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북한산 석탄을 실은 배가 대한민국에 입항해 석탄이 반입되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오랫동안 뉴스와 기사 등으로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관련 기사는 사건이 끝난 이후로도 종종 올라올 만큼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지요. 이때 함께 언급되었던 게 Secondary Boycott, 즉 '2차 제재'라는 말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경제적 제재를 당하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걱정도 많았습니다.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미국을 비롯한 EU 국가들이 러시아를 상대로 경제적 제재를 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러시아와의 무역을 금지하고 국경을 봉쇄하며 러시아 내의 자산을 동결시키는 등 전방위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에 따라 오히려 식량과 에너지 수급에 차질을 빚는 등 부작용이 뒤따랐습니다. 경제 제재를 통한 전쟁의 종료라는 목적은 이루지 못한 터이지요.
출처-<서울경제>
제재 또는 국제제재는 철저하게 유럽과 미국 등이 주도하다 보니 국내 개념과는 좀 다르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가령, 유럽은 국가들 간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만큼 다른 나라로 이동이 쉬워서 우리나라 여건에서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있습니다. 미국은 9.11 테러를 겪은 후 제재에 대해 전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국가가 되었지요. 이를 강제할 국력도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고?"라면서 신기해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금융법, 무역법 등 각종 법률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제도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이 유럽과 미국에서는 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출처-<연합뉴스>
심심치 않게 접하는 제재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지, 누가 제재를 가하는지, 제재를 피하는 방법과 이를 잡기 위한 노력 등을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내용 자체가 생소하거나 어렵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사례나 기준 대부분이 국외에 맞춰져 있음을 고려하여 최대한 간명하게 적어보았습니다.
1. 제재란 무엇인가
제재(制裁, sanctions)는 특정한 국가·단체·개인의 행동, 정책 등에 영향을 주고자 사용하는 조치입니다. 이를 통해 무역, 금융거래, 외교 및 국가 간 이동에 제한을 가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아테네도 주변국에 경제제재를 행했다고 하지요. 이러한 제재는 현대에 갑자기 생겨난 개념이 아닙니다. 언급했던 고대 아테네도 비슷한 개념으로 주변국들에 영향을 주었고, 이후 꾸준히 사용되어 왔으며 방법도 발전해 왔습니다. 특히 19세기 말부터 시작해서 전쟁의 대안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는데, 1차대전 때 연합군과 영국이 독일의 항구를 봉쇄하고 무역 제재를 가했던 게 가장 유명한 사례입니다.
이후 설립된 UN의 전신인 국제연맹에서도 전쟁을 일으킨 국가에 경제 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근거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2차대전이 지나고 냉전 시대가 되면서 제재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이후 UN의 핵확산금지조약(Non Proliferation Treaty, NPT) 발효 후 이를 공고히 하고자 제재를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리비아의 경우 1975년 NPT에 가입했음에도 핵무기 개발을 계속해 왔습니다. 이후 미국과 UN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받았습니다. 결국 2003년 카다피는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고, 리비아는 제재가 해제되면서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제재는 전쟁과 대량살상무기 방지를 비롯하여 인권 보호, 금융시스템 보호, 테러지원 금지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실행합니다. 일부는 성공하고 일부는 실패하기도 하지요.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출처-<한겨레>
북한은 2000년대부터 유엔과 미국을 비롯해 국제사회의 여러 국가가 무역을 비롯한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으나 중국이나 러시아 등의 지원으로 핵무기 개발을 지속합니다. 제재의 실패 사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요. 물론 리비아의 경우처럼 제재가 지속되고 시간이 흘렀을 때 결과는 달라질 수 있을 터입니다.
출처-<YTN>
2. 제재는 누가 누구에게 가할까
국제제재는 크게 다자간 제재와 일방적 제재로 나눕니다. 다자간 제재는 UN이나 EU처럼 국제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한 의무나 규범을 위반한 가해국에 국제사회 전체가 가하는 것입니다. 제재의 종류에는 무기 및 특정 사치품의 무역통제, 여행금지, 자산동결 등이 있습니다. 이 중 가해국에 적절한 것을 부과하는 형태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러-우 전쟁에 대한 서방 국가의 러시아 제재입니다. FATF(The Financial Action Task Force,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도 회원국을 대상으로 '블랙리스트'를 발표하여 해당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국가와의 거래를 금지하는 제재를 가합니다.
