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사 (49) 수직의 도전자 : 내가 고개 숙이지 않는 이유
(50)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로운 짝사랑은 왜 멈출 수 없는가
(51) 홍어 : 어머니는 더 이상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았다
(52) 제르미날 : 고급 아파트가 쓰레기로 넘쳐나길 바라는 이유
(53) 이반 일리치의 죽음 : 판사는 왜 의사에게서 자기 모습을 봤나 |
소설 『태평천하』
출처-<문학과지성사>
백범 김구 선생의 후회
1909년 초겨울, 김구 선생과 역시 독립운동가인 노백린 선생이 황해도 재령에서 하루 묵게 되었다. 이때 두 분은 우연히 한 젊은 부부의 싸움을 목격하게 되었다. 남편 되는 이가 손에 권총을 들고 매국노를 죽이겠노라 소리치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그것을 말리고 있었다. 큰 소동이었다. 김구 선생 일행은 남편 되는 이를 불러 타일렀다. ‘시세의 격변 때문에 헛된 열정에 들뜬 청년’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과 노백린 선생
노백린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공군 독립군을 양성하여,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영향을 미친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 중 한 명이다.
김구 선생이 ‘의지를 더욱 강하고 굳게 수양한 다음에 총과 칼을 찾아가라’고 말하며 그에게서 총과 칼을 넘겨받는 것으로 소동은 진정되었다. 아내는 재령 진초학교의 여교사인 ‘오인성’이었고, 남편은 훗날 ‘열사’로 추앙받게 될 ‘이재명’이었다.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은 매국노의 우두머리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 당시 일제는 동원 가능한 최고 수준의 의료를 제공하여 이완용은 목숨을 건졌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의사가 단총(권총)을 사용하였다면 국적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인데, 눈먼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충분한 성공을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 백범일지 中 -
이재명은 사형 선고를 받은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살아남은 이완용은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어쩌면 이재명은 아내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익이나 영광은 전혀 없이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을 잃어야 했으니 말이다.
독립운동가 이재명
출처-<양이원영 의원실>
윤두꺼비의 위대한 선언, 나만 빼놓고 모두 망해라
「윤두꺼비는 피에 물들어 참혹히 죽어 넘어진 부친의 시체를 안고 땅을 치면서,
“이놈의 세상이 어느 날에 망하려느냐!”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울음을 진정하고는, 불끈 일어서 이를 부드득 갈면서,
“오냐,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출처-<EBS>
‘윤두꺼비 윤두섭’이 젊었던 시절, 1903년 계묘년 삼월 보름날 밤. 윤두꺼비는 화적떼를 피해 도망치느라 벌거벗은 몸뚱아리로, 부친 ‘말대가리 윤용규’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부짖었습니다. 수령이라고 해야 백성들 토색질로 하루를 보내는 것들이고, 굶어 죽느니 도적질이라도 한다고 사방에 화적떼들이 창궐하던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한때는 판무식꾼에 서른이 넘도록 노름방 개평이나 뜯으며 살던 말대가리 윤가는, 어느 날엔가 느닷없이 이백 냥을 얻어와 논을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소작농들에게 곱절 이자로 돈놀이를 했지요. 말대가리 윤가는 무식하고 소박했으나 점점 돈이 대세가 되어가는 시대라는 것을 막연히 알았던 것입니다. 일조에 착실한 살림꾼이 된 말대가리 윤가는 어느덧 삼천 석은 족히 나오는 지주가 됩니다. 어려서부터 이익에 눈이 밝았던 아들 윤두꺼비의 도움도 한몫했지요.
시절이 시절이다 보니 이자 놀이도 재미졌고, 임자 없는 토지도 수두룩해서 가산 늘리기에는 제격이었으나 화적떼들의 약탈도 부지기수로 당해야 했습니다. 말대가리 윤가는 죽기 달포전 자기 집을 노략질하던 패거리들 틈에 자기 땅을 부쳐 먹는 놈이 섞여 있는 것을 보고는 관가에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토색질에는 도가 튼 수령은 말대가리 윤가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수령은 오히려 말대가리 윤가를 한패로 몰아 두들겨 패고는 가둬버렸습니다. 윤두꺼비가 부친을 빼내오는데 이천 냥을 써야 했고, 말대가리 윤가는 장독으로 드러누워야 했지요.
