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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레이스

2010-06-2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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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06. 24. 목요일


메리메리


 


1.


 


한 일 년 전부터 테니스를 배웠다.배워보니깐, 이게 뭐 뻔하게도 공이 얼만큼 날아왔는지 공간감각도 필요하고 공이 날아오는 곳으로 얼른 달려가는 달리기실력도 필요하고, 공을 채로 밀어낼 때 필요한 팔의 근력도 필요한데


 


... ...


 


나한텐 그 중 아무 것도 없었다. 선생은 인내를 갖고 날 가르치다가 결국 욕을 했다.


 


선생 : 왜 공 쫓아서 안 뛰는 거야?


 


나 : 난 최선을 다해 뛰었어!


 


선생 : 거짓말하지 마. 너 100미터 몇 초에 뛰어?


 


나 : 32초.


 


선생 : (버럭) 200미터 말고 100미터 말야!!


 


32초는 내가 고3 때 잰 체력장 기록이다. 우리 학교 운동장이 100미터가 좀 안 돼서 살짝 구라 기록이긴 한데 34초인가 36초였던 것 같기도 하지만 분명 더 짧지는 않았다.


 


선생은 한참 시간을 들여 100미터를 32초에 뛰는 여자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받아들였다. 그리고 심각하게 말했다.


 


"테니스 말고 탁구를 배우자."


 


나는 오기가 나서 아직도 테니스를 배우고 있다. 아직도 실력이 안 돼서 제대로 경기는 못 해봤다.


 


 


2.


 


이론만 머리속에 점점 쌓이고 있다. 그런데 그게 '공을 앞으로 치기 위한 팔다리 관절의 각도와 골반이 돌아가는 속도'에 관한 이론이지(의지대로 몸이 움직여주지 않는 나같은 놈한텐 정말 쓸모없는 이론이다.)아직 테니스 경기 스코어가 어떻게 올라가는지, 단식이랑 복식 때 서브 넣은 공이 어디에 떨어져야 되는지도 거의 모르거나 매번 헷갈린다. 게임을 제대로 뛰어본 일이 없으니 뻔한 일이다.


 


그래도 테니스 배운 후로 얻은 소득이라면 테니스 경기를 아주 가끔 재밌게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공을 무려 저렇게 칠 수 있는 감각'에 대한 경이로움이 생겼으니 능력자들의 채 휘두르는 솜씨에 빠져들어 구경하게 된 것이다.


 


...그래봤자 선수 이름은 힝기스(이름만 알지 얼굴은 모른다)라던가 비너스라던가 사라포바라던가 정도만 안다. 세상 있는 명품은 구찌랑 샤넬밖에 없는 줄 아는 수준과 비슷하다 하겠다.


 


 


3.


 


졸라 큰 세계경기라는 윔블던이 영국에서 이틀 째 진행중이다. 그리고 아주 소름끼치는, 몇 시간 전에 막 끝난(?) 경기 하나에 완전히 정신을 빼앗겼다.(선수들 채 휘두르는 솜씨 정도에나 감탄하던 내가)


  


그러니까 오늘 점심 즈음에 텔레비전을 켰는데 두 사내가 졸라 공을 때리고 있었다. (녹화였던 것 같다.)그런데 점수 기록이 이상한 거다.


 


테니스는 3세트를 먼저 따면 이기는데 각 세트 당 7점을 먼저 내는 사람이 세트를 딴다. 그런데 세트를 각자 두 번씩 이긴 상황에서 마지막 세트 점수가 있어야 될 자리에 이상한 숫자가 보였다.


 


48:48


 


저게 뭔가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결국 깨닫고, 경악하고 말았다.


 


마지막 세트는 7점을 먼저 내면 이기는 게 아니라 2점을 앞서면 이기게 된다. 근데 저 두 남자는 마지막 세트에서 1점을 앞서면 1점을 따라붙는 식으로 48점까지 내고 앉아 있었던 거다.


 


경기 시간은 8시간 33분째.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두 남자가 서로 상대방에게 경악하면서, 감탄하면서 경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vs


           존 이스너..고마하자.     니콜라스 마허트.. 지겨워!!지란 말야!


 


 


4.


 


마허트는 프랑스 선수. 1982년생. 어렸을 때 프랑스 유소년 챔피언이었던지라 프로 데뷔도 빨랐다. (2000년) 최고 기록은 2008년 세계 40위. 지금은 149위다. 모르긴 몰라도 좀 떨어지는 추세인 선수인 것 같다.


 


이스너는 미국 선수. 1985년생. 대학 선수로 뛰다가 프로 데뷔는 2007년에 했다. 데뷔 때 세계 랭킹이 839위 -_-; 2008년엔 106위까지 뛰어오르고 2009년엔 34위까지 치고 올라갔던데다 2010, 올해는 19위까지 올라와 있다. 키가 2미터 6에 몸무게가 111키로;; 가슴도 완전 두껍고 어깨도 짝 벌어진 게 장난 아니다.


 


각 기록만 보면 이스너가 슝 이겼어야 할 게임 같다. 헌데 저 게임, 내가 봤을 때 48:48. 질기게 이어지는 중이었다.


 


 


5.


 


나중에 기사를 보니 이 쯤에는 이제 무슨 문제로다가 전광판에 점수 기록하는 것도 힘들어졌다고 한다. 화이트보드에 손으로 써서 기록했다고.


 


오전에 시작한 경기가 저녁 7시, 8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51:51, 51:52, 52:52, 52:53, 53:53...


 


밤 9시가 다 돼가면서 해도 떨어졌다. 전등빛이 밝기도 했고 지겨워서라도 끝내고 싶었겠지.


 


경기가 계속됐다. 덩치가 크다보니 이스너가 좀 더 힘들어했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 넘어가니까 '따라 잡힌' 순간마다 괴로운 듯 악을 쓰더라. 처음엔 (처음도 아니지만;) 조용히 테니스를 쳤는데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힝기스처럼 뱃 속 깊이서 뿜어져 나온 악을 쓰기 시작했다. 정말 희안했던 건, 정말 힘들어 보이는데 중간 중간 쉬지 않고 땅을 부술 듯이 꽂는 공의 힘이었다. 점점 더 득실대고 떠나지 않는 관중이었다. (나라도 못 갔을 듯;;)


 


무엇보다 두 선수의 눈빛. 그 눈빛은 9시간 동안 전력을 다 해 경기를 한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이제 막 경기를 시작한 사람의 눈이었다. 땀을 닦는 동안 지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네트 너머로 상대방을 보는 눈빛이, 조금도 죽지 않고 둘 다 살아있었다.


 


소름이 돋더라.


 


 


6.


 


58:58이 됐을 때 처음으로 화장실 가는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59:59가 됐을 때 마허트가 빛 때문에 공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논의 끝에 다음 날 경기를 다시 하기로 하고 오늘의 경기는 '일단 중단'됐다.


 


Decision time for suspending game day 2


 


<독한 놈..>


 


이 경기 전까지 세계적으로 제일 긴 경기는 8시간대였다. 이 두 사람이 경기를 중단하고 내일을 기약한 건 9시간 58분이 지난 후였다.


 


 


7.


 


내일이랬는데 영국 시간으로 24일이니까 한국 시간은 언젠가;;;(계산 뻘뻘;;;)어쩌면 5분만에 후루룩 끝날지도 모르지만 가슴 뛰는 5분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