출처-<YTN>
위의 경우를 제외하고 개별 국가가 주체가 되어 자율적으로도 제재를 가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일방적 제재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 발사 등을 저지하고자 자체적인 대북 제재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일방적 제재는 다른 나라에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대북 제재를 중국이 위반하였다고 해서 이를 통제할 수는 없겠지요. 일방적 제재는 금융과 무역의 세계화로 성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령 1980년대 호주는 프랑스의 핵무기 실험을 중단하도록 하고자 독자적인 제재를 가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호주와의 무역을 다른 국가로 대체했고, 제재는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지요.
일방적 제재가 힘을 발휘하는 예외적인 나라가 있습니다. 초강대국 미국이지요. 미국의 PATRIOT ACT(미국의 반[反]테러법)를 근거로 정부 산하에 OFAC(Office of Foreign Assets Control, 해외자산통제국), BIS(Bureau of Industry and Security, 산업보안국) 등을 둡니다. SDN(Special Designated Nationals, 특별지정대상자), BIS list와 같은 제재대상자 목록을 발표합니다. 이런 제재대상자와 거래하거나, 테러 자금과 같은 주요 자금세탁 문제에 관여한 곳은 미국 내 금융기관과의 거래가 중단되었습니다. 세계 공용 통화인 미국 달러화 거래를 금지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어지간한 무역 제재보다 더 무서운 조치입니다.
주요 대북제재의 구성
출처-<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
3. 제재의 특징
이런 제재에는 Extraterritoriality(역외성, 치외법권)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즉 국내에서 시행하는 제재가 다른 국가에서도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UN의 경우 독자적으로 제재를 시행하는 것이 아닌 UN 결의안을 국가들이 법률로 채택해야 하므로 역외적용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EU와 미국은 차이가 있습니다.
EU는 EU 내에서 시행하는 제재를 다른 국가에 적용하는 것을 불법이라고 여깁니다. 즉 EU 연합국의 영토 및 EU 국가 출신 사람들에게만 적용이 되는데, 미국은 반대입니다. 미국 내에서 뿐 아니라 미국에 본사가 있는 회사의 국외 자회사, 미국인이 일정 지분을 초과하여 보유한 외국 회사 등에까지 제재를 적용합니다. 도입부에 말씀드린 2차 제재(Secondary Boycott)를 인정하는 것이지요.
"미국이 뭐라 하든 무시하면 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의 조치를 무시하고 제재를 받게 되면 미국 달러화 거래가 불가능해집니다. 잘 아는 것처럼 이는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뜻하며 경제적인 타격은 상상할 수 없을 수준입니다.
여담인데 Standard Chartered Bank나 CITI Bank 등 글로벌 은행들은 몇 차례 미국의 제재를 위반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천문학적인 벌금을 냈습니다. 보통 미국은 제재 대상에게 선택하게 합니다.
"벌금을 낼래? 미화(US Dollar) 거래 중단할래?"
글로벌 은행이 미화 거래가 막힌다는 것은 은행의 국제업무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은행의 평판리스크에 엄청난 타격을 주며 뱅크런(예금 대량 인출 사태)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천문학적 벌금을 내고서라도 거래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제재의 특징인 역외적용성에 대한 부분은 미국의 사례들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9.11 테러 사건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테러 지원 국가를 악의 축으로 선언했습니다. 이란·시리아·북한·쿠바이지요. 미국은 이들 국가와의 금융거래를 원칙적으로 차단하고 있습니다. 만약 은행의 영업점에 방문해서 이란이나 시리아로 해외 송금을 한다고 하면 다양한 사유로 거래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조지 W. 부시가 악의 축이라 지목한 나라들
(빨간색: 이란·이라크·북한)
존 볼턴이 또 다른 악의 축으로 지목한 나라
(주황색: 리비아·시리아·쿠바)
출처-<위키피디아>
4. 요 근래 제재 사례들
1) BNP Paribas
프랑스의 최대 은행인 BNP파리바는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수단·이란·쿠바의 정치권과 1,900억 달러 규모의 달러 거래 서비스를 제공한 혐의로 미국 정부로부터 89억 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았습니다. 추가로 일부 달러화 거래 업무도 1년간 금지되었는데, 벌금 액수가 역대 최대규모였습니다. 연루된 13명의 임원이 해고 되고, 일부 직원들은 징계처분까지 받았습니다. 벌금이 부과된 2014년부터 전 세계 은행들에 제재 위반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왔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Banco Delta Asia
Banco Delta Asia는 마카오에 있는 소규모 은행이었습니다. 이 은행이 현재까지도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2005년 9월 미국이 이 은행을 '자금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정하려고 한 이후였습니다. 대북 제재를 위반하고 북한의 위조지폐 제작과 유통에 혐의가 있었던 은행을 아직 제재도 가하기 전 이었습니다.
