사건으로 이승만 정부 당시 처형당한다), 조선노동당 창건자로 불리는 김용범,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장 출신 방호산(조선인들로 구성된 166사단은, 이후 6사단으로 개편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미국의 워커 장군이 인정할 정도의 전공을 보여준다. 마지막엔 ‘근위사단’ 칭호까지 얻는다. 해당 사단 지휘자가 바로, 방호산이다), 소설<세 여자>의 주인공이었던 고명자, 주세죽 등이 있다.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권에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까지 들어갈 정도면 엄청난 엘리트여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매의 눈으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감시했다. 출신 학생들을 잡아다 취조하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일본은 이들의 동태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졸업자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하는 일이 “나라를 엎는 것”이었으니까.

 

전 세계 어느 국가도 식민지 조선에 관심이 없던 시절. 소련은 달랐다. 의도와 목적이 뭐였든,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핍박받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소련은 ‘희망’이었다.

 

소련이 주창하는 사회주의도, 가릴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이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상식적이고, 필요한 일이었다. 그들은 반제국주의이자, 조선 독립을 물리적으로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