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 이야기, 한 줄 요약
1. 심양 전투에 진 조선군이 포로로 후금에 잡혀 있는 상황. 조선이 후금에 보낸 국서의 내용 때문에 누르하치를 비롯한 후금 인사들은 분노했다.
2.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강홍립을 비롯해 (포로로 잡힌) 조선군 지휘부는 어떻게든 분노를 가라앉히고 오해를 풀려고 노렸했다.
3. 그럼에도 후금 측 고위급들은 포로들을 다 죽이고, 조선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4. 광해군은 명나라에 감시를 받고 있어, 후금에 대놓고 호의적으로 할 수 없는 상황을 전했다.
5. 후금의 화는 많이 풀렸으나, 후금에 밀리는 명나라가 초조해지며 조선을 더욱 쥐어짰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대신들까지 명나라를 도와야 한다며 광해군을 압박했다. 광해군의 외교 난이도는 극상인 상황이었다.
6. 광해군의 말을 전해 들은 후금은 조선군 포로 중 일부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그중 본 기사의 주인공 '이민환'도 있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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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집에 가는구나...
목숨을 건 포로 생활 끝에 돌아온 건, ‘변절자’라는 낙인
칙서를 대신한 광해군의 ‘구두 회답’은 상황을 반전시킵니다. 마침 명나라의 경제 봉쇄 정책으로 인해 식량난에 시달리던 후금도 더는 포로를 관리하기 힘들었죠. 근 1년 사이에 개인적으로 도망간 조선군 포로도 많았으나, 후금은 고위 관료가 아니면 그다지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조선 측의 긍정적인 반응도 얻었으니, 누르하치로서는 석방의 명분을 충분히 얻었죠. 드디어 이민환은 집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620년 7월 4일 - 『책중일록(柵中日錄)』
누르하치가 조선에 국서를 보냈다. 국서의 내용은 이랬다.
「도망간 여진족을 돌려보낸 것은 참으로 공정한 처사이니, 후의에 보답하고자 한다. 그래서 장수 3인과 종 7인을 돌려보내겠다.」
그에 따라 우리는 장수 다섯 명 중 세 명이 제비를 뽑아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와 정주목사 문희성, 순천군수 이일원의 이름이 나왔다. 후금 측 사람들이 우리에게 물었다.
“이제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어 기쁜가?”
“우리는 강화 때문에 오래 잡혀 있었는데, 화친이 되었음에도 두 원수를 구류하고 우리만 돌려보내니, 어찌 기뻐할 수 있겠는가.”
조선이 처해 있었던 또 하나의 외교적 현실은, 1:1 대응이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누르하치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능수능란한 외교를 펼치면서 조선과 명을 압박했습니다. 이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여진족을 돌려보낸 조선에게 화답하면서 은의를 쌓고, 동시에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를 남겨 두었죠. 훗날, 정묘호란이 벌어지자 강홍립과 김경서는 길잡이 겸 외교 사절로 이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조치는 후금은 조선에게 은의도 쌓고, 언젠가 있을 조선 침략을 위한 담보도 마련한 ‘꽃놀이패’였습니다.
돌아오는 귀국길,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들을 기억합니다. 압록강을 건너는 이민환의 마음도 그랬습니다.
1620년 7월 17일 - 『책중일록(柵中日錄)』
압록강을 건넜다. 처음 포로로 잡혔던 병사들이 거의 4천 명이었는데, 두 차례에 걸쳐 처형된 사람이 5~6백 명이었다. 또한, 개별적으로 도망친 자가 2,700여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도망쳐 온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지나온 산과 계곡에 굶어 죽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심하 전투의 결과는 1만 3천의 대군이 3천 명밖에 남지 않은, 조선사 최악의 참패 중 하나로 손꼽을 만합니다. 그러나 더 최악인 건, 살아남은 병사들에 대한 대우마저도 최악이었다는 점입니다. 조선 조정은 이 전쟁에 병사들을 끌고 갈 때는 국가를 내세워 지엄한 명령이라며 윽박질렀으나, 정작 병사들이 돌아올 때는 반겨주고 대우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엄히 단속하기만 했죠.
지휘관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비뽑기를 통해 간신히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민환은 돌아오자마자 탄핵을 받습니다. ‘오랑캐에게 굴복했다.’라는 죄명이었지요.
전하! 이민환을 탄핵해야 하옵니다.
출처-영화<광해>
하지만 이에 대해, 강홍립 등 조선 지휘관들은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다며 광해군에게 장계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1619년 7월 14일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죄인 강홍립·김경서·이민환 등은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전쟁에서 패하고도 즉시 죽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죽음으로도 변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적에게 항복하기를 빌었다는 말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털끝만큼도 굴복한 일이 없었는데, 무슨 근거로 그러한 탄핵을 받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논점은 이렇습니다. 조정, 특히 일부 강경파는 그들이 사전에 짜고 ‘투항’했다고 여겼지만, 강홍립 등의 당사자들은 전투 후 ‘강화’한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투항은 적의 신하가 되는 것이고, 강화는 전쟁 후 화해하는 외교 행위이니 엄밀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조정에서 이러한 인식을 가지게 된 건 광해군의 소극적인 파병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나, 너무나 일시에 1만 3천이라는 대군이 쓸려나갔다는 소식을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외교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명나라는 조선의 장수들이 후금에 ‘협조’하고 있고, 조선 또한 그것을 계기로 후금과 친교를 맺을 것이라는 의심이 진해지고 있었죠. 따라서 조선을 더욱 강하게 압박하여 한 번 더 파병 요구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었습니다. 조정은 명의 의심을 거두기 위해서라도, 이들과 ‘손절’하는 정치적 행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죠.
