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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마천의 <사기>는 이 남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술과 여색을 좋아하였다.”


사마천은 죽간(竹簡. 필기를 위해 가공된 대나무)에 먹을 먹여가며 역사를 썼다. 쓰는 것도 노동이지만, 이 죽간이라는 대나무 묶음은 종이에 비해 크기와 무게가 엄청나다. 보관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글자를 아껴야 한다. 중요한 사안만을 최대한 추려 기록한다.


여색은 여자와 다르다. 여색이란 여성과 ‘성적으로’ 노는 행위를 뜻한다. 초한쟁패를 다룬 역사에는 남자들이 술에 취한 정경과, ‘영웅호걸’이라 불리는 수컷들에게 붙들려 끌려 다니는 불쌍한 미녀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고 욕망에 충실한 남자들의 성격에 굳이 “술과 여색을 좋아했다”는 설명을 붙여주지 않는다. 이 문장은 이 남자의 캐릭터를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마천이 자신의 판단과 남들의 입을 빌어, 특별히 신경 써서 기록한 그의 성격을 보자.


“말끝마다 욕설을 붙인다.”
“오만하다.”
“불손하다.”
“무례하다.”
“허풍이 많다.”
“제대로 끝내는 일이 드물다.”
“일하지 않는다.”
“게으르다.”
“지식인(유생)을 경멸한다.”
“무뢰한”
“책 읽기를 싫어한다.”


이 남자는 누구인가?



2


먼저 그가 살았던 배경을 음미해보자.


지금의 하남(허난)성, 패읍(沛邑)이라는 곳. 패읍의 ‘패(沛)’는 늪 혹은 늪지를 말한다. 춘추전국시대에 행정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읍으로 개편된 곳이다. 즉 패읍은 중앙의 지배자들이 부르던 행정명이다. 현지인들이 부르던 원래의 이름은 '패택(沛澤)'이다. 택(澤)은 연못이다. 흔히 연못이라고 하면 녹색 수생식물이 한가로이 뜬 전원적인 풍경을 떠올린다. 하지만 원래 못이란 그저 깊게 고인 물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동네가 물이 많았던 곳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왜 강도 하천도 아니고 늪인가? 당시 중국에는 ‘패’, '택'이라는 말 그대로 늪지, 자연적으로 고인 물, 진창이 많았다. 이것은 패택만의 특징이 아니었다.


2200년 전의 중국은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과 많이 달랐다.


중국을 대표하는 강은 두 개다. 북으로 황하, 남으로 장강(양자강). 황하와 양자강은 다르다. 황하는 광대한 농토의 생산력을 떠받치며 흐르는 누런 강이다. 중국 문명에서 생명력과 대지의 힘을 상징하는 누런빛은, 흙과 곡물의 빛이기도 하지만 황하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반면 2200년 전의 양자강은 자욱한 삼림 사이를 도도히 흐르는 짙고 신비로운 강이다. 이때 양자강 유역에는 코뿔소와 코끼리가 살았다(초한쟁패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보드게임인 장기의 아이템 중에 코끼리가 있다). 양자강 남쪽 아래는 원래 중원의 일부가 아니다. 오나라와 월나라, 초나라가 등장하면서 중국역사에 편입된 곳이다. 양자강 남쪽의 상당지역은 자욱한 정글지대였다.


앞선 1편에서 진시황이 운하사업에 백성을 동원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진시황이 시작한 운하사업은 수나라 문제 시절에 1차 완성된다. 이때 중원은 마른 땅과, 그 땅을 ‘적절히’ 적셔주는 하천과 강으로 양분된다. 땅과 물이 분리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첫째, 땅이 농토가 된다. 물은 그 땅을 딱 필요한 만큼 적셔준다. 둘째, 수로를 통해 물자와 사람이 운반된다. 생산력과 교통량이 증가한다. 중국문명은 운하사업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하지만 2200년 전이다. 장장 천여 년에 걸친 치수(治水. 물을 다스림)사업이 이제 갓 시작되었을 때다. 그리고 중국은 세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지난 2천 년간 건조해졌다. 따라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중국 땅에는 습기와 녹색이 더해진다. 초한쟁패의 배경이 되는 중국은 지금의 중국이 아니다. 그 많은 중국의 물은 거지반 땅에 스며들어 있었다. 중원은 도랑, 늪, 진창이 깔린 축축한 대륙이었다. 이런 땅에는 어디에서나 개구리와 뱀을 볼 수 있다. 중국의 창조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여와’는 뱀이기도 하고 개구리이기도 하다.


