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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박사학위가 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때때로 학술지에 논문을 기재한다. 그렇다. 나는 소위 말하는 '교수'다.

 

대학교수만큼 멀쩡한 직업도 없다. 존경받는지까진 모르겠지만, 어디 가서 내가 내민 명함을 보고 위험한 사람이라 경계 한다든가, 돈을 떼먹고 도망갈 것 같다는 불안을 느끼는 자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교수라서 그런지, 내가 하는 말을 사람들이 잘 믿어준다.

 

그리고 나에겐, 또 다른 내가 있다.

 

나는, 오타쿠다. 일본 애니메이션(아니메 アニメ)나 만화(망가 まんが)에 깊이 심취해 있으며 그 취향이 나의 정체성 한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무리 봐도 나는 사전적 의미의 오타쿠에 충족하는 사람이다.

 

겉보기에 멀쩡한 교수가 알고 보니 심각한 오타쿠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신이 내 강의를 듣는 학생이라면 이런 레포트 주제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에바 초호기는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늘을 나는 기계는 정말 하늘을 날 수 있을까?”

 

“왜 원펀치맨은 모기를 잡을 수 없나?”

 

어떤가. 혹시 흥미로운가? 듣자마자 가슴이 설레고 대뇌 전두엽에 불이 켜지는 느낌이 드는가? 그랬다면, 환영한다. 당신도 우리(?)와 같은 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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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오타쿠들

 

오타쿠는 어떤 사람들인가? 오타쿠는 일본어 ‘オタク’에서 왔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아니메나 망가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또는 광적인) 사람”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영어로는 ’nerd’나 ‘geek’이라는 표현이 가깝지만, 이 두 단어는 관심사가 아니메나 망가가 아니어도 사용할 수 있는 표현들이므로 정밀한 번역은 아니다. 최근에는 미국에서도 Japanimation(= Japan + Animation)에 푹 빠진 nerd나 geek를 ‘otaku’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결국 2021년에 Merriam-Webster 사전에 ‘Otaku’가 정식 단어로 등재도 되었다.

 

나는 내가 오타쿠라고 생각하지만, 가끔 나를 진정 오타쿠라 할 수 있는지 주저하게 될 때가 있다. 바로, 나보다 더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그렇다.

 

90년대 중반, 대학생이던 나는 대학로의 어느 카페에 매주 출석했었다. 그곳은 아니메 동호회 정모 장소였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아니메나 망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쉽지 않았다. 그 동호회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최신 정보의 원천이었다. 매주 상영회도 같이 하고 있었으니, 더없이 소중한 모임이었다. 거기서 많은 오타쿠들과 교류를 하거나 공동작업을 했다. 그중, 보통의 오타쿠 이미지와  꼭 맞아떨어지는 형님 한 분이 계셨다.

 

이 남자로 말할 것 같으면, 80년대 초중반에 한국의 텔레비젼 방송에서 방영한 마징가 제트나 태권 브이 등등, 애니메이션(당시에는 만화영화라고 불렀다)를 녹화한 비디오 테잎을 벽장 가득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스트리밍 서비스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에겐 그게 뭐 얼마나 대단한 건지 싶을 거다. 한번 상상을 해보시라.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소장하고 싶어서, 신문에 나온 TV 방송표를 확인하고, 미리 녹화를 할 공테잎을 준비하고, 텔레비젼 방송 시간에 맞춰 대기하고 있다가, 방송이 시작하면 비디오 데크로 녹화를 시작해(이때 광고부분을 스킵해야한다), 녹화가 끝나면 정성스레 레이블에 제목을 써서 비디오 테잎에 붙이는 작업을 해야, 하나의 만화영화 비디오 테잎을 소장하게 된다. 투입되는 돈과 노력과 정성을 생각하면 미친 짓에 가깝다. 그런걸로 벽장을 가득 채웠다는 이 양반의 덕력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아주 겸손하고 겸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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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니메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일본어에 능숙한 자들이 많았다. 학습동기는 단순했다. 아니메와 망가가 좋아서, 일본어로 된 원본을 읽고 보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망가책을 교재삼아 독학으로 공부한 거다. 개중에는 대학에서 일본어를 제2외국어 교양과목으로 수강하면서 쉽게 A학점을 챙기는 친구도 있었다. 이런 일본어 능통자들도 어떻게 읽는지 아리까리해하는 일본이름도(일본이름은 한자로 쓰고 지 마음대로 읽는다) 이 형님 앞에서는 아무런 저항을 못 하고 후리가나(소리를 읽는 법)을 까발리는 것이었다. 

