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사 (50)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로운 짝사랑은 왜 멈출 수 없는가
(51) 홍어 : 어머니는 더 이상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았다
(52) 제르미날 : 고급 아파트가 쓰레기로 넘쳐나길 바라는 이유
(53) 이반 일리치의 죽음 : 판사는 왜 의사에게서 자기 모습을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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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인간 실격』
출처-<민음사>
일본과 퇴폐
영화 한 편을 만들기 위해 일본의 거장들이 모였다. 일본 최고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작가 ‘무라카미 류’가 자신의 작품을 토대로 연출을 맡았고, 영화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사카모토 류이치’가 음악을 맡았다. 세계적인 일본의 현대미술가 ‘쿠사마 야요이’가 작중 인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제목은 ‘도쿄 데카당스’이다.
영화 ‘도쿄 데카당스’
이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며 동시에 음란하다. 도쿄의 1급 호스티스인 22살의 ‘아이(愛)’가 그녀의 고객들과 벌이는 SM(사도 마조히즘) 섹스가 중심 줄기이다. 그녀의 고객들은 야쿠자 두목, 졸부 등 다양하다. 아이는 그들의 요구대로 가죽 코르셋과 하이힐을 신고 네온사인이 빛나는 도쿄를 배경으로 묘한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팬티를 벗기도 한다. 일본 군국주의 시대 군가를 틀어놓고 성기에 바이브레이터를 삽입한 채 호텔방을 기어다니는 것은 예사이다. 그녀의 오줌을 받아 마시는 고객도 있으니 말이다.
‘옥쇄’, ‘카미카제’, ‘집단자살’, ‘궁성요배(천황 숭배)’, ‘멸사봉공’ 등, 뿌리 깊은 전체주의의 전통을 가진 일본 사회에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집단의 일원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개인을 드러낼 때는 자신만의 밀실에 있을 때이다. 그리고 그 밀실에서는 서슴없이 개인의 치부와 욕망을 드러낸다. 집단에 매몰된 개인이 찾은 해방구. 이것이 일본의 데카당스(퇴폐, Décadence)이다.
내가 익살꾼이 된 이유
출처-영화<인간실격>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 이름은 ‘요조’입니다. 저는 동북 지방의 시골에서 형제 많은 집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주 약한 몸으로 태어나 병치레를 자주 하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배고픔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누군가가 ‘배고프지?’하며 내 입에 무언가를 넣어 주면 ‘아아 배고파.’하며 받아 먹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아부였을 뿐입니다.
가족들의 식사 시간은 제 어린 날의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식사는 일종의 의식 같았습니다. 가족들은 말없이 엄숙한 얼굴로 밥알을 씹었고, 그것은 저에게 으스스한 느낌을 들게 했습니다. 방안은 어두컴컴했고, 저는 ‘인간은 왜 꼭 하루 세 번 밥을 먹어야 할까’란 생각을 하며 음식을 조금씩 입에 쑤셔 넣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도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혼자였고 나만 별난 놈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불안과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존재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짓으로 익살을 떨었습니다. 그것만이 저를 다른 사람과 간신히 연결해 줄 수 있었으니까요.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익살을 떠는 어린아이를 귀여워했습니다. 저는 늘 인간을 무서워하면서, 뭔지 모를 우울함과 긴장감 같은 건 가슴 속 작은 상자에 담아 두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오직 다른 인간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어린 익살꾼으로 살았습니다.
하녀와 머슴에게 순결을 잃으면서 저의 유년기는 끝났습니다. 어린아이에게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 중에서도 가장 추악하고 야비하며 잔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일을 당한 후에 그냥 힘없이 웃었을 뿐입니다. 인간의 특징 하나를 알았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도쿄로 떠났습니다.