「“......네놈들이 죄다 잽혀가서 목이 쓸리기를 축원허구 있는 내가, 됩다 한 놈이라두 뇌여나오라구, 내 재물을 들여서 뇌물을 써? 흥! 하늘이 무너져두 못헌다!”」
악에 받친 말대가리 윤가는 다시 찾아와 옥에 갇힌 패거리를 빼내야 하겠다며 삼천 냥을 요구하는 화적패에게 대들었습니다. 그의 늙은 마누라는 화적패 두목을 깨물었고. 이 와중에 윤가는 손에 잡힌 칼을 휘두르다가 그만 도끼에 맞아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윤두꺼비에게는 잊히지도 않는 계묘년 삼월 보름날이었습니다. 부친의 피까지 적신 삼천 석거리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삼십여 년 동안 착실히 가산을 늘렸습니다. 춘궁, 봄 굶주림에 모여드는 소작인들에게 장릿벼를 놓는 등 수단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착취? 윤두꺼비로서는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벼 만 석을 받게 되고 현금이 십만 원 가까이 은행에 쌓이자, 윤두꺼비는 온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 이것은 윤두꺼비의 웅장한 절규이자 위대한 선언이었습니다.
돈을 채운 윤두꺼비, 족보를 새로 짜다
윤두꺼비에게 참으로 좋은 세상이 왔습니다. 곳곳에 넘치는 일본 순사들이 윤두꺼비는 그렇게 믿음직할 수 없었습니다. 수령에게 뜯기고 화적패에 부친을 잃은 그에게는 이 새로운 세상이 이리 좋을 수 없습니다. 몇 곳 필요한 곳에 적당히 멕이기만 하면 재산을 늘리는 데 아무 장애가 없습니다. 상인들에게는 돈을 놓고 폭리를 취하니 참으로 재미집니다. 돈을 못 갚으면 더 좋습니다. 경매와 차압으로 더 큰 이문을 보니까요.
「“자아 보소. 관리허며 순사를 우리 죄선으루 많이 내보내서, 그 숭악헌 부랑당놈들을 말끔 소탕시켜주구, 그래서 양민덜이 그 덕에 편히 살지를 않넝가? 그러구 또, 이번에 그런 전쟁을 히여서 그 못된 놈의 사회주의를 막어내주니, 원 그렇게 고맙구 장헐 디가 어디 있담 말잉가......”」
더군다나 일본이 아라사(러시아)를 이겨서 그 부랑당 같은 사회주의까지 막아주는 것에는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까지 치고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진심으로 일본의 승리를 기원했으며 또 반드시 일본이 이길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럴 것이네 워너니. 일본이 부국갱병허기루 천하제일이라넌디...... 어 참, 속이 다 후련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재산과 몸이 안전한 세태가 되자 윤두꺼비에게는 새로운 욕심이 생겼습니다. 바로 문벌이었습니다. 윤두꺼비는 돈은 남부러울 게 없으니, 문벌만 갖춘다면 원도 한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윤두꺼비는 가문을 빛나게 할 필생의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 처음이 족보에다가 도금(鍍金)을 하는 것입니다. 몇 대 윤아무개는 무슨 정승이요, 몇 대 윤아무개는 무슨 판서요, 몇 대 아무는 효자요, 몇 대 아무 부인은 열녀요...... 돈이 있으니 족보를 새로 꾸미는 것 따위는 땅 짚고 헤엄치기이지요.
윤두꺼비 본인 자신은 ‘직원(시골 향교의 우두머리)’ 직함을 달았습니다. 서울로 오기 삼 년 전부터 향교 제사에 소도 잡고 돼지도 잡고, 재정에 보탬이 되라고 돈도 좀 바치고 해서 얻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윤두꺼비는 ‘윤직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춘추 두 차례씩 향교에 올라가 “흥-”, “바이-” 해가며 그럴듯하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향교의 선비들에게 풀지 못할 수수께끼 하나를 안겼습니다.
「“대체 거, 공자님허구 맹자님허구 팔씨름을 하였으면 누가 이겼으꼬?”」
‘공자와 맹자 중 누가 더 기운이 세었는가’란 윤직원 영감의 궁금증은 아무도 풀어주지 못했다고 합니다.
윤두꺼비, 윤직원 영감이 사는 법
추석이 지나 이윽고 짙어가는 가을 해가 저무는 어느 날, 좁쌀만 한 인력거꾼 하나가 계동을 향해 인력거를 끌고 있습니다. 그는 힘에 부치는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인력거를 끕니다. 직업적 단련이란 위대한 것이어서, 그는 마침내 남대문보다 조금만 작은 어느 집 솟을대문 앞에 도착하는 것에 성공합니다.
