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4.27.수요일
필독
테무진to the칸 지난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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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한 주 연재를 쉬었다. 쉬고 싶어 쉰 게 아니다. 다 쓰고 게재만 하면 되는 기사가 통째로 날아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씨바... 역시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거였다. 우리 모두 백업을 생활화하자.
지금까지 꽤 달렸다. 그치? 이쯤 서 간단히 테무진의 일생을 정리해보자.
몽골 부족-보르지긴 씨족-키야트 혈족의 예수게이, 메르키트족으로 시집가는 옹기라트족의 신부 ‘헐룬’을 납치해 결혼하다.
예수게이와 헐룬 사이에서 테무진이 태어나다.
예수게이의 세력이 점점 성장하다. 평탄한 유년기를 보내다.
9살 되던 해, 신부를 찾으러 예수게이와 함께 외가인 올쿠누트족을 향해 떠나다. 여행길에 올쿠누트족의 친척씨족인 ‘옹기라트’족을 방문하다. 옹기라트족의 수장 ‘데이 세첸’의 게르에 머물며 당시 10살이던 보르테를 처음 만나다. 예수게이와 데이 세첸에 의해 보르테와 혼약을 맺다. 데릴사위가 되어 옹기라트족에 남다.
예수게이가 돌아가는 길에 타타르족 전사들의 잔치에 참석, 독살당하다. 테무진은 급하게 몽골족의 야영지로 돌아오지만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는 못하다.
타이치우드족이 고아가 된 테무진 가족을 버리고 떠나다. 비참한 생활이 시작되다.
몽골부족 자다란 씨족의 소년 ‘자무카’와 만나 안다 관계를 맺다.
이듬해, 두 번째로 안다 의식을 치르다.
동생 카사르와 함께 배다른 형 벡테르를 살해하다. 헐룬에게 개갈굼당하다.
타이치우드족에게 납치되어 목에 칼을 쓴 채 포로생활을 하다. 드릴루킨인 솔두스 씨족의 수장 ‘소르칸 시라’ 가족에게 보살핌을 받다.
소르칸 시라 가족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 가족과 재회하다.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다. 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생활을 하다.
말 8마리를 도둑맞다. 말을 되찾기 위해 도둑들을 추격하던 중 ‘보르추’라는 소년을 만나 친구가 되다. 보르추의 도움으로 말을 되찾다.
옹기라트족의 데이 세첸을 찾아가 그때껏 테무진을 기다려준 보르테에게 다시 한 번 청혼하다. 보르테와 결혼하다.
보르추가 테무진 가족의 캠프에 합류하다.
보르테의 어미니 ‘초탄’이 보낸 혼수 담비모피옷을 커레이트족의 칸 토그릴에게 선물하다. 예수게이의 안다였던 토그릴이 테무진의 보호자가 되어줄 것을 약속하다.
젤메가 테무진 가족의 캠프에 합류하다. 생활이 나아지고 보르테와 행복한 신혼을 보내다.
메르키트족이 선대(先代)의 복수를 하기 위해 테무진 가족을 공격하다. 아내 보르테와 계모 소치겔, 늙은 하녀 ‘코아그친’이 납치당하다. 테무진을 포함한 다른 멤버들은 성산(聖山) 부르칸 칼둔에 몸을 숨겨 위험을 피하다. 부르칸 칼둔을 자신의 토템으로 섬기기 시작하다.
커레이트족을 찾아가 토그릴에게 보르테를 찾아줄 것을 부탁하다. 토그릴의 주선으로 자무카와 재회, 자무카가 전쟁에 합류하다. 빼앗긴 신부를 찾기 위한 자무카-커레이트-테무진 연합군이 결성되다. 약관 스무 살의 자무카가 전쟁 총사령관직을 맡다.
자무카의 ‘킬코 강 도하작전’이 성공하다. 연합군이 메르키트족 3개 씨족을 연속 격파하다. 보르테와 재회하고 코아그친을 구하다. 하지만 계모 소치겔은 구하지 못하다. 벨구테이가 학살로 어머니 소치겔의 복수를 하다. ‘카아드 메르키트’의 카아타이 다르말라가 포로가 되어 부르칸 칼둔에 바치는 제물이 되다. 하지만 ‘톡토아 베키’가 이끄는 ‘오도이드 메르키트’, ‘다이르 오손’이 이끄는 ‘오와스 메르키트’는 일부 세력을 유지한 채 도주에 성공하다.
테무진의 작은 무리가 자무카 캠프에 합류하다. 자무카와 세 번째 안다 의식을 치르다. 자무카와 테무진이 무리를 함께 이끌다. 보르테가 메르키트족 전사(헐룬의 원래 약혼자의 동생인 칠게르)의 아이가 거의 분명한 첫째 ‘주치’를 낳다.
테무진과 자무카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1년 6개월여간 지속된 ‘쌍두체제’가 붕괴하다. 보르테의 조언으로 결별을 결심하고, 바로 그날 밤 자무카의 캠프를 떠나다. 다음날 아침, 무리의 ‘친 테무진 파’ 구성원들이 테무진에게 합류하면서 최초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다. 한편 테무진 무리의 이동에 놀란 타이치우드족이 자무카에게 도망치듯 귀순하다.
8년여간 세력이 꾸준히 성장하다. 상시적인 약탈과 폭력 등으로 자무카 무리와 원한이 누적되다.
몽골 왕족들에 의해 ‘칭기스칸’으로 추대되다(1차 즉위라고 한다.). 그러나 암바가이 칸의 후손 타이치우드 인사들이 쿠릴타이에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정족수가 미달된 선거가 되다.
자무카의 친동생 ‘다이차르’가 테무진 무리의 말떼를 훔치다 말떼 주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다. 이를 계기로 전쟁이 발발하다. 친자무카 파 13개 쿠리엔이 결집하다. 이에 대항해 테무진도 수하들과 지지자들로 13개의 쿠리엔을 구성하다. ‘13 쿠리엔 전투’에서 테무진이 자무카에게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며 좆망행 열차를 타다.