호리키에게 배운 인간 공포증 극복의 방법
저는 미술 학교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제가 관리가 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도쿄의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입니다.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단체생활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교실도 기숙사도 비뚤어진 성욕의 쓰레기통일 뿐이었으며 ‘고교생의 기개’와 같은 말들은 듣기만 해도 닭살이 돋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제 익살마저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폐결핵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자이자 의원인 아버지가 출장 중에 이용하는 별택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별택 생활은 꽤 괜찮았습니다. 아버지야 어쩌다 올 뿐이었기에 대부분의 시간은 집을 지키는 노부부와 저, 이렇게 셋뿐이었습니다. 저는 슬쩍슬쩍 학교를 빼먹었고 나중에는 학교에 간다며 서양화가 ‘야스타 신타로’ 선생의 화방으로 가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몇 시간이고 데생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이윽고 저는 화방에서 어떤 미술 학도로부터 술과 담배와 창녀와 전당포와 좌익 사상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묘한 배합입니다만 사실입니다.」
저보다 여섯 살 많은 ‘호리키 마사오’, 그는 첫 만남에서 저에게 돈을 빌렸고, 그 돈으로 자기가 사겠다며 저를 카페로 끌고 갔습니다. 저는 차마 거절하지 못해서 따라갔습니다. 이것이 저의 첫 교우입니다. 저는 도회지의 진짜 건달을 만난 것입니다.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무서워서 마신 맥주이지만 몇 잔 들이켰더니 묘한 해방감까지 느꼈습니다. 인간 공포증이 심한 저였지만 저에게 좋은 도쿄 안내자가 생긴 것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호리키를 따라다니며 도쿄의 술집들을 누비게 되었습니다.
「술, 담배, 창녀,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는 사실을 저도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단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 소유물을 모두 팔아 치워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음지의 사람에게 어울리는 비합법 활동
내가 창녀들과 같이 지내는 일에도 흥미를 잃어 갈 즈음, 어느날 호리키는 ‘공산주의 독서회’란 비밀 연구회에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항상 최신 유행을 좇는 호리키의 허세 덕분입니다. 저는 유물론에는 수긍했지만, 그것을 통해 인간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거나 새싹을 보고 희망의 기쁨을 느끼거나 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모임에 빠짐없이 나갔습니다. 그것은 비합법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던 저에게는 비합법의 바다를 헤엄치다 빠져 죽는 편이 차라리 마음을 편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저는 제 특유의 익살로 무거운 모임의 분위기를 바꿨고 점점 더 인기 있는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그 단순해 보이는 사람들은 저를 동지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가 그들을 속인 셈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전 그들의 동지가 아니었으니까요. 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지하 운동 그룹의 분위기가 묘하게 편안했기에 그들과 어울린 것뿐이었습니다.
내가 그들이 시키는 일이나 심부름을 성실히 수행하자 그들은 점점 더 많을 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저는 중앙 지구인지 무슨 지구인지의 학교 전체의 마르크스 학생 행동대 대장이라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장봉기를 한다는 말에 작은 주머니칼(연필을 깎기에도 약해 보이는 칼)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 약한 몸 덕분입니다. 그래서 결국 도망쳤습니다.
「결국 도망쳤습니다. 도망은 쳤지만 기분이 좋을 리 없었고, 그래서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죽고 나는 살았다
그 무렵 아버지는 별택을 팔았고, 저는 하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송금받은 돈은 이삼일이면 다 떨어졌습니다. 술과 담배. 호리키 몫까지. 허구의 익살로 형과 누나들에게 돈을 부탁하는 전보를 연발했고, 호리키가 가르쳐 준 전당포도 부지런히 들락거렸지만 늘 쪼들려야 했습니다. 필경 저에게는 연고 없는 하숙집에서 혼자 ‘생활’할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돈이 부족해도 하숙방에 혼자 가만히 있는 것이 끔찍했기에 호리키와 싼 술을 마시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렇게 학업도 그림 공부도 포기한 채 살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지 이 년째 되던 해, 어느 연상의 유부녀와 정사(情死) 비슷한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운명을 바꿨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쓰네코(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저라는 인간은, 함께 정사를 기도한 사람의 이름조차 잊어버립니다.)’였습니다. 그녀는 카페의 종업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왠지 마음이 놓여서 익살 연기를 하지 않고 음산한 제 모습을 보여도 괜찮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창녀들의 품 안에서만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들이 명랑한 백치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쓰네코는 그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저에게 편안함을 주었습니다. 남편이 사기죄로 감옥에 있다는 그녀와 보낸 하룻밤은 저에게 행복하고 해방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침이 되니 저는 원래대로 다시 경박하고 가식적인 익살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상처 입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쓰네코와 헤어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호리키가 카페에서 쓰네코를 옆에 앉혀 놓고 키스를 퍼부을 때, 그 키스를 멈추며 쓰네코에게 궁상맞은 여자라고 말할 때, 그때 저는 쓰네코와 마주 보며 서글픈 미소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의 마음이 싹트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여자도 누웠고, 새벽녘에 여자 입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왔습니다. 여자도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 완전히 지쳐 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밤 우리 둘은 가마쿠라의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친구에게 빌렸다는 허리띠를 풀어 바위에 올려놓았고, 저는 망토를 벗어 그곳에 함께 두었습니다.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저는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날 창 너머로 석양에 물든 하늘을 보았습니다. 기러기 한 마리가 ‘여자’라는 글씨를 쓰며 날고 있었습니다.
