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 같던 점심
동분이 야채 장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건 2008년, 48살이었다. 이 식당 저 식당 떠돌다 마땅치 않아 관두고, 파출부로 부잣집 다니며 청소해 주던 때였다.
“이불 장사 다니면서 알게 된 노점 상인들끼리 부부 동반 계모임을 했었어. 야채, 도자기, 생선, 원목, 우리까지 다섯 팀이 했지. 그중에서 야채 언니가 남편이랑 아파트 장터 다녔었거든. 하루는 계모임에 갔더니만 직원 구한다고, 파출부 그만하고 자기들 따라다니면서 야채나 팔라고 하더라?”
언니, 동생 하며 한 달에 한 번 만나 식사하던 야채 ‘언니’와 야채 ‘사장’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장사야 물론 10년 가까이했지만, 야채 장사는 당연히 처음이었다. 시작하고 며칠 좀 헤맸다. 매일매일 오르락내리락하는 야채 가격도 헷갈리고, 때마다 신선도가 다른 야채는 판매하는 요령도 달랐다.
“그랬더니만, ‘이불 장사를 그렇게 했으면서 이거 하나 제대로 못 팔어? 왜 이렇게 장사하는 게 어설퍼!!’ 하면서 면박을 팍 주는 거여. 그때 아차 싶더라고. 이래서 아는 사람이랑 같이 일하지 말라고 하는 건데. 원래부터 독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아휴~ 그 정도로 까다롭고 지독한 사람인 줄은 몰랐지. 결과적으로 내가 그 언니 따라다니면서 7년 동안 야채 장사했는데, 아무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실수하면 그렇게 사람을 면박하고, 소리 지르고, 짜증 부리고. 아휴. 직원이 나 포함해서 둘이었는데, 내가 7년 일하는 동안 같이 일하는 직원이 몇 번이나 바뀌었나 몰라. 장사도 물론 힘든데, 장사보다도 그 언니 때문에 못 버티는 겨. 그 성질머리 때문에.”
식사 시간도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12시간씩 일 시키면서 간식 한 번 없이 점심 한 끼 딱 주는데, 그 점심이 가관이었다. 맛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거라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동분을 서글프게 만들었다.
“야채 장사하는 사람이니까 집에 야채가 얼마나 흔하겄냐. 그 야채로 할 수 있는 요리는 또 얼마나 많고. 근데 매일 같이, 전날 저녁에 자기들이 집에서 끓여 먹고 남은 찌개를 싸가지고 오는 겨. 반찬은 딸랑 김치. 엄마도 살림하는 사람인데, 이게 오늘 끓인 찌개인지, 어제 끓여서 먹고 남은 찌개인지 구분 못 하겄냐? 자기들이야 자기들이 먹다 남은 찌개니까 상관없겄지만, 우리 직원들한테는 아니잖어. 그게 개밥이지, 안 그러냐? 그러니까 맛의 문제가 아니라, 한마디로 쫀심이 상하는 겨. 그래도 어뜩하냐?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는 거 아녀. 한 번은 내 동생 현희가 나 장사하는 데 왔었거든? 마침 내가 밥을 먹고 있었단 말여. 그 밥 보더니 현희가 놀래더라. 언니는 어떻게 저런 걸 먹으면서 일하냐고. 내가 얼마나 안쓰러워 보였나, 눈시울을 다 붉히더라고. 아휴, 내가 민망해가지고.”
출처 - 영화<고령화가족>
그 7년 동안 동분은 몸도 마음도 많이 상했다. 내 장사할 때와 남 장사 도와주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게 동분을 여러모로 지치게 했다. 똑같은 게 있다면 야채 장사 또한 길바닥 장사였다는 점. 아침저녁으로 야채를 트럭에서 내리고 올리는 것 또한 직원인 동분 몫이었다. 야채는 이불보다도 무거웠다.
“그때 엄마 허리가 다 아작난 겨. 야채는 한 박스가 무조건 20kg이거든. 아침마다 그걸 차에서 다 내려야 하니까 얼마나 힘들겄냐. 그런데다가 야채를 바닥에 쭉 진열해 놓고 팔았단 말여. 그러니 하루에도 허리를 수백 수천 번씩 숙일 거 아녀. 너도 그 야채 아줌마 본 적 있지? 엄마랑 겨우 5살 차이인데 그 언니 허리는 완전 굽었잖어. 그게 평생 야채 장사해서 그렇게 된 거라니까? 나도 야채 장사 계속했으면 그 언니처럼 됐을 겨 아마.”