인력거꾼이 그토록 힘들어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몸에 좋다 하여 장복한 인삼 등속의 약효로 인해 발그레한 동안의 얼굴을 가진, 이십팔관 하고도 육백이 더 나가는 몸, 옛날 같았으면 일도의 방백이 되었을 홍안백발의 풍채 좋은, 잔뜩 꾸민 윤직원 영감이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흔이 넘은 윤직원 영감은 요즘 한창 열다섯 살 기생 ‘춘심이’와 노는 것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 춘심이와 부민관에서 열린 명창대회를 구경하고 집에 오느라 인력거를 탄 것입니다.
인력거에서 내린 윤직원 영감이 허리띠에 매달린 새파란 염낭끈을 풉니다. 그리고 인력거꾼에게 삯이 얼마냐고 묻습니다. 인력거꾼은 팔짱 낀 허리를 굽실거리며 그저 처분대로 주시라 말합니다. 이는 인력거꾼들이 항상 쓰는 말입니다. 애썼으니 후하게 생각해 달라는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인력거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더니 염낭끈을 도로 비끄러맵니다. 그리고는 “으응! 그리여잉? 그럼, 그냥 가소!”라 말하고는 집으로 들어갑니다. 인력거꾼은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윤직원 영감은 더럭 역정을 내어, 하마 삿대질이라도 할 듯이 한 걸음 나섭니다.
“......자네가 아까 날더러, 처분대루 허라구 허잖있넝가?”
“네에!”
“그렇지?...... 그런디 거, 처분대루 허람 말은 맘대루 허람 말이 아닝가?”
인력거꾼은 비로소 속을 알았습니다.」
인력거꾼은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처음에야 농인 줄 알았지만, 윤직원 영감의 안색이며 말씨에 조금도 그런 내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납작한 초가집 앞이라면 뺨따구니라도 한 대 올려붙일 텐데 대저택과 윤직원 영감의 풍채에 눌려 그러지도 못합니다. 윤직원 영감은 오히려 ‘일구이언일부지자(一口二言二父之子, 한 입으로 두말하면 애비가 둘)’란 말까지 써가며 윽박지릅니다.
인력거꾼은 일 환 한 장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윤직원 영감은 막무가내입니다. 이러다 허파가 터지도록 애쓴 대가는 고사하고 다른 데 벌이까지 놓칠 지경입니다. 인력거꾼은 오십 전만이라도 달라고 사정사정합니다. 결국 인력거꾼은 이십오 전을 손에 쥐었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안 줘도 될 돈을 줬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밉니다.
일 년에 도지로만 만석을 받고 서울 상점 곳곳에 곱절 이자로 돈을 놓아 이삼만 원씩 벌어들이는 현금 부자이지만, 윤직원 영감은 단 한 푼을 쓰는 것에도 벌벌 떱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를 내세워 막무가내로 우기기, 그리고 우람스러운 몸집과 신선 같은 옷차림 덕을 봅니다.
버스는 언제나 무임승차입니다. 아까 명창대회 구경도 춘심이는 몰래 들여보냈고, 자신은 제일 싼 입장권으로 제일 비싼 자리에서 구경했습니다. 자리를 옮겨 달라는 관리인에게는 생어거지를 부려, 그가 기막혀서 ‘허허’하며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것이 서울 큰 부자, 윤직원 영감이 사는 방법입니다.
윤직원 영감의 연애와 뜻밖의 경쟁자
좋은 것이란 좋은 것은 다 먹고 사는지라 윤직원 영감은 일흔두 살이 되어서도 여자가 그립습니다. 서울로 올라와서 지난 십 년 동안 갈아치운 첩만 해도 무려 십여 명입니다. 참으로 ‘야만스러운 정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작년인가 얻은 서른둘 먹은 과부 하나가 맘에 들었으나 그것이 젊은 보험회사 직원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 여자에 대한 윤직원 영감의 집착은 더 심해졌습니다. 맏아들 ‘윤주사’ ‘창식’과 창식의 첫째 아들인 맏손자 ‘종수’가 얄미운 이유입니다. 자기들은 천지사방으로 첩질을 해대면서도 늙은 자신에게는 신경을 안 쓰니 말입니다.
