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24.목요일
아홉친구
한국전쟁, 중국 표현으로는 ‘抗美援朝’ 전쟁 또는 조선전쟁이라 부르는 그 전쟁이 발발한 날이다. 중국 관련 기획 기사를 쓰고 싶어서 이것저것 뒤지던 중 글을 하나 발견했다. 사실 중국에는 625와 관련된 책과 논문이 아주 많다. 중국이 한국전쟁을 기념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과 맞붙어 ‘승리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왜 승리라고 생각하는지는 이 연재를 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당시 중국 지도부는 아직 부패하기 이전의 ‘열혈’ 엘리트들이었다. 이때의 기록을 찾아보면, 실로 삼국지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생생한 전쟁의 내막이 득실댄다.
아래 글은 중국 교수 콩칭둥(孔慶東)의 이야기로, 중국에 출판된 <匹馬西風>이란 책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한국쾌담>이란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하지만 아래에 번역한 내용은, 곧 배달될 책을 뒤져보면 좀더 명확해지겠지만, 한국판에서는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625를 중국측 시각에서 해설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인식과는 사뭇 다른, 오히려 정반대의 결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반이 콩칭둥(孔慶東)
625에 대한 다른 시각의 접근이 처음은 아니다. 아마 서점에서 조금만 ‘사상이 빨간’ 책을 찾다보면 쉬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 내용을 번역한 건 625의 재조명을 의도해서는 아니다. 우리의 공식적 입장이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처럼, 중국의 시각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중국 측의 자료가 또다른 생각거리를 만들어줄 수는 있겠으나, 그 자체가 옳은 결론일리는 만무하다. 어느 나라가 자국에 불리한 논점을, 하물며 국가 대 국가의 전쟁 상황과 관련된 비판적 논점을 택하겠는가. 엄연히 공산당 정부 치하의 중국이 그럴리는 더욱 없다.
번역의 취지는 새로운 논점을 전달하는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중국인들이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625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내가 계획하고 있는 기획의 취지도, 중국인이 한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걸 기초로 자료를 수집하다가 마침 번역을 하게 되었다. 취지를 감안해서 보시기 바란다. 사실, 읽다 보면 대단히 재미있다.

압록강을 건너는 중국 인민해방군
한국에서 두어 해 살면서, 일상적인 대화, 수업, 강연 및 인터뷰에서 나는 수십 차례 ‘한국전쟁’을 언급했고, 또한 대학원에서도 몇 번인가 강의한 적이 있다. 내 생각에, 이 문제에 관한 한 한국과 중국 국민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존재한다. 민족적인 입장 차이를 제외하자면, 중국 인민이 얻는 정보들은 소스가 다양하여, 중국인은 객관적으로 중국, 미국, 영국, 일본, 러시아 및 한국의 책에 접근할 수가 있으므로 ‘병행분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은 민주국가라곤 하지만, 국민들이 얻는 정보는 주로 미국에서 오고, 심지어는 미국의 입맛에 따라 선택된 것들도 많다. 또한 한국 학생들의 보편적인 역사적, 지리적 상식이 비교적 낮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처음 이들과 교류를 시작할 적에는 아주 힘들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한국전쟁’과 관련해 가지고 있는 기본지식은 이렇다. 야만스럽고 낙후된 공산주의가 우리 번영하고 부강한 자유세계를 침략했고, 용감한 미국 국민들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전세계 사람들에게 우리를 도울 것을 호소했으며, 결국엔 하늘의 도움으로 우리는 금수만도 못한 적을 무찔러, 민주주의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나는 매번 강의 전에 학생들에게 수업 내용을 준비하도록 하였고, 한국 정부의 견해를 요약하도록 했다. 그 정부 자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중국 해방군 90여 만이 한국에서 죽었다고 말이다. 그때 나는 혀를 내둘렀다. 중국군이 가장 많이 동원됐을 때 100만이 좀 넘었는데, 90여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면 38선은 장강(長江)에 그어져야 했을 것이다.
수업이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서, 나는 되도록 미국, 영국, 일본 쪽의 자료를 활용해야 했고, 그래야 학생들이 수긍할 수 있었다. 누가 누구를 ‘침략’했는가란 문제를 나는 우선 지적했다. 남북 쌍방은 원래 한 나라였는데, 만약 외국의 침입이 없었다고 한다면, 남이 북을 치든 북이 남을 치든 모두 내전으로 봐야 하며, ‘침략’이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미국의 남북전쟁을 침략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중국의 국공내전을 놓고 누가 누굴 침략했다고 할 수 있는가? ‘침략’이라는 말을 쓰려면 남북이 서로 다른 국가라는 전제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면 남북통일이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가? 북에서 ‘침략’이란 말을 쓸 때엔 줄곧 미국의 침략을 지적하는 것이며, 남측이 북을 침략했다고는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한국 정부에선 ‘한국전쟁’을 ‘625’전쟁이라고 부른다. 이는 1950년 6월 25일 이날 조선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진한 데서 유래한다. 한국은 일부러 ‘625’라고 이 전쟁을 지칭함으로써, 전쟁의 성격을 ‘침략’으로 규정지을 수 있었다. 지적해보자면, ‘625’이전에, 남북간의 군사적 충돌은 이미 무수히 많았다. 북이 남을 몇백 번이나, 그리고 남도 북을 천 번은 넘게 넘나들었다.