이 사나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배경을 바꿔야 한다. 이런 작업을 하는 이유는 독자 여러분이 초한쟁패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갔으면 해서다. 그저 '옛날의 중국'이라는 추상적인 시공간에 무협지 클리셰 풍의 인간과 사물을 등장시키고 싶지 않다. 애초에 나는 유물론적인 초한쟁패를 쓰겠다고 했다. 독자제위도 나도 '지상에 발을 붙이고' 이야기를 나눴으면 한다.


‘저 멀리 산이 보이는 황량한 벌판 위를 달리는 기사. 무쇠 갑옷에 장검을 휘두르며 모래바람을 뚫고 단말마를 지르는 호걸!’


이 이미지는 초한쟁패와는 맞지 않는다. 배경도 틀렸거니와, 기사의 갑옷과 방패는 노랗고 희게 빛나는 청동 제품이다(청동은 푸르지 않다. 녹이 슬었을 때 청색이 되는 것이다). 검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모양보다 짧고 굵은 청동제다. 그렇다. 적어도 황하 유역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남쪽이라면, 동남아시아를 상상하면 된다. (한편, 북방의 초원은 황하의 북쪽 유역까지 내려와 있었다. 중국의 자연은 이렇게 변화무쌍했다. 지리적인 차원에서 보면 중원문명의 확장은 자연에 대한 농토의 확장을 의미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이런 곳을 어슬렁거렸던 것이다. 사마천은 이 동네를 '사수군 패현 풍읍 중양리'라고 기록했다. 이렇게 기록된 이유는 사마천이 진시황 이후의 인물이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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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패현의 모습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실시했다(이는 어마어마한 발명이다. 현재 한중일의 행정구역 분할은 군현제의 영향력 아래 있다). 군 밑에 현이 있다. 현 밑에 읍이 있다. 이렇게 '군-현-읍-리'의 순서를 가진 피라미드 구조다. 한국에 특별시와 광역시가 있듯 도시(성. 城)는 따로 분류되지만 결국엔 군현제의 시스템 안에 있다.


아직 패택이 진 제국의 영토가 되지 않았는데도 군현제에 따른 지명을 소개한 이유가 있다. 지명은 땅의 성격을 드러내준다. 우리의 주인공은 농사꾼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풍읍(豊邑)'이라는, 농산물이 충분히 나오는 곳이라는 뜻의 지명이 말해준다. 중양리(中陽里)는 햇볕이 모여 작물을 키울 만한 지대라는 뜻. 습기 찬 녹읍 사이로 햇볕을 밭아 논밭을 경영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땅. 그곳이 패현 풍읍 중양리다. 물론 아직은 그저 패택 혹은 패읍이었다.



3


우리의 주인공은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고 늙은 남자, 바로 ‘계’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이다. 계의 부모는 유태공과 유온. 당시 중국에서 ‘태공(太公)’은 문자 그대로는 살고 있는 곳 일대를 다스리는 지배자를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나이든 남자를 높여 부르는 애칭이었다. '온(媼)' 역시 나이든 아낙을 부르는 일반적인 명칭이었다. 따라서 유태공과 유온을 유씨 어르신, 유씨네 부인이라고 보면 되겠다.


계란 간단히 말해 ‘막둥이’다. 요새는 1-2-3-4의 순번을 갑-을-병-정으로 곧잘 바꿔 쓴다. 당시 갑을병정에 해당하는 순서는 ‘백중숙계(伯仲叔季)’였다. 남자아이의 이름을 이 순서에 따라 붙이는 관습이 있었다. 이 남자의 큰형의 이름은 그래서 유백이다. 둘째 형의 이름은 물론 유중이다. 유숙은? 없다. 세 번째라고 무조건 숙 자를 차지하는 게 아니다. ‘계’란 넷째를 뜻하기도 하지만 막내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래서 순번이 마지막이면 ‘막내’라는 뜻으로 ‘계’자 이름을 받는다.


남자의 이름은 유계. 그저 유씨네 막내라는 뜻이다. 한편 유태공은 집밖에서 실수를 했다. 유계가 막내일 줄 알고 막둥이라는 이름을 지어줬건만 외간 여자와 '진짜 막내'를 낳고 만 것이다. 이 사람의 이름은 유교(劉交)다.


아무튼 우리는 유계라는 남자에 집중해 보자.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유계는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생산적인 일을 한 적이 없다. '진짜 막내'인 유교는 공부에 재능이 있었는지 배움과 연구에 매진해 나름대로 인정받는 유학자가 되었다. 대단한 명성은 없었지만 제자를 가르치면서 받는 수업료로 먹고 살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시경 해석에 있어서만큼은 나름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요즘으로 치면 고학생 출신의 대학 교수라고 할 수 있으리라.