금나라의 왕경 승상(좌승상)이 황제의 명을 받고 커레이트족과 함께 타타르 정벌에 나서다. 금나라-커레이트 연합군에 가담해 기회를 얻다. 주르킨 씨족이 약속을 어기고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 집합하지 않다.타타르 정벌에 성공하면서 물질적 기반과 평판을 얻는 데 성공, 재기하다. 왕경승상이 토그릴에게‘왕(王)’이라는 호칭을 내리면서 토그릴이 ‘옹 칸’이 되다. 테무진은 ‘자우트 코리(백호장)’라는 직함을 얻다. 그러나 복귀행군중에 ‘주르킨’ 씨족이 후방 부대를 약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다.
주르킨 씨족을 정벌하다. 지배계급을 처형하고, 남은 백성들을 평등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다.
자무카가 타타르, 나이만, 메르키트족을 포함한 광범위한 지지세력에 의해 ‘구르 칸’으로 추대되다. 칸으로 추대된 자리에서 옹 칸과 테무진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다. 초원의 모든 세력이 가담하거나 연루된 ‘쿠이텐 전투’에서 테무진과 옹 칸이 승리하다. 적이 궤산되자 옹 칸은 자무카를, 테무진은 메르키트족을 추격하다.
휴... 여기까지만 해도, 겁나 파란만장하다.
1
(전편에 이어)쫓기는 타이치우드 전사들... ‘뚱뚱이 칸’ 타르구타이는 여전히 타이치우드의 칸이었지만, 군사작전을 지휘할 수는 없었다. 초원의 유목민들은 100% 가까이 육식을 했다. 생활습관이나 체질이 ‘찌는 타입’인 사람들은, 엄청나게 찐다. 타르구타이는 고도비만에 시달리고 있었다. 체구가 작은 몽골 말은 그의 체중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기마민족이 말을 못 타니, 군사를 지휘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야전에서는 ‘아오초’라는 용사(바하두르)가 타르구타이 대신 타이치우드 전사들을 이끌었다. 아오초는 맹렬하게 추격해오는 테무진 군을 따돌리며 씨족민들의 야영지까지 도망쳐왔다.
“어, 아오초 자네가 웬일이야… 행색이 그게 뭐야? 우리 군사들은…? 설마, 진 거냐?”
“참패했습니다. 비바람이 불어서 우리족 병사들을 쓸어버렸어요. 테무진이 옛 일을 복수한답시고 하필이면 우리를 쫓아왔습니다. 타르구타이 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방어준비를 해야 합니다. 방패부터 챙기라고 하세요!”
“어우 야, 씨바 X됐구나…”
후방 부대와 백성, 가축들이 전투부대를 지근거리에서 따라다니는 게 초원의 전통이다. 타이치우드족은 쿠이텐 전투가 벌어진 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거리가 워낙 가까웠기 때문에 테무진은 나중에 이곳도 쿠이텐이라고 부른다.).
타이치우드족이 황급히 전투준비를 하고 있을 때, 테무진의 군대가 나타났다. 타이치우드족의 세력은 테무진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게다가 쿠이텐 전투의 패배로 이미 승부의 추는 테무진 쪽에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다. 타이치우드 군사들은 방패와 목책 등의 방어기구 뒤에 몸을 숨기고 화살을 쏘아대는 전략을 택했다.노골적인 수비전술이었다.

타이치우드족에 잡혀와 목에 칼을 쓰고 포로생활을 하던 소년 시절의 테무진… 테무진은 “집집마다 돌아가며” 조리돌림을 당했었다. 타이치우드족 전부가 가해자이거나, 가해자의 일가친척이었다. 이 과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었다. 테무진이 자신들을 봐줄 가능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패배의 공포에 짓눌린 타이치우드족은 극렬하게 저항했다. 전투는 장기전의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런데 이‘쿠이텐 전투 2차전’의 전투 방식이 무척 묘하다. 테무진과 타이치우드, 양 측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오직 활만을 쏘아가며 며칠씩 싸웠다. 사실 초원에서는 이런 전투방식이 흔했다. 백병전을 기피하고 활쏘기를 중요시하는 초원 전사들은 서로의 사정거리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며 장기간 싸우곤 했다.
하지만… 테무진의 병력은 타이치우드를 압도하고 있었다. 왜 테무진은 병력을 적진에 일제투입해 단번에 전투를 끝내지 않았을까? 이 상황에서 돌진을 명령했다간, 화살이 쏟아지는 긴 거리를 달리는 동안 불가피하게 희생이 발생한다. 테무진은 부하들을 불필요하게 잃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단순한 논리의 싸움일수록 머릿수와 물량을 압도하는 측이 반드시 이기게 된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문제지만, 그까짓 며칠쯤 고생 더 해도 된다는 게 테무진의 입장이었다.
장기전이 되다 보니, 양측의 백성들이 살림살이와 가축들을 챙겨와 자기네 군인들과 함께 잤다. 글타… 양측은 자면서 싸웠다. 심리적 스트레스는 차치하고서라도, 전투라는 폭력활동은 엄청난 체력을 요구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며칠이 넘어가면 자지 않을 수 없다. 양측은 사정거리를 유지한 채 저녁이 되면 게르와 천막 등으로 군영을 치고, 밤에는 잤다. 물론 밤에는 초병을 세워 서로를 감시했다.
엽기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합리적이다. 적이 밤 사이 도망가거나 기습을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니 상대를 자기 시야에 두어야 한다. 필연적으로 아군도 적의 시야에 들게 되면서 거리를 평화적으로(?) 유지하는 현상이 생긴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마치 그날의 일과처럼 전투가 다시 시작된다. 초원이 광활하게 펼쳐진 지리적 조건이 만들어낸 싸움법이다.
테무진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테무진 군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타이치우드군을 견딜 수 없는 수준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타이치우드족의 전사 ‘지르고아다이’는 테무진이 자신의 사정거리 안에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2
중세유럽의 전투에서는 귀족인 기사계급이 앞 열에 서서 돌진한다. 귀족일수록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한다.그러다보니 중무장한 양측의 지배층이 물리적으로 충돌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다. 여당 국회의원들의 아들 태반이 군대에 가지 않는 어느 이상한 나라에서는 이게 무척 멋져 보일 수도 있는데, ‘정상적인’ 사회의 기준에서 보면 걍 무식한 거다.

