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들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표’가 없는 곳은 어딜까? 바로 국회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의원 입장에서 보면 국회 사람들 중에는 잘 보여야 할 유권자가 없다는 뜻이다. 모든 의원들이 각자의 지역구가 있고, 스탭들도 저마다 그들과 공동운명체로 엮여있으니, 의원이든 보좌진이든 복도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나를 찍어줄 가능성은 0%이다. 그러니까 국회의원들은 동료 의원들의 눈치를 크게 보지 않는다. 모든 의원들은 다들 자신들이 노리는 유권자층이 있다. 의원들은 그들을 보며 정치를 한다.
요즘처럼 선거가 가까워져 오는 시기가 되면, 국회의원 눈에는 주변 사람들이 세 종류로 보인다.
1) 반드시 나를 찍어줄 사람
2) 반드시 나를 찍지 않을 사람
3) 이도 저도 아닌 사람
자신 옆의 동료 의원은 명확히 2번 부류다.
의원들이 국회에서 보여주는 행보는 이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여지는가에서 결정된다. 물론 그 정도의 전략적 판단도 하지 않는 의원들도 있긴 하다. 내가 경험 한 바, 다음 국회에서 그런 자들을 다시 만날 일은 없었다.
하나 더, 대한민국 국회의 초선 의원 비율은 보통 50% 내외다. 그 말은 다음 국회에서 현역 국회의원의 절반이 낙선된다는 뜻이다. 정치혐오를 조장하는 언론에는 늘 국회의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따지고 보면 국회의원은 4년 계약직일 뿐이다. 4년 후엔 50%의 확률로 자신의 직을 잃는다. 국회의원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가고 있다. 의원들의 뇌 구조 속엔 어떻게 하면 직을 지킬 것인가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만 하기에도 4년은 정신없이 바쁘다.
국회에는 스트라이커만 있다
다음 국회에서 재선의 확률이 50% 남짓이라는 점. 동료 국회의원이 자신을 찍어줄 확률이 0%라는 점. 두 가지를 고려해서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국회의원들끼리 협업이 될까?”
당연히 “NO”다.
정치인이 되기 전 다른 의원과 사적인 인연이 있거나 혹은 끈끈한 정이 있는 의원 관계를 제외하고는 협업을 한다는 건 극도로 어려운 일이다. 협업이라는 건 바꿔 말하면 내 것을 양보해야 하는 일이다. 재선이 절대 목표인 의원들의 유전자에는 그런 게 없다.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를 도와주는 것은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가 하는 일이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의 의정 활동은 기본적으로 개인플레이다. 자신만 돋보이면 된다. 도움이란, 계산기를 뚜드려 봤을 때 자신의 커리어에 전혀 손해가 되지 않는 선일 때나 가능하다.
아무리 같은 정당 소속에 같은 지역구 옆 동네인 갑/을/병/정 국회의원들끼리도 안 친한 경우가 훨씬 많다. 지역 발전을 위해 같은 지역구 의원들끼리 힘을 합치면 더 좋을 텐데도 그게 잘 안된다. 결코.
아이러니한 것은 같은 지역의 서로 다른 정당 의원들끼리는 오히려 손을 잡고 일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지역 발전을 위해 초당적으로 손잡고 일한다는 대의명분에도 좋지만, 결정적으로 차기 공천에 서로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정당의 경우 오히려 견제가 심하다. 이건 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공천과 관련돼 있어 좀 더 복잡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아무튼 국회의원들에게는 협업 DNA가 없다.
의원들은 종종, 방송 진행자들로부터 어떤 동료 국회의원이 일을 잘하는 거 같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국회의원들이 좋은 대답을 찾지 못해 가장 난처해하는 질문 중 하나다(이 질문을 잘하는 자로는 대표적으로 김어준 총수가 있다). 보통 자신과 캐릭터가 겹치지 않고, 경쟁 구도에 얽혀있지 않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가장 무난한 의원을 선택해서 칭찬한다. 자신의 정치적 득실에 관계없는 무난한 동료가 누군지 생각해 내기 위해, 그 질문을 받은 국회의원의 머리는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인다.