큰형 유백과 둘째형 유중은 부모님을 따라 평범한 농사꾼이 되었다. 큰형도 둘째형도 부모를 부양할 만큼의 ‘잉여생산’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태공과 유온 부부는 노인이 되어서도 농사일을 멈출 수 없었다. 유계는 일하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싫어했다. 젊어서는 부모님에게, 늙어서는 작은 형 집에 얹혀살았다.


뭘 하느라고 그랬을까?


노느라고 그랬다.


유계는 천성이 건달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부터 이 건달을, 역사에 기록된 이름인 ‘유방(劉邦)’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비록 나중에 그의 ‘격’을 높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붙인 이름이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유방이라고 부르는 쪽이 편할 것이다. 


패택은 주민들이 생산한 곡식을 다 먹고도 어느 정도의 잉여생산물이 남는 곳이었다. 술을 담가 먹을 수 있는 고장이란 얘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주막도 있었다. 역사에 기록된 두 술집의 주인은 각각 ‘양온’과 ‘무부’. 양씨네, 무씨네 이모님들이란 뜻이다. 유방은 두 술집에서 서른 중반이 넘도록 외상술을 먹었다. 수명이 연장된 요새로 치면 오십에 가까운 나이다. 당시 술은 지금에 비해 훨씬 고가품이었다. 무슨 재주로 술을 얻어먹었을까?


역사에 따르면 유방이 술을 마시는 술집 위에는 푸른 용의 비늘과 같은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방이 술자리에 앉아있을 때는 손님들이 바글바글했기 때문에 양온과 무부가 기꺼이 넘어가줬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방의 외상 행각을 그럴듯하게 설명해주는 동시에, 그가 비범한 인물이었다고 치켜세워주기 위한 설명일 뿐이다.


상서로운 기운이라니, 그딴 게 있을 리가.


유방이 외상술을 얻어먹은 이유는 그가 허풍쟁이였기 때문이다. 유방은 시내의 저자거리를 다니면서 다양한 장난을 치고 다녔고, 자신의 경험을 과장해서 떠들어댔다. 그가 천하를 다투는 세력의 군주가 되고 나서도 못 버린 고약한 장난이 하나 있었다. 그는 유학자의 모자를 빼앗은 후 거기다 오줌을 누고(그가 아무데서나 노상방뇨를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되돌려주는 악취미의 소유자였다. 자기 소변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자를 받아든 학자의 표정까지 즐겨야 제 맛이었던 걸까. 이런 짓거리를 욕지거리와 함께 풀어내면, 농토에 매인 질박한 삶을 사는 술친구들에게는 대단한 재미를 자아냈을 것이다.


유방은 저잣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다양한 사람들을 사귀었다. 한 번은 돈 한 푼 없이 걸어서 위나라의 ‘장이(張耳)’라는 유명한 임협의 집에 쳐들어가 뻔뻔하게 수개월 동안 공짜 밥을 얻어먹으며 식객 노릇을 한 적도 있다. 원래 유방은 ‘신릉군’이라는 전국시대의 유명한 호걸의 팬이었다. 장이는 신릉군의 식객 노릇을 한 적이 있었고, 자신도 생활이 부유해지자 식객들을 즐거이 받아주었던 것이다(신릉군과 장이 이야기는 후에 따로 하겠다).


그런데 장이 정도로 유명세가 있는 인물의 식객이 되려면 학식이 뛰어나거나 무예가 비범하거나, 혹은 정의를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다고 떠벌이는 협객 기질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들의 눈에 농사꾼 마을에서 온 평민은 어떻게 보였을까? 필시 노상 술에 취해 여자 하인들에게 추파나 던졌을 텐데 말이다. 하여간 남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이다.


역사는 유방을 말버릇은 나빴지만, 말솜씨는 매우 좋았다고 기록한다. 그의 허풍은 꽁트에 굶주린 술꾼들을 불러 모았다. 같은 값으로 술을 마실 거면 유방의 수다를 즐기면서 마시는 편이 더 즐거웠으리라. 유방은 영리하게도 유온네 집과 무부네 집을 번갈아 가면서 두 술집끼리 그를 두고 경쟁하게 만들었다. 두 주모는 더 많은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유방의 외상 장부를 지우곤 했다. 이렇게 해서 유방은 평생 마신 대부분의 술을 공짜로 즐겼다.