몽골초원에서는 지휘관이 뒤편에 위치한다. 그리도 되도록이면 높은 곳에 선다. 그래야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알 수 있고, 부하들에게 적절한 명령을 내릴 수 있으니까. 물론 안전도 중요하다. 지휘관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면 아군 전체가 위험해진다. 당연히 테무진도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전투를 지휘했다. 물론 병사들은 사정거리 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적도 아군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니까 말이다. 하지만…
전편에 이야기한 것처럼, 몽골에서는 전통적으로 정확도가 아닌 사정거리가 명사수를 가르는 기준이다. 다시 말해 명사수의 사정거리는 통상적인 기준보다 길다. 여기에 정확도까지 겸비하면 특등사수가 된다. 지르고아다이는 특등사수였다.

몽골인들의 활쏘기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인간의 시력은 보통 2.0에서 마이너스가 시작되지만, 더 먼 거리를 볼 수 있게 진화된 몽골인들의 시력은 3.0에서 시작한다. 몽골사람들은 꼭 전투를 하지 않더라도, 어릴 때부터 활쏘기에 숙달된다. 활쏘기는 아이들의 기본 놀이다. 몽골인은 유목민족이지만, 수렵이 받쳐주지 않으면 유목도 할 수 없다. 초원의 유목민들은 가축을 도살하지 않는 계절을 엄격하게 지켰다. 가축의 안정적인 임신과 출산을 보장함으로써, 머릿수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당연히 사냥은 생존의 문제다. 몽골초원에선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활쏘기에 능했다. 덧붙여 당시의 초원사람들은 활과 화살만큼은 세계에서 가장 성능 좋은 물건을 썼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 특출나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보통 솜씨가 아니다.
며칠간 이어진 싸움이 막바지에 이른 날 오후. 태무진이 마침내 지르고아다이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지르고아다이의 시위를 떠난 화살이 테무진의 목을 꿰뚫었다. 테무진은 그대로 말에서 떨어졌다. 치명상을 입은데다가 낙마의 쇼크가 겹치면서 테무진은 실신하고 말았다.
쓰러진 칸… 테무진 조직의 수뇌부는 패닉상태에 빠지긴커녕 현명하게도 전투를 계속 진행했다.
“일단 테무진 형님을 게르 안으로 옮기자. 우리 편 군사들도 이 사실을 모르게 해야 해.”
아마 제2, 제3 참모였던 젤메와 보르추가 테무진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고 있었을 것이다. 테무진 조직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기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는 이 두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이날 테무진 조직의 수뇌부가 보인 침착함과 냉정함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응? 지금 뒤에서 무슨… 설마 칸께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무슨 소리냐? 공격하는데나 집중해!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간 뒤통수에 화살 꽂힌다.”
“아니 그게 아니라 분위기가 좀…”
“설마 칸이 다치셨으면 내가 너한테 공격명령을 내리고 있겠냐? 활이나 쏴!”
실신한 칸을 게르 안에 뉘인 수뇌부는 태연을 가장하며 저녁까지 전투를 치렀다. 결국 그날도 다른 날처럼 해가 저물자 전투가 끝나고 각자 저녁식사와 잠자리를 준비했다. 그러다보니 타이치우드족은 테무진이 쓰러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들은 전투에서 이길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채 일종의 ‘전략회의’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문제의 화살을 쏜 장본인인 지르고아다이는 과연 테무진이 쓰러진 줄 몰랐을까? 아마 긴가민가했을 것이다. 군대 갔다와 본 독자분덜은 알 거다. 인체의 상반신 실물크기의 250미터 과녁이 얼마나 작게 보이는지. 이 정도 거리가 되면 타겟은 사실상 점이나 마찬가지다. 과녁 가운데에 가늠쇠를 조준하는 게 아니라, 숫제 가늠쇠 위에 타겟을 고이 올려놓고 쏘는 수준이다.
몽골 활의 통상적인 유효사거리(살상효과가 유지되는 사정거리)는 300미터에 육박했다. 명사수의 경우 사정거리가 무려 400미터를 넘어섰다. 이 거리에서는 타겟을 정확히 조준할 순 있어도, 타겟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까지는 모를 수 있다.
‘분명히 맞은 건 같긴 한데… 저넘들 하는 걸 보면 너무 자연스럽단 말이지…’
지르고아다이는 테무진 군 수뇌부의 ‘연기력’ 때문에 자신이 테무진에게 타격을 입혔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장담할 수 없으니 윗선에 보고할 수도 없는 노릇. 만약 지르고아다이가 확신에 차서 타르구타이와 아오초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렸다면, 그래서 지도자가 실신한 채 누워있는 적을 밤사이에 기습했다면 테무진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3
밤이 왔다. 테무진 무리는 혈통조직이 아니다. 보스의 개인적 역량으로 뭉친 조직이다. 초원은커녕 몽골부족도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다. 테무진이 죽으면 조직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게다가 전쟁중이었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테무진을 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식을 잃은 테무진은 이미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젤메가 나서서 독박을 쓰기로 했다. 하긴 이럴 때는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가느니, 한 사람이 십자가를 매는 게 낫다.
“솔직히 다른 사람은 걱정된다. 내가 알아서 해 볼 테니, 모두들 날 믿고 기다려 달라.”
이게 먹혔던 걸 보면 젤메에 대한 조직의 신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여하튼 젤메는 혼자서 테무진을 뉘인 게르 안으로 들어갔다. 문제는…
당시 초원의 의료수준이 형편없었다는 거다. 딱 잘라 말해서, 민간요법 수준이었다. 물론 민간요법은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중국과 고려를 예로 들어보면, 아무리 민간요법이라 할지라도 한의학의 정교한 체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하지만 초원에는 이 ‘체계’라는 게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의학상식을 거스르는 처치법이 많았다.