300개의 회사
의원들의 사정이 이러하니, 그를 따르는 보좌진들도 의원실 간에 협업이 이뤄지기 만무하다. 의원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지를 이어가야 하는 미션이 있다면, 보좌진들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서 밥줄을 이어가야 하는 사정이 있다. 내가 모시는 의원에게 다른 의원실보다 앞서 ‘단독’ 혹은 ‘특종’ 아이템을 만들어 드려야 한다. 다른 의원실이 먼저 같은 아이템을 치고 나간다면, ‘선수를 뺏겼다’고 생각한다.
특종을 터트린 옆 의원실을 부러운 눈치로 바라보는 의원들의 머릿속은 이렇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 보좌진들은 뭐 했나?"
"우리 의원실 역량이 부족한 건 아닐까?"
이때부터 의원실 회의에서 의원들의 가열찬 압박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국회의원들은 늘 질투가 많다. 의원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쪼인다고 좋은 아이템이 나오진 않는다. 그런데 어쩌겠나. 사정들이 그러한걸. 그렇게 보좌진들의 퇴근은 늦어진다.
협업을 하지 못하는 의원들과 보좌진들을 상수로 두고 정치를 이해해 보자. 여당일 때는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각자 할 일을 하면 되니까. 하지만 강력한 대여투쟁이 필요한 야당이 되면 사정이 다르다. 투쟁의 대오를 짜서 힘을 모아도 일이 될똥말똥하기 때문이다.
시계를 돌려보자.
대통령의 수능 난이도 발언, 김건희 양평 고속도로 문제, 잼버리 사태,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 해병대 채상병 사망사건, 홍범도 지우기, 서이초 교사 사망사건, 친일 외교
각종 현안들이 터져 나올 때, 누가 앞에 나섰는가. 돋보이는 의원들은 대개 딱 한 명뿐이다. 이슈가 올라와 있는 동안 그 의원들은 여러 방송을 돌며 스포트라이트를 확실하게 받는다. 인지도도 쌓고 지지자들이 일 잘한다고 열성적인 응원도 보내준다. 그래 봤자 그게 그 의원의 미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겠는가 싶지만, 그렇지 않다. 마음 급한 국회의원들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다. 21대 국회의 의원 정수는 300명이다. 그중 한순간이라도 돋보이는 기회를 잡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국회의원과 보좌진은 운명을 같이한다. 어떻게든 우리 의원이 돋보여야 하는 게 그들의 임무다. 의원 간 협업이 되지 않는 구조가 보좌진들 사이에서도 같이 적용되는 이유다. 그래서 흔히 국회의원실을 각각 독립된 300개의 회사라고 한다. 사실은 약간은 경쟁적 독립된 회사라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
교육위의 팀플레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 의원들이 합심해서 좋은 결과를 얻어낸 사례가 있다. 바로 교육위원회.
17대, 18대, 19대 20대 국회 상임위원회 중에 교육위원회는 오랜 교육 전문 보좌진들이 포진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들의 팀플레이가 얼마나 막강했는지, 국회 내에선 그들을 ‘교피아’라고 부르며 시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국회에는 18개의 상임위원회가 있고 상임위원회마다 나름의 전통과 문화가 있다. 교육 전문 보좌진들은 상임위원회를 옮겨 다니지 않고 한 상임위에만 오랫동안 포진하면서 협업 모델을 만들었다. 어떤 현안이 발생하면, 교육위원회 소속 보좌진들끼리 아이템을 공유하고 각자의 국회의원들이 본 무대에서 협업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2015년 국정감사로 돌아가 보자.
