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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의 본질은 무엇인가


민주공화국의 기본은 의회정치이고, 의회는 여당과 야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시스템 하에서의 야당의 본질은 무엇일까? 왜 저렇게 나누어 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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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유신 시대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다. 여당이 있되 여당이 아니었고, 야당이 있되 야당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투표를 통해 의회를 구성한 게 아니라 거의 종신집권 총통에 가까운 대통령이 만든 여당이 있었고, 민주주의를 하라는 서구사회의 압박에 못 이겨 흉내만 내도록 만들어 놓은 야당이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어야 하는 의원들 대신에 '유정회'라는 대통령 친위조직이 국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이를 민주주의라고 칭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가 지켜지는 사회, 민주 공화국에서의 야당의 본질은 무엇일까? 제대로 된 야당은 왜 존재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야당의 존재 이유


제대로 된 여당이라면 다수의 유권자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 즉, 이 사회의 다수가 지지하는 정당이 여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논리로, 제대로 된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야당이라면 소수, 그것도 다수가 원하는 사회 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바꿔야 한다고 지적하는 소수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아 만들어지는 것이다.


야당은 소수의 지지를 받기 때문에 야당이다. 소수의 지지를 받기 때문에 더 적은 의석을 배정받아야 하며, 더 적은 지지를 받기 때문에 국정을 책임지고 운영하기보다는 현재 운영되고 있는 국정의 문제점을 찾아 지적하고 고치도록 요구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가지게 된다.


다수의 지지를 받은 여당이 국정을 운영하면서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게 된다면 그 사회는 조만간 독재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소수에게 이를 지켜보고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감시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을 끊임없이 제시하는 역할을 주는 것,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하에서의 삼권 분립과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의회 구성의 묘가 지니는 위대한 가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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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에게 권한을 주되, 소수의 역할이 필수적인 시스템,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하에서의 다당제 의회가 가지는 복잡미묘한 가치이며, 그 안에서 야당의 존재 이유는 자명해진다. 이 사회의 건강성을 지키며, 새로운 가치들을 사회에 받아들이고, 여당의 시스템 유지 능력이 약화되었을 때 언제든지 대치해서 국정 운영의 권한을 받아 줄 수 있는 대안세력, 그것이 바로 민주 공화국의 의회에서 야당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정리하자면, 여당의 역할이 다수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획득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라면, 야당은 여당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다수의 유권자에게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일 것을 설득하고 그것을 통해서 사회 전체의 건강성을 높이는 것이 주어진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런 새로운 가치에 대한 설득이 다수의 공감을 받게 되면 여야는 역할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이상적인 의회정치는 일찌기 이 땅에 존재해 본 적이 없기는 하다. 덕분에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는 공허하겠지만, 그래도, 원칙은 원칙이기에 정리해 봤다.




대한민국의 다수는 누구인가


정확히 알 수 없다.


유권자들의 한 표 한 표가 충분히 동일한 가치를 가질 때, 그리고 그 유권자들의 투표 비율과 정당의 의석수 비율이 일치할 때, 그리고 선거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치러질 때, 지역 구도나 권력의 선거개입이 최소화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유권자들의 다수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그렇게 누가 다수인지, 다수의 의견은 무엇인지를 '선거'를 통해 확인하도록 되어 있는데, 선거 과정이 제대로 치러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다수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렴풋이는 알 수 있다. 부족하나마 300석의 의석이 전국에서 뽑히고 정당 비례로 선출되는 선거구조는 과거 유신 시대와는 달리 어지간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권력이 개입하고 정보기관이 개입하여 선거를 망가트리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국적인 여론조사의 결과와 선거의 결과는 대략 일치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는 여당인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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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도는 수십 년의 역사 속에서 거의 깨진 적이 없다. 심지어 대한민국 정치사가 낳은 위대한 거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집권기에도 민주당은 다수당이 되지 못했었다. 그때조차도 다수 의석은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그 계열의 정당, 친일과 개발독재의 유산에 토건과 경제성장의 신화를 그대로 유전자에 새겨 담고 있는 그 정당이 가지고 있었다.


비록 유권자들의 마음 속에 변화의 열망을 불러 일으키고 당선되었지만,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건방진(그들의 입장에서) 대통령을 탄핵하려던 의회의 오만이 극에 달했을 때, 분노한 유권자들이 딱 한 번 그들에게서 다수당의 지위를 빼앗아 버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난 뒤, 다수당의 지위는 또다시 그들에게 넘어가 버렸다.