초원에서는 적의 무기에 의해 출혈이 생겼을 경우, 환부를 입으로 빨아 자연적으로 흘릴 피보다 더 많은 양의 피를 뽑아냈다. <우선 지혈을 한다>는 우리의 상식과 반대다. 젤메가 실신한 테무진에게 제공한 ‘의료서비스’도 입으로 피를 빨아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의료수준이 너무 조악할 경우, 오히려 이 방식이 소정의 효과를 거둘 수도 있지 않을까?
초원에서는 자신의 피를 보거나 피를 바닥에 흘리는 것을 불길하게 쳤다. 젤메는 테무진이 일어나서 자신의 피를 본다면 불쾌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입으로 빤 테무진의 피를 그대로 삼켜버렸다. 물론 게르 밖으로 나가 뱉고 돌아올 수도 있지만, 충성스러운 젤메는 그러는 사이에 테무진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밤새 보스의 피를 삼켰다. 입으로는 그의 목을 문 채… 자세가 딱 뱀파이어를 연상케 한다.
이 대목을 다룬 역사학자들은 무척 난감해하면서도, 이 치료법이 효과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폐에 침투해 생명을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응혈(굳은 피)을 제거한다거나, 인공적으로 피를 빨리 돌게 해 뇌에 산소를 공급할 수 있다거나, 감염균과 감염된 피를 인공흡혈로 제거할 수도 있다는 식이다. 물론 누구나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나는 이 문제 때문에 유명 대학종합병원 출신인 현직 의대 교수분께 직접 자문을 구했다. 물론 딴지 수뇌부는 때와 장소와 상황에 상관없이 여러분의 갑(甲)이므로 자문료 따위는 없다. 사실 흡혈요법의 효과를 묻는 그 자리의 술값도 이 분이 계산했다. 본문과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타의 모범이 되었기에 굳이 이야기하는 바이다.
여튼, 이 의대 교수님은 딱 잘라 말했다. 그건 위험하기만 할 뿐, 어떤 의학적 효과도 없다고. 감염균이 체내에 퍼지는 속도는 ‘흡혈’로 피가 체외로 빨려나오는 속도보다 빠르다. 또한 응혈은 필요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피를 빨리 돌게 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응급상황에서는 혈압이 오르는 것보다 떨어지는 것이 훨씬 위험하다. 흡혈 때문에 피의 유량이 적어지면 혈압이 떨어지는데, 더욱이 뇌에 산소를 공급하는 경동맥은 테무진의 환부인 목에 있다.
젤메는 주군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밤새 테무진의 피를 빨았다. 즉 현대의학의 상식으로는 밤새 뻘짓을 한 거다. 물론 젤메에게 죄는 없지만…
인간의 목이란 워낙 중요한 기관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라, 화살이 박혀도 살아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교수님은 언젠가 공사현장에서 목에 공업용 못이 박힌 인부를 수술치료한 적이 있다고 했다. 보고만 받고는 환자를 살리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환자 본인이 멀쩡히 걸어 들어와 사고경위를 차분히 설명했다고 한다. 못이 신기할 정도로 주요기관을 피해 박힌 것이다.
살다 보면 가끔씩 이런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지르고아다이가 쏜 화살이 0.5cm만, 아니 어쩌면 0.01cm만 옆으로 비껴갔어도 - 화살이 지르고아다이의 시위를 떠나는 시점에서는 그야말로 나노 단위의 차이다. - 테무진은 죽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테무진의 이름을 알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젤메의 위장에도 한계가 있었다. 너무 배가 불러서 더 이상 피를 삼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젤메는 어쩔 수 없이 테무진의 피를 바닥에 뱉었다. 젤메의 가공할 충성에도 불구하고 테무진은 죽지 않았다. 새벽녘, 드디어 테무진이 입을 열렸다. 그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아이라크(마유주)… 아이라크를 마시고 싶다.”

이건 이해가 간다. 테무진의 신체는 엄청난 출혈을 견뎌야 했다. 그러니 액체를 가장 먼저 찾는 건 자연스럽다. 왜 꼭 아이라크여야 했을까? 아이라크는 초원유목민들의 기본 음료다. 칼슘 등 영양성분이 풍부한 젖을 재료로 쓰는데다, 발효과정에서 영양이 더 풍부해진다. 또 술이기 때문에 몸에 빨리 흡수되는 느낌을 준다.
테무진의 입에서 아이라크라는 단어가 나왔다. 의학지식이 거의 전무한 젤메는 다른 음료 - 물이나 가축의 피 - 가 아니라 꼭 아이라크가 있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씨바, 그 흔한 아이라크가 없었다. 워낙 급하게 이동하느라 아이라크같은 것까지는 미처 챙겨오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젤메는 목숨을 걸기로 한다.
4
우리 편에 아이라크가 없다. 그렇다면 아이라크를 재빨리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타이치우드 진영이었다. 젤메는 적진으로 넘어가 아이라크를 훔쳐올 계획을 세웠다. 정신나간 짓이었다. 버뜨. 젤메는 의학지식은 없었지만, 머리는 정말 좋았다. 성격도 대담했다.
젤메는 옷을 벗고 알몸인 채로 400여 미터를 걸어가 타이치우드 진영의 목책을 넘었다. 초원 문화에서는 알몸을 보이는 일이 상당한 금기였다. 물론 몸을 가리는 건 동서고금에 흔한 문화다. 하지만 신체노출이 자연스러운 문화도 많다. 현대의 한국인들도, 한여름 해변가에서 비키니 차림을 한다고 무슨 큰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초원은 그렇지 않았다. 주르킨족이 테무진의 후방 부대를 약탈할 때 피해자들의 옷을 벗겨간 것도 일부러 그들을 모욕하기 위해서였다. 주르킨은 옷까지 벗겨갈 정도로 먹고살기 힘든 집단은 아니었다.
젤메는 테무진을 위해 목숨을 물론이고 자존심도 내놨다. 스스로 옷을 벗고 걸어 다닌다닌다… 술에 만취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 초병이 젤메를 발견하더라도, 술 취한 동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동료의 체면도 지켜줘야 하고 스스로 민망하기도 할테니, 고개를 돌리게 마련이다. 언뜻 스치는 순간에 얼굴을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는 밤의 어둠이 가려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히면?
젤메는 플랜 B도 마련해놓았다. 초병에 적발되어 붙들리면 이런 핑계를 댈 생각이었다.