당시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최고 현안은 상지대학교 총장과 이사장을 역임한 김문기 총장의 사학비리였다. 김문기 총장의 독단적인 학교 운영은 사학비리의 종합선물 세트라고 불릴 만큼 시끄러웠다. 당시 상지대 학생회도 강력하게 총장 사퇴를 주장하기도 했었다. 당연히 김문기 총장은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되어 국회 국정감사장에 끌려 나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문기 총장은 이런저런 이유로 미꾸라지처럼 국회 출석을 미루고 있었다. 중국으로 출장을 간다는 둥 본인이 호흡이 곤란할 만큼 위중한 상태라 중환자실에 있다는 둥의 핑계를 대며 끝까지 국감장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때 교육위원회 보좌진 전체 카톡방에 누군가 아이디어를 냈다. 김문기 총장이 입원하고 있다는 병원에 급습해 보자는 것. 당시 야당 교육위 비서관들이 팀을 짜서 직접 병원을 찾아갔다. 김문기 증인이 멀쩡하게 정장 입고 외출했다가 병원으로 들어오는 핸드폰 동영상은 그렇게 촬영되었다. 곧장 교육위 의원실 모두에게 전달됐고 국정감사장에서 해당 영상이 재생되며 김문기 증언의 거짓이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 속기록을 보자.
안민석 위원
(패널을 들어 보이며) 지금 이 사진을 보시면 지난 교육부 국정감사 때 대한민국 사학 비리의 상징인 김문기 증인이 호흡이 곤란한 위중한 상태로 입원한 게 아니라 양복을 입고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진입니다. 김문기의 아들은 국감장에서 오후 4시에 부친이 현기증과 호흡곤란으로 쓰러져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고 위증을 했습니다.
이 사진을 찍은 시점은 오후 7시 20분입니다. 병원에 양복을 입고 출현한 모습입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국정감사 증인 출석을 고의적으로 회피하고 국회를 기만하는 행태에 대해서 가장 엄중한 처벌을 위원장에게 요청한 바 있습니다.
유기홍 위원
제가 오늘 회의 벽두에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서 증인 또 청문회 관련되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 오전에 여야 간사 회의가 있었는데 증인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문기 증인 같은 경우는 원래 우리가 증인 신청을 해서 본인이 갑자기 병원 중환자실에 간다는 이유로 불출석을 했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확인국감 때 김문기 증인을 다시 불러야 마땅한데 새누리당 간사가 김문기 증인을 다시 부르는 데에 동의를 안 해 주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 여야 간에 합의해서 불렀던 사람이 좀 부당한 핑계를 대고 불출석한 것을 만약에 이런 식으로 봐준다고 그러면 앞으로 누가 증인 소환에 응하겠습니까?
박근혜 정부 국정교과서 추진 논란 당시에도 교육위원회 의원들은 젊은 비서관들과 노련한 보좌관들이 함께 국정교과서 TF를 급습하기도 했다.
<출처 - 링크>
최순실 국정농단의 전말이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처음 드러나기 시작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정유라의 입시 비리 최순실 박근혜의 미르재단, k재단 비리 등 굵직굵직한 아이템이 교문위에서 계속해서 터져 나왔던 것은 위원들과 보좌진들의 협업 플레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위에는 지금도 20년 이상 교육위원회에서만 일하는 보좌진들이 아직도 몇몇 포진하고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협업의 전통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 터지는 사안들이 워낙 상상을 초월하다 보니 국무위원 후보자 자녀의 학폭 문제 정도는 아무런 타격감이 느껴지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원래 발목 잡기 스킬은 야당의 것인데 매번 여당의 발목 잡기로 일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는다. 답답하다. 그 와중에 교육위는 정순신 변호사 아들 학폭 문제를 민주당 단독으로 청문회를 통과시켰다. 나는 이걸 교육위의 강성 보좌진들의 숨은 노력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출처 - 링크>
정치에 정답은 없다. 훌륭한 인물의 뛰어난 개인기가 필요한 때도 있고, 치밀한 팀플레이로 큰 산을 넘어가야 할 때가 있다. 중요한 건, 지금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화력을 집중해야 할지를 모색해 볼 수 있는 여유와 전략이다.
국회의원이 배지를 이어가는 것, 물론 중요하다. 좋은 정책일수록 긴 호흡이 필요하고, 이전 국회에서 경험이 더 좋은 의정활동에 꼭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멀리 보는 시야가 필요하다. 오늘을 이겨야 내일이 있다. 눈앞에 표에만 모든 신경이 쏠려있으면, 계속 진다. 의원 본인도, 정당도, 지지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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