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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결말 부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뭐, 실존인물들을 모델로 한 작품인지라 스포일러라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합니다만... 그래도. *



감독: 이준익
주연: 강하늘, 박정민, 김인우, 최희서, 최홍일, 김정석, 신윤주, 민진웅, 성홍일
음악: 모그
촬영: 최용진
12세 관람가 / Black & White / 110분




너희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이준익이 감독한(그리고 또 다른 영화감독인 신연식이 각본을 쓴) 신작 <동주>는 뭐랄까. 의외다. 처음 포스터를 봤던 순간부터 흥행과는 상관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을 깨고 손익분기점 50만 명을 넘겨 80여만 명 대를 달리는 중이다. 웬일로 극장가에서 잘 버티고 있길래 기분이 좋아서 관람하러 갔다. 작품은 기본적으로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다룬 전기물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기의 만주 명동촌에서 태어나 각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동주와 몽규는, 창씨개명이 시작될 때쯤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난다. 타향에서도 원하는 목적을 이루려 애쓰던 두 사람은 당시 일본 정부에 의해 체포된다. 그리고 끝내 해방을 목전에 두고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전기물이 주는 감흥이란 대략 이렇다. 그저 '사람'의 일생을 다뤘을 뿐인데, 같은 사람으로서 이런 일생들을 자연스레 존중하고 우러러보게 되는 것 말이다. 위인이 됐던 사람들은 흔히 시대가 만들어낸 체제에 불화하거나 주류가 된 생각들과 충돌을 일으켜 왔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살았던 시대는 일제강점기였다. 기본적으로 물리적, 체감적 거리가 있다만, 이 시대의 사람들은 마치 명예의 전당에 올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곤 한다. 태어날 때부터 사명감이 부여되어 오직 그것만으로도 인생을 살 수 있을 듯 보이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엄혹한 시대에서도 '일상'은 분명 존재했으리라. 존재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일제강점기 때도 연애하는 사람 있었을 테고, 어두운 시기를 아무 생각 없이 보냈던 사람도 있었을게다. 심지어 일본인의 침략과 차별행위들마저 그 당시에 무덤덤할 정도로 익숙하게 받아들여진 측면도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적인 시간이 있지 않았을까. 물론 이는 해방된 지 71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태껏 제대로 된 처벌과 보상이 이뤄지지 않은 사회에서 산 사람의 시선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동주>는 이런 부분에서 인상적이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작품들은 독립에 대한 사명감을 부각해서, 일상에 대한 묘사는 주인공들이 누리고 싶은 꿈이나 과거의 추억으로서만 표현되곤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명동촌에서 살던 시절의 동주와 몽규가 순수한 의미로서 평화롭게 시와 혁명에 매혹되는 순간들을 나름 길게 보여준다. 덕분에 일제강점의 시대와 우리에게 있어 위인으로 받아들여지는 사람들의 삶을 탁 트인 광장보다는 밀실에서 사적으로 가깝게 구경한다는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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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시네마스코프 역시 그저 시대의 삭막함만을 현실적으로 표현하려고 이용되지는 않는다. <동주>의 초, 중반부까지 흑백 영상은 일종의 향수마저 떠오르게 만드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대해서 말이다! 컬러보다는 흑백으로 찍힌 것들이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환상을 방부제 뿌린 듯 보존해주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동주와 몽규를 연기한 강하늘과 박정민은 여태까지 출연했던 작품들을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특히 강하늘) 작품 포스터의 말마따나 '빛나던 미완의 청춘'의 표상으로서 더할 나위 없다.


