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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완전학습모형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세상의 많은 것들이 정규분포의 형태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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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값에 대부분이 위치하고, 양극으로 갈수록 양이 작아지며, 좌우대칭을 이루는 정규분포곡선 말이다.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정규분포 그래프는 수능성적 등급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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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9등급은 위 그래프와 같은 모습으로 나뉘는데, 학생들 성적을 매겨보니 이런 정규분포를 그린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입시몰빵교육을 하는 우리나라 수능에서는 한 문제 차이로 등급이 2~3개 왔다 갔다 하며 정규분포곡선 따위는 개나 준 지 오래지만, 큰 틀에서는 이 그래프가 평가의 준거로 작용한다.


그런데 이런 불문율을 깨뜨리는 교육이론이 있었으니, 블룸이라는 교육학자가 제안한 '완전학습모형(mastery learning)'이 그것이다. 적정 시간만 주어지면 부진아를 제외하고 수업에 참여한 대다수의 학생들(90~95%)이 학습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절반 이상의 학생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정규분포곡선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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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으로 갈수록 높은 성취를 보이는 완전학습모형 그래프

완전학습 이후 개인교습(tutorial)으로 90%의 성취도를 보일 수 있다는 이론이다


'시간을 때려 부우면 결과가 나온다'는 당연한 명제가 이 이론의 전부는 아니고, 학습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요인들, 예컨대 수업의 질이나 적성 등의 요소를 밝혀 정규분포에서 벗어나 완전학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이론의 요지이다. 복잡하니 더 들어가지는 말고, 시간과 학습의 관계만 알고 넘어가자.



2. 필리버스터라는 완전학습모형


몇 날 며칠을 필리버스터에 빠져 살았다. 씻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필리버스터를 보면서 보냈으며, 그 소중한 잠까지 줄여가며 테러방지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지난 3월 1일에는 곧 필리버스터가 종료될 것이라는 기사를 접하고 부랴부랴 국회로 달려가 방청을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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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방청인 준수사항

방청 중 옆에 계시던 분이 웃음을 터트리자, 경호원이 나타나 크게 웃지 말라며 제지했다


미처 읽어보지 못했던 테러방지법의 전문을 수어번에 걸쳐 들을 수 있었고, 독소조항에 대한 명쾌한 해설과 법조문으로서의 형편없음, 입법 과정에 대한 상세한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잊고 있었던 국정원의 흑역사와 처음 듣는 간첩조작사건 등 다시 한 번 국정원 견제의 필요성을 떠올리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유익한 강의였다.


이름만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의원들, 혹은 처음 보는 의원들의 캐릭터를 봤고, 생전 처음 정치가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필리버스터 신조어인 1닭(7시간), 1쿵(20분), 1교안(0.36초), 조포이, 힐러 리 등의 드립을 보는 재미는 덤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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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비상사태라면서요"


그러다 문득, 완전학습이론이 떠올랐다. 다수당을 견제하기 위해 무제한 토론으로 여론을 환기시키는 필리버스터와 대다수의 학생들을 일정 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시간과 시간요인을 고려하는 완전학습이론. 테러방지법으로 보자면, 무제한 토론으로 직권상정과 테러방지법의 부당함을 끝없이 이야기하고 각양각색의 의원들이 나와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전해주니 어찌 학습이 되지 않을 수 있겠나. 필리터스터는 테러방지법이라는 내용을 학습할 완전학습의 도구가 된 것이다.


'지지층 결집'이라는 드라이한 단어로는 부족한 것 같으니,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보자. 어떠한 정치적 사안에 대한 의견을 크게 나눠보자면 지지하는 것과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를 더 세밀하게 나눠보자면, 



① 상당한 수준의 지식으로 찬성

② 나름의 근거로 찬성

③ 느낌으로 찬성 

④ 의견없음

⑤ 느낌으로 반대

⑥ 나름의 근거로 반대

⑦ 상당한 수준의 지식으로 반대



로 나눌 수 있다. 이 비중은 정규분포를 그리고 있다고 본다. 많은 이들이 정책에 의견이 없거나 느낌으로 찬반을 결정하고, 정확한 근거로 정책을 판단하는 이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생활에 쫒기는 사람들이 정치와 사회에 많은 시간을 둘 수 없는 현실에서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모든 사안에 정확한 정보를 갖고 나름의 판단을 내릴 만큼 여유가 혹은 관심이 있는 이들은 소수다.


테러방지법을 두고 보자. ①~③은 테러방지법에 찬성, ⑤~⑦은 테러방지법에 반대의 의견이다. 요번 필리버스터의 목적은 여론 환기였다. 이미 정확한 정보로 나름의 근거를 통해 테러방지법에 찬성하는 ①, ②번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다. 여론 환기의 대상은 ④~⑥번. 혹은 ③~⑥번의 테러방지법과 직권상정의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즉, 필리버스터의 효과란 의견이 없거나 정확한 내막을 모르고 지지, 반대하는 이들을 객관적 사실과 설득력 있는 해설로 번 혹은 의 테러방지법 반대로 끌어올리는 완전학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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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의 흠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 대국민 교육프로그램이자 완전학습 도구인 필리버스터는 필리버스터는 갑작스런 중단 결정으로 비난 여론에 휩싸이고 감동을 잃게 되었다.