포로로 있다 온 이들을 내치셔야 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후금에 포로가 되었던 자들 사이에서는 배신이 난무하게 됩니다. 자신만큼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말이죠. 살아남아 먼저 조선으로 온 자들은, 비난의 화살을 회피하기 위해 아직 후금 측에 남아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보고를 연이어 올렸습니다.
그렇게 조선은 미래를 대비한 인재를 쓰지 못했다
다시 이민환의 기록입니다,
『이응복, 황덕영, 황덕창은 함께 구금되어 있으면서도 망측한 일이 많았기에 일행이 모두 미워했다. 그런데 조선으로 도망쳐 온 후 날조하고 모함하는 데 여력이 없었다. 그들은, “좌영과 우영이 무너진 후 중영은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항복 절차가 누구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다.”라고 했다.
그때 황덕영은 중영장의 임무를 대신하고 있었는데, 만약 실제로 투항 절차가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강화’가 아니라 ‘투항’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발언을 이어갔다.』
- 월강후추록(越江後追錄) -
『월강후추록(越江後追錄)』은 이민환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부당하게 비난받은 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글인데요. 여기서 대체로 ‘강화’가 어떻게 ‘투항’이 된 것인지에 대한 은유가 나옵니다.
당시 조정 대신들은 정치적·외교적 이유로 이들의 행위를 투항으로 규정하고, 처벌하는 데 한목소리를 냈습니다. 특히, 군량 보급에 실패한 박엽은 이민환을 강하게 비판했죠. 이를 막아주던 건 오직 광해군뿐이었습니다.
광해군의 방어에도 불구하고, 조정 대신들은 먼저 조선으로 돌아온 하급 지휘관들을 압박하여 ‘강홍립 투항설’을 더욱 강화해 나갑니다. 하급 지휘관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함께 싸웠고 적진에 남겨 둔 전우들을 ‘양심에 크게 털 나지 않는 선에서’ 팔아먹었죠. “투항 절차가 어디서 나왔는지 난 모르겠다.”라는 말은, 현장 지휘관이 ‘그것은 강화가 아니라 투항이었습니다.’라고 증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정이 이러니 세상 사람들의 뜬소문도 더욱 괴랄해져 갔습니다.
글씨... 이민환이가 어쩌구저쨌다구 하더라구~
『내가 살아서 돌아왔을 때 어떤 자들은 “머리를 깎고 오랑캐 옷을 입고 있다.”라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포로로 있어도 절개를 잃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자들은 “돌아오는 길에 평양에서 기생과 함께 노래판을 벌였다.”라고 떠들었다. 어떻게 소문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는가!』
- 월강후추록(越江後追錄) -
이민환은 열심히 항변해 봤지만, 이미 사람들의 ‘확증 편향’은 단단히 굳어 있었습니다. 훗날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이민환은 이괄의 난 · 정묘호란 ·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마다 왕과 국가를 위해 헌신했습니다만, 그때마다 사람들은 이런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민환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고도 살아있는 자이니, 그를 쓰시지 마소서”
아무리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국가에 충성해도, 평생 ‘변절자’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패권 다툼이었던 사르후 전투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조금만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명나라의 패전을 예견하고도 남았죠. 명은 지휘체계도, 군사의 숙련도도, 장비도, 작전 계획도 모두 엉망이었습니다. 반강제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의 군인(백성)들만 타지에서 귀중한 목숨을 잃었죠.
이민환은 모두가 기피하는 이 원정에 동참하면서, 자신의 사적 견해를 최대한 줄인 채 ‘기록관’으로서의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엄혹한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조국에서 들려오는 자신들을 향한 비판을 들으며, 꿋꿋이 자신의 직분을 다 했습니다. 책임 있는 자들이 하나둘 도망가는 상황에서도 그는 주어진 책임을 다 짊어지고자 했죠.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돌아온 건, 멸시와 핍박뿐이었으니까요. 아무리 일해도, 아무리 성과를 내도, 그의 항변은 가족과 친구 외에는 변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조선은 현장 경험이 풍부한 인재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됐죠.
우리는 때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립니다. 우리가 했던 최선, 우리가 택한 최선, 그 모든 것들이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죠. 이민환은 최대한 객관성을 지키며 썼던 일기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오해를 넘어선 혐오에 대응하기 위한 글을 따로 지어야만 했습니다. 언젠가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주는 후손들이 등장할 거라 믿으면서요. 그의 처절했던 포로 생활, 그리고 통분했던 남은 생애를 기억하며, 평화를 지키는 것이 곧 국가뿐 아니라 그저 묵묵히 자신의 밥벌이를 하면서 살아가는 개인의 존엄함까지도 지키는 것임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참고문헌
(1) 이민환 저·중세사료강독회 역, 『책중일록』 (서해문집, 2014)
(2) 박경선, 「역주 책중일록」, 전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5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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