위에서 언급한 이런 사적으로 가까운 거리감은 윤동주란 인물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의 감성을 충만하게 만들어줬던 시인의 시가 자신의 생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안다는 건 중요하다. 천재라 불린 사람들이 남긴 작품들을 접하다 보면, 마치 가만히 있어도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떠오른 결과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착각이라는 듯, 윤동주가 쓴 아름다운 시를 그가 현실에서 겪는 일들 직후에 배우 강하늘의 나레이션으로 읽어주는 방식을 취한다. 이로써 그 역시 주변에서 발생하는 일이나 사물들로부터 영감을 얻는다는 사실이 관객에게 각인된다. 동시에 사회의 분위기도 작품세계나 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예술가 하면 사회로부터 동떨어져 자신만의 세계를 펼친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현실의 자장 속에서 활동을 해 나가는 사람도 있다. 그가 쓰는 예술적인 시들의 영감이 모두 일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동주>를 보다 보면 두 인물이 방 안에 들어와 성냥을 이용해 불을 붙이는 순간들이 문득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왜냐면 두 사람은 촛불에서까지도 아름다움을 발견해낼 테니까. 조금 과장을 보태본다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배리 린든>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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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동주>가 일제강점기의 배경에서 '평화로운 순간'을 거론했다고 하여 그때를 추억으로 기억하려는 작품은 아니다. 작품은 두 개인의 지향점이 바뀌어 가는 순간들을 보여주며, 왜 그 시대가 '암흑기' 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대표적으로 동주가 쓰는 작품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점 고독과 음울함을 더해간다. 그의 시적 감수성은 고향인 명동촌에서 '아우의 인상화'를 쓰던 초반부에서 '참회록' 이나 '쉽게 쓰여진 시' 등으로 대표되는 중반부에 이르러 꽤 많이 달라져 있다. 산문을 쓰던 몽규 역시, 자신이 가진 목적의식에 맞추다 보니 점점 다른 글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이고 곧 글 자체가 쓸모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가 끝내 내린 판단은 잉크 대신 총을 들어 손에 피를 묻히는 쪽이 어울린다는 것이다. 작품의 흑백 영상은 이에 맞춰 조금씩 미묘하게 변화한다. 이전까지는 과거에 대한 환상을 아련하게 보존해 줬지만, 곧 인물들로부터 갑자기 삶의 활력을 빼앗아 간 듯한 인상을 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에 맞춰 동주와 몽규의 모습도 점점 생명력을 잃어 창백한 시체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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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는 여기서 윤동주의 시 쓰기와 송몽규의 항일투쟁을 비슷한 위치와 무게감으로 보여주려 노력한다. 작품에서 묘사되는 동주의 성품은 다소 수동적이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주류 언론으로부터 글로 인정을 받고, 사람들을 리드하는 몽규의 모습을 보며 경외감과 질투심을 함께 느낀다. 이를 알고 있는 몽규는 동주를 보호하려는 요량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위험한 일에 절대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 그는 윤동주가 가진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가는 길을 절친한 친구와 함께 가기엔 위험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시도 결국 세상이 시인의 필터 속으로 들어가면서 창작되는 법이다. 작품은 시에 대한 애착 또한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투쟁의 애착과 전혀 뒤질 것이 없음을 말한다.


몽규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라면 문학이 무슨 소용이냐" 혹은, "세상을 바꿀 용기가 없어서 문학 속으로 숨는 것이 아니니" 라며 지적하는 순간, 동주는 처음으로 날카롭게 반응한다. 세상에 대해서 좋든 싫든 간에 그만큼의 관심이 없으면 시의 씨앗이 발아할 토양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째서 시를 쓰는 행위, 시라는 예술이 혁명 투쟁과 끊임없이 비교되어야만 하는가? 독립에 관한 시 대신 개인적인 감정과 행복을 쓴다고 해서 '무쓸모' 하다는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작품 속에서도 나름대로 시대가 가진 각박함을 많이 드러내고 있지만, 작품에서 일제강점기를 살아간다는 것을 체감케 만드는 순간은 이럴 때다. 마음대로 조직을 결성할 수도 없을 때. 혹은 쓰고 싶은 시조차도 마음대로 쓸 수 없고, 저항시를 쓰지 않으면 시로서의 가치도 인정받을 수 없을 때. 예술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급격하게 좁아질 때. 그리고 그 예술을 표현하려는 개인의 자유가 억압될 때 말이다. 