“그동안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테무진에게 충성했건만, 사소한 실수로 심기를 건드렸다고 이렇게 옷을 벗겨 모욕을 주지 뭡니까… 자칫하면 지금 딸랑 입고 있는 (팬티에 해당하는)속옷도 벗기겠더라고요. 분하기도 하고, 이 속옷만큼은 사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어쩌겠습니까. 도망 나왔지요. 역시 테무진은 인간도 아니었어요! 이제부턴 타이치우드족에 충성할랍니다!”
일단 이렇게 귀순해 놓고는, 때를 봐 적당히 실종된 다음 테무진 진영으로 넘어오려고 한 거다.

플랜 B까지 갈 것도 없었다. 어떤 초병도 젤메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그는 아이라크가 있을 만한 곳을 열심히 뒤졌다. 하지만 씨바, 타이치우드 진영에도 아이라크가 없었다. 급하게 이동하느라 살림살이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건 타이치우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타이치우드 진영엔 테무진 쪽에 없는 게 있었다. 젤메는 운 좋게 응유(凝乳) 한 덩이를 훔칠 수 있었다.
‘응유’라고 하면 뭔가 신비한 식품일 것 같지만, 사실은 걍 요거트다. 젖이 발효하면 요거트가 된다. 요거트가 더 발효하면 술이 되는데, 이게 아이라크다. 물론 마유주(馬乳酒)라고 하는 만큼, 말젖으로 만든다. 말젖은 다른 가축의 젖에 비해 굳지 않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계속 저어주어야 하지만, 치즈가 되지 않고 술이 된다.

사진 - 론니플래닛
젤메가 ‘입수’한 응유는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아이라크를 만들다가 전쟁통에 방치되어 굳은 것일 수도 있고, 다른 가축의 젖일 수도 있다. 가능성은 적지만, 물에 섞어 먹으려고 준비한 전투용 비상식량일 수도 있다(분유의 말뜻은 이유식이 아니라 ‘가루젖’이다.). 꿩대신 닭이라고… 그래도 젤메, 아이라크와 가장 비슷한 걸 구했다.
젤메는 응유 한 덩어리를 들고 타이치우드 진영을 빠져나왔다. 들어가다 잡히면 핑계가 있지만, 돌아오는 길에 잡히면 뭐라 설명을 하기가 애매하다. 따라서 적 초병의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이때가 젤메에겐 가장 긴장된 순간이었을 것이다. 젤메는 무사히 돌아왔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테무진이 누워 있는 게르에 달려가 응유를 물에 개어 테무진의 입 안에 흘려 넣었다.
몇 시간동안 출혈을 견디고 처음 음료를 마신 테무진은 드디어 눈을 떴다. 그가 의식을 찾고 처음 본 건 젤메와 바닥을 적신 자신의 피였다. 테무진이 죽다 살아나서 처음 한 말은?
“다른 데 뱉을 수 없었나?”
너무하다 싶은데, 생각해보면 뭐 이해는 간다. 테무진은 젤메가 어떤 밤을 보냈는지 전혀 몰랐던 데다가, 피에 대한 미신도 있었으니.
“아픈 형님을 두고 차마 왔다 갔다 할 수가 없어서… 너무 걱정돼서요… 피를 보지 마시라고 계속 삼켰는데,더 이상 들어갈 데가 없을 정도로 마셔서 어쩔 수 없이 옆에 좀 뱉었습니다.”
“아, 음… 그래? 그럼 응유는 어디서 구한 거냐? 우린 그런 건 안 챙겨온 걸로 아는데?”
“아, 그거요. 타이치우드 놈들 진영에 건너가서 훔쳐온 겁니다.”
“뭐… 뭐 색햐? 거기가 어디라고! 만약 네가 잡혀서 고문이라도 당했다 치자. 그래도 내가 몸져누웠다고 발설하지 않았겠느냐?”
맥락을 잘 살펴보면, 테무진은 젤메의 충성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테무진은 고문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상식선에서 인간을 판단했다. 물론 우리 역사엔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절개를 지킨 독립운동가들이 많지만, 이러한 극기를 자신이 선택하는 것과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테무진은 극기에 해당하는 충성을 바란 적도 없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테무진은 ‘고문에 굴복할 지도 모르는’ 젤메의 충성심을 의심한 게 아니라, ‘고문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을 감수한’ 젤메의 무모함을 탓한 것이다.
최악의 컨디션으로 찌뿌둥했던 테무진과 달리, 보스가 살아난 걸 본 젤메는 기쁨에 겨워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작전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신나게 설명했다. 엇… 테무진, 할 말이 없어졌다. 보통 지위가 높은 사람은, 특히 남자는, 아랫사람이 자기가 틀렸음을 증명하거나 자신의 예측을 벗어난 훌륭함을 보일 때 불쾌해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민망한 순간에 테무진의 장점이 나온다. 그는 젤메를 잘못 판단했음을 즉시 인정하고 영원한 신의를 맹세했다.
“젤메, 넌 좀 짱이다. 내 목숨을 네가 살렸다. 오늘 일을 잊으면 나는 사람이 아니다. 너의 충성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마.”
테무진과 젤메 사이의 온도가 훈훈하게 올라가던 그때, 타이치우드 수뇌부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5
“도망가면 따라붙고, 도망가면 따라붙고… 저 새끼들은 전생에 거머리였나…”
“놈들의 추격을 벗어날 수 없는 건 우리와 놈들의 조건이 같기 때문이에요. 우리나 저쪽이나 군사에 더해 백성들이 붙어있습니다. 그러니 일정한 거리가 쭉~ 유지되는 거죠.”
“당연한 말을 해서 뭐해?”
“만약 백성들을 버려두고 군사만 움직이면…”
“그런 말도 안… 으음 말이 되는데?”