진나라의 통일전쟁은 많은 과부와 고아들을 만들었다. 당장 경제력을 가질 수 없는 여자들은 주막과 같은 각지의 유흥업소에서 술을 따르고 몸을 팔아야 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자들이 많이 죽는 시대에는 성도덕이 느슨해진다. 잉여생산물이 축적되는 패현 땅에도 이러한 여성들이 생겨나고 또 흘러들어왔을 것임은 자명하다. 유방은 특유의 친화력과 뻔뻔함으로 공짜 술뿐 아니라 공짜 여색도 즐겼던 모양이다.



4


이제 유방의 얼굴을 스케치해 머릿속에 박아 넣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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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은 매부리코의 소유자였다. 얼굴은 긴 편이었다. 거기에 이마가 꽤나 넓었다고 하는데, 사료와 고증을 보면 아무래도 원래 넓은 이마가 아니라 후퇴한 이마다. 약간의 진행형 탈모로 보인다. 또 넓적다리에 72개의 점이 있었다고 한다. 72란 360을 5로 나눈 상서로운 숫자다. 이 역시 윤색된 수치임에 틀림없다. 어디까지가 점이고 주근깨란 말인가? 게다가 넓적다리란 부위의 정확한 범위는 또 어디까지란 말인가? 그냥 '점'이 '72'개인 셈 치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대목에서 유방은 몸에 자잘한 점이 많았다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 하나는 알 수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특징은 수염이다. 유방은 참으로 멋들어진 수염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이것도 ‘용안미염(용이 될 관상에 아름다운 수염)’이란 수식어와 함께 제왕의 풍모로 미화되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수염을 정성스레 가꿀 시간이 남아돌았다는 얘기다. 일할 시간에 외모에 신경을 썼던 것이다. 당시 청동거울은 패택 같은 동네에 굴러다닐 만큼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유리거울만큼 깨끗하지도 않았다. 대신 얼굴을 비춰줄 물이 많은 지역이었기에 수염을 가꾸는 데 특별한 애로사항은 없었을 것이다.


유방은 외모는 상당히 남성적이다. 성격도 그랬다. 그는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전형적인 ‘논두렁 조폭’이다. 그는 패택 일대의 저자거리에서 설치고 다니기로 알아주는 남자였다. 유방 위에 왕릉(王陵)이라는 진짜 큰형님이 있긴 했다. 왕릉도 성실한 노동과는 상관이 없는 남자였다. 대신 분쟁을 조정하거나 마을의 더러운 일을 처리해주는 해결사 역할을 제대로 한 모양이다. 베푸는 것도 좋아해서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겁 없는 허풍쟁이 유방도 왕릉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갔다. 하지만 왕릉 없는 곳에서는 유방이 왕이었다.


유방의 생활상을 좀 더 자세히 그려보자.


유방은 혼자 사는 가난한 유부녀와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 아마도 남편과 사별한 미망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성은 조씨였다. 결혼을 할 경제력도 없고, 처자식을 부양할 만큼 안정적인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던 유방에게 인근에 혼자 사는 미망인은 수작을 걸기 좋은 상대였을 것이다.


유방은 밥을 얻어먹다가 큰형수에게 바가지를 긁히는 등 눈치를 보인 적이 있다(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형수는 주걱으로 솥을 긁었다. 사실 유방도 할 말이 없는 게, 그때는 큰형이 죽은 후라 형수는 애 딸린 과부였다. 유방은 혼자도 모자라 친구들까지 끌고 가서 밥 좀 달라고 했다. 다 큰 장정들이 밥을 얻어먹겠다고 가난한 과부댁에 쳐들어간 걸 보면 죄다 한량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술집이나 친구의 집에서 널브러져 자는 습관이 있었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다. 길거리에서 자는 것도 날씨가 좋을 때나 가능하다. 또 날이 좋아봐야 패택은 습하고 벌레가 많은 동네다. 조씨는 가난할지언정 어찌 됐든 지붕 밑에서 산다. 유방에게는 쾌적한 잠자리였으리라. 조씨도 인간이라면 성욕이 있는 법이고, 빈둥거리며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는 유방과 잠자리를 하는 사이가 되는 건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조씨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요즘은 대체로 도시에 살지만 그래도 농경민족의 후예인)우리는 그녀가 밭에서 채소 따위를 경작해 입에 풀칠을 하는 모습은 금방 상상해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했던 노동, 베를 짜거나 삯바느질을 하거나 의복, 장신구, 새끼줄이나 바구니 같은 생필품을 만드는 가내수공업도 겸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남자의 근력은 아쉬웠을 것이다. 유방이 아무리 게을러도, 가끔 항아리를 옮기거나 지붕을 고쳐주는 식의 힘쓰는 일을 제공해줄 순 있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상과 유방의 캐릭터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진나라는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수많은 남성을 죽였다. 진시황의 군대에 패배했지만 포로가 되지 않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쉽게 도적떼가 됐다. 천하통일 전의 중국은 불안정했다. 유방은 저자를 주름잡는 건달이었다. 혼자 사는 조씨의 입장에서는 의지가 될 수밖에 없다. 불한당 유방의 애인은 존중과 부러움을 받을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동시에 해코지를 당할 일도 없다. 두 사람은 아들 하나를 낳는다. 