여자들의 정부(情夫)로 살아가기
저는 고등학교에서 쫓겨나 아버지의 별택을 관리하던 ‘넙치’네 집 2층 삼 첩(다다미를 세는 단위) 방에 칩거하게 되었습니다. 고향에서는 제가 아닌 넙치에게 직접 돈을 송금했고, 넙치는 제가 또 자살 시도를 할까 봐 저의 외출을 단단히 금했습니다. 저는 삼 첩 방에서 낡은 잡지나 뒤적이며 백치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자살할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어느 새벽녘, 저는 넙치네 집을 탈출했습니다. 신주쿠까지 걸어가 품에 지니고 있던 책을 팔고 나니 갑자기 막막해졌습니다. 갈 곳이 없었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했지만 ‘우정’이라는 것을 한 번도 실감해 본 적이 없었고 모든 교제가 그저 고통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아사쿠사에 있는 호리키를 찾아갔습니다. 제가 호리키에게 받은 것은 ‘냉대’, 그것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정부(情夫)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시즈코(그것이 그 여기자의 이름이었습니다.)가 신주쿠에 있는 잡지사에 일하러 가면 저하고 시게코라고 하는 다섯 살짜리 계집아이 둘이서 얌전하게 집을 지켰습니다.」
그날 호리키를 찾아온 잡지사 여기자 ‘시즈코’를 만났습니다. 호리키는 그 잡지사에 그림을 그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삼 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다섯 살 된 딸 ‘시게코’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저를 마음에 들어 하길래 전 그녀의 정부(情夫)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만화를 그리는 일거리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저는 돈이란 걸 벌게 되었습니다. 제가 번 돈으로 담배를 사고 술을 마셨습니다. 주량은 점점 더 늘어갔습니다. 다시 호리키가 저를 찾아오기 시작했고 저는 그를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詞)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어느 날 밤, 방에서 시즈코와 시게코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문을 조금 열고 들여다보았습니다. 둘은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하얀 새끼 토끼를 쫓으며 놀고 있었습니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문득 나 같은 멍청이가 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행복을 망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이 착한 모녀의 행복을. 만일 하느님께서 나 같은 놈의 기도라도 들어준다면 진심으로 둘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문을 닫고 집을 나와 긴자로 향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저는 하느님조차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벌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순결한 어린 신부, 요시코
저는 다시 스탠드바 마담의 정부가 되었습니다. 그곳 2층에서 기거하며 손님 같기도 하고, 남편 같기도 하고, 친척 같기도 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싸구려 나체화들을 그렸고 매일 술을 마셨습니다. 세상은 저를 전혀 이상하게 보지 않았고 가게의 손님들도 저를 다정하게 대해주며 술까지 마시게 해 줬습니다. 저는 점차 세상을 조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저에게 술을 끊으라고 권하는 처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시코의 표정에서는 분명 아무에게도 더럽혀지지 않은 처녀 냄새가 났습니다.」
스탠드바 건너편에 있는 담배 가게 아가씨 ‘요시코’. 열일고여덟 정도 되는, 얼굴이 하얗고 덧니가 있는 순결한 처녀. 어느 날 저는 술에 취해 걷다가 담배 가게 앞 맨홀에 빠졌습니다. 저는 저를 치료해 주는 요시코를 보며 술을 끊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요시코에게 청혼했습니다. 요시코는 웃으며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다음 날 저는 또 대낮부터 술을 마셨고, 요시코는 저의 어린 신부가 되었습니다. 우린 결혼했습니다.
「서로 경멸하면서 교제하고 서로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이 세상의 소위 ‘교우’라는 것이라면, 저와 호리키의 관계도 교우였음은 틀림없습니다.」
다시 호리키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제가 술도 끊고, 만화도 열심히 그리고, 저녁 식사 후에는 둘이서 영화도 보러 가고, 또 화분을 사기도 하며 저를 믿어 주는 어린 신부와 살 때였습니다. 이 어린 신부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나도 차차 인간다운 존재가 되어서 비참하게 죽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달콤한 생각이 희미하게나마 들 때였습니다. 저는 호리키를 거절하지 못했고, 다시 그와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호리키, 둘은 닮았습니다.
