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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5. 28. 목요일

펜더







러일전쟁으로 일본의 전쟁 방식은,


‘기습 공격 후 선전포고’


로 가닥이 잡힌다. 일본은 언제나 상대방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뒤에 전쟁을 시작했다. 상당히 비신사적이고, 국제적으로 비난 받을 행동이지만, 이를 딱히 제재할 만한 수단은 없었다. 결국 이들의 못된 버릇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확실하게(?) 고쳐진다.



1. 협상결렬. 그리고 기습 준비


1904년 2월 4일 일본은 러시아와의 협상 중지를 선언한다. 그와 동시에 일본은 마산포와 원산 등에 일본군을 상륙시키고, 전쟁 준비에 들어간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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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아무리 무지몽매하더라도 선전포고 없이 개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장관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이 생각이란 걸 하는 존재라면, 감히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부분은 유념해서 봐야 하는 게, 당시 러시아 황제나 장관들의 판단을 안일하다고만 여겨서는 안 된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을 둘러싼 국제정세를 봤을 때 전쟁을, 그것도 일본이 먼저 시작할 거라고 예상한 나라는 아무도 없었다. 영토, 국민, 생산력, 공업화, 철도 노선 길이(당시에는 철도 노선의 길이가 곧 국력을 의미했다), 병력, 해군력, 경제력 등등 어느 하나라도 러시아를 압도할 만한(최소 비슷한) 수치가 일본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기습공격을 했다.


일본의 핵심 목표는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제국의 극동함대였다. 마침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이 결빙기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극동함대는 여순항에 정박해 있던 상황이라 일본 해군은 여순항 봉쇄에 성공한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1904년 2월 4일 수십 척의 극동함대가 여순항을 떠났다는 정보를 받자마자, 연합함대 사령관이었던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제독이 사세보에서 제물포와 여순항을 목표로 함대를 발진시킨다. 2월 8일 여순항 앞바다에서 ‘여순항 해전’을 치르며, 러시아 함대를 여순항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극동함대와 수 차례의 격전을 치렀지만, 결국 여순항의 해안 포대 때문에 결정적인 타격은 입히지 못하고, 여순항 봉쇄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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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 해전 당시 러시아를 선박을 격침하는 일본 전함


이렇게 시선을 여순항으로 돌려놓은 상태에서 약 3천 명의 일본군이 제물포에 상륙한다. 이때 제물포 항에 수많은 열강들의 군함들이 정박해 있었는데, 이들은 ‘순진하게도’ 일본 해군에게 항의를 한다. 그에 돌아온 건 일본 해군의 협박이었다.


“전투 중 피탄을 당해도 책임지지 않는다!!”


아예 막 나가기로 작정을 한 것이었다. 일본 해군은 곧바로 러시아 해군의 바략과 카레이츠를 공격했고, 14대 2의 전력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 전함은 자침한다.


뒤이어 인천항에 5만 명의 일본 육군이 상륙했다. 전격적인 상륙이었다. 1904년 2월 12일 러시아 제국 공사가 철수를 했고, 러시아와 조선은 국교단절 상태가 된다. 이틈을 파고들어 일본은 조선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한다. 이미 러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04년 1월 23일,


“조, 조선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거야.”


라고 선언했지만 완전히 일본의 ‘따까리’가 된 상태라 별 소용이 없었다. 1904년 5월에는 ‘대한시설강령’에 의해 후방기지가 된다.


1904년 5월 1일 일본은 압록강으로 진격했고(압록강 전투), 러시아 육군과 첫 교전을 치른다. 그러나 전투는 싱거웠다. 러시아는 선선히 뒤로 물러났고, 일본군은 별 저항 없이 압록강을 건널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전략방침은 간단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지원될 후속병력들을 기다리기 위해서는 시간을 벌어야 했던 것이다. 단순하기로는 일본의 전략방침도 만만치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순항을 함락하라!”