이 정도라면 거의 틀림이 없다. 이 사회의 다수는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억울하고 화가 나는 일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제발 그래선 안 된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호소하고 있지만, 박정희의 유신 정권의 정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고, 우리 사회의 다수는 개발독재를 지지하며 분배보다는 성장을 지지하고 소수자를 보호하기보다는 다수의 부를 더욱 중시하고, 다수의 중소기업보다는 몇몇 재벌에게 부가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장 근본적으로는 물질만능주의, 천민자본주의, 간단히 말해서 배금주의를 숭배하는 천박한 유권자들이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는 괴물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현실은 딱 이 수준이다. 여기에 반론은 불가능한 일이다.




야당의 선택지


우리 사회의 다수가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한다면, 그 환경에서의 야당의 선택은 아주 단순해진다는 것을 금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정권의 획득을 우선시한다면, 우리 사회의 다수 유권자가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현재의 집권세력, 민정당으로부터 이어지는, 아니 그 이전에 박정희의 공화당으로부터 이어지는 개발독재 세력이 하고자 했던 일을 야당이 스스로 더 잘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여당 세력이 말로만 개발과 성장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을 강변하면 된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경제는 바닥으로 처박히고 있고, 성장률은 감소하며 수출은 마비되고 있음을 역설하면 된다. 우리는 더 성장시킬 수 있고, 우리는 더 소수자를 차별할 수 있으며, 우리는 더 물질을 숭배하는 집단이라고 역설을 하고, 당신들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 맹세하면 된다. 다수의 천박한 유권자들이 이에 동의한다면 새누리당을 대치할 수 있는 집권세력이 될 수도 있다. 이를 '권력 지향형 야당'의 선택지라고 명명하기로 하자.


그러나 왜 그래야 하는가?


해방 이후 70년간 우리 사회는 그 길로 달려왔고,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세계에서 보기 드문 경제성장을 이루어 왔지만, 그만큼 문화 수준은 천박해지고 세상은 더욱 각박해졌으며 자살률 최고, 출산율 최저의 사회를 만들어 버렸고 젊은 세대를 좌절시켰다. 그걸 이제 와서 더 빨리 계속하자고? 그렇게 지옥의 나락으로 이어지는 무한 경쟁의 세상을 향해 더 빨리 달려가자고?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그렇게 주장할 셈인가?


또 하나의 다른 길이 있다.


비록 소수지만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새로운 가치를 주장하는 유권자들이 있다. 인권을 존중하고 소수자를 보호하며 물질보다는 문화적 가치를, 경제규모의 성장보다는 지속 가능한 분배를 우선하고, 권위주의보다는 수평적 관계를 소중히 하고, 국제 사회 속에서 우리의 역할을 생각하며, 전쟁보다는 평화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가치를 역설하며 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개발지상주의자들을 설득하여 대한민국이라는 커다란 배에 탑승한 모든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새로운 가치들을 심어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길이다.


그 어렵고 힘든 길을 가다 보면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가치들에 동의를 하게 되고, 이 새로운 가치들에 동의하는 유권자들이 수가 더 많아진다면 야당에게는 자연스럽게 권력이 넘어오게 될 것이다. 이것을 앞서 설명한 '권력 지향형 야당'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가치 추구형 야당'으로 이름 붙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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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모두 정당한 야당의 역할이며, 현존하는 야당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당장의 정권획득인가? 아니면 느리고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이 사회의 확실한 변화를 이끄는 길로 가야 하는가?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당신이 원하는 야당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필리버스터에 감동하는 이유


그간 우리 사회의 야당, 현재 명칭으로 더불어민주당은 지속적으로 첫 번째의 길을 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많은 야당 지지자들이 답답해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명박근혜 정권 동안의 경제실적이 참담함을 보여주며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 이어지는 민주정권 10년간의 실적이 더 좋았음을 강변한다. 새누리당의 부패와 무능을 꼬집으며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다고 외친다.


심지어 전두환의 국보위에 쫓아가 부가세의 폐지는 곤란한다고 역설을 했던 김종인, 이 사회의 주류 경제논리의 상징인 그 김종인을 대표로 영입하며 그에게 선거 전반을 지휘해 달라며 전권을 위임한다.


그러던 와중에 새로운 가치, 인권과 평등과 분배와 지속가능성을 역설하는 소수의 유권자들은 심지어 '야당에게도 버림받는' 참담함을 느껴야 했다. 그 결과 환경을 중시하는 자들은 녹색당으로,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찾는 자들은 정의당으로, 더 나아가 확실하고 급속한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자들은 노동당으로 뿔뿔히 흩어져 갔다.


