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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과 '을'의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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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간호법 국회 본회의 통과를 촉구하기 위해, 국회 앞으로 모인 간호사들

 

파업. 영어로 "Lock out". 고용자 측에서 회사 문을 걸어 잠근다는 뜻. 즉, 노동자들이 요구사항을 실현하기 위해 집단으로 노동 제공을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사용자와 고용인은 명백한 갑을 관계다. 을이 갑을 상대로 1:1로 대응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을은 다른 을들과 함께 움직인다. 한 번에 수백, 수천 명의 노동자가 동시에 업무를 멈추면, 사용자도 어쩔 수 없는 노릇.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된다.

 

한두 명 혹은 수십 명이 집단 행동하는 것에는 끄떡없다. 특히 규모가 큰 회사에서는 그렇다. 그 정도 인력, 다른 사람을 대신 고용하면 그만이다. 일용직 하나도 간절한 사람이 꽤 많기 때문이다. 사용자는 그걸 알고 이렇게 말한다.

 

"억울하면 그만두던가."

 

PA의 딜레마

 

한 대형병원에서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익명의 제보다. 수술방에서 의료 사고가 있었다. 제보자는 의사의 실수였다고 한다. 하지만 독박을 쓴 건 PA(Physician assistant, 수술실 전담 간호사). 의사는 PA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PA)가 책임을 지는 게 징계가 적으니, 너의 책임으로 하자."

 

의사의 업무를 다른 직역의 의료인이 수행하는 것은 불법 의료행위다. 애초에 PA에게 맡겨서는 안 되는 업무였다. 거기다 PA에게 책임까지 떠넘긴 것. PA는 병원 측에 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병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의사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는다. 대신 간호사가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부서, 옮기는 게 낫겠죠?"

 

PA가 의사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의사 대신 징계위원회에 회부된다. 커리어에 금이 간다. 그것도 억울하게. 반대로, 그 제안을 거부한다면? 그날부터 교수와 불편한 상황이 시작된다. 직업 특성상, PA 간호사는 업무 시간 내내, 의사와 함께 움직인다.

 

정당한 처우를 기다리며, 뻗대봤자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병원 출근이 불편해지는 것보다, 의사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부서를 옮기는 게 낫다고 판단한다. 결국, 간호사는 PA 직을 그만두고, 수술실 일반 간호사 업무를 보게 되었다.

 

의사는 사용자가 아니다. 하지만 간호사와의 관계에 있어서, 명백한 '갑'의 위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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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양대학병원 블라인드에, 의사의 갑질을 고발하는 글이 올라왔다

출처 - (링크)

 

이름하여 Dr. 닌자

 

평소 괴팍하기로 소문난 의사가 있다. 산부인과 교수다. 그는, 담당 교수 밑에서 일하는 레지던트뿐만 아니라, 간호사들 사이에서도 기피 대상이었다.

 

오후 수술이 잡힌 날. 환자가 받을 수술은 일반적인 외과 수술이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수술이라, 평소처럼 진행하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수술방은 평소보다 긴장감이 가득했다. 이유는 이렇다.

 

집도의가 바로, 산부인과의 '그' 교수였기 때문. 

 

아침부터 그의 기분이 언짢다는 소문이 돌았다. 오늘은 무사히 잘 넘어가기를. 의사의 고성이 튀어나오는 일이 없도록 눈치껏 잘 행동해야 했다. 소식대로다. 입장부터, 그의 표정이 좋지 않다. 간호사들은 더욱 긴장한다.

 

수술을 시작한 지 30분 정도 지났을까.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의사가 사용한 수술용 가위를, 간호사가 한 번에 받아 내질 못했다. "착" 하면, "척" 하고 받아야 하는데, 그러질 못한 거다. 간호사가 비명을 지른다. 의사가 간호사의 얼굴 쪽으로 사용한 가위를 집어 던진 것이다. 다행히, 간호사는 재빠르게 피해,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수술이 끝나고, 간호사는 수간호사를 찾아간다. 수술방에서 벌어진 일을 전했다. 목격자가 많아, 의사도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는 상황. 결국, 의사는 간호사에게 사과한다. 이 사건은 어떻게 해결되었나. 의사는 징계를 받았을까?

 

해당 간호사가 산부인과 수술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피해 간호사의 동료들과 만났다. 그들은 이번 사건을, 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의사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고 했다.

 

"우리(간호사)를 동료로서 존중하지 않습니다."

 

간호사들이 생각하는 사건의 본질은, "관계의 우월성"에 있었다. 아침마다, 담당 의사의 기분을 살피고, 동료들과 공유한다. "오늘은 누가 예민하니 주의하라"는 소식은 직장 생활을 하는 데 꽤나 유용하게 쓰인다. 수술방에서 교수의 눈치를 보는 일도, 간호사의 당연한 업무가 되었다.