「“야, 이 수언(순) 불효막심헌 놈덜아! 그래, 느놈덜은 이놈덜, 밤낮 지집 둘셋 읃어놓구...... 그러먼서 이 늙은 나넌 이렇기...... 죽으라구 내빼려두어야 옳담 말이냐. 이 수언 잡아 뽑을 놈덜아!”」
아까 명창대회가 끝난 후, 저녁 먹고 오라고 한 춘심이가 생각납니다. 어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열다섯 살 춘심이는 윤직원 영감에게 여섯 번째 동기(어린 기생)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늙으면 늙을수록 어린 계집애가 좋았습니다. 어린 것들은 귀여웠으며 어린 만큼 세상 물정을 몰라 돈이 적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막판에 가서 한번 안으려 하면 꼭 “이 영감이 왜 이 모양야? 미쳤나!”하며 내뺍니다. 다섯 차례나 낭패를 본 윤직원 영감에게는 참으로 비참한 노릇입니다.
춘심이가 왔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춘심이에게 다리를 주무르라 하고는 우동을 시켜 먹자고 합니다. 춘심이는 탕수육도 시켜 달라고 합니다. 윤직원 영감은 돈이 아까웠지만 그래도 춘심이인지라 탕수육까지 시켜줍니다. 계집애가 여우 같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다리를 비비 꼽니다.
「못 견디겠어서 인제 웬만큼, 너 몇 살이지? 응, 숙성하다. 너 내 말 들을늬...... 이, 이를테면 사랑의 고백을 해야만 하겠는데, 그놈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는 도로 넘어가곤 하던 것입니다. 역시 다섯 번이나 창피를 본 나머지라,」
“아이 망칙해라!” 윤직원 영감이 끝내 용기를 내어 덥석 허리를 안자, 춘심이가 소리를 빽 지릅니다. 여섯 번! 여섯 번째 실패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진실로 기가 막혔습니다. 그런데 춘심이는 뭔가 다릅니다. 앞선 다섯 기집애들은 소리를 지르고는 내빼기 바빴는데 춘심이는 도망을 가기는커녕 날 잡아보라는 듯이 밴들밴들 웃고 있지를 않겠습니까. 윤직원 영감은 희망을 느낍니다. 어찌어찌 사알살 달래볼 여지가 있을 듯합니다. 루비 반지로 타협점을 찾아갑니다.
「시방 사랑에서는 일흔 두 살 먹은 증조 할아버지가, 열다섯 살 먹은 애인과 더불어 그처럼 구수우하니 연애 흥정이 얼려가고 있겠다요. 그리고 안에서는......」
그러나 윤직원 영감이 모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늙은이와 어린 소녀의 연애 흥정을 지켜보고 있는 눈길 하나를. 사실 그 눈길의 주인공이 춘심이가 고분고분 윤직원 영감의 집에 오는 이유입니다. 윤직원 영감의 아들 윤주사 창식이, 창식이의 첫째 아들이며 윤직원 영감이 맏손자인 종수, 종수의 아들 열다섯 살 ‘경손’이. 춘심이가 연정을 느끼고 있는 사람, 이 어린 기생의 사랑은 바로 증손자 경손이였습니다. 경손이와 춘심이, 이 두 아이는 영감 몰래 진심으로 연애 중이었습니다.
「아무려나 이래서 조손간에 계집애 하나를 가지고 동락을 하니 노소동락(老少同樂)일시 분명하고, 겸하여 규모 집안다운 계집 소비 절약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윤직원의 꿈, 군수와 경찰서장이 될 두 손자
윤직원 영감은 재산을 고이고이 지키면서 족보에 금칠을 한 양반 가문을 만들기 위해 군수와 경찰서장 양성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찌감치 첩질에 빠져 지 할아버지 돈이나 써대는 아들 윤주사 창식은 진작에 기대를 접었고, 맏손자 종수를 군수로. 그리고 둘째 손자 ‘종학’이를 경찰서장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입니다. 이것은 윤직원 영감에게 마지막 필생의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윤직원 영감이 군수 재목으로 계획한 장손 종수는 열일곱에 서울로 올라와 스무 살 때까지 입학시험이라 생긴 것은 죄다 떨어졌습니다. 결국 윤직원 영감은 십 년 계획으로 종수를 고향 군에 서기로 집어넣었으나 종수는 가자마자 첩을 들이고 자기 아버지 창식처럼 할아버지의 돈을 뜯어내는 것에 열심입니다. 종수의 말로야 군수가 될 경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첩질에 술과 마작으로 탕진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윤직원 영감의 꿈은 오롯이 모두 둘째 손자 종학이에게로 모아집니다.