여순항이야말로 러일전쟁의 핵심 목표였고, 전쟁의 성패를 가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극동함대를 격파해야 승기를 잡을 수 있고, 혹시 모를 발틱함대의 진출에 대비해 기항지를 없애버려야 이후의 전쟁국면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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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


러일전은 ‘발틱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려는 힘’과 ‘발틱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끝내려는 힘’의 충돌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병력은 20만 수준이었지만, 러시아 군은 200만까지 끌어올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빨리 전쟁을 끝내야 했다.


<언덕 위의 구름>에 여순항을 차지하기 위한 일본 해군과 육군의 노력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일본 해군은 여순항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러시아 해군을 압박하기 위해 아예 항구를 봉쇄해 버리는 작전도 펼쳤고(시멘트를 채운 배를 항 입구에 자침시켰지만 실패했다), 소소한 포격을 계속했다. 이 와중에 기뢰에 접촉해 수척의 전함을 서로 잃어야 했다. 러시아도 여순항을 돌파하기 위해 몇 번 시도를 해봤지만, 그때마다 일본 해군의 포격에 밀려나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군이 기대할 수 있는 건 일본 육군이었다. 육군이 여순 요새를 치고 들어가 그 위에서 항만에 있는 러시아 해군을 포격하는 것이다. 정확한 관측정보만 줘도 일본 해군이 포격할 수 있고, 육군 포격에 밀려나 여순항을 빠져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육군의 진격과 여순항의 함락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상황이었다.



2. 일본이 간과했던 부분


여순의 외곽에 있던 금주성과 남산을 함락시킨 일본 제2군. 그러나 이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3,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당시 일본 대본영은 제2군의 보고를 받은 직후,


“압록강 도하 작전에서도 1,000명 미만이었는데, 3,000이라니 ‘0’을 하나 잘못 붙인 게 아닌가?”


라는 반응을 보였다. 대본영도 단 한 번의 전투로 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5월 1일 손쉽게 압록강을 건넜을 때만 해도 일본군은 손쉽게 러시아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금주성에 다다랐을 땐 ‘지옥’을 마주해야 했다. 일본군은 러시아 야전 축성의 달인 로만 콘드라첸코 소장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급작스럽게 만든 요새였지만, 촘촘히 맥심 기관총을 배치해. 후방에서 날아오는 중포들의 지원 사격으로 돌격하는 일본군들에게 ‘육편(肉片)’이 되는 영광(?)을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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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편의 영광을 안겨준 로만 콘드라첸코 소장


당시 일본 제4보병 사단장인 오가와 마다쓰구 장군의 기지가 없었다면, 금주성을 함락하는데 더 많은 병력이 소모됐을 것이다. 당시 오가와 마다쓰구 장군은 집중 포격으로 러시아군 진지를 갈아엎은 뒤 보병을 육탄돌격 시켜 간신히 남산 요새의 좌익을 함락 시킬 수 있었다. 어렵게 요새를 함락시켰지만, 한 번의 전투로 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건 일본군으로서는 충격이었다.


‘20세기 최초의 대전투’


는 일본군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줬다. 철조망, 기관총, 중포로 방어된 진지 앞에 ‘앞으로 돌격’이 어떤 결과를 안겨 주는지 일본군은 몸으로 체험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물량전’ 앞에 일본군은 일본의 국력으로는 이만한 ‘물량전’을 치를 수 없다는 걸 온몸으로 깨닫는다. 근대화의 힘이 전쟁을 어떤 식으로 ‘변질’시키는 지 뼈저리게 체험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당시 전투를 수치로 분석해 보면, 일본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알 수 있다. 제2군이 남산에서 단 하루 동안 사용한 포탄만 34,600발, 총탄은 220만 발이었다. 이는 청일전쟁 전 기간에 걸쳐 소비한 것과 같은 양이다. 결국 일본은 전쟁 개시 반년 만에 포탄 재고가 동이 나 영국과 독일에 긴급 주문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포탄이 도착하는 12월까지 대규모 작전을 하기 힘들었다. 근대의 ‘물량전’을 제대로 겪어야 했었던 일본이었다.