타이치우드 수뇌부는 백성들을 버리고 튀기로 했다. 그러면 속도가 빨라지는데다가, 테무진 군은 백성들을 약탈하느라 추격속도가 더 늦어지겠지… 참으로 비겁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과연 비겁한 결정이었을까? ‘보호자’와 ‘착취자’는 크게 다른 말이 아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백성들은 소수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존재했다. 기실 이 보호라는 것도 지배층의 기득권이 보장되고 난 후에 발동되는 혜택이다. 내가 죽게 생겼는데 하층민을 보호하는 상층계급은 없다. 가족주의를 외치며 직원들에게 군대식 충성을 요구하던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IMF 때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가족’을 자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자본주의는 생각보다 봉건적이다.
테무진은 달랐다. 이건 타이치우드 지배층이 특별히 비겁한 게 아니라 테무진이 별난 경우다. 그의 위대함 대부분이 여기에 있다. 테무진은 자신과 울루스(백성,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백성들의 나라)의 관계를 지배와 복종이 아닌 상호계약으로 봤다. 백성에겐 테무진에 대한 의무가 생기면, 동시에 테무진 입장에선 그들에 대한 책임이 발생한다. 뭐랄까, 뜬금없을 정도로 근대적이다.

테무진이 배신자를 그토록 혐오한 이유는 그가 사회의 구성원리를 ‘약속’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자기 자신도 백성들에 대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착취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그냥 착취다. 테무진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에 굉장히 예민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사치를 멀리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권력자가 된 후에도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나는 평생 누더기를 입고, 병사들과 같이 한데서 잤다. 언제나 백성들이 먹는 것과 똑같은 음식을 먹는다.”
이런 소양이 가능한 이유는 경험 때문이다. 테무진은 출신과 배경에 의해 권력을 얻지 않았다. 그는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여러 계급을 거쳤고, 개인적 역량으로 부하들을 ‘모집’했다. 그래서 자신이 왜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칸인지 계속해서 증명해야 했다. 테무진의 무리는 혈통집단이 아니라 공동의 목표를 가진 이익집단이었다. 그렇다면 테무진의 부하들은 무엇을 위해, 어떤 이익을 위해 모여들었을까?
설마 테무진이 정복자의 운명을 타고난 영웅이고, 영웅의 위대한 여정에 함께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충성을 맹세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았을까? 그럴 리가… 불안하고 가난한 초원에서, 좀 더 잘 먹고 잘 살아보자고 모인 거다. 테무진은 이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배신을 혐오하면서도, 부하들에게 ‘먹고사니즘’을 넘어서는 충성을 요구한 적은 없다.

대표적인 예가 전쟁을 할 때의 태도다. 테무진은 패색이 짙어지면 자신을 위해 죽거나 다치지 말고 각자 살 길을 찾아 도망가라고 명령했다(물론 끝까지 남는 사람들을 쫓아내진 않았다.). 또한 병가지상사라는 말이 있듯이 싸우면 질 수도 있고 후퇴할 수도 있다. 그러니 안 되겠다 싶으면 명령이 없어도 알아서 도망가야 한다. 테무진의 병사들은 목숨만 살아 돌아올 수 있으면 승리, 약탈품, 군 보급품 등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었다. 이건 권고사항이 아니라 군율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테무진의 이런 태도가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궁극의 충성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테무진의 부하들이 한 말 중에 이런 표현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물을 가리키면 물에 뛰어들고, 불을 가리키면 불에 뛰어든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날이 밝았다. 타이치우드 수뇌부와 군사들은 말 그대로 ‘튀었다.’ 버림받은 타이치우드 백성들은 그냥 그 자리에 눌러앉아서 운명을 기다렸다. 자포자기 상태였다. 도망가봐야 잡히고, 싸워봐야 가망이 없다. 타이치우드 진영에 들어온 테무진의 군대… 절망의 순간, 테무진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결정을 내렸다.
“놀라 도망한 백성들일 뿐이다. 모두 살려준다. 자기 군사들에게 가든, 야영지로 돌아가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놓아주도록 한다.”
주르킨 정벌 때와 마찬가지로, 백성을 제외한 적의 지배층에만 책임을 물겠다는 뜻이었다. 뜻밖의 ‘사면’을 받은 타이치우드 백성들이 짐을 꾸려 자기네 병사들이 도망한 곳을 향해 피난행렬을 이룰 때였다. 저 멀리,웬 붉은 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고개에 올라서서 울부짖고 있는 게 아닌가?
“테무진, 테무진! 테무진이다! 테무진을 찾았다!”
‘뭐지, 저 여자는? 머리에 꽃 꽂았나…’

테무진은 병사 하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 저 여자 말이야. 가서 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지 물어보고 와.”
6
“이봐요, 아줌마. 우리 칸께서 통크게 살려주셨으면 다른 사람들을 따라 갈길 가면 되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테무진이 뭐요, 테무진이. 칭기스칸이라고 불러야지…”
“테무진이 내 친한 친구라서 그래요.”
“얼씨구, 친구 같은 소리 하네… 이 아줌마가 정신이 아주 나갔구만?”
“정말이에요. 나는 ‘솔두스’ 씨족 ‘소르칸 시라’의 딸 ‘카다안’이에요. 테무진이 어릴 적 타이치우드 족에 붙잡혔을 때 친구가 됐어요. 우리 가족의 도움으로 테무진이 탈출할 수 있었단 말이에요.”
글타… 붉은 옷의 여인은 그 옛날 포로생활을 하던 테무진을 도와준 소르칸 시라의 딸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이쿠, 제가 카톤(귀부인)님을 몰라 뵙고 실수를 했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 남편이 당신네 군사들한테 붙들렸어요. 당신네들이 남편을 죽여 버리면 난 어떡해요. 어서 테무진에게 가서 내 남편을 살려달라고 전해줘요!”
(카다안의 남편은 타이치우드족의 전사였던 모양이다. 퇴각 중에 테무진 군의 추격대에 꼬리가 잡혔거나,진영에 남아 저항하다가 붙들린 것 같다.)
테무진은 병사의 보고를 듣자마자 카다안이 서 있는 곳으로 냅다 말을 달렸다. 그는 카다안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렸다. 두 사람은 감격에 겨워 서로를 끌어안았다. 테무진에게 카다안은 은인이기 이전에 그리운 친구였던 거다.
“일단 네 남편부터 찾자.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봐.”