 

폐기된 간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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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은 간호법 폐기를 주장하며, 단식 농성에 돌입한다

출처 - <더 팩트>
 
지난 4월, 보건 의료계에서 큰 이슈가 있었다. 바로, '간호법 제정'이다. 대한민국에서 간호법은 총 세 번 발의되었다. 올해가 그 세 번째 발의로, 무려 18년 만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상황. 간호법 실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의사들의 반대가 있었다. 의협은 간호법에 대한 가짜 뉴스를 퍼뜨린다.
 
"간호사가 의사 없이, 단독 개원을 하려 한다."
 
거짓이다. 하지만, 간호법이 폐기되기까지 의협은 이 주장을 이어갔다. 그러지 못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의협은 보건 의료계에 종사하는 다른 직역을 불러 모았다. 간호사가 "지역 사회"로 진출하면, 당신은 직장을 잃게 될 것이라고. 이 역시, 부풀려진 내용이다.
 
일단, 간호법은 "간호사법"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간호와 돌봄"에 관한 법률이다. 각 직역 간 업무를 명확히 해, 의사 업무를 다른 직역이 수행하지 않도록 하는 것. 간호사가 담당할 환자 수를 법적으로 정하는 것. 간호사가 병원을 벗어나도, 간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이다(참고 기사: 가족 없는 사람을 위한 나라는 없다(링크))
 
즉, 간호법은 간호사의 근무 환경 개선만이 목적이 아니다. 본질은 이렇다.
 
환자가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그 기초를 다지는 법안
 
뭐, 간호법이 폐기된 마당에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법안"이었다고 말해 뭐하겠나. 다만, 간호법 내용 중 큰 가닥이라도, 파악하고 있을 필요는 있다. 언젠가는 재정비해야 할 내용들이기 때문에. 간호법이라는 이름 그대로, 혹은 다른 이름으로, 공론화될 수밖에 없다. 
 
다시 시작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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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6일,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간호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다
 
5월30일, 간호법은 폐기되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두 번째 거부권 행사다. 그의 발언을 들어보자.
 
"간호법안은 유관 직역 간의 과도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간호 업무의 탈 의료기관화는 국민들의 건강에 대한 불안감을 초래하고 있다."
 
정부는 확실하게 의사협회의 손을 들어주었다. 의사협회에서 주장하는 바를 그대로 '사실'로 인정한다. 직역 간 갈등을 일으키는 법안. 간호사가 다른 직역을 침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간호 업무의 탈 의료기관화가 국민 건강에 불안감을 초래한다. 간호사가 지역 사회로 진출하면, 의사 지시 없이 간호사 단독으로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에서 의협의 힘은 이 정도다. 간호사 수의 절반도 되지 않는 의사는, 정부의 판단 근거까지 좌우지하고 있었다. 거기다 간호법 통과는 민주당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비판이 있다. 윤석열 당시 대선 후보의 <공약 위키> 간호 파트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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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 윤석열의 <공약위키> 간호파트
 
첫 번째 줄에, "간호법 제정 추진"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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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여기서, 의협은 반발한다. <공약 위키>는 진짜 공약집을 발표하기 전, 선대위 검토로 정리된 일종의 플랫폼이었다고. 놀라지 마시라. 국민의 힘에서 반박한 것이 아니라, 의협에서 주장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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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회사진취재단>
 
2022년 1월, 윤석열 후보는 간호협회를 방문한다. 간호사들의 근무 환경 실태를 점검하기 위함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간호사들의 헌신과 희생에 국민과 정부가 합당한 처우를 해주는 것이 바로 공정과 상식이다."
 
그리고 간호법 제정의 내용이 담긴 정책 제안서를 받아 든다. 다시 말한다.
 
"잘 검토해서 간호사들의 숙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간호사의 지위도 명확히 하겠다고 약속했다. 든든하다. 하지만, 간호법 제정을 공약집으로 내지 않았으니, 그는 공약하지 않은 것이다. 윤석열식 공정과 상식에 따르면.
 
일단, 간호법은 한발 물러나게 되었다. 간호법 국회 본회의 통과를 위해, 국회 앞으로 모였던 간호사들은 다시 직장으로 돌아갔다. 아무런 수확 없이. 그래서 법 제정이 아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시작한다.
 
얼마 전, 집회가 있었다. 그것도 최대 규모의 보건의료노조 총파업. 간호사들은 일단, '간호법'은 제쳐 두기로 한다. 너무나도 먼 이야기라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그래서 "비교적" 도달하기 용이한 병원 측과 협상에 돌입한다. 하지만, 비교적이다. 이것도 만만치 않다.
 
다음 기사에서는, 간호법 폐기 이후, 다시 투쟁에 돌입한 의료진의 이야기를 다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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