「우리 방 위의 작은 창이 열려 있었고, 그곳으로 방 안이 보였습니다. 전깃불 아래 두 마리 짐승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찔어찔 현기증이 나면서 이 또한 인간의 모습이야, 이 또한 인간의 모습이야, 놀랄 것 없어 등등의 말을 거친 호흡과 함께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요시코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계단에 못 박힌 듯 서 있었습니다.」
잊히지도 않는 무더운 여름밤이었습니다. 돈을 빌려달라고 호리키가 찾아왔습니다. 우리 둘은 옥상으로 올라가 시궁창 냄새를 맡으며 소주를 마셨습니다. 요시코는 우리를 주겠다며 콩을 삶는다고 했습니다. 옥상 밑 2층, 거기서 다시 아래층 우리 방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그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요시코의 상대 남자는 저에게 만화를 그리게 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몇 푼 안 되는 돈을 주고 가는 삼십 세 전후의 무지하고 몸집이 작은 상인이었습니다. 호리키는 가버리고 저는 다시 옥상으로 올라가 혼자 꺼이꺼이 울며 소주를 마셨습니다.
칙쇼...
울다가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요시코가 삶은 콩을 수북하게 담은 접시를 들고 등 뒤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요시코와 저는 나란히 앉아서 콩을 먹었습니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인간 실격, 나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제 얼굴은 극도로 천박하게 변해갔습니다. 저는 아침부터 소주를 마셨고 이빨은 흐물흐물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소주를 사기 위해 춘화를 그려 밀매했습니다. 요시코는 저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며 늘 절절맸습니다. 술에 잔뜩 취한 날, 설탕물이 마시고 싶었던 날, 저는 DIAL 한 통을 발견했습니다. 디알, 수면제. 분명히 치사량이었습니다. 저는 천천히 물과 함께 한 통 모두를 입안에 전부 털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불을 끄고는 그대로 잠들었습니다.
저는 죽지 않고 삼일 뒤 깨어났습니다. 요시코는 제가 자기 대신 독약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전보다 더 절절맸고 웃음도 사라졌습니다. 저는 싸구려 술을 더 많이 마시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술 생각이 났습니다. 도쿄에 큰 눈이 내린 밤, 저는 갑자기 토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최초의 각혈이었습니다. 흰 눈 위에 커다란 일장기가 그려졌습니다.
「저는 그 약품을 손에 넣고 싶은 일념에 또 춘화 모사를 시작했고, 약국 부인과 글자 그대로 추잡한 관계까지 맺었습니다.」
구원처럼 저에게 ‘모르핀’이 나타났습니다. 이제 저는 알콜 중독자에서 모르핀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파는 것은 불법이라는 말에, 그것도 외상으로 사기 위해 약국 부인의 정부까지 되었습니다. 다시 춘화 모사를 시작했지만, 아무리 그려도 약의 사용량이 점점 늘었기에 약국 빚은 끔찍할 정도의 액수가 되었습니다. 약국 부인은 제 얼굴만 보면 눈물을 흘렸고 그러면 저도 따라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늘 밤은 열 개를 한꺼번에 주사하고 강에 뛰어들자’고 결심한 날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꾼 넙치가 호리키를 이끌고 나타났습니다. 호리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입원을 권했습니다. 저는 그 미소에 완전한 인생의 패배자가 되어 자동차에 태워졌습니다. 저는 의지도 판단력도 없는 사람처럼 그저 훌쩍훌쩍 울면서 두 사람이 시키는 대로 유순하게 따랐습니다. 요시코까지 포함한 우리 네 사람은 어두울 무렵 숲속에 있는 커다란 병원 현관에 도착했습니다.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요양원이 아니었습니다. 정신 병원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죄인이 아닌 미치광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저는 단 한 순간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석 달이 지났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큰형이 저를 데리러 와 시골에서 요양 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저는 진정한 폐인이 되었습니다. 삼 년을 어떤 시골집에서 보냈습니다. 형이 저를 돌보라고 붙여준 예순 살가량의 못생긴 식모에게 몇 번인가 이상한 방법으로 겁탈을 당했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느낀 진리는 단 한 가지,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남들처럼’이 아닌 ‘나처럼’ 살기 위해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모두가 알고 있는 우리 사회의 속담입니다. 삐죽 솟아난 모난 돌은 정과 망치로 두들겨 맞아 둥근 모양이 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튀지 말고 남들처럼 둥글게 둥글게 살라는 말입니다. 남들처럼 살라고 하는 것, 그것을 옳다고 여기는 것. 우리는 그것을 집단주의, 또는 전체주의라고 합니다.