조씨가 실리적인 차원에서만 유방을 만나주진 않았을 것이다. 유방은 여자 입장에서 아주 못 사귈 남자는 아니었다. 책임감이나 양심 따위는 없지만 사악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는 여성과 같은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선배나 동기들에게는 한심한 녀석 취급을 받았지만 고향 후배들에게는 ‘잘 노는 형’으로 인기가 많았다. 유생들을 괴롭혔다고 하지만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이들이었고, 집요하게 못살게 구는 일은 없었다. 모두 1회성이었다. 반대로 같은 농민 계급의 노인들에게는 다정하게 굴었다.


또 하나, 유방은 자타가 공인하는 깡패면서도 언제나 수중에 돈이 없었다. 다시 말해 빼앗거나 착취한 적이 없다는 얘기다. 술을 마셔도 외상을 그었으면 그었지 상납을 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쩌다 돈이 생기면 모조리 '쏘는' 타입이었다. 사람을 때려도 이겼으면 그만이지 중상을 입히거나 건강에 영구적인 악영향을 끼친 적은 한 번도 없다. 말끝마다 욕설을 달고 살았지만 말이 몸을 다치게 하진 않는다. 그래서 유방의 패악질에는 귀여운 구석이 있다. 그는 존경할 순 없지만 미워하기도 힘든 사람이었다.



5


지금은 진시황의 천하통일 전이라고 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유방은 어느 나라 사람이었던가? 당시의 국경선을 보면 원칙적으로는 초나라 국적이다. 그러나 역사는 유방을 '패현 사람'이라고 하지 초나라 사람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패택은 전국시대의 국가들이 싸운 결과에 따라 때로는 제나라의 영토이기도 했고 위나라의 영토이기도 했다. 특정 국가의 행정력이 온전히 미치지 못하는 완충지대였던 적도 있다. 유방을 포함한 패택 주민들에겐 국가적 정체성이라는 게 없었다. 이들이 그냥 민초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자에서 사람을 뜻하는 人과 民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人은 한 사회에서 의사결정 권한을 가진 집단의 일원을 뜻한다. 民은 지배와 보호의 대상인 백성을 뜻한다. 人은 소수고 民은 다수다. 다수의 民은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살만 해지는 게 삶의 목적이다. 각국의 人들이 싸운 결과로 국적이 바뀌는 건 큰일이 아니다. 국인(國人. 나라의 지배층)을 잘못 만나 전쟁터에 끌려가거나 전보다 많은 세금을 뜯기는 게 큰일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유방과 패택 주민들은 빼도 박도 못하는 진나라 백성이 되었다. 패택은 진나라의 강력한 통제에 놓이게 된다. 이때부터 유방의 삶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 전에, 유방의 명목상 국적이었던 초나라의 상황은 어땠을까?


초(楚)는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인 묘족(苗族)이 세운 나라다. 묘족은 전쟁의 신 치우(蚩尤)를 조상신으로 섬기는 남방계 민족으로, 한족과는 다르고 원래 중국인도 아니다. 묘족은 중원 문명과 충돌하면서 내부갈등을 겪는다.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한 일파는 현재까지도 고산지대에 남아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중원 문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일파는 초(楚)나라를 세웠다. 나라 이름이 절묘하다. 회초리라는 뜻도 있지만 글자의 생김새대로 일차적으로는 '우거지다'는 뜻이다. '楚'는 양자강 이남의 원시적인 자연환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초나라는 옛 오나라와 월나라의 영토를 삼키며 세력을 확장해갔다. 양자강 유역을 차지하고 난 시점에서 이들은 더 이상 묘족이 아니라 중국인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대대로 토착 농민의 후손인 유방은 묘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방은 "응? 내가 초나라 사람이었어?" 했겠지만.



6


다시, 전국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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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의 모식도에서 잠깐 벗어나보기로 하자. 전국칠웅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7개 국가는 중국의 인구와 생산력을 7등분해 나눠 갖지 않았다. 지도가 보여주는 그대로, 초나라는 진나라의 최대 적국이었다. 초나라는 강국이었지만 천하통일을 이룰만한 역량은 없었다(밑에 관련 설명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의 천하통일을 저지할 유일한 희망은 초나라였다.