하지만 이윽고 들어온 보고는…
“저 그게… 우리 병사가 이미 친구분의 남편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헐…”
아 씨바 이거 어떡하지… 테무진은 미안함에 몸둘 바를 몰랐을 것이다. 그날 밤, 테무진은 카다안과 만난 바로 그 자리를 중심으로 진영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카다안이 자신과 나란히 앉게 했다. 자신과 동급의 인간임을 공식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원래 카다안은 천민 씨족의 여자였다. 역사는 이후 그녀의 이름을 다시는 거론하지 않지만, 테무진과 재회한 후 카다안의 사회적 지위와 삶의 질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하여간 테무진에게는 카다안에게 갚을 게 많았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삼천포로 새 보자.
6.5
근거없는 상상이지만, 테무진과 카다안 사이엔 묘하게 로맨틱한 분위기가 있다. 초원에서 칸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부인 밖에 없다. 나란히 앉았다라… 어쩐지 남녀관계를 암시하는 느낌이 든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장소는 아무래도 테무진의 게르 앞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란히 앉았다가 “안녕, 잘자~”하고 각자의 잠자리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테무진의 게르에 함께 들어갔을까? 함께 들어갔다면 밤새 주사위놀이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손만 잡고 자지도 않았을 거고…
재회하자마자 서로를 끌어안은 것도 너무 격의가 없다. 이전 기사에서 충분히 설명했지만, 몽골초원에서는 어릴 때 약혼이 성사되면 신랑이 신부에게 성교육을 받는다. 꼬마 연인에게 에로틱한 지도를 받으면서 데릴사위노릇을 한다. 즉 어릴 때는 성(性)의 주도권이 여성에게 있다.

카다안은 테무진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을 느꼈다. 성적 호감은 전혀 없었을까…? 둘 다 사춘기였다.테무진이 소르칸 시라의 게르에 올 때마다 카다안이 그를 뉘이고 “보살폈다.” 이 보살폈다는 표현이 많은 상황을 함축한다고 느끼는 건 내 사상이 불순해서인 셈 치자.
테무진에게는 몇 명의 아내가 있었다(아직까지는 보르테가 유일한 아내였다.). 그 중 카다안의 이름은 없다.카다안은 아마 다른 남자와 재혼했을 것이다. 그러나 테무진과 성관계가 전혀 없었다고 장담할 순 없다. 어쩌면 테무진과 당분간 애인 사이로 지냈을 수도 있고, 공공연한 정부(情婦)였을 수도 있다.
자자, 책임 못 질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7
다음 날. 테무진 군은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다. 타이치우드 수뇌부는 멀리 가지 못했다. 테무진 군은 백성을 약탈하느라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롭게 놓아준 백성들이 다시 수뇌부와 군에 합류하면서 이동속도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말았다. 테무진이 백성들을 돌려보낸 데엔 이런 계산도 있었던 것이다.

쿠이텐 1차전의 패배, 연속된 후퇴… 지칠 대로 지친 채 결국 포위당한 타이치우드족은 드디어 저항을 포기했다. 테무진은 타이치우드 귀족층을 “친척의 친척까지 재로 날려버렸다.” 대신 백성들은 무리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아오초 용사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뚱뚱이 칸 타르구타이는 기어이 탈출에 성공했다. 수레를 타고 도망간 걸 생각해 보면, 이동속도도 느렸을 텐데 나름 용하다.
테무진은 드디어 소르칸 시라 가족 전부와 만날 수 있었다. 노인이 된 소르칸 시라와 장성한 칠라온, 침바이 형제 말이다. 은인들이 무사히 살아있는 걸 본 기쁨이 지나가자 서운한 감정이 밀려왔다.
“노인장, 내가 얼마나 그대들을 보고 싶었는줄 아시오. 솔두스 씨족이 타이치우드 씨족에 눌려 사는 천민씨족이라곤 하지만 나한테 넘어올 기회가 영 없었던 건 아니지 않소? 내가 자무카와 갈라지던 날, 타이치우드 놈들이 놀라서 자무카한테 도망갔지 않소. 그때 눈치껏 빠져나와 내 진영으로 넘어온 솔두스족 친구들이 여럿 된단 말이오. 우리가 이렇게 늦게 만나지 않아도 되지 않았소? 나는 그대들을 ‘밤에는 꿈 속에, 낮에는 가슴에 그리며’ 매일같이 생각했는데…”
“나라고 왜 테무진 칸과 함께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나는 솔두스 씨족의 수장이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수장인 내가 칸에게 귀순해버리면 남은 사람들, 남은 가축들이 어떻게 됐겠습니까? 아마 타이치우드 귀족들이 우리 일족의 씨를 말렸을 겁니다. 왜 조급하게 서두릅니까? 그대가 타이치우드를 물리치고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데.”
듣고 보니 맞는 말이지 않은가? 테무진은 소르칸 시라가 현명했음을 선선히 인정했다.
“아, 그렇구려. 노인장 말이 맞소. 내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소.”
이때부터 소르칸 시라는 원로 대우를 받으며 살게 된다. 침바이, 칠라온 형제는 테무진의 중요한 장수가 되는데, 이 중 칠라온이 특히 주목할 만한 인재다.
분위기 참 좋다… 좋은 건 좋은 거고, 이제는 테무진을 죽일 뻔한 새끼를 잡아 족칠 차례였다.
8
테무진은 포로들을 앉혀놓은 자리에서 물었다.
“우리가 싸울 때 내 백마의 목을 화살로 맞춘 자가 누군지 아는 사람?”
테무진은 범인을 손쉽게 적발하기 위해 두 가지 꼼수를 썼다. 일단 백마가 다쳤다고 뻥을 쳐서 죗값을 낮춰놓았다. 어차피 전투 중이었다. 말을 다치게 하는 것까지야 충분히 정상참작이 가능한 일이었다. 두 번째로 마치 상이라도 줄 것처럼, 아는 사람 있으면 일러바치라고 했다.
활을 쏜 당사자인 지르고아다이는 테무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분명히 테무진의 목을 조준했는데, 말이 맞을 리가 없지 않나. 싸움이 끝나기 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테무진이 치명상을 입었던 게 확실해졌다.