비대위에서는 필리버스터 이후에도 테러방지법에 대한 반대 여론이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는 점,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소폭 상승하긴 했으나 새누리당의 지지도도 오르며 각 지지층이 결집하는 모양을 보였다는 점 등을 들어 필리버스터의 효과를 상당히 미미하게 평가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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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리얼미터


허나 필리버스터의 의의는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반대 지지층 안에서 '반대의 명분'을 완전학습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지, 새눌당의 지지자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 성향이 고작 일주일 만에 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 않는가. 문재인이 100억 금괴를 내놓지 않는 이상 그런 드라마틱한 변화란 있을 수 없다.


암튼 아쉬움은 따르지만, 개인적으로는 비대위가 택한 연착륙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3월 10일 까지 필리버스터를 진행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감동과 선거 연기와 공천 문제, 여론 등의 비난을 따져보면 잃는 쪽이 더 많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필리버스터로 얻을 수 있는 감동의 최대치와 손해의 최소치가 만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스무스'하게 연착륙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스무스'가 무엇이냐.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민주당 지도부가 택한 방법은 스무스하지 않았다. 2월 29일 밤으로 돌아가 보자. 저녁 7시, 이종걸 대표는 정의화 의장을 만나 중재안을 들고 김종인 비대위 대표와 원유철 새눌당 대표를 만나는 등 동분서주했다. 저녁 9시, 새눌당과의 합의가 사실상 무산되자 다시 김종인 대표를 만나고 9시 반, 의원 총회가 열린다.


30여 명의 의원들이 참여한 의총에서 끝까지 가자와 출구전략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뉘게 되었고, 원내대표에게 결정이 위임되었다. 11시 10분, 의총이 끝나고 이종걸, 김종인, 박영선 등이 당대표실에서 비공개 논의에 들어갔다. 11시 51분, 이종걸 대표가 당대표실에서 나오고, '문제의' 박영선 의원이 대표실에서 나왔다.


여기서 박영선 의원이 기자들에게 필리버스터가 중단됐다고 확인해주고, 기사가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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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합뉴스>


그렇게 필리버스터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바보가 되었다. 우리들의 마국텔에서 순식간에 니네들의 정치판으로 회기해 버린 것이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박영선이 과녁을 자처하고 나섰다. 야당이 승리할 수만 있다면 모든걸 감내하겠으니, 화살은 자신에게 쏘라는 것이다. 박영선이 최종 회의에 참여해 필리버스터 중단 의견을 피력하고 이를 기자들에게 흘려서 김을 뺀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게다가 동성애 발언이 터져 나오고 세월호 특별법의 악몽까지 떠오르니 반박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가장 강경하게 반대 입장을 표한 실질적 권력이자 총선을 책임지고 뛰고 있는 김종인 앞에 박영선이 서서 모든 비난을 자신에게 돌림으로써 총선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는 점 하나는 인정하고 넘어가고 싶다. 재기 불가능한 정치인에게 그 정도 아량은 괜찮지 않나.


아무튼 현 상황은 어찌어찌 이종걸 대표가 마무리를 지어보려 노력했고 상당한 효과를 거뒀으나, 흠결이 가득한 상황이다. 애초에 정청래 의원이 주장한 대로 모든 의원이 5~10분간 발언을 하고 이종걸 대표가 마무리와 사과를 했으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정청래 의원의 해당 발언은 이번 주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통해 공개될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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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리고.. 


그렇게 필리버스터가 끝났다. 연착륙 과정에서 잡음으로 감동을 잃었으나 필리버스터 전체를 잃은 것은 아니다. 192시간 26분, 39명의 토론은 여전히 남아서 빛을 내고 있다.


많은 이들이, 적어도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을 반대했던 46%의 시민들은 테러방지법과 직권상정에 관한 한 완전학습이 되었다고 본다. 어디 가서든 직권상정 요건을 줄줄 읖을 수 있게 됐고, 테러방지법을 유신회기법, 국정원 몰빵법이라 하는 이유, 국정원 몰빵이 위험한 이유 등을 상당한 근거를 통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홍종학 의원이 말했듯, 발언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국회의원과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은, 대리인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시민이 만나는 마국텔이라는 새로운 시스템도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다시 블룸의 완전학습모형으로 돌아가 보자. 완전학습모형의 가치는 단순히 학습 내용을 많은 학생들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정규분포 곡선에 따라 누구를 밟고 밟히는 경쟁에서 벗어나, 다수에게 할 수 있다는 성취에 대한 자신감, 성공경험을 전해주는 것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필리버스터도 마찬가지다. 일주일간 방송을 시청한 이들, 앞으로 시청할 이들이 테러방지법이라는 악법의 전모를 알게 됐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값진 것은 저거뜰이 어떻게 구라를 치는 것인지 알게 된 것이다. 정부 정책에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 그 패턴을 보았다는 것, 이는 두말할 필요 없이 값진 경험이다.


이로써 야권은 강력한 지지자들, 정부 여당에 대한 비판의 강도와 깊이가 달라진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다. 이는 분명 상당한 파급력과 확산력을 지닐 것이다. 야권의 큰 자산이 탄생한 것이다.


비관할 필요 없다. 필리버스터를 시작하기 전보다 이후 상황이 명백히 나아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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