끊임없이 한국어로 시 쓰기를 멈추지 않는 동주의 모습은 그래서 절대 가볍지 않다. 김구의 밑으로 들어가 항일 투쟁 활동을 벌이고, 학생들을 조직하여 운동하려는 몽규와 대비시켜도 말이다. 비록 작품 속에서 스스로 '도망치는 행위' 라고 표현하지만, 그의 시 쓰기는 곧 개인이 할 수 있는 자유의 영역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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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전체가 인상적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뇌리에 깊게 박힌 순간은 결말 부분이었다.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시집을 일본인 쿠미에게 부탁할 때, 그녀는 한국어 제목을 어떻게 발음하느냐고 동주에게 묻는다. 그는 천천히, 신중하게 그녀에게 말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네 번 발음하는 그 사이사이에는 짧지만, 굉장히 깊은 침묵이 들어가 있다. 침묵 속에는 이 단어를 정하기까지와 입으로 말하기까지 얼마나 큰 사색과 고뇌의 시간을 거쳤는지가 들어있다. 그리고 이 단어선택과 입을 통해 발음함으로써, 자신이 앞으로 당할 수도 있는 일에 관해서 감내하겠다는 결의도 들어있다. 마지막 단어인 '시'를 발음할 때, 작품은 프리즈 프레임으로 잠시 멈춰 선다. 실제로 시를 읽을 때 발생하는 침묵이 영상으로 구현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과 윤동주라는 인물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는 순간이다.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땅 위에 발 딛고 남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간 순서로 따져보면 제목을 읊은 후, 동주는 일본 경찰에 의해 구속되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내셔널리즘을 강조하는 국가에서, 이렇게 사적인 방식으로 일제강점기 시대를 다루고 또 기억하게 만드는 작품은 참 간만에 본다. 김호선 감독의 <사의 찬미> 이후로 간만일까. 심지어 잘 만들었다. 이 작품은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엄혹한 시대에 의해 어떻게 '위인'으로 변해갔는지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때는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를 지키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작품은 주권을 빼앗긴 나라에서 살아가는 역사적 풍경을 개인적인 지층으로까지 가지고 오는 데 성공한다. 한국에서 이 작품과 비슷하거나, 혹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시대를 다루는 작품들은 주로 '(너네가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우리를 기억해줘'라는 식으로 닭살 돋게 기억을 강요하곤 한다. 그 강요는 때로 작품성을 압도했었다. 그러나 <동주>에서 구현된 일제강점기 속 억압의 역사는 수능을 대비하여 암기해야 할 지식이나,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증명받기 위해 거쳐야 할 필수 암기과정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대신 삶의 한 풍경으로서 마음속에 이해된다. 그때를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마저도.

 


<동주>를 보고 있으면, 작품 속 동주와 몽규는 삶에서 그런 결말을 맞이하기를 원하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은 이들이 이른 죽음을 맞이했으니, 똑같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한다. 과연 당신에게는 매혹과 정열을 불러일으킬 만한 대상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라도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언젠가 대답해야 할 질문으로 생각하고 계속 잊지 않는다면, 우리 삶도 아마 꽤 괜찮아질지 모를 일이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달랐다면 각자 남다를 정도로 매혹되어 정열을 쏟는 대상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세상과 불화되었다. 결국, 영원히 젊은 모습으로 역사에 남았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으며, 대상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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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

 

 

1) <동주> 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은 결말에 이르기까지 묘사되는 부분과 엔딩 크레딧, 그리고 제목이다. 