지르고아다이는 성격이 급하고 과단성 있는 사내였다. 시쳇말로 ‘화끈했다.’ 그는 이렇게 긴장한 채 숨어서 목숨을 부지하는 상황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지르고아다이는 벌떡 일어서서 테무진 앞으로 걸어나갔다.
“제가 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맞춘 건 말이 아니라 당신의 목인데요?”
“어… 그… 그러냐?”
테무진은 지르고아다이의 당당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요놈 봐라?’
“뭐, 저도 사람인데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래 뵈도 꽤 쓸모가 있는 놈입니다. 눈 딱 감고 살려주시면 크게 쓸 수 있는 인재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이건 비굴한 게 아니라 솔직한 거다.
“영 괘씸해서 안 되겠다 싶으면 처형하십시오. 그까이꺼 ‘제 피로 조그만 땅을 적시는’ 일밖에 더 되겠습니까. 이 마당에 중간이 어딨습니까? 깔끔하게 가죠.”
테무진은 지르고아다이의 태도가 마음에 쏙 들었다. 활솜씨도 탐났을 것이다. 테무진은 지르고아다이를 부하로 삼고 싶은 마음에 그를 살려줘야 하는 이유를 직접 설명하기까지 했다.
“전투중에 적의 우두머리를 쏘아 맞추는 게 뭐가 잘못된 건가? 이 친구를 봐라. 솔직한데다 당당하고, 죽음도 겁내지 않는다. 동무할 만한 사람이다. 너, 이름이 지르고아다이라고 했던가?”
“네.”
“짜식, 살려준다. 앞으로 날 위해 싸워라.”
“충성이 뭔지 보여드리죠.”
“그래. 그럼 네 이름 좀 바꾸자.”
“네…? 이름을 바꿔요?”
몽골초원에서는 태어날 때 부모에게 받은 이름을 평생 바꾸지 않는다. 칭기스칸이니 구르 칸이니 하는 건 이름이 아니라 호칭일 뿐이다. 테무진도 가족과 가까운 사람에게는 본명으로 불렸다. 본명을 바꾼다는 건 굉장히 생뚱맞은 거다. 테무진이 상상력을 발휘할 줄 아는 인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네 이름은 앞으로 ‘제베’다.”
아무리 맘에 든다고 해도, 칸을 죽일 뻔한 건 심각한 죄다. 테무진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름을 바꿈으로써 ‘지르고아다이’로 산 한 남자의 과거를, delete키를 누르듯 그야말로 삭제해버린 거다. 대신 테무진에게 충성하는 제베라는 이름의 새로운 인간을 생성시켰다. 새 캐릭터의 이름이 제베인 이유는, 테무진이 이 남자와 ‘제베’를 통해 처음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보통 제베를 ‘화살’로 번역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하진 않다. 제베란 구체적으로 말해 무기에 달린 쇠, 그 쇠의 날카로운 ‘날’이나 ‘끝’부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창에는 제베가 있다. 창에는 날이 있고, 날에는 뾰족한 끝이 있으니까. 화살엔 대체로 제베가 있지만, 끝이 뭉툭한 고두리살에는 없다. 철퇴는 쇳덩어리를 단 무기지만 형태상 제베가 있을 수 없다.
(예문)
보르테 : 여보, 당신 창의 제베가 구부러졌어요.
테무진 : 그러게. 이따 망치로 두들겨 펴서 다시 살려내야겠어.
개인적으로 제베를 ‘날끝’정도로 번역하면 되겠다는 생각이다. 참고로 ‘날끝’은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원래 있는 단어다. 독일현대철학의 권위자 이기상 교수가 하이데거의 철학개념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우리말로 만든 번역어다.
전설의 장수 제베는 이렇게 탄생했다.
8.5
제베의 전설과 함께 수부테이의 전설도 탄생하게 된다. 원래 수부테이는 테무진의 ‘케식’ 멤버였다. 케식은 칸의 호위군사를 뜻한다. 어느 정도 규모의 무리를 이끄는 칸들은 케식의 호위를 받았다. 테무진은 수부테이를 제베에게 맡겼다. 물론 제베의 천재적인 군사능력이 검증된 후였다. 활솜씨가 다가 아니었던 거다.
이하의 대사는 순전히 상상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대사처럼 파란색으로 표기하지 않고 회색으로 처리하도록 한다.
“이봐, 수부테이라고 알지? 젤메의 친동생 말이야. 글쎄 이 녀석이 말이야, 너무 처먹어. 나이 좀 들면 타르구타이처럼 말도 못 탈 거 같다니까? 이놈이 원래 숲속에서 대장장이 하던 친구라 그런지 말 타고 사냥하는 취미가 없어. 그러니 몸매관리가 될 리가 있나…”
실제로 수부테이는 인생의 반 이상을 고도비만으로 보내게 된다.
“아니, 말이 힘들어 할 정도로 살이 쪘으면 케식에서 자르면 될 거 아닙니까?”
“그게, 이 친구가 뭔가 특별한 게 있어. 군사작전을 좀 짤 줄 아는 거 같아. 그런데 재능이 어디까지인 줄 모르겠단 말야. 무식할 땐 또 엄청 무식하고… 어쨌든 그냥 썩히긴 아무래도 좀 아까워. 그래서 자네 부관으로 붙여보려고.”
“설마 지금 저한테 폭탄을 돌리시려는…”
“자네 이름이 왜 제베더라?”
“성심껏 가르치겠습니다.”
숲 속 대장장이로 성장해 테무진의 케식이 된 수부테이. 그는 제베의 부관으로 커리어를 쌓으면서 전쟁이 뭔지를 ‘제대로’ 배운다. 제베-수부테이 콤비의 이야기 <투 가이즈> 편을 기대하시라. 거기까지 가려면 몇 편 남았지만.
outro
타이치우드 백성들을 흡수한 테무진의 울루스는 오논 강 상류로 올라가 겨울을 났다. 한편, 목숨을 부지한 타르구타이는 테무진의 눈을 피해 숲 속에 숨어 지내고 있었는데…
(다음편 ‘패자의 역습’에서 계속)
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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