 

이분이 진정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이라는 걸 깨달은 건 더 한참 후의 일이다. 후에 오카다 토시오가 쓴 오타쿠에 관한 전문서적 <오타쿠, 애니메이션 게임 영화에 미친놈들.>이라는 책을 읽고나서 알게 되었다 (애초에 이런 책을 읽고 있는 것 자체가 내가 오타쿠라는 방증일지도). 이 형님이 했던 녹화/수집 행위가 일본의 오타쿠 1, 2 세대가 했던 방식과 동일하다는 걸. 이 형님이야말로 찐 오타쿠였다. 그때 더 친하게 지내둘걸.

 

이 동호회에서 만난 선배 한 명이 어느 날 <건버스터>의 노리코를 그린 그림을 필자에게 보여주었다. 매우 예뻤다. 종이가 아닌 투명한 플라스틱 필름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이 선배님은 아니메가 너무 좋았던 나머지, 애니메이션용 물감과 셀지를 사서 애니메이터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걸 잘 그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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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내 고등학교의 1년 위 선배님이었다. 선배님은 어느 날 나에게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녀 배달부 키키”의 주제가 무엇인지 느닷없이 물어봤다. 평소 아니메를 보내는데 깊은 생각을 하지 않던 나는 “세상엔 착한 마녀도 있다?”라고 대답했다가, 아니메를 대하는 태도가 진지하지 않음에 엄중한 꾸짖음을 받았다.

 

그 동호회 회원 중에는 로보트 태권 브이의 창시자인 김청기 감독을 직접 만났다는 사람도 있었다. 자막 작업을 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들여서 당시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고사양의 컴퓨터를 꾸민 사람도 있었다. 오타쿠의 세계는, 넓고도 심오했다. 

 

오타쿠는 가까이에 있다

 

학생시절을 지나 모 회사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다. 거기에도 있었다. 오타쿠가.

 

회사는 전라북도 어느 간척지에 있었다. 미혼인 젊은 사원들은 회사 기숙사에 모여 살았다. 당시 나는 장거리 연애 중이라 덕질을 등한시하던 때였고(그렇다. 연애는 탈덕의 시작이다), 그러다 보니 이 선배님이 오타쿠라는 사실에 그닥 감흥이 없었다. “눼눼 그러시군요” 뭐 이런 정도..

 

처음 그의 방에 놀러 갔을 때의 경이로움은 잊을 수가 없다. 책상과 침대 주변에 가득 꽂혀있는 온갖 일본어, 한국어 만화책. 벽 쪽 텔레비젼 옆에 늘어선 각종 일본 최신 게임기들과 게임 타이틀. 그 옆으로는 게임들이 쌓여 있었다. 야바이…

 

자기 소장품을 열심히 소개하던 선배님이 난데없이 자기 옷장을 열어보라고 했다. 뭐지… 궁금한 마음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옷장 안에는 온갖 플라스틱 모형과 레진 킷들이 (물론 조립을 하지 않은) 그득히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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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는 2인 1실이었다. 때마침 곁에서 쉬고 있던 그 선배님의 룸메이트에게 이렇게 공간을 잠식당해서 불편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룸메이트도 자기의 옷장을 열어보라 했다. 룸메이트의 옷장에도 오타쿠 선배님의 수집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사람도 내가 만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오타쿠였다. <오타쿠, 애니메이션 게임 영화에 미친놈들>에 소개된 일본 오타쿠들의 전형적인 방을 회사 기숙사에 구현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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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워하는 나를 보고선, 방 주인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고향의 부모님 댁에 있는 자기 방과, 수도권에 있는 자기 형의 아파트에 있는 방 하나도, 지금 이방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수집물로 꽈악 채워져 있다고. 과연 내가 이런 자들 앞에서 덕력이 있다고 해도 될지. 고개가 떨구어지는 순간은 이처럼 자주 찾아왔다.

 

한때 이런 진성 오타쿠들에게 치여, 내가  스스로 오타쿠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드래곤볼>의 스카우터(전투력 측정기)로 오타쿠력을 측정할 수 있다면, 나는 수많은 프리저나 셀 같은 급의 오타쿠들 사이에 껴있는 무천도사급 정도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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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이후, 내 스스로의 덕력에 대해 인정하기 시작했다. 보통 나이가 들면 이런저런 이유로 탈덕을 한다고 하는데, 나는 반대로 주변의 사람들에 비해서 확실히(?) 남다른 덕질을 하고 있었다.