한성대 사회학과 김귀옥 교수는 최근 출판한 책에서 이렇게 밝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9년 6월 29일, 한국군에 속한 호림대대의 유격대 대원 252명이 38선을 넘어 설악산과 금강산에 있는 북한 부락을 습격했다. 일부 대원들은 심지어 북위 39도의 원산시 부근 안변 지구까지 침투했다. 그들은 북에서 2주일 동안 활동했으며, 대부분 죽었고 단지 50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한국 연합통신사에서는 어느 육군 장교의 말을 통해 김귀옥 교수의 이 주장을 실증한 바 있다. 이 장교는 호림대대가 1948년 창건됐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는가를 따지고 들려면, 어느 쪽이 위기 상황이었고 그럴만한 동기가 있었는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당시 북측의 김일성은 ‘평화통일’, ‘전국민선거’를 주장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항일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으므로, 민주적 방식으로 인심을 크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김일성은 국민의 판결에 맡기자는 주장을 계속했지만, 미국과 남측에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김일성과는 상반되게, 남측의 이승만은 ‘무력북진’ ‘군사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조국이 어려움을 겪던 시절, 오랜 기간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2차대전 중에는 조선을 열강에 위탁관리시키자는 주장을 하여 민심의 분노가 컸다. 미국은 이승만보다 더 유능한 대리인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그 때문에 이승만이 남쪽 통치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측의 정치인 무리 중에서, 가장 신망을 받았던 사람은 중국 국민당 정부를 따라 각지를 떠돌며 조국 광복에 힘썼던 김구 선생이었다. 나는 이화여대 도서관에서 김구 선생이 몇 차례 장졔스(蔣介石)에게 보냈던, 진지하고 성심이 담긴 편지를 찾아보았고, 이를 보여주자 학생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이승만은 김구의 신망을 질투하고 또한 두려워했기 때문에, 특무를 보내 그를 암살했던 것이다.
장졔스는 김구를 위한 추도사에서 이렇게 썼다. “나라를 위해 독립을 구하고, 민족을 위해 자유를 쟁취하니, 위대하도다! 이 사람은 흥멸을 거듭하며 의를 취해 인을 이루었다. 고단함에서 절개가 보이며 역사 속에서 바른 기운이 빛난다”. 이는 매우 대단한 평가였다. (爲國家求獨立爲民族爭自由偉哉斯人興滅繼絶取義成仁見大節于顚沛昭正氣于千秋)
미국은 이승만의 행패가 몹시 불만스러웠으나, 일본인이 남긴 폐해를 수습할 만한 마땅한 인물이 없었고, 또한 반공의식이 결연했기 때문에 마지못해 경이원지(敬而遠之)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조선과 대만을 모두 방어선 밖으로 구획지음으로써, 공산당이 대만을 차지하도록 방임하는 한편, 38선의 현상 유지 정도만 바라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은 전쟁을 벌여야만 자신의 정치 생애를 위해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가 있었다. 또한 1945년 광복 직후의 군사력에서 남측은 명확하게 북측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군사력이 비교적 약한 북측이 어떻게 파죽지세로 이승만을 부산까지 내몰 수 있었을까? 나는 한국 친구들에게 국제학계에선 이미 알려진, 그러나 한국 학자들은 대부분 모르는 내막을 말해주었다. 사실 김일성의 인민군 주력부대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3개 ‘조선군 사단’, 즉 중국 강남을 휩쓸었던 린퍄오(林彪)의 부대였다.
베이징대 역사학과 겸직 연구원이며 중국 역사학회 이사인 셴즈화(沈志華)에 따르면, 1945년 이후 중국 동북부의 조선인은 약 120만이었고, 그 중 약 5만 명이 제4야전군에 참가해 있었다. 김일성은 남측 군사도발의 형세가 위급하다고 여기고, 마오저둥(毛澤東)에게 연락해 이들 조선군 사단이 ‘고향을 지키도록 귀국하기를’ 요청했다. 마오는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국제주의자였다. 또 중국에서의 혁명이 막 승리를 거두려는 시점이었고, 대만을 해방시키는 데엔 그렇게 많은 병력이 필요하지 않으며, 병사는 금방 다시 채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린퍄오에게 지시해 이 호랑이처럼 용맹했던 병사들이, 장비까지 챙겨 조선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1950년 4월 18일 마지막 조선군 사단이 원산에 돌아왔을 때, 이승만은 이를 모르고 여전히 북측 침범을 계속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신속하게 이 3개 사단을 주축으로 하여 15만 정예 대군을 갖추었다. 6월 25일, 스탈린의 묵인 하에, 또 마오저둥을 속인 북측은 일거에 38선을 넘어 서울, 수원, 인천, 대전까지 함락시키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남측의 90% 이상을 점령했고, 남은 한미 연합군은 낙동강 이남의 협소한 구역에 몰리고 말았다. 경험이 풍부한 팔로군과 제4야전군 출신의 인민군은, 이미 사평, 장춘, 금주, 영구를 탈환한 경험이 있었고, 2백만 강남 병사를 잿더미로 만들었던 백전노장들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의 전투가 그들에게 어려울 리 있었겠는가? 김일성은 흥분해서 미리 조국통일대회까지 준비했다.