「“그렇지? 응, 그래, 내후년이먼 대학교 졸업을 허구 나와서, 삼 년이나 다직 사 년만 찌들어 나머넌 그놈은 지가 목적헌, 요새 그 목적이란 소리 잘 쓰더구나, 응? 목적...... 목적헌 경부가 되야각구서, 경찰서장이 된담 말이다! 응? 알겄어.”」
지 형이 사 년간 끝내 붙지 못한 ‘XX고보’를 단박에 붙은 종학이, 동경으로 유학까지 간 종학이가 번듯이 경찰서장이 되어 가문을 빛내고 재산을 지켜 줄 것임을 윤직원 영감은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고~ 우리 손자 종학이~
반가운 새날의 시작과 동경에서 온 전보
「그렇듯 반가운 새날이 시방 시작되느라고 먼동이 휘엿이 밝아옵니다. 날이 밝으면서 뚜우 여섯 점 고동이 웁니다. 이 여섯 점 고동에 맞추어 우리 낡은 윤직원 영감도 새날을 맞느라고 기침을 했습니다.」
하루가 가고 새날이 밝았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윤직원 영감은 제일 먼저 요강에 오줌을 쌉니다. 그리고 그 오줌으로 자기 눈을 닦습니다. 매일 아침 소변으로 눈을 씻으면 시력이 쇠하지 않는다는 옛말을 들은 이후, 윤직원 영감은 삼십 년을 두고 이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하인이 받아 온 옆집 어린애의 오줌을 마십니다. 음양을 알기 전 어린애의 오줌을 받아먹으면 몸에 좋다고 하여 하는 일입니다. 오줌의 대가로 나가는 월 이십전이 아깝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오줌도 먹고 보건 체조도 하고 좋은 보약도 먹고, 해서 어떻게든지 몸을 충실히 하여 오래오래 살고 싶은 게 윤직원 영감의 크고 큰 소원입니다.」
아따~ 오줌 맛 좋다!
윤직원 영감은 만석의 부를 누리면서 백 살 이 백 살 살고 싶어 합니다. 이 가산을 남겨두고, 이 좋은 세상을 오래 못 살고 죽는다는 것은 도저히 원통하고 섭섭한 노릇입니다. 끝내 종수를 군수로 만들고, 종학이가 경찰서장이 되어 양반 가문이 되고 가산은 더욱 불어나고. 윤직원 영감에게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 행복된 날입니다.
그 시각에 전날 첩의 집에서 마작으로 밤을 새운 윤주사 창식이 윤직원 영감의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동경에서 전보가 왔는데 마작에 빠져 깜빡한 것입니다. 가기 싫은 집이기는 해도 종학이가 유학 가 있는 동경서 온 전보니, 윤직원 영감에게 반드시 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리 좋은 태평천하에!
「윤직원 영감은 먼저에는 몽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같이 멍했지만, 이번에는 앉아 있는 땅이 지함을 해서 수천 길 밑으로 꺼져 내려가는 듯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뭐~어??!!!!
윤직원 영감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 윤주사가 가져온 전보에는 ‘종학, 사-상 관계-로, 경-시청에 피검!’이라 적혀있었습니다. 그토록 기대했고 믿었던 손자 종학이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동경 경시청에 붙잡혔다는 것입니다. “으엉?”, 윤직원 영감의 놀람은 곧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예전 화적패에 아버지인 말대가리 윤용규가 죽었을 때보다 더 분했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사람 하나는 족히 잡아먹을 듯, 집이 떠나가라고 포효를 합니다.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들이 있더냐? 재산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요,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넌 다 지내가고오...... 자 부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명 동병(動兵)을 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 것 지니고 앉어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윤직원 영감은 땅바닥까지 쳐가며 발광을 합니다. 이런 태평천하에 부잣놈의 자식이, 경찰서장이 될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종학이가, 족히 삼천 석거리 재산은 떼어 주려고 마음먹었던 종학이가 세상 망쳐놀 부랑당패에 가담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습니다. 윤직원 영감의 발광이 점점 거세어집니다. 모여든 식구들은 이 어른이 이러다 혹여 상성이 되지나 않는가 하는 눈빛으로 봅니다. 윤직원 영감의 입에서는 “이 죽일 놈!” 소리까지 나옵니다.
「마지막의 으응 죽일 놈 소리는 차라리 울음소리에 가깝습니다.