진나라는 영악한 외교술로 초나라의 기둥뿌리를 갉아먹었다. 외교가 통하지 않으면 대놓고 사기를 치고 간첩을 이용했다. 초나라 사람들은 아직 문명의 세례를 덜 받은 야만인 취급을 받았다. 초나라 수뇌부는 진나라의 야비한 술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결국 진나라는 어수룩한 초나라 회왕을 거짓말로 유인해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초회왕은 비통한 죽음을 맞는다.


이후 진나라가 천하통일에 저벅저벅 다가선 반면 초나라의 국력은 점점 쇠약해져갔다. 마침내 기원전 225년. 몇 년 후 진시황이 되는 진왕 영정의 명을 받은 진나라의 대장군 이신(李信)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침략했다. 초나라를 침공했다는 말은, 자욱한 밀림지대로 진입했다는 뜻이다.


코뿔소와 코끼리가 노니는 양자강 유역과, 그보다는 비교적 건조한 회수(淮水. 회강 혹은 회하. 황하의 ‘河’와 구분하기 위해 당시에는 회수라 불렀다) 사이. 그곳에는 마지막 국력을 짜내어 모은 초나라의 대군(10만 명으로 추정된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군의 수장은 백전노장 ‘항연(項燕)’이었다. 1편에 등장한 장량은 대대로 한나라의 승상을 역임해 온 집안의 상속자였다. 반면 항연은 행정능력 대신 무력으로 초나라 왕실을 지탱해 온 무장가문, 항씨 일족의 수장이었다.


이신의 20만 대군은 중국의 북서지방과 중심부 출신이었다(당시 기준으로). 드넓은 평지의 대부분이 농토로 개간된 곳이다. 초나라의 삼림지대는 땅도 공기도 습했다. 무엇보다 뻥 뚫린 시야가 보장되지 않았다. 진의 대군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항연은 조심스레 진나라의 대군을 초나라 군사들에게 익숙한 밀림 깊숙이 끌어들였다.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그는 순간적으로 군사력을 집중해 적군을 기습했다.


초나라 군대의 대승리였다. 이신의 20만 대군은 한 번의 전투에 궤멸 당했다. 뛰어난 지휘관의 조건은 한 번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 그러기 위해선 하나의 ‘올인’할 수 있는 판단력과 승리를 굳히는 집요함이 필요하다. 항연은 이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군대는 살아남은 진나라 군사들을 3일 밤낮에 걸쳐 추격했다. 그러면서 잃어버린 국토까지 수복했다. 무적의 진나라 군대를 짓이긴 항연은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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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씨는 춘추전국시대의 세습귀족 집단과 달리 주나라 왕실과 관계가 없었고, 본국 왕실과도 혈통이 섞이지 않았다. 항씨 가문의 족보인 <동류항씨종보(東流項氏宗譜)>에 따르면 주나라 천자 가문은 물론 전설상의 신들에게도 피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당연히 족보 특유의 끼워 맞추기라고 봐야 한다. 항씨는 저 옛날 초나라가 세력을 확장하고 국토를 넓히던 시절에 편입된 ‘외국인’ 혹은 ‘이민자’ 집안이다.


초나라의 왕실 성씨인 미(羋)씨 역시 전설상으로는 주나라 천자와 관련이 있지만 원래는 묘족이거나 묘족과의 혼혈이다. 그러나 이 성씨 자체가 중원문화를 받아들였음을 증명한다. 미(羋)란 양의 생김새에서 나온 글자인데, 그러면서도 양의 울음소리를 뜻하는 말이다. 미(羋)의 양 울음은 원래 ‘도살당하는 양의 비명’에 더 가까웠다.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것은 양자강이 아닌 황하 유역의 문화다.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시대에 제사장은 곧 왕을 뜻한다. (비슷한 한자가 또 있다. '아름다울 미'는 방금 도축된 양의 머리를 들고 있는 제사장의 모습을 그린 상형문자다) 양은 초원에 산다. 초나라 국토에는 원래 없는 동물이다. 양을 구하거나 인위적으로 길러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면서도 미씨는 묘족을 위시한 남방 소수민족의 특징도 갖고 있었다. 종족은 부족으로, 부족은 씨족으로 나뉜다. 미(羋)씨는 제사장 부족의 성씨다. 미(羋)씨 중에서도 웅(熊)이라는 성씨를 가진 씨족이 초나라의 왕족이었다.