인권을 얘기하면 '씹선비질'로 몰렸고, 성차별은 SNS에서나 화제거리가 되고, 노동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노조원들은 성장 논리에 몰려 불평분자 취급이나 받으며 목숨을 걸고 굴뚝에나 올라가야 하는 세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수가 원하는 가치가 살아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심지어 경제논리만 따라가며 제2의 새누리당이 되고자 하는 걸로 보이던 더민주 안에 숨어 있던 다수의 초선 비례 의원들, 재선을 포기하고 컷오프 당하고 한 번 써먹고 버리는 소모품 취급이나 받던 그들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싹이 피어난 빈틈은 심지어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지금 통과시키려고 그렇게 난리를 치는지 이해하기도 힘들었던 '대테러방지법'이라는 괴물같은 법안이 느닷없이 직권상정이 되었고, 이를 저지하고자 누가 넣었는지도 모를 '필리버스터' 조항이 적용되면서 다섯 시간, 열 시간씩 무대를 독차지한 비례 초선 의원들의 연설이 시작된 것이다. 정의당 같은 소수정당도 거기에 합세했다.


그리고 그 연설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인권을 배우고 개인 정보의 소중함을 배우고 국정원의 일탈의 행적과 권력의 참담한 불법행위들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단지 시간끌기용의 수동적, 방어적 조항에 불과한 필리버스터, 요리법이나 읊고 사전이나 읽어 주는 것인 줄로만 알았던 필리버스터의 조항이 지구 반대편 한반도에 와서, 사라져 버린 줄로만 알았던 소수 유권자의 진보적 가치들이 논리 정연한 말의 향연으로 되살아나 수만 명의 가슴을 울리고, 밤을 새우며 화면 앞에 눌러앉아 그 긴 연설을 경청하도록 만드는 인류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해 버린 것이다.


외신들도 놀라 이에 대해 감동적인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충혈된 눈과 피곤한 몸으로 우리가 잊고 있었던 가치를 서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연설이 중계되는 화면 옆의 채팅창에는 놀라움과 감탄의 목소리가 빛의 속도로 스크롤 되기 시작했고,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의원들의 후원금 계좌는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이런 국회의원들이 있었다니, 우리가 그토록 경멸하던 국회에 이런 보석들이 숨겨져 있었다니 하는 감탄이 줄을 잇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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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제대로 된 말에 굶주려 있었다. 터무니없는 적반하장의 언사가 아니라, 정확한 자료에 근거한 제대로 된 주장, 논리 정연한 강연에 목말라 했으며, 우리 사회가 처한 정신적 빈곤을 채워줄 새로운 가치에 대한 강연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쏟아진 말의 향연은 우리 사회에 아직 희망이 있으며,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의원들이 저기 저렇게 감동적인 모습으로, 또는 처절한 모습으로, 또는 유쾌한 모습으로 서서 이 사회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람이 없던 것이 아니라 단지 저 사람들에게 힘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뿐이구나 하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는 작은 균열이었고, 새로운 싹이 비집고 나올 틈이었으며, 모든 것에 짓눌려 숨도 못 쉬던 수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숨 쉴 수 있는 숨구멍을 하나 뚫어주는 상황이었다. 이는 작은 반란이었고, 변혁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2016년 대한민국 의회에서 있었던 필리버스터는 이렇게 감동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감동 파괴자


수만 명의 젊은 유권자들이 받았던 감동은 그리 길게 가지 못하고 무산되고 만다. 그리고 그 파괴의 망치는 여당도 아니고 청와대도 아닌 야당의 내부에서 먼저 나오게 된다.


앞서 설명한 대로 이는 야당의 선택에 관한 문제였던 것이다. 집권세력의 길을 그대로 따라하며 우리가 더 잘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길로 가고 있던 야권의 주류들에게 있어 이 필리버스터라는 작은 반란은 매우 거추장스럽고 위험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들의 눈에 필리버스터는 거시적인 여론에 아무런 영향을 못 주는 찻잔 속의 태풍이었으며, 오히려 큰 틀에서 소위 중도 유권자의 의심을 사기 딱 좋은 위험한 불장난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기독교인들 앞에서 동성애 합법화는 우리 당론이 아니며 성적소수자들을 탄압하는 기독교인들의 입장과 우리의 당론은 한치도 다르지 않다고 강변하는 야당의 비대위원 박영선 의원의 눈에는 더욱 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필리버스터를 계속하기로 결정하는 의총의 결론 따위, 비대위를 이끌고 있는 김종인의 눈에는 아무런 힘도 없는 아이들의 불장난이었을 것이며, 뼈대가 약한 원내대표 이종걸은 이러한 김종인의 논리 앞에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녹아 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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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 한겨레


겨우 몇만. 그들에게는 무려 몇만이 아니고 겨우 몇만 이었다. 4천만 유권자의 0.1%에 불과한 겨우 몇만의 감동은 그들의 손익계산서에서는 누락되어도 좋은 작은 숫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필리버스터를 중단시켰다. 진짜 보기 드물게 타오르던 수만 명의 감동의 물결을 파괴해 버렸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겨우 몇만의 감동보다는 선거일정이 더욱 중요하며, 일부 소수 유권자의 주장보다는 다수 중도층의 안심이 더욱 소중했고, 인터넷 언론 찌끄러기들의 보잘것없는 영향력 보다는 입을 굳세게 다물고 있던 메이저 언론들의 역풍이 더 중요한 안건이었을 것이다.