하루 12시간, 일주일에 6일씩 일해서 동분이 받은 월급은 110만 원. 그만둔 게 2014년이니까 그리 먼 얘기도 아니다. 그 당시에도 110만 원 받는다고 하면 다들 놀랐다. 어떻게 겨우 그 돈 받고 그렇게 일하느냐면서.
참고로 2014년 최저시급은 5,210원이었다. 이를 기준으로 동분 월급을 계산해보면 최소 162만5,520원(5,210원X12시간X26일)은 받았어야 했다. 동분은 7년 동안 최저시급에도 한참 못 미치는 월급을 받았던 거다. 매우 당연한 얘기지만, 근로계약서 없었고, 복리후생 및 연차수당, 주휴수당 등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개밥’ 같은 점심 한 끼와 월급 110만 원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동분이 야채 장사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건 월급이 적어서도, 일이 힘들어서도 아니었다. 두 아들이 장성했고, 하여 그전보다 돈 들어갈 때가 줄었다. 그러는 사이 남편 송일영이 늙어버렸다. 그래서 그만뒀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도 야채 장사하고 있었을 거라며, 동분은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분은 여전히 그런 사람이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기어코 참아내는 사람.
2013년, 바다 놀러 가서 한껏 멋 부리고 찍은 사진. 동분 53살 때.
“엄마 야채 장사 그만둔 게 니네 아빠 딱 60살 됐을 때여. 이미 그전부터 여기저기 아프다고, 니네 아빠가 맨날 죽는소리를 하긴 했었지. 늙어서 혼자 이불 장사 다니려니까 힘도 들고, 챙겨주는 사람 없으니까 적적하기도 할 테고. 옆에서 마누라가 좀 챙겨줬으면 싶었던 겨. 그런데다가 그 몇 년 전에 니네 아빠가 뇌경색이 살짝 왔었잖어.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양반인데, 혼자 장사 다니다가 쓰러지기라도 해봐. 아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 그리고 니네 아빠가 언제 때 됐다고 밥 챙겨 먹는 사람이냐? 장사 안되면 안 된다고 굶고, 장사 잘되면 바쁘다고 굶고. 안 봐도 뻔햐~ 밥은 안 먹고 믹스 커피나 홀짝거리고 담배나 뻐끔거리고 앉아 있을 거 아녀. 그래서 그만둔 겨. 니네 아빠 때문에.”
야채 언니에게 이만저만한 사정을 설명하고 그만뒀다. 며칠 뒤 전화가 왔다. 집에 한 번 오라는 전화였다. 그래도 7년이나 일했으니, 퇴직금 좀 주려나 보다 하고 갔다. 지독한 거야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 100만 원까지는 기대도 안 했다. 그래도 50만 원은 주겠거니 싶었다. 봉투에 든 건 만 원짜리 10장이었다. 동분은 믿기지 않아, 그 10장을 세고 또 세어봤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장이었다.
“같은 길바닥 장사였어도 이불 장사랑은 차원이 달랐지. 노점상 하면서 직원을 둘이나 쓰는 게 쉽냐? 그 정도로 장사가 잘됐단 말여. 그 언니 집이 얼마나 넓었다고. 아마 돈 무쟈게 벌었을 겨. 그런 사람이 7년이나 일한 직원한테 퇴직금으로 10만 원이 뭐냐, 10만 원이. 그렇게 넓은 집에서 10만 원 든 봉투 받아 나오는데 진짜로 없던 정까지 뚝 떨어지더라. 요즘도 엄마가 허리 때문에 고생하잖어. 아휴.”
회사 생활 한 번 해본 적 없는 동분은, 그때 인생에서 처음으로 퇴직금이라는 걸 받았다. 10만 원이었다. 그와 함께 만성 요통을 얻었다.
퇴직금 관련 법률을 보자면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제8조(퇴직금제도의 설정 등) ① “퇴직금제도를 설정하려는 사용자는 계속근로기간 1년에 대하여 30일분 이상의 평균임금을 퇴직금으로 퇴직 근로자에게 지급할 수 있는 제도를 설정하여야 한다.” 및 「근로기준법」 제2조(정의) 제6호 “평균임금이란 이를 산정하여야 할 사유가 발생한 날 이전 3개월 동안에 그 근로자에게 지급된 임금의 총액을 그 기간의 총 일수로 나눈 금액을 말한다. 근로자가 취업한 후 3개월 미만인 경우도 이에 준한다.” 등이 있다. 근로계약서 한 장 없이 일했기에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관련 법률을 근거로 한 번 계산해보자면 동분은 당시 퇴직금으로 최소 770만 원(110만 원X7년)은 받았어야 했다. 2014년 최저임금 기준으로 하면 자그마치 1,137만8,640원(162만5,520원X7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쌔가 빠지게 일한 몸뚱이
동분에게도 물론, 꿈은 있었다. 어릴 땐 문학도를 꿈꿨고, 나이 먹은 후엔 유치원 교사를 꿈꾸기도 했다.