항씨는 미(羋)씨 집단과 혈통상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런데도 대대로 사령관을 배출했고 때때로 2인자 가문의 역할을 하며 국가와 왕실을 보좌했다. 능력만으로 성장한 가문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항씨 집안만의 검술과 무예 교습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와 왕실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도 이들의 특징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연의 책임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조국과 왕실을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낸 기쁨이 어땠을지도 상상이 간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기원전 224년. 진나라의 군대가 다시 초나라 국경을 넘었다.


이신을 강판한 진왕 영정은 은퇴 상태에 있던 노장군을 호출했다. 왕전(王翦)이었다. 이신의 패배를 면밀히 분석한 왕전은 정복욕에 불타는 왕에게 60만 대군을 요청했다.


60만!


진나라의 군사력 전부에 육박하는 수치였다. 진나라에게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러나 진왕 영정은 초나라가 세력을 회복해 힘의 균형을 이루는 모습을 볼 마음이 없었다. 무게추가 기울어져 있을 때 끝장을 내야 했다.



8


항연의 10만 군사와 왕전의 60만 대군. 전장은 초나라의 국토. 두 노장군은 나라의 운명을 어깨에 지고 충돌했다. 60만 대군에게 진다면 초나라는 그대로 멸망한다. 거꾸로 진나라 군사력의 대부분인 60만 군사가 초나라 땅에서 소멸하거나 패퇴할 경우, 진나라 국토로 이어지는 역관광의 고속도로가 뚫려버린다.


항연은 이신에게 했듯이 초나라의 밀림 안으로 왕전을 유인했다. 6대1의 병력차를 계산하면 어차피 개활지에서의 대회전은 승산이 없었다. 진나라 군대의 제식, 훈련도, 병장기는 다른 나라를 압도했다. 거기다 군용 말의 수도 많았다. 실제로는 10대1 이상의 전력 차였다. 그러니 홈그라운드로 끌고 들어와 진흙탕 싸움을 전개하는 수밖에.


왕전은 항연에게 적당히 끌려들어가는 척 했다. 그런데 웬걸. 그는 60만의 군대를 나눠 성읍을 점령하고 거점을 여럿 세우더니, 그대로 눌러앉아버렸다. 침공군이 수비군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초나라는 60만 대군에 짓눌린 상태로 있어야 한다.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 항연은 침략군을 쫓아내기 위해 거꾸로 ‘공성’을 해야 할 처지가 됐다.


전통적으로 '공수 3배 원칙'이라는 말이 있다. 공격 측이 성이나 목책 등 일정한 진지 안에 있는 수비 측과 대등해지려면 ‘최소한’ 3배의 전력을 구비해야 한다는 의미다. 심하면 10배, 아니 스무 배로도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거꾸로 60만 대 10만이라니.


항연과 그의 10만 대군은 갈 곳을 잃고 말았다. 반면 진나라의 60만 대군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굶기는커녕 밀림 적응을 끝내고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초나라와 진나라의 행정력 차이 때문이었다. 진나라는 당시의 세계적 기준으로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의 보급망을 운용했다. 반면 초나라는 국토의 태반이 정글이었다. 초나라의 문화와 행정은 띄엄띄엄 떨어진 몇 개의 도시를 거점으로 발달했다. 그래서 인구와 물자의 이동이 험난했다.


당시 초나라의 군사력을 가리켜 ‘백만대군’이라고 했다. 장정들의 머릿수를 합하면 백만대군을 산출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필요할 때 백만대군을 오롯이 모을 행정 시스템과 교통망이다. 초나라 사람들은 애국심이 강했지만 정신력으로 군대가 모이진 않는다. 설사 온갖 어려움을 뚫고 백만 명의 사내가 모였다고 치자. 그러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식량을 안정적으로 조달해 먹일 방법이 없다.


굶고 지치는 쪽은 외려 항연의 국토방위군이었다. 기묘한 공방은 1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항연의 군대는 장기전을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전투원을 교체하고 재정비를 하기 위해 항연은 군대를 후방으로 물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왕전이 60만 대군을 결집해 물러서는 항연군의 배후를 쳤다. 예상치 못한 한 번의 기습. 이신을 무찌른 방법 그대로 당한 것이다. 항연의 군대는 전멸했다.



9


살아남은 항연은 후퇴해 왕과 수도를 지키는 싸움에 나섰다. 그러나 초나라 왕 ‘부추’는 여지없이 추격해온 왕전의 군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기원전 223년, 초나라는 이렇게 멸망하고 말았다.


이대로 포기할 항연이 아니었다. 그는 초나라가 망하기 전부터 진나라에 끌려가 관료생활을 하던 왕족을 찾아냈다. 마지막 왕 부추의 동생 창평군(昌平君)이었다. 항연은 창평군을 왕으로 옹립해 회남(淮南)에서 초나라 임시정부를 세웠다. 임시 수도는 진나라 진압군에 곧 포위되었다. 창평군까지 전투에 나섰으니 마지막 저항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알 수 있다.