물론 당시 러시아 측도 금주성과 남산 전투에서 충격을 받았다. 축성의 달인 로만 콘드라첸코 소장, 대대적으로 배치한 맥심 기관총, 중포의 지원 등등 화력 면에서 전혀 밀릴게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쉽게 금주성이 함락된 것이다. 물론 급작스럽게 요새를 구축하느라 허술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 ‘로만 콘드라첸코’ 소장이 만든 진지였다. 게다가 신무기인 맥심 기관총을 빼곡하게 채워 넣었는데도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은 뒤이어 터진 ‘203 고지 전투’에서 달랠 수 있었다.


근대의 힘은 ‘수비자’에게 절대적인 우위를 안겨다 줬다. 그리고 대량살상의 시대가 왔다는 걸 일본은 ‘최초로’ 깨달았다. 그러나 이건 악몽의 시작일 뿐이었다.



3. Port Arthur...여순으로 가는 길


일본 근현대사를 다룬 수많은 작품들에 ‘비극’으로 포장된 203 고지의 전투가 이렇게 시작된다. 가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면, 203 고지 전투의 느낌이 나는 ‘특공대’의 느낌을 확인할 수 있다. 어깨에 흰 띠를 두른 ‘백거대’는 어쩌면 일본 근현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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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대가 이렇게 생겼다


시작은 아주 간단했다.


일본 해군은 갖은 수를 다 썼지만, 극동함대를 분쇄하지 못했다. 문제는 요새화 된 여순항의 해안포였다. 항구로 접근하면 날아오는 포탄 앞에서 속수무책인 상황. 아예 항구를 봉쇄해 버리려는 시도를 했지만, 이 역시 실패한다. 러시아 역시 항구를 나오기 위해 몇 번의 시도를 했지만, 이 역시 일본 해군의 공격에 무산되었고. 일본도 러시아도 서로 노려만 보고 있었다.


이 당시 금주성을 함락한 일본 육군 제2군이었지만, 여순 요새를 공략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요양에 위치한 러시아 육군 주력과의 일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 문제는 계속해서 극동함대를 살려뒀다간 일본의 본토가 위험해 진다는 걸 삼척동자라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섬나라다. 모든 수출입 물류는 ‘바다’로 통한다. 이 바다가 막히는 순간 일본은 망하는 거다. 게다가 지금 일본이 싸우는 러시아는 극동함대와 발틱함대라는 엄청난 전력을 갖춘 해양 대국이다. 각각의 함대와 맞서 싸우는 것도 힘겨운데 만약 이 두 개의 함대가 합쳐진다면? 일본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이었다.


어쨌든 각개로 떨어져 있을 때 하나씩 제압해 나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여순’을 함락시켜야 한다. 함대결전으로 극동함대를 분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결국 일본 대본영은 요양에서의 결전에 투입해야 할 병력 중 일부를 뽑아 여순항 공략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제1, 9, 11보병사단을 뽑아 제3군으로 편성한다.


문제는 제3군 사령부의 인선이었다.


일본이 망할 때까지 잊히지 않을 그 이름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과 이지치 고스케(伊地知幸介)소장의 등장이었다. 조슈번 출신의 노기 장군은 애초에 근대전을 지휘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지치 고스케 장군을 3군 참모장에 임명했다. 고스케 참모장은 포병과 출신으로 일찍이 독일 참모본부에 유학했던 경험이 있었고, 당시 요새 공략을 위해서는 최고의 인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 인선은 일본 역사에 몇 안 되는 최악의 ‘군 인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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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노기 마레스케 (우) 이지치 고스케


당시 일본 육군과 대본영에서는 여순 함락에 대한 ‘낙관론’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청일전쟁 당시 단 하루 만에 여순항을 함락한 경험이 있었던 일본이었기에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문제는 당시 러시아는 여순항을 불침의 요새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여순항은 일본이 하루 만에 함락한 허접한 항구가 아니라 러시아가 요새로 뒤바꿔 놓은 ‘포트 아르트르(Port Arthur)’로 변신해 있었다.