하지만 전략에 귀신 같았던 마오저둥은 이 소식을 듣고 오히려 근심했다. 그는 미국이 반드시 손을 쓸 것을 알고 있었다. 38선은 반도 남북의 경계가 아니라, 동방과 서방의 경계였다. 미국이 수수방관할 리 없었다. 역시나2차대전의 명장 맥아더는 비분강개한 연설을 통해 미 국회를 감동시켰다. 칠순이 넘은 맥아더는 다시 전쟁의 포화 속으로 들어와, 연합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대한민국을 ‘공산당의 마수에서 구해’내고자 했다.

이승만과 맥아더
맥아더는 펜타곤의 한결 같은 반대를 무릅쓰고, 5000분의 1의 도박이었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군사적으로 볼 때 인천 상륙의 성공률은 500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인천 앞 조수간만의 차이는 최고 11.2미터에 이르렀는데, 이는 세계 최고의 고저차였다. 썰물이 되면 몇백 년 묵은 뻘밭이 4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진다. 그래서 상륙은 오직 밀물 때에만 가능했지만, 인천의 밀물 최고조는 아침 6시 59분과 오후 7시 19분에 한번씩 일어나며, 2시간도 채 지속되지 않는다.
만약 2시간 내에 연안을 돌파하지 못하면, 뻘에 틀어박히게 될 함대는 모두 대포의 밥이 될 것이었다. 그 두 시간 내에, 항구 전체를 통제하는 요지였던 월미도를 점령하고, 또 해류의 속도가 시간당 11킬로미터에 달하며 기뢰가 득실대는 비어도 해협을 돌파해야만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결연하게 말했다. 불가능할수록 기습은 성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자신은 11차례 상륙작전을 지휘했고, 모든 전문가들이 안된다고 했지만, 그 11번을 모두 성공시켰다고. 관건은 거기에 있다. 여기 전문가들이 모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그 우매한 공산당 놈들은 더더욱 생각지 못할 것이라고. 앉아서 지켜보라, 이 노병이 해내고 마는 것을!
하지만 맥아더의 위계는, 사실 공산당도 이미 알고 있었다. 8월 하순, 해방군 합참 작전실에서는 인천 상륙을 예상했을 뿐만 아니라, 9월 15일 새벽이라는 작전 시간까지 정확하게 계산해냈었다. 마오저둥은 보고를 듣고, 즉각 김일성에게 이를 통지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마오의 경고를 별다른 가치가 없다 여기고 무시했다. 그리고 이를 비밀에 부치도록 명령했다.” (陳兼, <중국이 한국전쟁에서 걸어온 길 : 중미 충돌의 형성>에서)
9월 15일 새벽, 1만 명에 이르는 미국 해군 육전대가 몇백 척의 함선과 비행기의 호위 하에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준비가 부족했던 인민군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아무도 투항하지 않은 채 몰살됐다. 맥아더는 한 칼에 반도의 허리를 끊어 형세를 역전시켰고, 인민군 주력 부대는 포위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김일성이 죽음을 무릅쓰고 중국 국경에 다다랐을 때, 그의 수중엔 3개 사단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맥아더는 그에게 ‘최후통첩’을 날리며 ‘무조건 항복’하라고 명령했다. 스탈린은 이때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중국 정부에 통지를 했다. “김일성 동지는 중국 동북부에서 망명정부를 세우도록 하라.”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약소국은 외교를 하지 못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38선이란 사실 미국의 어느 참모가 별다른 생각 없이 지도에 그렸던 것이다. 김일성과 이승만은 서로 싸우면서 자신이 민족통일대업을 이룬다고 했지만, 사실 둘다 대국의 정치 노리개였을 뿐이다. 당시의 중국 역시, 소련의 눈에는 그저 조금 더 큰 노리개에 불과했다. 하물며 미국이 중국을 그만큼으로도 봐줬을 리가 없다. 마오저둥이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중국인이 허리를 굽히면 다리를 만들어주는 줄 안다. 미국인은 그걸 밟고 소련에, 소련인은 그걸 밟고 미국에 가려 한다.” 이 씁쓸함은 중국이든 한국이든 모두 아주 충분히 맛보았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이 책의 한국판이 입수되면 수정이 가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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