 

무천도사도 에네르기파를 쏠 줄 알고, 드래곤볼 초반 천하제일무도 대회에서 손오공을 이긴 적이 있다(물론, 아직 어린 손오공이었지만). 그래서, 생각했다. 나는 일반인계(係)와 오타쿠계의 경계 즈음에 있다고. 위대한 과학자이자 연금술사였던 뉴턴의 말을 살짝 빌리자면,

 

 “나는 오타쿠의 오의(奧義)가 가득한 거대한 바다가 펼쳐진 해변에서 노니는 아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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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 어인 일인지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교수로서의 경력이 늘어나면서, 되려 오타쿠력도 점점 더 깊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 인정한다. 난 내 취미에 진지해지기로 했다. 난 오타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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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 교수의 사무실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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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지하실 한쪽 벽을 차지한

오타쿠 교수의 프라모델 수집품들

 

자동차는 못 고칩니다

 

나는 미국 중부의 한 주립대학에서 교육과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교수가 되는 것은 하늘이 점지해 준다고 하던데, 운이 좋았다. 단 한 번의 온사이트 인터뷰 기회가 있었고 오퍼를 받아서 교수가 되었다. 현재는 정년 보장을 받은 부교수다. 빡세기로 유명한 미국의 정년 심사를 어찌저찌 턱걸이로 통과한 것을 보면, 나름 운빨이 좋은 듯하다.

 

내 전공은 기계공학이다. 어려서부터 로보트 아니메를 좋아했고(우주세기 건담은 인생의 진리), 과학에도 관심이 있었다. 장래 희망을 묻는 질문에 언제나, 로보트 공학자나 어떤 과학 분야의 연구자라고 답했다. 현재 공학 교수로서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니, 어릴 때의 꿈이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중학생 시절부터 하늘을 나는 기계, 즉, 항공기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고등학생 시절 기계공학에 대해 알게 되었다. 대학을 입학할 때 전공으로 기계공학을 선택하면서, 결국 평생 동반자가 되었다. 기계공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서 기계공학 관련한 직장에서 연구원으로 일을 한 이후에, 도미하여 기계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는 기계공학 교수로 일하고 있으니, 인생의 절반 이상을 기계공학과 함께 한 삶을 살고 있다.

 

나를 포함한 기계공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으레 듣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자동차 고칠 줄 알아요?”

 

물론, 기계공학이 자동차나 기계장치를 설계하고 생산하는 데 매우 중요하지만, 아쉽게도 자동차를 고치는 방법은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배우지 못했다. 기계공학 교과과정에 자동차 수리에 대한 과목이 없었다.

 

기계공학에 관한 이런 선입견은 아마도 이름 자체에서 유래할 것이다. 기계공학을 영어로 하면,

 

Mechanical Engineering

 

이다.

 

여기서 Mechanical이라는 단어를 Machine, 즉 기계(機械)의 형용사형처럼 생각해서, Mechanical Engineering을 ‘기계에 관련한 공학’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일반적이지만, Mechanical Engineering의 Mechanical을 Mechanics, 즉 “역학”의 형용사로 생각해서, Mechanical Engineering을 역학에 기반한 공학이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다. 나도 이쪽 의견에 더 공감하는 편이다.

 

역학(力學)이란 아주 쉽게 말하면, 그 이름처럼 힘에 관련한 과학이다. 물리학을 공부한 적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물리학 교과서가 언제나 속도, 가속도, 힘의 균형, 아이작 뉴튼의 법칙 등으로 시작하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 그 부분들이 역학이다.

 

그래서인지, 대학 과정의 기계공학 교과과정에는 역학이란 단어가 들어간 과목들이 많다. 정역학(statics), 고체역학(solid mechanics), 동역학(dynamics), 열역학(thermodynamics), 유체역학(fluid mechanics) 등. 이 과목들은 보통 대학 3학년까지 배우게 되는 기초과목들이고, 이외에도 역학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과목이 더 있다.