더민주는 여당과 똑같은 길을 우리가 더 잘 갈 수 있음을 강변하며 잘못된 다수 유권자들의 눈에 들어 권력을 되찾아 오기 위한 '권력 지향형 야당'의 길을 선택했으며, 이 사회에 새로운 가치를 심어 뿌리내리게 하고자 하는 '가치 추구형 야당'의 길을 버린 것이다.


이는 비단 김종인과 박영선만의 결정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보여준 박영선 의원의 추한 무능은 아마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지만 말이다. 현실론이며, 다수의 의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정권 탈환을 가장 우선으로 간주하는 다수의 야당 지지자들 역시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가치를 얘기하는 사람들을 '진신류', '진보충'이라 매도하고, 그들에게 표를 주지 말라고 단속하는 야권 지지자들은 SNS 공간에서 너무나 흔하게 발견된다.


이렇게 그 짧은 시간 동안 싹이 텄던 그 감동적인 말의 향연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말의 향연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들, 앞서 필리버스터에 참여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냈던 '극히 일부의' 국회의원들은 바보가 되고 말았다. 아니 눈치 빠르게 선거운동 잘 한 약삭빠른 인간들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의 감동은 파괴 되었고, 사람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남아있는 의문


다 좋다. 모두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정권탈환이 급한지, 그렇게 급하게 되찾아온 정권으로 과연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다 준비가 되어 있다고 봐주도록 하자.


사실 우리는 그렇게 급하게 정권을 가져보고, 의회의 다수당을 가져본 적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 불과 십 년 전의 역사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정권을 찾아와야 된다고 외치는 것,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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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재의 집권세력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우리 사회를 과거로 퇴행시키고 있으며, 하루가 지나면 그만큼 더 우리 사회는 망가지고 있는 중이다. 급하긴 하다. 솔직히 나도 무섭다.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 폭압적인 정권이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정권이 아니라 다수의 지지를 받아 성립한 정권이라면, 그런 정권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다수라면 상황은 다른 것이다. 그게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그런 유권자들이 다수라면 우리는 절벽으로 달려갈 수 밖에 없다. 그런 유권자들을 꼬드겨서 정권을 잡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권력을 운용한다면, 그게 현재의 상황과 다를 게 무엇이 있을까? 그렇게 권력을 추종하고, 심지어 야당조차 이 천박한 천민자본주의의 세태에 동참해서 우리 사회를 더욱더 각박하게 만들어 버리는 대열에 합세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이 사회를 진심으로 바꾸고 싶은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알아서 다 잘하겠다고 외치고 집권한 박근혜가 지금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잖은가.


게르만의 대부흥을 약속하고 집권한 히틀러가 독일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지 못했는가? 지금도 독일의 수상은 때만 되면 무릎 꿇고 사과를 해야 된다.


야당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정권탈환을 위해서라면 모든 부당한 짓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야당의 역할인가? 또 하나의 여당, 이름만 다른 여당이 될 생각이란 말인가?


야근에 지친 몸으로, 아니 야근에 시달리면서까지 몰래몰래 인터넷 화면을 켜놓고 필리버스터에 나선 보석 같은 의원들의 귀중한 강연을 들어가며 남몰래 눈물을 훔치던 수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파괴해 놓고 도대체 어떤 사회를 만들려고 한단 말인가?


이들이 느끼는 감동의 씨앗을 세상으로 퍼트려서 삶에 지쳐 각박해진 다수 유권자들을 설득하고 진정한 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하며, 그것이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진정한 야당의 역할이라는 당연한 명제는 당신들의 머릿속에는 절대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인가?


- 그들은 소수니까... 결과에 상관 없으니까...


- 그까짓 욕, 잠시 기다리면 다 잊어버릴 텐데...


- 어차피 찻잔 속의 태풍, 선거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고...


지극히 현실적인 목소리들이 들려오고 있다. 하지만 그 목소리들은 내게는 권력이라는 악마와 타협한 자의 음험한 속삭임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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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미친 듯한 폭주를 막기 위해서라도 당신들에게 또 한 번의 내키지 않는 표를 던지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들은 이제 더 이상 내 마음 속의 야당은 아니다.



끝.





물뚝심송

트위터 : @murutukus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