제목에 대해서는 사실 윤동주와 더불어 송몽규의 이름까지 다 포용할 수 있는 식으로 지어졌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한국영화들이 제목을 짓는 방식이 주로 끝에 '~들' 이 붙는다거나 이름, 단어로 제목 표현하기, 외국 작품 제목 베끼기로 나뉘다 보니 '동주' 말고 다른 제목은 없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에 인상 깊게 읽었던 안소영 작가의 소설 제목도 <시인 / 동주>였는데 말이지. 공연되는 뮤지컬 이름도 <윤동주, 달을 쏘다> 이고. 단순히 이름만 적는 것보다는 더 나은 제목을 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굳이 '동주'라는 제목 아래에 부제로 '윤동주, 송몽규를 그리다' 라고 적는 것보다는 말이다. 송몽규도 공동주인공인데...


윤동주가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 역시 좀 불만이었는데, 이건 개인차가 있다고 생각하는지라 그냥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기로 하겠다. 다만 작품을 보면서 위에서 언급했던 시대극 특유의 '사명감' 적인 정서가 죽음 직전의 순간에서 갑자기 보인 것 같아 몰입이 좀 깨진다는 느낌이 있었다. 물론 뒤에 진짜 와장창 깨지고 마는 순간이 나와서, 그나마 양호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몰입이 정말 깨져버린 순간은, 바로 작품이 끝나자마자 바로 강하늘이 부른 주제곡인 '자화상' 이 나올 때였다. 나쁜 곡은 아닌데, 왜 굳이 그렇게 작품이 끝나자마자 바로 나와야 했을까. 거기다 색이 많이 빠지긴 했지만 갑자기 컬러로 찍힌 시퀀스가 나오고... 물론 극장을 나오면서 함께 영화를 봤던 다른 관객들의 반응은 좋았다. 노래 듣고 나니 눈물이 더 난다던가, 혹은 그 곡 덕분에 작품에 대한 기억이 오래 남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좀 더 원활한 흥행을 위해 삽입했다는 의도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준익 감독이나 음악을 맡은 작곡가 모그의 입장에서는 필요했으리라고 본다.

 

제목 역시 그렇다. 아마 송몽규를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 영화 제목에서 몽규는 빠지고 동주만 남았겠지. 확실히 이준익이 제작자도 겸하는 감독이라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히 작품의 흥행을 위한 결단들을 내릴 줄 아는 것 같다. 물론 <동주>에 한해서는 제작자적인 생각으로 내린 듯한 결정들이 내겐 아주 별로였지만 말이다.



2) 작품에서는 두 명의 인물이 중요하게 나온다. 한 명은 윤동주와 송몽규의 친구이자, 훗날 유족들이 끝까지 지켜왔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는데 큰 도움을 줬던 동료 강처중. 그리고 윤동주가 존경하는 시인이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강처중과 함께 서문을 썼던 정지용이다.

 

강처중은 미망인의 증언에 의하면 좌익 활동을 배후에서 지원했다고 지목받아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직전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두 달 정도 요양한 그는 아내에게 '소련에서 공부하고 오겠다.' 며 말한 뒤, 월북했다고 한다. 강처중이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지용 시인은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 그런데 1950년 9월경 경기도 동두천 부근에서 미군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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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주> 에서 윤동주, 송몽규와 함께 문학잡지를 만드는 동창생으로 문익환이 짧게 등장한다. 위의 사진에서 오른쪽, 모자를 삐딱하게 쓴 사람이다. (그리고 작품에서 언급되지 않지만, 정일권과 장준하도 이들과 학교 동창이었다.)그는 시인 정지용 역으로 특별출연한 배우 문성근의 아버지이자 훗날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목사가 되었다. 

 

문익환도 사실 시인의 꿈을 꾼 적이 있다. 실제로 당시 그가 잡지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 중이었던 윤동주에게 고심하며 적은 시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윤동주의 반응은 "이걸 시라고 적었니?" 였다고 한다. 여기서 문익환은 큰 충격을 받고 시인의 길을 한동안 포기했다. 그가 다시 시를 적기 시작한 것은 훗날 나이를 한참 먹고 나서다.


 



참고로 이 글의 부제목은 문익환의 시, '동주야' 의 구절 중 하나인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를 일부 변형시킨 것이다.






홍준호


편집 : 딴지일보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