 

이미 독자들은 이 과목들의 영어 이름에 mechanics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가 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눈치가 좀 더 빠른 분이라면 기계공학자들이 반드시 자동차를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겠구나.. 까지 도달했을 것이다. 맞다. 기계공학과 교수여도 차 퍼지면 발 동동 구르면서 보험 불러야 하는 건 똑같다. 그리고 자동차 수리소에 가서 절대 기계공학 교수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기계공학의 기초 분야 중에서 유체역학을 연구하며 먹고 살고 있다. 유체역학(流體力學)은 유체, 즉 흐르는 물질(액체나 기체)에 관련한 역학이다. 액체나 기체의 흐름은 자연계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장치들에도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면, 우리는 매일 물을 마시고, 들숨과 날숨을 통해 공기를 허파로 빨아들이고 내뱉고 있으며, 심장은 한 번도 쉬지 않고 혈액을 아주 복잡한 혈관의 네트워크를 통해 흘려보낸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항상 공기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공기의 흐름을 일으킨다. 자동차 엔진에는 연료와 공기가 섞여 연소실로 들어가고, 연소 가스는 엔진으로부터 나와 기다란 파이프를 따라서 공기 중으로 나가게 된다. 배는 부력이라는 힘 때문에 물 위에 뜰 수 있고, 비행기는 양력이라는 유체역학적 힘 때문에 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흐름에 대한 분야이기 때문에 유체역학은 기계공학뿐만 아니라, 물리학, 수학, 화학공학 등 다른 과학, 공학 분야에서도 가르치고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유체역학이 기계공학 전공 학생들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과목이다. 내가 유체역학을 처음 배운 때를 되돌아봐도, 같이 수업을 듣던 200명 정도 친구들 중에 이 과목에 흥미를 느끼던 학생은 몇 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소수의 학생들이 대부분 한국이나 미국에서 교수가 되었다. 

 

아마도 액체나 기체의 흐름이니 그 흐름 속의 힘이니 에너지니 하는 말들은 학생들에게 뜬구름 잡는 얘기일 것이다. 이렇게 유체역학에 흥미를 못 느끼는 학생들을 위해서, 수업 중에 아니메나 망가에서 찾은 예를 쓰기 시작한 것이 나의 “프로페서 오타쿠”로서의 삶의 시작이 되었다.

 

프로페서 오타쿠의 탄생

 

아니메나 슈퍼히어로물의 전통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자. 로보트 아니메에는 주인공 로보트를 발명하거나 이후에 관리하는 박사들이 대부분 등장한다. 마징가 제트에는 카부토 박사, 로보트 태권 브이에는 김 박사, 게타 로보에는 사오토메 박사, 건담에는 레이 박사, 에반게리온에는 아카기 박사. 슈퍼히어로 쪽에도 꽤 유명한 교수님이 있다. 엑스맨 시리즈의 프로페서 X.

 

이 박사님들이 어느 학교에서 어떤 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는지는 대부분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어쨌거나 콘텐츠의 단골 캐릭터인 무슨무슨 박사나 교수가 덕질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건 딱히 어색한 부분이 아닐 거라 믿는다.

 

내가 “프로페서 오타쿠”가 된 이야기의 시작은 1954년 판 영화 <고지라(ゴジラ)>였다. 어떤 이유로 그날 밤에 고지라를 보게 되었는지는 기억 나질 않는다. 중요한 건, 이 오래된 흑백영화에서 고지라가 처음 바다에서 나올 때,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대한 괴수가 물속에서 나오거나 물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고지라로부터 떨어지는 물의 움직임이나 고지라 주변의 바닷물 흐름이 기대와 달리 사람이 물에 들어가고 나올 때의 그것과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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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고지라를 슈트 액터가 연기한 것이라, 직접 고지라 슈트를 입은 연기자가 물속에 들어가고 나왔기 때문에, 물의 흐름이나 움직임이 우리가 욕조나 수영장에서 보는 물의 흐름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수십 미터 크기의 고지라가 물에 들어간다면, 그때 일어나는 바닷물의 흐름은 마치 거대한 배가 가라앉을 때 나타나는 물의 흐름과 같은 느낌이 있어야 한다. 이 질문은 유체역학의 차원해석과 상사법칙을 통해서 답할 수 있다고 깨달아 버린 나는, 이어 ‘영화 고지라를 필자의 유체역학 수업에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여기서 차원해석과 상사법칙이 무엇인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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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디어를 처음 시도했을 때는 이미 학기의 중반을 넘어선 때였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유체역학에 흥미를 잃고 딴 짓을 하거나 졸고 있었다.

 

마침 차원해석과 상사법칙 부분을 가르쳐야 할 때가 되었다. 영화에서 고지라가 처음 등장하는 부분을 보여주고, 내가 영화를 볼 때 가졌던 질문을 학생들에게 물어봤다. 지루한 수업 중에 갑자기 옛날 흑백영화를 보게 된 학생들은 눈이 초롱초롱해졌다(‘뭐든 유체역학만 아니면 돼’ 이런 마음가짐이었을지도).

 

그때 부터 시작되었다. 괴상한 질문을 던지는 프로페서 오타쿠의 강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