“......이 태평천하에! 이 태평천하에......”」
윤직원 영감이 연해 부르짖는 죽일 놈 소리가 차차로 멀리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사나운 포효는 점점 암담한 여운으로 바뀌어 갑니다.
비정상 시대에 정상으로 살기 위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주관적 의지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라 세계의 해석과 수용은 각자 모두가 다릅니다. 각자에게 각자의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이 말은 누군가의 지옥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천국이 될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조국의 멸망이라는 객관적 현실을 바라보는 것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이 실린 황성신문
시일야방성대곡(이 날에 목놓아 우노라).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이름만 그럴싸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며칠 뒤인 20일, ‘황성신문’의 주필인 ‘장지연’ 선생이 쓴 글입니다. 선생은 이 글에서 말 그대로 피 끓는 통곡을 하며 일제와 매국노들을 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막대한 부와 출세의 기회를 제공할 새로운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해(일본)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땐 온 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
이것은 당시 내각총리대신인 ‘리노이에 간요’, 이완용이 일장기에 적은 문장입니다.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통곡의 세상이 또 누군가에게는 환하게 밝아지는 세상이기도 한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는 70년도 넘은 먼 과거의 일이니 시선을 돌려 오늘,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살펴봅니다. 도저히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사회가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대통령이란 사람은 조국의 독립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느닷없이 생뚱맞게도 일본을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라 치켜세우고, 어느 날 갑자기 ‘썬데이 서울’에도 실리지 못할 해괴한 극우 괴담을 퍼붓던 유튜버가 ‘인재개발원장’이라는 감투를 떡하니 씁니다.
김채환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
이뿐만이 아닙니다. ‘통일부 장관’이라는 고관께서는 ‘5천만 국민이 주권을 가지면 무정부 상태로 간다’는 어질어질한 소리를 서슴없이 내뿜습니다. 아무리 형식적인 활자일 뿐이라도 우리 사회는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고 말하는 민주 사회 아니었나요? 하도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화보다 먼저 어이가 없어집니다. 방송통신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자를 살펴보면 그냥 숨이 막힙니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 사회는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비정상인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정하겠습니다. 그 누군가에게는 이 현실이 비정상이 아닌 정상, 더 나아가 태평성대일 수도 있다는 것을요. 현재를 비정상으로 보는가 혹은 태평성대로 보는가를 결정해 주는 해석의 잣대, 그것을 우리는 가치관이라 부릅니다. 서로 정반대인 두 개의 시대해석은 정반대인 두 개의 가치관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올해 3.1절에
세종시의 한 아파트에 일장기가 걸려 있다
출처-<연합뉴스>
일장기를 걸었던 세종시 교회의 목사
나의 가치관을 만들어 주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나란 누구인가’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의 결과물입니다. 시대, 사회와 단절된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기에 ‘나’는 ‘세 개의 나’가 모여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역사적인 나’이고 둘째는 ‘사회적인 나’이며 마지막은 ‘개인으로서의 나’입니다. 이 세 개의 나가 하나로 융합된 것이 지금의 ‘나’란 존재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세 개의 나’ 중에서 ‘역사적인 나’와 ‘사회적인 나’를 제거하고 오직 ‘개인으로서의 나’만 남긴다면 그것은 곧 이기심입니다. 이 이기심에 근거한 가치관으로 해석했을 때, 나만 잘 살 수 있다면 일제강점기도 태평천하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비정상이 아닌 태평성대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윗글에 소개한 윤직원 영감은 죽는 순간까지도 손자인 종학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잣집 자식으로 그 엄혹한 시절에 동경 유학까지 간 녀석이 사회주의 운동(참고로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운동은 오늘날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최대 과제는 ‘반제국주의’였으며, 따라서 우리나라뿐만이 아니고 대부분의 식민지 해방운동은 사회주의 운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었습니다)에 참여해 스스로를 망친 이유를 말입니다. 윤직원 영감이 몰역사, 몰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오직 나 개인을 위한 이기심으로만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비정상적인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정상적인 인생을 사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아마도 역사적인 나와 사회적인 나의 존재 이유, 그리고 거기에 주어진 역할과 의무에 대한 성찰을 통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쉰네 번째 인생탐구를 통해 얻은 생각입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하면 떠오르는 시인이 있지요? 보통 아름다운 언어와 잘 짜여진 운율로 유명한 김영랑 시인입니다. 김영랑 시인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김영랑 시인의 시 한 구절로 이번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김영랑 시인
<독(毒)을 차고>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고
.
.
.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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