게다가 금주성과 남산의 함락을 지켜 본, 여순 요새 사령관인 아나톨리 스테셀 중장이 콘트라첸코 소장에게 요새를 보강하라고 명령했다. 각 포대와 보루(堡壘)는 콘크리트 방벽으로 둘러쳤고, 병사들의 거주와 보호를 위해 지하 공간도 마련했고, 각 포대와 보루 사이의 원활한 연결을 위해 지하 통로까지 만들었다. 일본군의 운명은 이미 결정 된 듯 보였다.



4. 블랙 코미디


<언덕 위의 구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연합함대 참모인 아키야마 사네유키 소좌는 여순 요새를 관찰하다가 203고지를 발견한다. 다른 고지들은 포대와 벙커로 도배 돼 있었는데, 유독 203 고지만은 허허벌판의 민둥산이었던 것이다. 사네유키 소좌는 이를 상부에 보고했고, 해군은 육군에게 이 사실을 통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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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203 고지


“203 고지만 점령하면 된다. 무리하게 다른 고지를 공략해 아군 피해를 가중시킬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지치 고스케 소장이 이를 거절한다.


“육군은 육군만의 작전이 있다. 굳이 해군에서 요청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저 요새를 효과적으로 공략시킬 작전을 세워두고 있다.”


그리곤 러시아군이 요새화한 북쪽의 이룡산과 동북부의 동계관산 사이를 치고 들어갔다. 일본 육군은 판판히 깨져나가며, ‘삽질’을 시작한다.


당시 해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육군의 여순 요새 공략을 위해서는 중포가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해군의 중포부대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이지치 고스케 소장이 또 거절했으나 해군은 억지로 이를 떠넘겼다. 결국 해군 중포대는 제3군에 배속된다.


그리고 운명의 1904년 8월 19일, 일본 제3군은 여순 요새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제1차 공세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제3군은 ‘개죽음’을 목도한다.


포병의 공격 준비포격 이후 착검한 보병들이 요새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요새로 달려갔을까? 손쉽게 요새를 점령할 수 있다는 망상을 하고 있었을까? 그들의 운명은 순식간에 결정됐다.


이룡산, 동계관산, 송수산에 배치된 포대에서 일제히 중포들이 불을 뿜었다. 요새 근처의 보루까지 접근하기도 전에 이들은 모두 육편(肉片)이 돼 공중으로 산산이 흩어졌고, 운 좋게 벙커와 보루 근처까지 간 일본군은 철조망 앞에 가로막혀 머뭇거리다 벙커와 보루 여기저기에 배치 돼있던 맥심 기관총에 총알받이가 돼야 했다. 당시 스텔라 사령관은 각 벙커와 보루마다 2~3정의 맥심 기관총을 배치시켰다. 1차 세계대전 당신 단 2정의 기관총으로 1개 대대의 병력을 저지한 기록을 참고한다면, 일본군이 얼마나 무모한 작전을 펼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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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쨌든 이 1차 공세로 제3군은 그야말로 녹아버렸다.


제1사단의 경우는 중대규모로 전멸 당하는 사태가 속출했고, 대대장과 중대장 등 현장지휘관의 손실이 막대했다. 제9사단의 경우도 철조망을 절단하고 벙커와 포루까지 진출했지만, 항구 내 군함에서의 포격과 이웃한 벙커와 보루에서 날아오는 기관총탄에 의해 장교의 과반수를 잃었다. 당시 제3군의 전투참가 인원이 50,765명이었는데, 사상자 수가 무려 15,860명에 달했다. 금주성 전투의 사상자 숫자는 애교로 보일 정도의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1차 공세의 실패 원인은 청일전쟁 당시의 낡은 전술 사상 때문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 당시 ‘효과적으로’ 여순항을 점령했던 생각으로 예전처럼 ‘강습탈취전법’을 그대로 반복했다. 수 시간 혹은 수일 동안 포격을 가한 다음 보병들이 기습적으로 들어가 요새를 탈취한다는 전술 말이다. 그러나 요새화한 벙커와 포루, 사각을 메워주는 기관총좌들은 청일전쟁 시절의 요새공략전술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피로서 배웠다.


155일간 벌어진 203 고지의 혈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펜더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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