창평군은 전사하고 말았다. 일평생 조국을 위해 싸웠던 노장군은 기어이 망국의 책임을 졌다. 창평군의 죽음을 확인한 항연은 함락되어가는 성 안에서 자결했다. 그가 죽자 남아있던 초나라 세력은 모두 항복했다. 2년 후, 진나라는 통일제국이 되었다.


1차 사료들은 위의 과정을 “(항연은)왕전의 계책에 걸려 패배했다.”고 기술한다. 이 말만 보면 마치 항연의 군사적 식견이 왕전보다 한 수 아래처럼 보인다. 왕전이 뛰어난 장군이고 그가 완벽한 승리를 거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히 항연을 누군가보다 ‘아래’라고 표현할 수는 없다. 그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있었고, 자신의 조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그랬기에 항연은 진 제국 수립 이후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항연의 최후는 중국인들에게 강한 이미지로 남았다.


1) 항연 자신
그의 이름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진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중국 전역에 항연이 아직 살아있다는 전설이 퍼졌다. 그가 소수의 초나라 전사들을 이끌고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2) 항씨 가문
가장은 죽어도 유족은 남는다. 중국인들은 항씨 일족에 대한 존경심을 품게 된다.


3) 초나라
“초나라 사람이 세 집만 있어도 진나라를 멸하는 것은 초나라가 될 것(아무리 나라가 멸망했어도 백성은 남았다. 초나라 유민이 진 제국을 무너뜨릴 것이다)”이라는 말이 퍼졌다.


4) 초나라의 전사들
초나라의 ‘백만대군’은 물론 과장된 숫자일 것이다. 애초에 백만이라는 수치 자체가 상징적이다. 예를 들어 진실에 접근한 숫자가 40만 명이라고 치자. 그럼 항연의 국토수호전에 참여하지 못한 전사들의 수가 30만 명이 된다. 이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나라가 망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만약 진 제국이 지속되었더라면 저항의식이 있는 전사 세대가 소멸하고, 그들의 후손은 진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게 되었으리라.


하지만 진 제국은 10여년 후에 흔들리게 된다.


5) 초나라의 기득권과 평민들의 결속
어느 사회든 기득권과 피지배층은 사이가 좋지 못하다. 두 집단은 보통 외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결속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생활권역을 점령한 외적이 기존의 기득권보다 더 가혹할 때만 그렇다. 평민들은 구관이 명관이므로 함께 싸운다.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체제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평민들을 다시 보게 된다. 이러면 평민들의 삶의 질에 소정의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진시황의 통치는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가혹했다. 멸망한 초나라의 귀족들은 평민들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평민층 역시 전통 귀족들을 더 이상 살찐 돼지로 보지 않았다. 비록 왕실의 일원은 아니지만 귀족집단을 상징하는 항연이 직접 나서서 산화했다. 악감정이 해소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때의 평민은 묘족 혈통의 전통적인 초나라 백성들을 말한다.


항연의 유산은 이후 중국천하를 진동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항연은 죽을 때 여러 명의 자손을 두었다. 그 중에는 이제 갓 10대가 된 어린 손자가 있었다. 아이의 이름은 적(籍). 그는 훗날 날개라는 뜻의 우(羽)를 이름자로 선택한다. 그 이름 그대로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남자.


항우.jpg


그렇다. 항우(項羽)였다.



다음 편에 계속




PS. 여기서 기사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밝혀야겠다.
일전에 <폭로에 매장된 논객>이라는 기사를 냈다. 거기에 이런 대목을 썼다.


"... 어떤 여성 논객의 경우는 특히 비범하다. 그녀는 마침 이 기사의 주인공이 화형대에 올라간 바로 그때 자신이 남성에게 당했다는 비슷한 사례를 풀어 일간지 재입성에 성공했다. ...중략... 필연적으로 보일 만큼 기막힌 우연의 공교로움에 나의 안면근육이 실소를 범하고 말았다는 것으로 내 입장을 정리하겠다."


이 분이 누군지 굳이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겠다. 나는 기사가 나간 이후에 '그'하고 술자리를 가졌고 '그녀'와도 직접 만나 오해를 풀 기회가 있었다. '그'가 폭로에 매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지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밝혀야 할 것은, 위의 문단은 자의적이고 잘못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사자들에게 진심의 사과를 전한다.



PS 2. 이래서 염력취재는 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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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기획특집]초한쟁패
텅 빈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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