“엄마가 옛날부터 아기들을 무쟈게 좋아했거든. 왜 그런 사람들 있잖어. 타고나길 아기들 예뻐하고 같이 놀아 주는 거 좋아하는 사람. 엄마가 딱 그런 사람이여. 니네 형수랑 같이 요섭이, 민설이(큰아들 주성의 자식들) 키울 때도 엄마가 동화책 얼마나 많이 읽어줬다고. 아무튼 20대 때는 그런 생각도 했었지. 형편이 좋아서 배울 기회가 있었으면 그 뭐여. 유아교육과라고 하나? 그런 과 졸업해서 유치원 선생 했으면 참 잘했을 텐데, 하는 생각. 근데, 그건 그야말로 꿈이었고. 스물둘에 결혼해서 먹고살기 바쁜 인생이었는데 뭘. 다시 태어나면 공부 열~심히 해서 한 번 도전해 볼까? 호호호.”
아이들이 좋아 유치원 교사를 꿈꿨다던 동분. 정작 동분이 공부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요양보호사 자격증 공부였다. 때는 2008년, 동분이 야채 장사 아르바이트를 막 시작한 즈음이었다. 자격증 따두면 나중에 분명 쓸모 있을 거라는 지인 말에, 동분은 학원을 찾았다.
2008년, 정부는 고령화 사회를 대비해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를 도입했다. 이와 함께 요양보호사 제도를 시행했다. 초기엔 인력 확보를 위해 일정 기간 소정의 교육과정만 이수하면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10년 1월, 노인복지법 제39조의2(요양보호사의 직무‧자격증의 교부 등) ②를 개정하면서 요양보호사교육기관에서 교육과정을 마치고, 요양보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말도 말어. 엄마가 자격증 딴다고 1년이나 고생했다는 거 아니냐. 작업복 입고 땀 삐질삐질 흘려가며 야채 팔다가 퇴근하면 저녁 8시여. 그럼 밥도 못 먹고 부랴부랴 학원으로 가는 겨. 죙일 땀에 쩔었으니 얼마나 거지꼴이겄냐. 창피하니까 학원 화장실 가서 옷만 대충 갈아입고 야간반 수업에 들어갔었지. 수업 끝나고 집에 오면 밤 10~11시. 그제서야 저녁 먹고, 다음날 또 8시까지 출근하고. 그때 엄마가 오십 가까웠으니까 피곤하지 왜 안 피곤했겄어. 더군다나 안 하던 공부를 하려니까 죽겄더라고. 호호호. 나중엔 실습한다고 한 달 동안 일요일마다 요양원 가서 노인들 케어하는 것도 배웠어~! 원래 1년이나 걸릴 게 아닌데, 엄마가 일하면서 학원 다니다 보니까 이래저래 오래 걸린 겨.”
야채 장사 아르바이트 그만두고 남편 송일영 따라다니며 다시 이불 장사한 건 2년 정도. 날이면 날마다 죽는소리하는 송일영 걱정돼서 따라나서긴 했지만, 이번엔 동분이 죽을 판이었다.
“아무튼 간에 엄마는 니네 아빠랑 안 맞어. 붙어있으면 그렇게 사람을 들들 볶아. 알지? 니네 아빠 성깔. 스트레스받아서 살 수가 있어야지. 그런 데다가 막상 둘 다 이불 장사에 매달리니까 생활이 쪼들리더라고. 그래도 엄마가 야채 알바하면서 100만 원 남짓 벌어서 용돈 쓰고, 공과금이랑 보험료 같은 걸 냈었는데, 그 돈이 없어지니까 생활이 안 되더라고. 그래가지고 2017년부터 다시 각자 벌기 시작한 겨. 니네 아빠는 혼자 이불 장사 댕기고, 엄마는 요양보호사를 1년 정도 했지. 원래는 바로 대학병원 청소 일하려고 했는데, 자리가 안 나는 바람에 요양보호사 하면서 자리 나길 기다린 거지. 그러다 자리 났다고 해서 2018년 5월부터 지금까지 줄곧 병원 청소하는 겨.”