출처-<경향신문>
하지만 단지 '언급'만 되었을 뿐이었던 이 은행은 이후 1억 3천 3백만 달러가 인출되는 뱅크런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후 마카오 금융기관은 추가적인 뱅크런 사태를 막기 위해 Banco Delta Asia은행의 계좌를 전부 동결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북한이 보유하고 있던 자금도 동결되었으며 이것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북핵 6자 회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미국 정부 한마디에 소규모 은행이 파산했다는 사례로서 지금도 회자하고 있습니다.
3) IBK 뉴욕
2011년 국내의 무역업체는 IBK기업은행에서 이란과의 허위거래를 실행했고, 이 과정에서 IBK 뉴욕지점이 자금을 중개했습니다. 이는 미국 자금세탁 방지법을 위반하게 되었습니다. 국내 은행으로는 처음으로 8,600만 달러의 제재금을 부과받았습니다. 국내 은행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내에서 영업하는 지사의 자금세탁방지(Anti Money Laundering, AML) 책임에 더욱 철저히 신경 써야 할 것을 배웠습니다. 더불어 대한민국-미국-이란을 거치는 거래 과정에서 최초에 한국의 위반거래 파악이 늦었다는 것도 이유가 되어 국내 자금세탁방지 시스템의 개선에도 큰 영향을 끼친 사례입니다.
국제 돈세탁 조직의 범행 통로가 된 적이 있는 기업은행. 2020년 4월 미국 자금세탁 방지법 위반 기소를 유예받은 대신 1,000억 원이 넘는 벌금을 내는 처지가 됐다. 이 일로 국책은행으로서의 국제 신인도는 추락했다(출처-<MTN 머니투데이방송>).
4) Microsoft
금융기관뿐 아니라 일반 기업도 제재의 대상입니다. Microsoft는 러시아 방산업체에 수출 규제 대상인 소프트웨어를 판매하여 위반사항이 생겼습니다. 이 외에도 쿠바·이란·시리아와 관련된 수출통제 위반도 추가로 적발되어 총 330만 달러의 벌금을 내기로 하였습니다.
5) Air BNB
2015년부터 쿠바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Air BNB는 당시 미국 정부가 쿠바를 여행하려는 미국인들에게 요구했던 정부 업무나 봉사활동 등의 자격조건을 갖춘 사람 이외의 사람들에게 숙소 예약을 허가했고, 이를 따로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는 제재 위반이었습니다. 9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았습니다. 참고로 미국은 쿠바를 대상으로 하는 경제제재로서 1960년대부터 상거래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제제재 프로그램이지요.
출처-<연합뉴스·에어비엔비 홈페이지>
5. 마무리: 한국에서 자금세탁 제재는..?
대략적인 제재의 개념과 종류, 사례들을 이야기 해드렸는데 서두에도 말씀드렸듯이 제도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생소합니다. 내 금융기관들도 자금세탁방지는 관심이 적지요. 특정 가상자산 거래소들은 자금 세탁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 보니 은행권보다는 관심이 높지만, 외국보다는 여전히 미비한 수준입니다. 우스갯소리로 현업에 있는 분들은
"우리나라 은행들도 제재로 벌금 한번 맞아봐야 신경을 쓸 거야"
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만큼 자금세탁방지나 제재에 관심을 둔 글로벌 은행들은 이미 한 번쯤 제재 위반으로 천문학적 벌금을 냈기 때문이지요. 선례들이 쌓여 있고, 한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차츰 커져 온 만큼 앞으로 국내은행과 기업들은 제재 위반으로 벌금을 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터입니다.
자금세탁과 제재에 관련된 이야기는 기회가 있을 때 영화나 드라마 혹은 현실 속 흥미로운 사례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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