사실 인류의 역사에서 ‘개인’이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돌과 몽둥이에 의지해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야 했던 원시 인류에게 공동체 생활은 곧 생존을 위한 필수적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은 원시 시대를 지나 중세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처벌이었습니다.
‘개인’이라는 개념에 대한 자각은 18세기 유럽, 계몽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길고 긴 신과 종교의 지배가 가져온 모순이 쌓이고 쌓여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때, 그때 계몽사상가들은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권리, 즉 인권의 중요성에 대해 자각하게 됩니다. 인간이란 곧 개인입니다. 한 인간에게서 종교를 떼어내고 인종을 벗기고 신분을 사라지게 하면 결국 남는 것은 오직 개인이기 때문입니다.
계몽의 세례를 받지 못하고 농경이 핵심 생활 양식이었던 동아시아는 여전히 강력한 집단주의 문화 속에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강력한 유교 문화를 토대로 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을 거쳐 식민지와 권위주의적 군사 정권의 지배를 받았던 우리 사회는 특히나 집단주의의 뿌리가 깊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학생들의 교련 모습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中 -
남의 옷을 입으면 불편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관계가 불편한 옷이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는 사회가 불편한 사회입니다. 이것의 이름은 폭력입니다. 집단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사회적 폭력입니다. 이 폭력에 맞서서 개인의 삶, 개인의 권리, 개인의 자유 의지를 지켜 나갈 때, 그때 나는 존엄한 개인,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 자격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中 -
‘남들처럼’이 아닌 ‘나처럼’ 살기에 많이 불편한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남의 눈에 비춰지는 삶’에 더 신경을 쓰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몇 살에는 자산이 얼마이어야 하고, 아이들은 언제부터 학원에 가야 좋고, 대학은, 차는, 집은, 결혼은......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을 내 인생입니다. 내 인생의 행복을 위해 ‘나처럼’ 사는 길을 생각해 봅니다. 힘들겠지만 ‘나’를 찾아야겠습니다.
20세기 초, 일본은 집단주의가 극에 달한 시기였습니다. 극에 달한 집단주의 광기는 군국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진화해 전 일본 사회와 일본인들을 쓰나미처럼 덮쳤습니다. 그 어떤 이견이나 저항도 용납되지 않았으며 젊은이들의 목숨은 ‘천황 폐하’와 ‘대일본제국’을 위해 버러지만 한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야 했습니다. 가슴에 폭탄을 품고 탱크를 향해 달려들었고, 비행기를 몰고 적의 군함에 자살 공격을 했습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 보이(좌)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우)
이 미친 시대는 원자폭탄 두 발로 끝났고 일본에서는 땅도 사람도 폐허가 됐습니다. 그때 ‘허무’라는 이름의 두 번째 쓰나미가 폐허가 된 그 자리를 덮쳤습니다. 예술가들, 젊은이들은 ‘퇴폐’로 그 허무를 채우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일본의 데카당스 문학입니다.
쉰다섯 번째 인생탐구는 일본 데카당스 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인간 실격’ 속 ‘요조’의 삶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자신의 뜻대로는 단 하루도 살지 못했고, 세상과 타인들에 맞춰보려다 끝내 실패한 인물입니다. 늘 자살을 꿈꿨던 전범국가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다섯 번의 시도 끝에 성공하여 서른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국 배우 ‘캐롤 버넷’의 충고로 글을 마칩니다.
캐롤 버넷
출처-<BIOGRAPHY>
"내 인생을 바꾸는 사람은 자신입니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어요."
(Only I can change me life, no one can do it for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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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기통신사업법 제 22조의 5제1항에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삭제, 접속차단 등 유통 방지에 필요한 조치가 취해집니다.
2.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청소년성처벌법 제11조에 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아동·청소년이용 음란물을 제작·배포 소지한 자는 법적인 처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4.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에 따라 청소년 보호 조치를 취합니다.
5. 저작권법 제103조에 따라 권리주장자의 요구가 있을 시 복제·전송의 중단 조치가 취해집니다.
6. 내부 규정에 따라 제한 조치를 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