2018년 대학병원 청소 일 시작하기 직전 58살의 동분.
동분이 대학병원에서 보내는 하루는 제법 바쁘다. 새벽 6시 30분부터 청소를 시작한다. 우선은 간호사실, 처치실, 약제실 등 사무 공간부터 쓸고 닦는다. 출근하는 직원들이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다음은 복도와 화장실. 긴 걸레 들고 다니면서 복도를 한 번 훑어낸 후, 화장실 청소를 시작한다. 화장실 청소엔 꽤 공을 들인다. 화장실만 봐도 그 건물의 청결 상태를 가늠할 수 있다는 게 동분 생각이다. 솔과 수세미로 변기와 세면대, 타일 바닥과 문손잡이 등을 꼼꼼하게 닦아낸다. 화장실 청소까지 끝내면 아침 8시 40분이다. 이때부터 20분가량 잠시 쉰다. 병실 청소가 남아있긴 하지만, 기상 전인 환자도 있고, 환자 아침 식사가 7시 40분부터라 아직 식사 중인 환자도 있다. 밥상머리에서 먼지 피울 순 없기에, 그 시간을 피하는 거다.
9시가 딱 되면 병실로 간다. 9시부터 입원 환자의 진료와 재활을 시작한다. 이 때문에 자리 비우는 환자가 더러 있다. 꼭 진료가 아니더라도 9시쯤이면 산책이나 가족 면회 등으로 왔다 갔다 하는 환자가 많다.
“이왕이면 한두 자리라도 비었을 때 청소하는 게 서로한테 편하잖어. 그리고 침대가 비어있으면 하다못해 이불이라도 한 번 더 털어줄 수 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그래서 병실 청소를 마지막에 하는 겨.”
누가 가르쳐 줬을 리 없건만, 동분의 청소 동선은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병실 청소까지 끝내면 11시 30분, 점심시간이다. 바로 이 시간이, 요즘의 동분에겐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후딱 밥 먹으면 12시거든. 그럼, 엄마까지 마음 맞는 아줌마 네 명이서 꼭 커피를 마시러 가. 대학병원이라 커피가 좀 싸.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1,500원이여. 그거 하나씩 시켜놓고 수다 떠는 겨. 그 30분이 참 별것도 아닌데, 엄마는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하다? 왜, 일하다 보면 이래저래 속상할 때가 있잖어. 청소 일이 그렇지 뭐. 그리고 꼭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남편이나 자식 걱정도 많고. 그 시간 동안 이런저런 얘기 하면서 스트레스 푸는 거여. 호호호. 그렇게 쉬다가 12시 반부터 4시까지 또 한 바퀴 돌면서 청소하고 퇴근하는 겨.”
“…….”
동분과 점심시간마다 커피 마시는 수다 떠는 친한 동료들. 가장 왼쪽이 동분이다.
남들 학교 다닐 14살에 짐 보따리 하나 싸 들고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동분의 운명은 이미 예견됐는지도 모르겠다. 젊어서는 공장에서, 결혼한 후엔 시댁에서, 또 30대부터 50대까지는 길바닥 장사꾼으로, 그 사이사이 신발 밑창 붙이는 부업을 하고, 고깃집에서 불판을 닦고, 식당에서 김밥을 말고, 찌개와 반찬을 서빙했다. 지금은 청소노동자로 살아간다. 스스로 표현했었듯, 동분은 “쌔가 빠지게 일한 몸뚱이”를 여전히 굴린다.
섬유공장 다니던 17살에 망가져 버린 코에서는 오늘도 콧물이 줄줄 흐르고, 재채기는 멈추질 않는다. 길바닥 장사하며 아작난 허리는 날이면 날마다 동분을 괴롭힌다. 무릎 연골도 닳을 대로 닳아, 요즘은 한번 쭈그려 앉았다 일어나는 것도 일이다. 그런 몸뚱이를 여전히 굴린다. 그런 인생이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마음 맞는 사람들과 커피 마시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며 웃는다. 그래서 아들인 나는 엄마에게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너무나 소소하게 느껴져서, 그 소소한 걸 너무나 소중하게 여겨서, 그래서.
2009년, 친척 결혼식에서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큰아들 주성(27살), 송일영(55살), 동분(49살), 작은아들 주홍(23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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